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리게 아름답게 걷는 길
촐폰아타에서 카라콜로 가는 길
카라콜로 가는 길은 파란 하늘에 덮힌 하얀 눈의 멜로디다. 웅장한 설산의 파노라마는 기본 선율이 되어 초원의 노래를 만든다. 창 밖으로 펼쳐지는 자연의 노래는 촐폰아타에서 카라콜로 가는 길에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다. 인간이 만든 그 어떤 디자인이 이 자연의 아름다움을 넘어설 수 있을까. 푸른하늘과 설산, 초원 위를 가르며 버스가 달린다. 카라콜은 키르기스스탄 이식쿨 호수 관광의 중심도시로 중앙아시아 최고의 스키여행과 산악 트레킹으로 유명하다. 촐폰아타에 비하면 생각보다 도시 규모가 커서 놀란다.
성삼위 대성당과 이슬람 사원
호스텔에 짐을 풀고 카라콜 거리로 나온다. 나무가 줄지어 서 있는 흙먼지 길이 익숙치 않은 새로운 느낌이다. 포장 안된 흙길에 먼지를 날리며 도심을 걷는다. 흙을 밟고 가는 기분이 편안하다. 시야를 가리지 않은 나지막한 건물도 산책하는 느낌이다. 별로 볼 것 없어 보이는 도시의 거리를 완성시키는 것은 눈 덮힌 산이다. 하늘이 맑은 날,설산을 배경으로 펼쳐진 이 도시의 모든 것은 수채화처럼 아름답다. 아주 낡은 집과 거친 흙 담마저 설산이 배경이 되면 그림 같은 풍경으로 변한다. 설산을 배경으로 하는 이 도시는 포장안된 흙먼지 길을 걷는 것만큼이나 모든 것이 느리게 아름답다.
호스텔에 짐을 풀고 따뜻한 햇살을 받으며 도시를 걷는다. 푸른 나무들이 바라보는 길이 싱그럽다. 공원처럼 조성된 벤치에 앉아있으니 대각선 방향으로 동상이 보인다. 옛 소련연방 국가에서 흔히 보이는 레닌 동상이다. 키르기스스탄이 구 소련국가의 영향이었음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상징물이다. 레닌동상을 바라보며 도로를 걷다보면 아름다운 목조건물에 발길이 멈춘다. 러시아정교 건물이다. 여기서는 ‘성삼위 대성당(Holy Trinity Cathedral)’로 불리고 있다. 초록색 지붕이 인상적인 이 곳은 1872년에 지어진 것인데 원래 건물은 1890년 지진으로 파괴되었다고 한다. 기존의 기단부에 목재로 지어올린 새 건물은 1895년에 완성되어 볼셰비키 당원의 클럽으로 이용되었다. 러시아정교회의 성당인데 양파형 돔이 없는 것이 신기해서 물어보니 볼세비키 당원들이 1930년대에 5개의 양파형 돔을 없애버려서 현재의 상태가 되었다고 한다. 이 건물하나에 시대의 격동 속에 키르기스스탄이 지나간다. 예배는 소련의 해체 후, 1991년부터 다시 재개되었다고 하니 이 아름다운 성당 건물이 본연의 자리로 돌아오는데까지는 격동의 한 세기, 100년을 기다려야 했던 것이다. 성당건물을 지나 직진에서 더 걸어가면 이슬람 사원이 보인다. 그야말로 키르기스스탄의 모든 역사적 시간이 길 하나에 서 있는 느낌이다. 이슬람의 영향을 받았고, 러시아정교의 영향을 받았으며, 그후 러시아 혁명으로 소련연방에 편입된 후 해체된 모든 역사의 모습이 카라콜의 작은 도시 안에 모여있다. 설산이 보이는 바자르의 작은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숙소로 돌아와 내일 트레킹코스를 확인한다. 카라콜을 오는 대부분의 여행객은 아름다운 자연을 보기위해 이 곳을 들린다.
체코 여행가 ‘Lost Czech Man’ 마틴과의 만남
호스텔에는 세계의 여행자들이 모인다. 여기서는 소속된 국적과 관계, 역할, 직업에서 벗어나 ‘여행객’으로 만난다. 무엇보다 자유롭고 편안한 만남과 헤어짐이 좋다. 호스텔만이 주는 이 ‘과장이나 포장없는 담백한 시간’이 나는 참 좋다. 그래서 비싼 호텔보다 베낭여행자들이 많이 모이는 호스텔을 더 선호하는지도 모른다. 윗 사람을 만나기 때문에 실수하면 안된다는 압박이 있는 만남도 아니고, 업무로 만나는 형식적인 회의도 아니며, 헤어짐이 아쉬운 연인도 없는 자유로운 공간과 시간이다. 8개월동안 여행중인 체코 여행가 마틴(Martin)은 본인을 ‘길을 잃은 체코 남자(Lost Czech Man)’이라 소개한다. 다양한 직업과 남부러울 만큼의 돈을 벌고 있던 그는 어느 날 문득 본인이 행복하지 않음을 알았다고 했다. 그 길로 짐을 싸서 가진 돈을 통장에 넣고 길을 떠났다. 체코에서부터 출발해서 유럽을 거쳐 이란에서 두달을 보내며 중앙아시아로 들어왔다고 했다. 정해진 일정도 없고, 히치하이킹과 현지 주민들을 만나며 최소한의 돈으로 여행을 하는 그는 나와 동갑내기다. 10년이란 시간을 누구나 부러워하는 삶을 살았으면서도 그 모든 것을 버리고 택한 ‘여행’, 그 ‘길 위의 시간’만 가지고도 우리는 늦은 시간까지 이야기할 수 있었다. 마틴이 가진 여행의 철칙은 절대 비행기를 타지 않는 것이란다. 모든 지역의 국경과 경계를 두 발로 넘고 육로로 실크로드를 횡단하고 있다고 했다. 7성급 호텔과 최고의 음식을 제공받으며 1등석 비행기로 이동했던 8개월 전의 자기 자신보다 하루 10불 이하로 살며, 히치하이킹으로 현지주민들을 만나고, 산과 바다를 있는 그대로 시간에 구애받지않고 향유할 수 있는 지금이 더 행복하다며 웃는다. 반드시 하고 싶은 일이 생기거나, 인생을 함께하고 싶은 동반자를 찾지 않는 한 이 여정을 멈출 생각이 없다는데 그는 진정 ‘나를 찾는 여행’을 하는 중인 것 같았다. 본인은 ‘길을 잃은’이라고 본인을 표현했지만 나에게 그는 누구보다 세상을 걸으며 ‘길을 찾는’ 체코 남자처럼 보였다. ‘길 위에 선 삶’은 ‘집 안에 있는 삶’의 입장에서는 위험과 불안정성일 것이다. 그러나 실제 길 위에서 선 이들은 위험이나 불안정성보다 더 큰 자유로움과 행복을 느낀다. 아이러니한 부분이다. 그래서일까. 호스텔에서 만나게 되는 많은 배낭여행객과 이야기하는 것은 언제나 ‘부담스럽지 않은 편안함’과 ‘소소한 행복’이 있다. 남 부러운 직업과 돈, 안정된 삶을 다 가졌던 ‘길을 잃은 체코맨’에게 물었다.
“남들이 갖고 싶었던 걸 다 가졌으면서도 넌 대체 왜 길 위에서 헤매고 있는 이 시간이 더 행복하다고 느끼는 거야?” 정말 궁금해서 물은 질문인데 돌아오는 대답이 머리를 친다.
“난 전에는 늘 ‘내일’을 살았어. 그런데 길 위에선 항상 ‘오늘’을 살게 돼. ”
두 발로 매일 단 한번도 가지 않은 ‘익숙하지 않은 곳’을 걷는 것은 새로운 도전이다. 그래서 ‘다음’을 생각할 틈이 주어지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 당면한 새로운 모든 과제들에 집중해야 한다. 당장 밥을 먹는 것도, 잠자리를 정하는 것도, 어딘가를 걷는 것도 매일의 모든 일이 ‘선택’인 일상이 곧 여행이다. 아무것도 정해진 것이 없는 상황이 ‘지금’을 결정해야하는 상태가 된다. 그런 상황은 곧 ‘현재’에 집중된 상태를 만든다. 반면, 안정된 직장과 삶은 그 ‘안정성’ 때문에 오히려 ‘내일’을 더 걱정하게 된다. 어떻게 하면 돈을 더 벌 수 있을지, 어떻게하면 좀 더 더 안락한 안정성을 가질 수 있을지가 늘 고민이다. 그런데 ‘어떻게하면’이라는 단서는 언제나 ‘미래’를 위한 질문이다. 온전히 ‘지금’에 집중하기엔 삶은 너무도 평화롭고 안정되어 있는 것이다. 여행은 어쩌면 현재에 집중하는 법을 해워가는 과정, 어딘가에 ‘소속된 나’가 아닌 가장 ‘나다운 나’로 편안해지는 ‘자유’일지 모른다. ‘지금’에 집중하는 이 8개월의 배낭 여행 ‘히치하이커’와 또 다른 사연을 가진 여러명의 베낭여행자들이 알틴아라샨으로 함꼐 떠나기로 했다. 모두 각자의 사연을 안고 떠나온 여행이겠지만 오늘 하루는 단지 ‘오늘’을 함께하는 ‘동행자’다.
알틴아라샨(Altyn-Arashan)을 달리는 말
산을 오르는 순간 여행자들은 각자의 수많은 사연을 다 내려놓고 아름다운 자연 앞에 하나된다. 알틴 아라샨은 카라콜을 찾은 여행자가 가장 많이 찾는 곳이다. 알친아라샨은 ‘황금스파’라는 뜻으로 온천과 우편엽서처럼 아름다운 고도 3000미터의 계곡에 위치해 있다. 이 곳에는 20여 마리의 눈표범이 서식하고 있다고 하는데 이 아름다운 설산에는 정작 말과 소가 더 많이 보인다. 이 거대한 자연을 벗삼아 달리는 말은 자유로워 보인다. 얼마전 한국에서는 경주마들이 제주의 도축장에서 비극적 최후를 맞이한다는 보고가 있었는데 이 곳 말들에겐 상상도 못할 일이다. 이 너른 들판을 자기 집처럼 달리고 있다. 인간에 의해 경주마로 혹살 당하고도 모자라, 3일도 쉬지 못한 채 도축되는 것 한국의 말들인데 키르기스스탄의 야생마는 거침없이 달린다. 아닌게 아니라 여기 말들은 장건이 서역개척시 보고 돌아와 한무제에게 보고한 한혈마가 아닌가! 늘씬하고 늠름한 모습의 말들은 순식간에 계곡을 훅 뛰어 다른 계곡으로 달려간다. 그 사이에서 관광객을 태우고 힘들게 산길을 걷는 말들과 다른 장쾌함이 있다. 말을 타고 가는 현지인의 모습에선 여유가 가득하다. 그 옛날 이 멋진 한혈마는 오늘날의 스포츠카를 보는 느낌이 아니였을까. 시시각각이 변하는 빛에 달라지는 산의 모습을 보다보면 4시간의 산행은 전혀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다. 말 옆에서 한가롭게 뼈다귀를 뜯고 있는 강아지, 시원하게 흐르는 계곡의 물과 평온한 말, 그리고 그 뒤로 펼쳐진 설산의 조화! 이 모든 순간을 ‘즐기는 ‘지금’이 무엇보다 감사하고 고맙다.
4시간을 올라가면 중앙아시아의 알프스가 펼쳐진다. 유르트와 게스트하우스의 숙박시설도 모두 이 코스를 오르면 나온다. 유목민의 삶을 생각해보게 하는 순간이다. 이렇게 자연과 함께 가까이 하며 사는 삶에 경계가 있을리가 없다. 휴전선 너머를 상상하지 못하는 곳에서 온 나는 ‘유목민’의 마인드가 절실하다. 상상력도, 삶의 영역도, 생각의 범위도 훨씬 더 넓어지는 대자연의 무경계가 한국의 청년들에게도 가득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같이 함께한 배낭여행객중에는 네델란드에서 온 19살짜리 소녀, 렌시아도 있었다.
네델란드 소녀, 렌시아와의 대화
걸으면서 보이는 많은 것들은 차로 지나갈 때는 느낄 수 없는 것들이 많다. 빠르게 지나가는 못든 것들은 생각할 틈을 주지 않는다. 산을 걸으면 그냥 지나치던 꽃 한송이, 풀 한 포기가 눈에 들어온다. 저 거대한 자연의 변화 안에서 한 계절을 버티고 꽃을 피운 것, 그 자체로 이미 놀랍다. 걷다가 지치면 풀밭에 앉아 들꽃을 바라본다. 이 작은 생명이 오늘의 햇살을 보기위해 얼마나 땅속에서 애썼을 것인가. 함께 걷고 있는 세계 각지의 배낭 여행자들도 잠시 앉아 휴식을 취한다. 그중에 가장 어린 아이는 네델란드에서 온 19살짜리 소녀, 렌시아다. 금발에 파란 눈동자가 예쁜 이 친구는 혼자 3주간의 여행을 하고 있다고 했다. 19살 때 나는 인도를 3주 여행한 기억이 있는데 이 아이는 이 거대한 자연을 만나러 먼 곳에서 온 것이다. 홀로 여행하고 있는 렌시아에게 낯선 나라를 가는 게 두렵지 않냐고 물었다. 그런데 대답이 예상을 빗겨간다.
“난 낯선 나라를 가는 게 두려운게 아니라, 언젠가 자유롭게 다니지 못할 어느 날이 오는 게 두려워.”
자유롭게 다니지 못할 어느 날은 어떤 날일까. 내 몸이 더 이상 걷지 못할 만큼 쇠약해졌을 때, 또는 관계, 소속, 상황 등의 어떤 이유로 마음먹은 순간 떠나지 못할 때가 아닐까. 그녀의 대답을 대답을 듣고 난 이렇게 대답했다.
“그래도 넌 행복한거 아닐까. 다른 어딘가에서 태어난 너 나이의 어떤 아이는 죽을 때까지 자기가 태어난 땅을 한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살아야하는 운명도 많아. 만약, 언젠가 니가 자유롭게 다니지 못할 그 어느 날이 오면, 한번 그런 아이들을 위해 어떤 일을 할 수 있을지 생각해보는 것도 의미있지 않을까?”
세상을 본다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에 대한 의문의 시작을 말한다. 떠나지 않으면 생기지 않을 수 많은 질문들이 현재 나의 삶을 돌아보게 한다. 정주민의 입장에서 고정된 공간 속에서 과거로부터 습득된 방식으로만 사고한다면 유목민의 생활방식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유목민의 삶속에 들어와 있으면 그들의 생활방식이 이해가 된다. 동시에 저들은 왜 저렇게 살아야하는지, 왜 저렇게 생각하는지 등의 온갖 의문이 생긴다. 전혀 다른 사고방식과 환경의 문명을 알아간다는 것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과 범위의 확장을 말한다. 배낭여행자들과의 대화가 늘 즐거운 것은 각자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다른 문화와 환경을 이해하려는 그들의 열린태도가 언제나 대화를 편안하게 하기 때문이다. 4시간의 등반이 지루하지 않을 수 있는 것도 저마다의 사연을 가지고 전 세계에서 모여든 젊은 배낭여행객의 열린태도에 있다. 그들은 타인을 이해하려고 하는 마음이 기본적으로 커서 많은 대화를 나누지 않아도 금방 친구가 된다. 오늘 이 순간은 국적이 어디건 키르기스스탄의 아름다운 산 알타아라샨의 유목생활을 이해하려는 공통의 목표를 가지고 함꼐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나는 우즈베키스탄과 키르기스스탄을 여행하면서 홀로 여행하는 한국인 배낭여행자를 한명도 만나지 못했다. 앞으로 더 많은 한국의 청년들이 거대한 자연안에서 유목민의 마인드를 가지고 대륙을 품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유목민이 가진 경계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움, 타인에 대한 친절, 자연과 공존하는 마음 등은 시대와 무관하게 반드시 생각해 볼만한 중요한 가치들이다. 배낭여행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천천히 산을 오르니 설산 아래, 유르트와 게스트하우스가 있다. 높은 봉우리의 ‘정상’을 알리는 비석이 있을거란 생각은 완전히 빗나간다. 이 산의 정상에는 알프스의 소녀가 살 것 같은 작은 마을이 펼쳐져 있다.
아파트와 유르트
옛 유목민이 살던 유르트도 그대로 만들어 숙박으로 이용할 수 있게 해 두었다. 유르트 하나를 잡고 일박을 하겠다고 했다. 유르트 안을 들어가니 키르시스스탄의 국기에 그려진 바로 그 무늬가 보인다. 이 나라는 국기에 이미 유목의 정신을 담고 있는 것이다. 이 광활한 평원에서 늘 ‘길 위의 삶’을 사는 유목민의 이 소박한 집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이런 공간에서는 도무지 많은 짐을 두면 안될 것만 같다. 이렇게 소박한 최소한의 삶으로도 삶은 부족함없이 충분히 살아질 것 같은데. 무엇이 그렇게도 더 필요해서 우리는 수 많은 ‘쓰레기’를 안고 떠나지못할 사람처럼 짐을 쌓으며 사는걸까. 정주민의 아파트에 익숙한 사람에게 유르트는 집 안에 아이들 놀이터로 만든 텐트로 느껴진다. 하루 놀이용이면 모를까 어떻게 이런 곳에서 장시간 지낼 수 있는지 놀랄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이렇게 짐없이 살 수가 있나 싶어서 놀란다. 참 신기하다. 어차피 그 어떤 것도 하나 가져갈 수 없는 유한한 인생인데 왜 그다지도 많은 짐을 우리는 안고 살아갈까. 컴퓨터도, 가지고 다니던 모든 짐들도 모두 카라콜의 숙소에 두고 가볍게 오니 모든게 편하다. 오로지 보이는 것은 자연과 나, 둘 뿐이다.
정주민의 삶에 익숙한 사람들은 유목민의 생활이 ‘아주 오래된 현실부적응자’처럼 느껴질 수도 있지만 사실 우리 모두는 애초부터 방랑하는 유목민이었다. 인류는 살아온 시간의 99.9퍼센트를 대초원에서 사냥거리와 먹거리를 찾아다니며 방랑하며 살았다. 관광객을 위한 숙소로 만든 것이지만 실제로 이곳에 사는 현지인들이 있다. 유목민들의 삶을 21세기에도 고수하고 사는 이들이다. 집과 같은 외형적 모습이야 크게 변화가 없어보일지 모르지만 도시에 나가있는 딸과 통화하는 유목민의 모습에서 ‘오늘 날의 유목민’의 모습을 본다. 현대적인 문명의 이기와 전통적인 유목민의 삶이 오버랩되는 순간이다. 소박하고 단촐한 유르트 안에서는 문 밖으로 보이는 푸른 초원과 그 곳을 뛰놀며 움직이는 모든 것들에 눈이 간다. 화려한 영상도, 신나는 게임도, 재밌는 이야기가 가득한 인터넷 세상도 그 어떤 것도 없는 이 곳에서는 유르트의 문밖으로 보이는 단촐한 세상의 이야기가 궁금하다. 모든 것이 급할 것 없이 느려지는 순간, 마음이 한없이 편해진다. 평소에는 한번도 집중해 본 적없는 ‘바라봄’ 에도, ‘걸어감’에도 시선이 간다. 들판에 핀 작은 들꽃에도, 천막을 치는 바람소리에도, 들판을 거니는 양 떼의 소리 하나하나가 티비 속에 영상만큼이나 집중하는 시간이다. 설산 아래 펼쳐진 작은 탁자에 앉아 ‘현재’를 생각한다. 이 광활한 자연속에 하나의 점과 같은 인간, 그 유한한 삶에 모든 욕심과 욕망은 얼마나 어리석은가. 신선한 바람, 푸른 들판을 걷는 소와 양떼, 계곡을 달리는 야생말, 오늘을 평범하게 살아가는 이 곳의 현지 주민들, 그리고 그 모든 ‘평범한 일상’에 잠시 끼어든 ‘나’, 나는 ‘지금’, 나는 광활한 자유 안에 ‘오늘’을 마주하고 있다.
초미세먼지와 별빛세상
알티아라샨에는 소규모이긴 하지만 온천이 있다. 나무 헛간으로 둘러싸인 콘크리트 웅덩이 안으로 천연 온천수가 흘러나온다. 저녁에는 산 정상에 기온이 떨어지는데 몸을 따뜻하게 하는 온천물에 몸을 담그면 피로가 다 풀리는 기분이다. 온천을 하고 나온 깜깜한 밤, 불빛하나 없는 이 산위에는 은하수가 인사한다. 수많은 별이 떨어질듯이 하늘을 가득메운다. 초 미세먼지가 가득한 한국에서 매일이 스모그 세상이었던 중국에서 언제 별을 보았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린 시절, 알지도 못하는 별자리에 이야기를 혼자 지어가며 쏟아지는 별빛을 바라보는 건 답답한 날에 유일한 낙이었다. 아주 오래 전 필리핀을 여행하며 사가다에서 본 별을 빼면 근 몇 년간 그런 별빛을 본 적이 없다. 별빛을 볼 수 있는 곳, 별빛을 만났던 그 모든 곳들은 늘 그리움이다. 몽고 초원의 별빛, 실크로드 사막의 일월천에 드리우던 별빛, 설악산 백담사에서 보이던 별빛 그리고 무엇보다도 히말라야 산맥 자락의 티베트에서 본 형언할 수 없는 하늘과 별빛의 감동을 나는 잊을 수 없다. 물질문명의 혜택은 없지만 온화한 미소를 간직하며 평화롭게 사는 오지의 사람들과 결코 자신이 가진 것에 만족할 줄 모르며 살아 가는 현대인은 늘 별빛 안에서 오버랩되곤 했었다. 별을 잃고 사는 오늘날 인간군상의 비극적 상황을 장자의 우화(螳螂搏蟬)만큼 잘 표현하고 있는 글도 드물다. 버마 제비에 화살을 겨눈 ‘나’는 그 버마 제비가 사마귀를 노리고 있고, 그 사마귀는 또 나뭇가지 그늘에서 제 몸을 잊고 있는 매미를 노리고 있음을 발견한다. 그런데 이번엔 산주인이 ‘나’를 도둑으로 알고 소리소리 지른다. 눈앞의 이익만 쫒으며 무슨 일이 벌어지는 지조차 모르는 존재(見利而忘其眞)가 인간인 것일까. 별의 그리움과 진주의 슬픔에 함께 아파하기 보다는 황금빛 이익을 좇는 이 어리석은 ‘당랑박선’에게도 그러나 별빛은 저 멀리 어디선가 언제나 그렇듯 아득한 그 곳을 지키고 있다.
알티 알라샨의 별빛은 밤하늘 전체에 보석을 뿌린 듯 은하수를 만든다. 이 하늘엔 약 천억개의 별이, 또 그런 은하계가 이 우주공간 전체에 천억개가 있다. 우주 나이는 138억년, 지구나이 약 40억년, 태양의 나이는 50억년이다. 태양수명은 앞으로 50억년이라고 한다. 은하수 끝에서 끝까지의 거리는 10만 광년이다. 빛은 1초에 지구 여덟바퀴반. 태양과 지구거리는 빛 속도로 갈 때, 8분이다. 이 엄청난 시간 관념 안에서 지구는 어디쯤 속해 있는 걸까. 허블 스페이스 망원경은 우리 은하계와 가장 가까운 은하가 안드로메다임을 관찰했다. 그 후 북극성과 지구 거리는 400광년. 은하계는 지름이 20만광년. 우리 은하와 안드로메다 은하는 200만 광년임을 알아내었다. 도무지 숫자만으로 감이 오지 않는 이 거대한 시간과 공간의 차이가 바로 우주이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지구가 속한 태양계는 천 억개의 은하계의 변두리란 것이다. 그렇게보면 우주의 공간 속에 지구란 그렇게 그저 ‘점 하나’에 불과한 것이다. 1994년 미국의 유명한 천문학자인 칼 세이건은 지구를 ‘창백하게 푸른 점’이라 말했다. 넓은 우주 공간에서 보면, 지구는 그저 ‘창백한 푸른 점 하나’란 것이다. 이 점 하나에 우리가 있다. 네가 있고, 내가 있고, 그들과 우리가 있다. 모든 생명체의 고통과 즐거움이 있다. 확신에 찬 수많은 종교의 이데올로기가, 문명의 약탈자와 파괴자가 있다. 사랑하는 연인이 있고 증오하는 누군가가 있다. 지구는 광대한 우주의 무대 속에서 하나의 극히 작은 무대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조그만 점의 한구석, 어딘가에 일시적 지배자가 되려고 장군이나 황제들은 수 많은 유혈의 강을 만들었다. 또 이 점의 어느 한구석의 주민들은 또 다른 점의 어느 한 부분인 다른 주민들을 ‘다르다’는 이유로 잔인하게 죽이고, 빈번하게 오해하고, 끔직하고 지독하게 미워했다. 광활한 우주의 공간안에서 보면 인간은 만물의 기준이 될 수 없다. 그럼에도 이 거대한 우주의 넓이를 모르는 인간은 얼마나 어리석고, 오만한가.
그러나 동시에 별은 무지를 알고 진리에 다가가려는 인간에게 엄청난 통찰력을 주기도 했다. 붓다는 새벽 별 아래에서 이 우주, 이 세계는 모두 이루졌다가 무너지고 없어진다(성주괴공, 成住壞空)는 진리를 깨우쳤다. 존재의 모든 실상이 무상함을 깨달은 것도 거대한 우주 공간 속에 별을 통해서다.
독일의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는 자신의 묘비명에 이렇게 썼다. "하늘엔 빛나는 별, 내 마음엔 도덕률"! 칸트는 세계를 순수이성의 영역과 실천이성의 영역으로 구분했다. '하늘의 별'은 신이 자연에 부여한 필연의 법칙에 의해 움직이는 자연계를 상징한다. 인간의 행위를 설명한 것이 우리 본성 안의 어떤 것, 곧 ‘도덕률’이다. 산업화와 함께 대중 민주주의가 확산되면서 공리주의가 윤리학에서도 영향력을 넓혀갔다. 공리주의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원리에서 드러나듯 결과로 행위의 정당성을 판단한다. 더 많은 이들에게 더 많은 덕을 주면, 그 행위는 도덕적인 것으로 인정된다. 때문에 공리주의는 다수의 이익을 위해 소수의 희생을 정당화하는 근거가 되기도 했다. 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생체 실험을 자행하던 의사나 과학자들은 더 많은 사람의 복지를 위해, 죄수 포로 혹은 '쓸모없는 존재들'을 생체 실험에 이용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런미국의 철학자 존 롤스가 정의에 관한 칸트의 명제를 복원시켜 '옳음이 좋음보다 선행한다'고 선언한 것은 인류의 거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매매된 난자 사용금지 규정이나, 인체 실험 금지 규정 등은 칸트의 ‘도덕률’이란 복원 안에서 가능한 것이다.
별은 문학작품 속에서도 아름다운 이야기로 늘 만들어지곤 했다. 나는 특히 알퐁스도테의 <별>이란 작품을 좋아하는데 아직도 책에 나온 마지막 문장 하나를 잊지 못한다.
“밤하늘의 가장 밝은 별 하나가 길을 잃고 내려와 내 어깨에 기대어 잠들어 있었다.”
순수한 양치기 목동의 풋풋한 짝사랑 이야기가 마지막 문장 하나에 다 녹아있는 것 같아서다. 길을 잃고 내려온 별, 그 아름다운 로맨스가 은하수처럼 펼쳐진다. 미세먼지로 늘 흐린 하늘을 보는 사람들에게 알티아라샨의 별은 이 산이 선사하는 최고의 선물이다. 쏟아질 것 같은 별들이 유르트 숙소로 향하는 길잡이가 되고 있다. 그 옛날 실크로드를 거닐던 상인들은 그저 별자리에 의존에서 길을 찾아가는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태고적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비치는 저 벌볓만큼 제발 시간이 많이 지나도 오염되지 않고 이곳에 그대로 남아있기를 기도한다. 은하수처럼 쏟아지는 볓과 빛의 파도는 아무리 사진으로 담으려해도 담기질 않는다. ‘지금’, 오늘 이 순간을 그대로 느끼고 기억하라는 별의 메시지일까. 알티아라샨의 밤은 은하수의 작별인사다. 있는 그대로의 자연이 전하는 세상 가장 아름다운 빛이 유르트 아래도 쏟아질 듯 떨어진다. 밝은 별 하나가 어깨로 떨어져 잠들 것 같은 알티아라샨이 선물 같은 밤이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