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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우 Jan 16. 2023

중앙 아시아의 알프스, 키르기스스탄

경계와 경계 사이에서

버스 안에서 보이는 키르기스스탄의 설산

어제와 다를 바 없는 일상의 한 발자국이 ‘선’을 넘는 순간 여기와 저기, 나와 너로 갈라진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지금 여기, 내가 서 있던 그 땅은 과거에도 지금도 늘 그 자리에 변함없이 있었다. 선을 그어 여기와 저기, 나와 너를 가른 것은 ‘땅’이 아니라 ‘사람’이다. 하나의 ‘덩어리’로만 존재했던 공간은 이제 이름을 가진다. 오른쪽과 왼쪽, 이쪽과 저쪽, 우리와 그들, 내것과 네것으로. 어제까지 ‘하나’였던 공간은 오늘부터 완전히‘분리된’개체가 되는 것이다. 경계의 장벽이 더 높게 들어서면 설수록 이제 처음부터 하나였다는 생각은 점점 사라진다. 이제 사람들은‘나누어진’두 공간을 보며 생각한다. 원래부터 달랐던 거라고. 그래서 함께할 수 없는 거라고. 갈등은 그렇게 나와 너를 나누는 것에서 시작된다. 키르기스스탄 국경을 한발짝 앞에 두고 생각한다. 지금 나는 그 분리된 ‘경계’위에 서 있다. 여기도 저기도 아닌 그 ‘어딘가’이곳은 우즈베키스탄 안디잔과 키르기스스탄 국경도시 오쉬, 그 사이의 어느‘경계 위’다. 


키르기스탄 오쉬 국경에서


경계 위에 서 있는 삶은 불안정하다. ‘어디’도 아니기에 소속이 없는 나는 불안하다. 그러나 경계는 곧 ‘자유’이기도 하다. 어디도 아니기에, 스스로 경계를 넘는 ‘의지’를 내는 순간, 나는 자유인이 된다. 경계인은 그 양쪽 그 어디에서도 받아줄 수 없는 삶인지만, 경계없이 경계에 선 나는 ‘자유인’이다. 그러고보면, 경계를 만들어 갈등의 씨앗을 뿌린 것도 인간이요, 또 그 경계를 아무렇지 않게 넘어설 수 있는 것도 인간이다. 인간이 곧 절망이자, 희망이요, 속박이며 또 자유다. 인간은 스스로 만들어놓은 수많은 ‘틀’과 ‘선’안에서 끊임없이 이렇게 절망가 희망, 속박과 자유의 경계를 매일 수천번 넘나든다. 그러나 자연은 스스로 경계를 두지 않는다. 자연은 한번도 스스로 나누겠다 말한 적이 없다. 한번도 나는 어디 소속이라 말한 적이 없다. 우즈베키스탄이란 ‘경계’를 넘어서는 순간 나는 처음부터 그 어떤 경계도 없던 광활한 대자연을 만난다. 키르기스탄은 그렇게 경계없는 대자연과 경계없이 살아가는 사람들과의 만남으로 시작한다.  



키르기스스탄에서 만난 공원국 작가


키르기스탄 국경도시 오쉬에서 가장 먼저 만난 사람은 공원국 작가이다. 공원국 선생님은 <유라시아 신화여행>, <춘추전국시대 이야기1-12> 등 이미 많은 책으로 국내에 잘 알려져 있다. 책으로는 자주 접했지만 실제로 뵙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처음 본 사람을 위해 조금이라도 늦을까 1시간이나 먼저 나와서 세관에서 기다리고 계셨다. 1시간이나 서서 기다리셨으니 많이 피곤하셨을 법도 한데 전혀 불편한 기색없이 반갑게 맞아주신다. 처음 들어선 나라가 익숙치 않는 나는 궁금한게 많다. 질문이 쏟아진다.


“선생님, 유심은 어디서 살 수 있나요? 환전은 얼마나 할까요? 오늘 바로 이동인가요? 숙소는 어디예요? 키르기스스탄에는 오래있으셨나요? 요즘 연재하고 계신 글을 읽어서 하고 계신 일은 알고 있습니다. 이번에도 그 일로 오신 건가요? ”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질문에 선생님은 빙그레 웃으시더니 이렇게 대답하신다.


“천천히 하시면 됩니다.”


천천히. 하다. 익숙한 말이 아니다. 천천히 해야한다가 아니라 ‘천천히 가도 다 갑니다’의 뉘앙스다. 내가 너무 급했나. 천천히 한다는 것은, 지금‘무언가를 해야한다’는 관념의 경계를 벗어나는 일이다. 관념의 경계를 벗어나면 정해짐이 없는 하루가 된다. 꼭 오늘이어야할 이유도 없지만 꼭 오늘이 아닐 이유도 없는 매일이 된다. 매일이 ‘지금 현재’에 집중하는 삶이 된다. 그런데 나는 또 오늘 하루에 ‘경계’를 두고 오전과 오후를 나눈다. 해야할 일을 정하고 있다. 그 모든 것으로부터 선생님은 자유로워보였다. 급할 것도 없지만 느슨하지도 않다. 그 누구보다 자유롭게 여행을 다니는 ‘느슨한 하루’가 매일이지만 그 누구보다 ‘지독한 하루’를 보낸다. 독서와 사색, 경험과 실천을 놓치 않는 분이다. 경계없는 삶이란 단순히 ‘국경을 넘는 삶’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삶에 대한 모든 ‘경계’를 넘어선 경지를 말한다. 이 나이에는 이것을 해야한다, 여행에서는 이렇게 해야한다, 사람을 만날 때는 이렇게 해야한다, 오늘 하루를 이렇게 보내야한다까지. 제한된 모든 경계와 규정에서 벗어난 삶이다. 그러나 그것이 결코 내가 하고 싶은대로 ‘마음대로 한다’는 것이 아님을 나는 곧 알게 되었다. 

 

사리모골 마을로 가는 길


중앙아시아사를 연구하시는 윤성제 선생님, 공원국 선생님과 함께 사리모골로 향한다. 사리모골은 공원국 선생님의 연구지역이다. 내일 있을 마을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오늘 오쉬에서 마을 사람의 픽업을 기다리고 계셨다. 오쉬에서 사리모골이라는 작은 마을까지 가는 길은 사계절을 담은 4시간의 경계없는 대자연의 파노라마다. 매 시간마다 다른 계절이 창 밖으로 지나간다. 가도 가도 끝없는 초원인가 싶더니 어느 새 웅장한 산이다. 해발 고도가 높아지자 창 밖은 온통 눈이다. 계절은 4월인데 이곳은 이미 겨울이다. 눈 내린 도로와 산을 넘어가면 봄과 겨울이 동시에 있다. 푸르른 초원을 뒤로하고 파미르 설산이 펼쳐진다. 이 거대한 자연의 광활함이 작은 사진 프레임 안에 담기지 않는다. 이 경이로운 자연이 말과 소들에겐 그저 어제와 같은 오늘일 뿐이다. 지극히 평온한 일상이다. 



사리모골 마을 입구 전경


사리모골 마을이 가까워지자 거대한 설산과 초원의 반대편에 인공산이 보인다. 분진을 일으키는 큰 트럭 몇 대가 계속해서 인공산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광산에서 석탄을 캐는 위해 들어온 회사라 한다. 중국회사와 키르기스스탄 회사가 달려들어 광산을 개발중이었다. 한쪽에는 눈에 다 담을 수도 없는 거대한 파미르의 설산과 초원이, 다른 한 쪽에서는 석탄채굴을 위한 작업이 한창이다. 차는 그 두 가지 현장의 불편한 부조화의 ‘경계’를 가로질러 사리모골 마을로 들어간다. 마을에 들어서자 순박한 표정의 마을 사람들이 반갑게 인사한다. 공원국, 윤성제 선생님과는 이미 오랜 안면이 있고 잘 알고 있기에 친척이 돌아온 듯 한참 대화가 이어진다. 우리가 묵을 작은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는 오쉬르네는 아이가 한명 더 생겼고 있던 아이들도 훌쩍 자랐다. 낯선 사람을 보고 수줍어 얼굴을 돌리던 꼬마 아가는 이제 누구에게나 생글생글 잘 웃는다. 당나귀를 타고 가는 4-5살 된 남자아이들은 누군지도 모를 이 낯선 이방인에게 반갑게 손을 흔들어준다. 이들을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얼마나 도심을 걷는 사람들이 표정이 차갑고 무표정한지 새삼 생각해보게 된다. 먼 곳에서 온 손님을 진심을 다해‘환대’하는 마음이 초원의 바람을 타고 전해온다. 보이는 풍경은 황량한 겨울인데 전달된 마음은 따뜻한 봄이다. 손발이 시리는 추위가 환하게 웃어주는 사리모골 마을 사람들의 미소에 녹는다.     

 

초원의 바람이 불면

공원국 작가와 함께

따뜻한 차를 한잔 마시고 잠시 쉬고 있자니, 밖에 말이 준비되었다며 나를 부른다. 건장한 체격의 말 세 마리가 기다리고 있다. 제주도에서 보던 조랑말의 크기가 아니다. 공원국 선생님과 윤성제 선생님은 이미 익숙한듯 자연스럽게 말에 오르신다. 거대한 설산 아래로 초원이 나타나자 말들이 신나게 달린다. 울타리 경계 안에서 같은 자리를 반복해서 빙글빙글 도는 승마장 말이 아니다. 그들은 대자연 속에 경계 없는 초원을 힘차게 달리고 있다. 엄청난 힘과 속도다. 이제 드 넓은 초원을 달리는 두 마리 말은 수 만의 기마병력이 되어 초원을 뒤덮는다. 말과 함께한 기마병의 이동이 곧 정복의 역사이다. 그리고 그것은 곧 유목민의 역사이기도 하다. 


한 무제는 중앙아시아의 한혈마를 얻고자 수만의 살상을 감행한 전쟁을 단행하기도 했다. 정주민과 유목민의 모두에게 ‘말’은 곧 군사력의 핵심원천이었다. 그렇게 기마병을 중심으로 펼쳐진 세계의 수 많은 정복전쟁은 땅에 경계를 그어 ‘나’와 ‘너’를 나누었다. 정복하는 자는 언제나 우월한 문명이어야했다. 자연스럽게 정복 당한자는 저열한 문명으로 간주되었다. 말은 그렇게 ‘정복’전쟁의 승리 안에도 있었고 수많은 전쟁터를 인간과 함께 누리며 고통을 함께 겪기도 했다. 그런 이유로 <말의 세계사>를 쓴 피타 켈레크나는 인류 문명을 이끌어 온 힘을 말에서 찾는다. <말의 세계사>라고는 하지만 결국 그것은 말을 이용한 인간의 역사를 말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말은 한번도 전쟁에 나가고 싶다거나 전쟁에서 승리해서 행복하다고 말한 적이 없다. 그러나 인간은 말을 이용했고, 기마병을 만들어 정복전쟁을 했으며, 경계없는 말의 초원에 제멋대로 금을 그었다. 그렇게 승리한 정복전쟁은 ‘우월한 문명 전파란 이름으로 포장되었다. 전쟁 후, 경계 없던 자연은 ‘내 것’과 ‘네 것’으로 갈라져야만 했다. 정복전쟁을 통한 문명의 전파란 ‘파괴’를 전제한다. 더 우월한 문명이란 그보다 저열한 문명이 있어서 존재한다. ‘우월’하다는 것은 ‘저열함’이 있어 성립하고, ‘문명’이란 ‘야만’이 있을 때 존재하는 말이다. 정복의 역사는 발전이면서 파괴이듯, 말과 함께 시작된 ‘유목’과 ‘야만’의 역사는 또 한편에서는 ‘정주민’과 ‘문명’의 이분법 안에서만 존재한다. 대체 언제부터 나와 너, 문명과 야만, 우월함과 저열함의 기준이 생겨난걸까. 대체 누가 이렇게 ‘다름’을 구별하여 경계를 만든 것인가. 유목민이든 정주민이든 처음에 나눠져 있던 것이 있을까. 처음부터 그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악’이 였을까. ‘나는 선, 너는 악’의 구별은 ‘악’을 처단하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는 공포를 만든다. 상대가 악마가 되어야 내가 선이 되는 세상이다. 기원전부터 지금까지 그것은 어느 나라, 어느 세대를 막론하고 지속되어 왔다. 


21세기에도 다를 것은 없어보인다. 악마화와 낙인찍기의 위력은 여전하다. ‘악의 축’, ‘빨갱이’, ‘왜놈’, ‘이슬람 테러리스트’ 등의 낙인이 그렇다. 우리는 삶 속에서 끊임없이 이런 ‘낙인’찍기에 쇄뇌되어 무의식적으로 그 틀을 받아들이며 경계를 나누고 우리편을 가른다. 그러나 무엇보다 안타까운 것은 일상적으로 아무렇지 않게 쓰는 그 용어가 통치자들의 권력을 위해 ‘만들어진 틀’이라는 생각을 못하는데 있다. 통치자들은 늘 이런 대중의 무지와 두려움을 활용하여 ‘악’을 만들어내고 살상을 정당화한다. 그 살상을 위한 도구로, 때로운 인간을 위한 물건의 운반 수단으로 오랜 시간 인간에게 착취당했던 동물 중 하나가 말이다. 사람들은 오늘도 여전히 너와 나, 정상과 비정상, 문명과 야만, 선과 악을 구별한다. 아군과 적군을 가른다. 동물은 그런 구별도 없으려니와 단지 ‘그들’이여서 ‘싫다’는 이유로 다른 생명체를 함부로 죽이지 않는다. 인간과 같은 탐욕도 없다. 인간은 아무리 많은 땅을 가져도 아무리 많은 돈을 가져도 만족이 없다. 더 큰 땅, 더 많은 돈을 가지기 위해 누군가를 정복하고 때로는 죽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동물은 배가 고프지 않으면 사냥을 하지도 않는다. 먹을 만큼만 먹고나면 더 욕심내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는 인간이 동물보다 ‘우월’하다고 아무런 거리낌없이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까? 우리는 ‘인간’이라는 ‘대상’도 흑인, 백인, 정상인, 장애인, 이성애자, 양성애자, 동성애자, 여성, 남성 등으로 구분한다. 그리고 이렇게 ‘이름’ 붙여 구별한 ‘대상’을 ‘옳다’ ‘그르다’, ’싫다’, ’좋다’ ‘우월하다’ ’저열하다’ 등으로 판단한다. 


그런데 분별심에서 나온 어떤 가치 판단이 완전 무결한 절대 진리가 되는 순간 그것은 ‘도그마’가 된다. ‘하나만이 정답’이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집단을 이루어 극단주의로 무장하게 되는 것이다. 이슬람 극단주의(IS), 미국의 백인우월주의(KKK)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미국의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은 기독교를 세계에 전파하는 것이 신에 의해 주어진 자신들의 운명이라도 믿는다. 부인할 수 없는 ‘명백한 운명 (Manifest density)’은 종교적 도그마이다. 이 도그마의 연장선 상에서 서유럽에서는 약 150여 년에 걸친 십자군전쟁의 비극이 있었다. 또 30년 전쟁을 통해 신교와 구교는 서로를 수 없이 죽고 죽였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로 나누어졌던 냉전시대도 역시 하나의 선택이 강요되는 비극이었다.


 이 냉전의 구조 안에서 한국도 남한에서는 ‘빨갱이’, 북한에서는 ‘반동분자’로 나누어 서로를 ‘악’으로 규정하며 죽였다. 이분법적 사고는 정치 이데올로기의 도그마가 되어 수많은 희생자를 만든다. 나는 다시 묻는다. 인간은 정말 동물보다 우월한 존재일까? 여름내내 우는 매미를 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 고작 일주일 살다 죽을 걸 왜 저리도 악을 쓰고 사는가라고. 초원을 달리는 말도 마찬가지다. 25년 정도 살다 죽는 생인데 인간의 노예처럼 살다 죽는구나. 그런데 우주의 시간 속에서 보면 인간의 수명 100년도 찰라에 불과하다. 매미의 일주일이나, 말의 25년, 인간의 100년이나 다를 바가 무엇인가. 우리는 인간이 동물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지만 인간보다 수승한 존재가 우주의 시간 속에서 보면 인간 또한 마찬가지다. 그러고보면, 모든 존재는 내가 인식할 수 있는 ‘시간’ 안에서만 존재할 뿐 영원히 ‘고정된 실체’는 없는 것이다. 초원을 달리는 말이나 그보다 더 수승하다고 생각하는 나나 사실은 다를 것이 없다.



광활한 사리모골의 초원을 달리는 말이 점처럼 사라졌다가 순식간에 눈 앞에 다가온다. 얼마나 빠른 속도인지 광활한 초원 위가 아니라면 가늠하기 어렵다. 그래, 좋다. 니 땅, 네 땅 구별없이 마음껏 뛰거라. 이 공간 어디에도 니가 못 갈 땅은 없다. 인간은 그 땅을 니것, 내것으로 갈라 때로는 그 경계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지만 너에겐 그럴 경계도 없지 않느냐. 달려라, 바람아. (공원국 선생님의 말 이름이 바람이다.) 경계에 얽매이지 말고, 바람처럼 어디든 원하는 대로 마음 껏 달려가거라. 경계 없이 달리는 바람같은 유목민의 자유가 파미르를 넘어 사리모골 마을에 내려앉고 있었다. 초원의 해가 그렇게 저물고 있었다.     

 

개발과 보존의 경계 사이에서


오후 4시, 해발 고도 3천미터의 바람은 해가 사라지자 무섭게 돌변한다. 살을 에이는 듯한 추위가 몸에 파고든다. 바람이 강하게 부니 체감온도가 더 낮아진다. 말을 돌려 집으로 향한다. 망르로 돌아오는 길에 눈 위에 널부러져 있는 개 두마리를 보고 죽었는지 물었다. 그렇게 말하는 순간 개 한마리가 천천히 고개를 든다. 차라리 눈이 오는 날이 바람만 부는 날보다 덜 춥다고 한다. 이 곳의 개들은 눈 위에서 자는 게 익숙하다나. 익숙함이란 그렇게 무섭다. 당연하다고 생각하면 하나도 의문가질 것이 없고 당연하지 않다고 질문하기 시작하면 모든 것이 달라진다. 사리모골 마을의 하루는 평온하다. 아낙네들은 새벽별이 뜰 떄부터 일어나 마을을 흐르는 개천에서 물을 떠온다. 손을 에리는 추위에 장갑도 없이 물동이 두개를 들고 걷는다. 아침밥을 짓기 위해 물을 길러와야 하는 것이다. 석탄으로 난로불을 지피고 주전자를 올려 찻잎을 띄운다. 아침밥을 먹고나면 오늘 장터로 나간다. 오늘 팔 양 한마리와 송아지 한마리를 차에 태우고 축산시장으로 향하는 것은 보통 마을 남자들의 몫이다. 축산시장에는 가끔 정말 잘생긴 백마나 흑마가 등장하곤 하는데 그러면 모두가 그 말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다. 공원국 선생님은 잘생긴 백마 앞에서 한참을 서성거리다 주인에게 가격을 묻는다. 



흡사 올해 새로 출시된 신형 세단 자동차의 디자인에 상당히 감동한 느낌이다. 승차감부터 디자인까지 빠지는 게 없는데 안타깝게도 연차가 좀 된 것 같다. 10년 된 백마란다. 그러나 나이만큼이나 노련한 이 말은 좁은 축산시장의 사람들 무리 사이를 어려움 없이 빠져나간다. 축산시장을 지나면 식료품시장이다. 아주머니들이 나와 과일이며, 음식거리를 내다 팔고 있다. 해발 고도 3000미터의 오지라도 사람들이 사는 모양은 다 비슷하다. 


이 평온한 마을에 문제가 생긴 것은 이 마을에 탄광회사가 들어오면서부터다. 사리모골 사람들 중에 일부는 광산에서 일을 하고 있다. 하지만 일하는 인구는 이 마을 주민은 약 6천명 중 고작 100명이다.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지역주민들의 건강이다. 탄광에서 일한 주민들은 일한지 3년이 되지 않아 기관지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물이 오염되고 있는 것도 주민들 건강에 적신호다. 상하수도와 정수시설이 전혀 없는 이 곳은 마을을 끼고 흐르는 냇가가 곧 식수다. 그런데 광산개발로 이 물에 엄청난 양의 석회가루가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정수장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대로 석회물을 마시고 이용하는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정부는 이 문제를 해결할 자금과 의지도 없으려니와 현재 이 곳 국회의원은 광산회사와 ‘일자리’의 명분으로 거래하는 중인 듯 했다. 그는 그것이 주민들을 위한 일자리 창출과 더 나은 삶을 만들어줄거라고 설득했겠지만 실제 주민들이 사는 땅을 이용하면서 그들이 내고 있는 사용료는 없는 듯 했다. 가장 큰 자본은 중국인데 광산개발을 위한 모든 장비를 들어와서 해주는 명목으로 정부에 일정 금액을 지불했을지는 몰라도 주민들의 생활터전이 오염되는 문제는 제기가 되지 않으니 강건너 불구경이었다. 주민들은 당연히 받아야할 권리를 찾지못한 채 그대로 오염된 물을 마시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공원국 선생님은 문화인류학 논문의 참여관찰 케이스 스터디로 이 지역을 연구하시다가 이 문제를 알게되고 많은 고민을 하신 것 같다. 마을의 문제에 대해 외부 관찰자는 가능한 비개입을 연구의 원칙으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생님은 직접개입을 선택하셨다. 윤성제 선생님은 중앙아시아사 전공으로 키르기스탄언어에 능통하신 분으로 공원국 선생님을 도와주고 계셨다. 그러나 절대 탄광이나 정부에게 이렇게 해야한다, 저렇게 해야한다는 말씀은 하지 않으신다. 그런 생각과 행동은 철저히 마을 주민들이 스스로 판단해서 해야할 일이지 외부에서 함부로 개입할 일이 아니란 것이다. 다만, 수도시설은 모두가 당장 맞딱드린 문제이니 우선 이 문제를 먼저 함께 해결해가는 걸 시작으로 희망을 얻어 차차 주민들 스스로의 권리를 찾아 가길 기다리고 계셨다. 내일은 마을 회의가 있는 날이다. 두 분 선생님은 일단 마을 사람들의 건강과 직결된 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국에서 모음활동을 하고 정수시설을 이 마을에 설치하는데 협조를 부탁하셨다. 공원국 선생님은 밤새 키르기스탄어로 적은 연설문을 보고 또 보고 읽으며 내용을 고치쳤다. 그런 공 선생님 옆에서 윤성제 선생님은 키르기스탄 노래 한곡을 계속 보고 계신다. 나를 위함이 아니라 남을 위해 댓가없는 일을 하시면서도 그것을 ‘돕는다’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연설문을 보고 계신 공원국 선생님과 옆에서 글쓰고 있는 나


누군가를 돕는다는 마음은 나보다 ‘상황이 어려운 사람’을 돕는다는 관점이 있지만 ‘친구’로 생각하는 마음에는 그의 일이 곧 내 일이라는 동등한 관점이 있다. 상대의 마음을 먼저 해아린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내가 너를 돕는다’는 입장에서는 내가 편한 방법을 우선 선택한다. 어차피 내가 도와주는 입장인데 내가 편한 쪽을 선택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런데 내가 속해 있는 집단과 다른 집단이 함께 어떤 일을 해 갈때는 기준이 동일할 수 없다. 만약 상대에게 내가 맞다고 생각하는 기준만을 주장하여 어떤 일을 진행했다면 그것은 어떤 방식으로든 ‘내가 중심이 되는 폭력적 개입’이다. 일체의 폭력성을 배제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방법은 내가 아니라 상대의 관점에서 그들을 이해하려는 마음이다. 상대를 배려하고 공감하는 마음이 아니라, 누가 더 우월한가의 기준으로 분리되는 순간 그것은 작게는 타인에게 상처를 주며 크게는 전쟁까지 갈 수 있는 여지가 된다. 나의 기준을 상대에게 반드시 적용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은 일체의 ‘폭력적 개입’을 배제하고 싶은 마음에 기인한다. 공원국 선생님과 윤성제 선생님이 편한 영어나 한국어 통역 대신 굳이 현지언어인 키르기스탄 언어로 이야기하기 위해 더 많은 시간을 애쓰고 있는 이유도 아마 그런 마음이 아닐까. 상대의 마음을 얻는다는 것은 언제나 나보다 타인의 입장에서 먼저 배려하는 것이다. 내가 생각한 기준대로 반드시 ‘따라와야한다’도 것도 철저히 내 중심적 사고다. 상대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는 태도다. 그런 의미에서 어떠면 우리가 현대의 기준에서 ‘발전’이라 생각하는 ‘근대성’도 문화와 삶의 기준이 서로 다른 다양한 집단에 ‘서구적 기준의 근대성’을 하나의 표준 잣대로 획일화한 것일지도 모른다. 근대적 기준을 ‘위생’이나 경제적 발전, 생활의 편의성으로 본다면 사리모골은 철저히 ‘낙후한’ 도시다. 그러나 가족이나 마을 공동체 정신이나 타인을 위한 희생정신을 기준으로 본다면 사리모골은 그 어떤 도시보다 ‘발전된’ 곳이다. 그러고보면 ‘낙후’나 ‘발전’이란 잣대는 얼마나 자기 중심적 기준으로 정해지는 것인가. 


마을 단합을 위한 양의 희생


사리모골에서는 마을에 큰 행사가 있을 때 단합과 축하를 위해서는 양을 한마리 잡는다. 오늘 오전에는 중요한 마을회의를 하고 저녁에는 마을 사람들의 친목을 위한 단합대회를 해야하니 이를 위해 희생할 한 마리 양을 잡는 일이 관건이다. 그런데 나는 이것이 아무리 생각해도 영 맘에 들지 않는다. 왜 마을 사람들을 위해 양이 희생되어야 하며, 중요한 모든 행사때마다 집안일은 모든 여성들이 해야하는가. 남자들은 어떤 가사일에도 관여하지 않으면서 중요한 행사와 업무의 결정에는 모두 관여한다. 나는 이 모든 상황 속에서 사리모골의 ‘낙후성’을 비판하고 있었다. 여성의 지위와 여성교육수준, 동물권리의식, 생활수준까지 현대 도시사회에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그야말로 우리가 ‘전근대적’이라고 하는 모든 것들이 바로 이 곳, 사리모골이었다. 이 마을의 문화에 맞추어 양을 한 마리 잡으러 축산시장을 가는 길에 나는 차마 양을 볼 수 없어 돌아나왔다. 어떤 마음인지를 이해한다는 듯 윤성제 선생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불편한 마음인거 알아요. 나나 공선생도 둘다 채식주의자였으니까. 하지만 여기 오래 있으면 이들의 생활방식을 이해하게 돼요. 그리고 그 방식을 이해하면 바꾸려고 하기보단 공감하고 이해해주면서 스스로 문제점을 깨달아 변화되길 기다리게 되더라구요. 양은 절대로 혼자 생존이 안됩니다. 어차피 야생에 두면 죽어요. 반드시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죠. 그런데 수명이 10년이 안되고, 그 개체수가 너무 많아도 이곳 생태계에 큰 위험이 돼요. 동물이 많기 때문에 인간이 풀만 뜯어먹고 채식을 하면 생태계의 먹이사슬이 파괴되는게 초원이예요. 우리의 ‘잣대’ 또는 ‘기준’에서 무조건 ‘틀렸다’라고 말하기 전에 ‘저들은 왜 그래야만 했을까’라는 질문으로 바꾸어서 이해하려고 하면 다르게 보여요. 나는 무엇이 맞다고 판단하라고 하지 않아요. 다만, 상대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결과를 가지고 옵니다. 그들의 언어, 문화, 종교를 이해하려는 모든 노력이 여기에 속하죠. 현대 도시에서 우리가 먹는 모든 육식은 전부 공장사육이죠. 닭은 날개를 펼칠 수도 없는 좁은 공간에서 매일 알을 낳다가 죽어가요. 소나 돼지는 어떤가요. 그리고 살처분 되는 동물은 어떻구요. 유목민이 동물을 잔인하게 죽인다고요? 그들은 생태계를 파괴시키는 공장사육과 도살을 하는게 아니예요. 도축하는 동물은 거의 대부분 나이든 동물이지 새끼를 죽이는 경우는 거의 없어요. 동시에 그들은 적어도 살아있는 동안은 공장에서 사육되는 그 어떤 동물보다 자유롭게 지내죠. 그렇다면 공장사육과 전기도축은 문명적인 거라고 할 수 있나요? 그들의 생존환경에서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고, 우리의 잣대로 상대를 ‘평가’하는 어떤 행동도 폭력적 개입이 될 수 있어요. “ 


선생님은 오해를 풀어주기 위해 유목문명이 가지는 의미를 설명하다보면 늘 자신을 현대사회에 부적응한 ‘유목문명의 찬양자’로 본다며 웃으신다. 서구 근대화와 발전이 가지는 의미, 또 그 발전이 가지는 문제점에 대한 실랄한 비판 또한 서구지성이 해냈다는 위대한 사실을 한번도 부정한 적이 없는데 단 하나의 측면에서만 판단되는 것이 억울하다는 것이다. 마치 서구 근대화를 비판하면 친 ‘아시아주의자’로, 서구 근대화를 찬양하면 서구중심주의자로 단순하게 이분법적으로 분류하는 오류를 일상에서 경험하는 것과 같다. 그런데 참으로 ‘친’일 수 밖에 없지 않겠나. 상대를 더 많이 이해하려고 노력한 사람이 상대를 더 잘아는 법이다. 더 잘 알고 있으니 당연히 억울하다 싶은 일에 나서서 ‘친구’편을 들게 되지 않겠는가. ‘친구’란 그런 것이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헤아려보려 더 많이 노력했기에 다른 누구보다 내가 더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 그런 의미에서 공원국, 윤성제 선생님은 사리모골 마을의 친구다. 두 분은 이 마을의 문제를 알고 그에 깊게 공감하면서도 이 문제를 절대 ‘개발과 보존’의 관점에서 논쟁적으로 끌어가려고 하지 않으셨다. 무엇이 더 옳고 그르다의 문제로 접근하는 방식이 가지는 한계 때문이 아닐까. 식수문제는 여기 살고 있는 거주민의 문제다. 따라서 모든 가치판단도 그들 스스로 결정해서 행동해야 한다. 만약 외부에서 무엇이 맞다 그르다를 결정해서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아무리 부드러운 말로 전달한다 해도 ‘강압적 개입’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어려움이 처했을 때 그들의 처지를 공감하고, 그들의 입장에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함께 노력하는 것은 ‘강압적 개입’이 아니다. 그것은 친한 친구의 마음으로 함께하는 것이다. 


사리모골 마을 회의와 파티


오전 11시, 사리모골 주민들이 한자리에 모여 식수문제 대한 마을회의를 시작한다. 주요 발언자는 공원국 선생님이다. 선생님은 배운지 얼마 되지 않은 키르기스탄 언어로 적은 글을 찬찬히 읽어가셨다. 윤성제 선생님은 현지 노래를 부르며, 상대의 입장에서 마음을 열어 오해 없이 이야기 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신다. 많은 사람들의 여러 이야기가 오고갔지만 진심은 전달된 것 같았다. 그들은 알고 있다. 두 분이 얼마나 이 마을을 아끼는 마음으로 애쓰고 있는 지. 회의는 성공적으로 끝났다. 주민들은 공원국 선생님께 감사를 표했고, 최선을 대해 돕겠다고 말해주었다. 나는 결코 200명이 넘는 주민들이 한마음으로 감사를 전하는 지금이 단순히 ‘오늘’하루의 행사를 통해서 가능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마을 회의 모습


아주 오랜시간 주고 받은 ‘마음’은 진심을 전한다. 서툰 현지어로 전하는 마음도, 그들의 정서를 이해하기 위한 노래도, 한번더 눈 맞추고 악수하는 행동도, 그들의 문화를 존중하고 이해하는 모든 행동에 진심이 있었다. 정복하려는 자는 상대를 이해할 필요가 없다. 힘으로 굴복시키면 그만이다. 그러나 그렇게 정복된 사람들은 반드시 다시 힘을 키워 복수를 노린다. 원한과 보복의 악순환은 반복되는 것이다. 그러나 친구가 되려는 자는 마음으로 상대를 이해하려 다가가기에 감동이 전해진다. 원한과 보복의 고리가 상생과 협력의 순환으로 변화한다. 그 순간 나와 너를 가르는 경계는 마침내 ‘우리’가 된다. 나눠진 ‘땅’이 아니라 다시 경계없는 ‘자연’으로 돌아가는 순간, 진정한 ‘우리’가 된다. 대자연은 경계를 벗어난 삶이다. 경계를 벗어낫기에 무한히 자유롭다. 하지만 그렇다고 대자연의 자유가 다른 생명체의 자유를 함부로 침해하는 무질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거대한 자연의 생태계에도 늘 안보이는 질서체계가 존재한다. 이 자연안에서 동식물은 탐욕이 없으며 필요한 만큼만 취할 뿐이다. 동시에 그들은 어떻게 공존해야하는지 그 방식을 잘 알고 있다. 이것이 사리모골 마을이 전하는 ‘평화’이야기다. 오전에 잡은 양을 해체하여 마을 어르신을 초대한 저녁 잔치가 열렸다. 


사리모골 마을잔치와 동네사람들과 함께


가장 높은 어른에게는 양의 머리가 전해진다. 부위별로 해체된 양고기는 그날 온 손님의 순서대로 전달된다. 남은 고기는 다 먹지 않고 싸서 집으로 가져가 함께 먹는다. 두 시간 정도의 저녁식사시간이 끝나고는 마을에서 가장 명망있고 나이 많은 어르신의 축복기도가 이어진다. 기도가 끝나자 마을 어르신들이 한명씩 돌아가며 감사인사를 전했다. 공원국 선생은 감사인사에 이렇게 짧게 대답했다.


 “여러분들은 자꾸 도와줘서 고맙다고 하는데, 나는 ‘돕는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친구입니다. 친구가 어려움에 처해 있거나 아파서 누워있다면 그냥 모른체하고 갈 수 있습니까? 사리모골의 마을 일이 곧 내 일인 것입니다. ”  


파미르 고원의 바람은 어느새 하이얀 눈송이로 변해 온 마을을 가득 덮고 있었다. 내린 눈송이 만큼이나 순수하고 맑은 사리모골 사람들이 마음이 저기 어디 설산 한자락에 언제나 걸려있을 것만 같다. 정겨운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새하얀 초원의 황량한 설국 아래로 저물자 사리모골의 푸른 달빛이 슬며시 다가와 친구가 된다. 키르기스탄의 대자연이 내린 선물 같은 하루가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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