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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우 Jan 19. 2023

키르기스스탄 촐폰아타

중앙아시아의 스위스, 촐폰아타 

빛나는 설산처럼, 장엄한 호수처럼

빛나는 설산처럼, 장엄한 호수처럼



비슈케크에서 촐폰아타로 가는 4시간은 설산의 ‘배웅’이요, 호수의 ‘마중’이다. 비슈케크의 버스터미널에서 280솜(4불)이면 촐폰아타에 도착한다. 촐폰아타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산정호수인 ‘이식쿨(Issyk-Kul)’의 중점도시 중 하나이다. 촐폰아타로 떠나는 버스는 가는 시간이 정해진 것이 아니고 사람이 어느 정도 모이면 출발이다. 오전 8시부터 앉아서 기다린 차는 한 시간 반이 지나서야 시동을 건다. 정해진 시간이 없으니 급할 것도 없고 시간을 놓쳤다고 못갈 일도 없다. 정주민의 시간에서 나와 유목민의 시간 속에 들어와 있으면 모든 것이 느려진다. 느려진 만큼 모든 것에서 자유롭다. 이 곳엔 나를 배웅해주는 사람도, 마중나오는 사람도 없다. 그래서 나는 홀로 더 자유로울 수 있는지 모른다. 비슈케크에서 촐폰아타로 가는 4시간 내내 나는 설산의 ‘배웅’을 받는다. 이식쿨 호수에 진입한 순간부터는 거대한 호수의 반가운 ‘마중’이다. 이 나라에서 나는 그 누구도 아는 이가 없지만 자연은 늘 이렇게 반가움과 헤어짐의 아쉬운 인사를 건넨다. 그래서 자유롭지만 외롭지 않다. 가도가도 끝없는 설산은 햇살을 받아 아름답게 빛난다. 하나의 개별적인 산을 보면 그 거대함과 웅장함에 압도된다. 그런데 끝없이 이어지는 설산의 모습을 4시간 내내 보고 있다보면 끝이 보이지 않는 도로만큼이나 편안하고 익숙해진다. 그래서 4시간이 지루해질 틈이 없다. 편안함이 익숙해질쯤 이식쿨 호수가 거대하고 장엄하게 눈 앞에 나타난다. 도무지 호수라 상상할 수 없는 바다 같은 규모에 놀라는데 면적이 무려 6,236 평방미터, 제주도 크기의 4배란다. 이 호수로 들어오는 물줄기만도 118개라고 하니 말이 호수지, 이 곳은 거대한 바다다. 3천미터 이상의 천산산맥의 만년설을 배경으로 하는 이식쿨 호수는 키르기스 민족의 최초 정착지로 알려져 있다. 이 호수는 현장법사의 구법체험을 기록한 <대당서역기>에도 ‘큰 맑은 못’이란 의미의 대청지(大淸池)로 기록되어 있다. 1400년 전, 현장도 이 곳을 지나며 바다 같은 거대한 크기에 놀랐을 것이다. 이식쿨 호수는 천산산맥의 만년설에서 흘러녹음 빙하수와 호수지하에서 나오는 온천수가 합쳐져 여름에는 청량하고 겨울에는 얼지 않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식쿨이란 이름은 ‘뜨거운(Issyk) 호수(Kul)’란 뜻이다. 면적은 경상북도 정도의 규모로, 세계 2위의 산정호수, 세계 모든 호수 중에는 10위의 규모를 가진다. 빛나는 설산의 배웅과 장엄한 호수의 마중을 받고 있다보면 어느 새 버스는 촐폰아타 도심에 진입한다. 


촐폰아타의 전경


“촐폰아타!” 

기사의 말 한마디와 함께 터미널도 아닌 길 거리 어딘가에 툭 던져진다. 내리자마자 마음이 편안해진다. 길치에게 터미널이 없는 마을은 천국이다. 터미널이 없을 만큼 작은 마을이란 뜻이다. 이 경우 길은 큰 도로는 하나일 수 밖에 없다. 지도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내 앞으로 뻗은 길을 그저 걸으면 된다. 지도에서 벗어난 순간, 나는 걸으면서 보이는 나지막한 모든 풍경을 하나하나 눈에 담는다. 기다리는 사람도 없고 헤매야 할 만큼 복잡한 도로도 없는 거리, ‘순간’이 담기는 시간을 걷는 지금이 진짜 ‘여행’이다. 촐폰아타에서는 모든 것이 여유롭고 느려진다. 큰 길을 따라 걸은지 몇 분이 지나지 않았는데 숙소 이름이 보인다. 촐폰아타는 여름 한철이 시즌인데 아직 봄기운이 만연한 이곳을 찾는 관광객은 많지 않다. 그래서인지 비수기에는 넓은 게스트 하우스를 혼자 독차지하는 ‘호사’를 누릴 수 있다. 비수기 여행의 장점이다. ‘Resort 10’이라는 숙소는 가족이 운영하는 정원이 있는 소박한 가정집 게스트하우스이다. 이 소박한 가정집이 거대한 리조트보다 훨씬 더 아늑하고 포근하다. 진정 ‘리조트’가 따로 없다. 이 게스트 하우스의 주인아들이 집에서 직접 만든 빵과 차를 전한다. 여행자를 세심하게 배려해주는 그 마음이 고맙다. 마음에서 우러나는 친절은 돈을 내고 받는 서비스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다. 이 도시가 너무도 마음에 든다. 나에게는 2층 방 하나가 배정되었다. 벚꽃 가득한 이 가정집 리조트에 짐을 풀고 점심을 먹으러 밖으로 향한다.       


숙소에서 바라본 저녁 노을 전경

                 

피가수스 호스텔을 찾아


사실 이 곳은 2년 전에 아빠가 여행하며 오래 머무르고 싶다고 극찬한 지역 중에 하나다. 그때 아빠는 피가수스 호스텔에 머물렀고 방명록을 남겨놓았다고 했다. 궁금해서 찾아가보았는데 이런, 문이 잠겨져 있다. 호스텔 내부는 모두 공사중이다. 아직 시즌이 아니여서인지 문을 닫을 식당과 상점이 많이 보인다. 변함없는 건 2년 전이나 지금이나 때가되면 피는 벚꽃 뿐일까. 계절은 다시 돌아왔는데 사람이 온데간데 없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발길을 돌린다. 2년 전, 아빠가 써둔 이 지역에 관한 여행일기를 다시 읽어본다. 혹시 찾아갈 만한 곳이 또 있을까 싶어 찾아보니 고려인이 운영하는 식당 ‘코리아 사라다’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아빠의 여행일기] 2017년 5월 3일 촐폰아타에서 


"나는 어제 만난 까레이스키 2세 할머니 가게를 다시 찾아갔다. 내가 할머니라고 했는데, 사실 나이는 60세 였다. 나보다 더 나이들어보이는 것은 아마도 이분의 삶의 역정이 그대로 묻어있기 때문일 것이다. 할머니는 내게 삼각케익 하나를 먹어보라고 권한다. 맛있다. 이분의 아버지 어머니는 우즈베키스탄에서 사망하였다. 남편도 사망하였고 35세의 아들은 수도 비슈케크에서 대학도 나오고 그곳에서 일을 한다고 했다. 31세의 딸이 이 할머니와 함께 가게일을 보고 있었는데 손자가 초등학교 3학년, 둘째손자가 두살이다. 사위는 인천에서 일하고 있다고 한다. “돈은 보내오나요?” ”아니요. 그러나 귀국때 가져오겠죠.” 아마도 한국에서 일하며 돈 모으는 게 쉽지 않은 것 같다. 서른 한살 딸은 아들을 데리고 가게일을 보고 있는데 남편을 보러 한국에 갔다가 3개월만에 돌아왔다는 것이다. 


왜일까. 할머니는 한국에서 딸이 둘째를 낳기를 바랬다고한다. 그러나 딸은 3개월만에 돌아온 것이다. 딸은 그저 웃기만 하면서 별로 한국에 대해서 말하고 싶어하는 눈치가 아니다. 그러면서 “인천은 너무 복잡해요. 나는 여기 촐폰아타가 훨씬 좋아요.“라고 한다. 그렇다. 내가 봐도 복잡한 한국의 대도시보다 아주 시골스럽지만 한국 어디서도 볼 수없는 이 아름다운 풍경의 촐폰아타가 더 좋을것이다. 나는 까레이스키 2세 할머니와 좀더 얘기를 이어갔다. 1970년에 아버지를 따라 우즈베키스탄에서 키르키즈스탄으로 왔단다. 그런데 부모님은 다시 우즈벡으로 돌아가고 그곳에서 사망하였다고 한다. 그러니까 이 할머니는 1935년 블라디보스톡에서 스탈린의 명령으로 강제이주당하여 중앙유라시아 로 이주하게 된 까레이스키 1세대의 비극을 이어서 체험한 분인것이다. 


올 9월에 한국에 간다고 한다. 서울과 대전에 친척이 있고 시숙 아들이 서울에서 부자라고 한다. 부자라! 나는 이 할머니가 말하는 부자의 개념이 궁금했지만 더 이상 질문을 하지는 않았다. 할머니는 이곳 촐폰아타에 큰집이 있고 또 딸이랑 함께 살아 괜찮다고 한다. 전에는 ‘레바라토리’에서 일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이게 무슨 소린지 몰랐는데 알고보니 식품 등 위생 검사소에서 일했다는 얘기였다. 연금이 있는데 그러나 아주 조금 뿐이라고 한다. 나는 왜 민박을 안하시냐고 물었다. “사람들이 너무 복잡해서지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아마도 이 아름다운 촐폰아타에서 딸과 함께 한가하게 사는 것이 민박을 하며 돈버는 것보다 더 편안한 삶이 아닐까. 


     동네가 작아서 조금만 걸으면 바로 가게가 보인다. 간판의 색깔은 바뀌었지만 이름은 그대로여서 쉽게 찾을 수 있다. 작은 가게로 들어가니 아주머니 한 분이 반찬을 팔고 있다. 2년 전, 이 곳에서 찍은 아빠 사진을 보여주며 인사하니 기억난다며 환하게 웃으신다. 점심식사가 가능한지 물었으나 작년부터 식당은 하지 않고 반찬만 팔고 있다고 한다. 한동안 쌀밥을 못먹어 김치가 그립다고 했더니 팔고 있는 반찬을 한봉지 담아 건네준다. 그냥 가져가서 먹으란다. 영락없는 ‘정’ 많은 한국 아주머니의 심성이다. 지나가는 여행객에게 김치 한봉지 퍼담아 주며 보내는 마음이 전해져 찡하다. 딸과 손녀는 한국에 있다고 했다. 혼자서 가게를 운영하기는 분명 벅찼을 것이다. 심지어 얼마 전까지 차사고가 나 나서 가게문도 못열었다고 하니 그 고충을 짐작할만 했다. 얼굴의 주름 속에서 고된 세월을 읽는다. 그 세월만큼의 고통이 곧 중앙아시아 강제 이주의 역사, ‘고려인(까레이스키)’의 슬픔이 아닐까. "


다른 시간, 같은 공간에서 아빠와 나


 중앙아시아 강제 이주의 역사, 카레이스키


1937년은 고려인의 중앙아시아 강제이주가 있던 해다. 일제와 대립하고 있던 소련은 고려인에게 ‘일제의 간첩이다’라는 누명을 씌워 극동을 떠나라는 추방령을 내렸다. 그 전까지 조국과 인접해 살았던 고려인들은 강제이주로 말미암아 20세기 디아스포라로 전락했다. 강제 이주로 인하여 얼마나 많은 고려인이 희생되었는지에 대한 의견은 분분하다. 숙청, 기근, 질병 등으로 인한 사망자가 9500명에서 2만 5천명에 이른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을 뿐이다. 대규모 강제 이주 이전에 스탈린 정권은 고려인 지도층 2500명을 체포했고 “일제의 사주를 받아 연해주를 소련에서 떼어내려는 폭동을 음모했다”는 날조된 혐의로 거의 대부분 처형했다. 


그들이 실제 간첩으로 증명된 경우는 거의 없었다. 고려인들은 2-3일 전에 겨우 이동준비를 연락받았다. 최종 행선지가 통보되지 않아 다만 멀리 떠난다는 것과 출발일자밖에 알지 못했다. 당국은 단 1명의 이탈도 허용치 않았다. 병원에 입원한 사람은 퇴원시켜서, 복무중인 군인은 제대시켜서 열차에 태웠다고 한다. 이주민들은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창문없는 컴컴한 화물열차에 갇혀야만 했다. 질병에 약한 어린이와 노인들은 중간에 많이 숨졌다. 열차가 서면 이름도 모르는 철길 근처에 시신을 묻었을 고려인의 마음이 어땠을까. 눈물의 곡소리가 끊이지 않는 기차가 3-4주 만에 내린 곳은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였다. 


937년 10월 말까지 중앙아시아 이송이 완료된 고려인 수는 총 3만 6천 가구로, 17만 명 중 9만명 이상이 카자흐스탄에, 7만이 우즈베키스탄으로 이주했다. 그 후 수송된 4700명을 포함해 강제 이주 당한 고려인은 18만이라고 한다. 고려인이 살던 444개의 마을은 영구적으로 폐쇄되어 지도에서 사라졌다. 강제이주는 1860년대 이래 고려인이 극동지역에서 쌓아올린 모든 성과에 대한 전면적 파괴 행위였다. 소련의 이익과 국가안보의 이름아래 소수민족 고려인 사회는 철저히 무너졌다. 주민 모두를 ‘적’으로 몰아 일시에 추방한 이 엄청난 비극, 이것이 중앙아시아 강제이주의 역사이다. 이 비극적 민족탄압의 역사의 그 어디엔가 이 아주머니의 개인의 아픔이 있을 것이다. 하나라도 더 주지 못해서 안타까워하는 그 마음이 너무 짠하고 고맙다. 가게에서 팔고 있는 작게 포장한 꿀을 하나 하서 김치와 함께 들고 나온다. 근처 식당에서 밥을 시켜 아주머니꼐서 직접 만드신 양배추 김치와 함께 점심을 때웠다. 이 소박한 밥상이 비싼 스테이크보다 백배는 맛있다. 


까레이스키가 겪은 삶의 굴곡에 비하면 이까짓 여행에서 며칠 ‘김치’ 못먹는건 일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치 반포기 나눠주려는 인심을 가진 것이 한국인이다. 그 마음이 목메이게 고마워 받은 김치를 다 먹고 자리에서 일어선다.


웃으며 한가로운 마음


촐폰아타의 작은 거리에서도 만년설이 쌓인 설산은 어디서나 보인다. 이 동네 아이들은 매일 만년설을 바라보며 그네를 탄다. 공원처럼 조성된 아이들 놀이터 그네에 앉아 시간 가늘 줄 모르고 눈 덮힌 산을 바라본다. 놀이터 배경이 천산산맥의 만년설이라니, 눈을 뗄 수가 없다. 아파트 단지로 둘러쌓인 놀이터만 보다가 대 자연을 바라보니 숨이 트이는 기분이다. 이렇게 멍하니 몇 시간이고 앉아있을 수 있을 것 같다. 앞을 보면 설산이요, 뒤를 돌면 바다 같은 호수라. 이 거대한 자연을 보며 이태백은 이렇게 말했다. “그대는 왜 푸른산에 사는가 물으면, 나는 웃을 뿐 답을 않고 마음이 한가롭네.” 웃으며 한가로워지는 마음, 설산이 보이는 놀이터에 앉아 그네를 타고 있는 내 마음이 딱 그렇다. 세상 부러울 것 없는 마음이다. 세상 모든 것에 화낼 일도 없고 복잡한 모든 질문에 대답할 것도 없다. 촐폰아타의 도심은 ‘웃으며 한가로워지는 마음’을 전한다. 그 마음이 곧 ‘만족한 일상’의 원천 아닐까. 근심도, 고통도, 슬픔도, 격한 기쁨과 환희도 없는 그 평정심의 상태, 대자연이 주는 선물이다. 이 작은 놀이터에서 매일 산과 호수를 바라볼 수 있는 이 지역 아이들이 부럽다. 이 마음 상태에서 상대에게 화날 일은 무엇이며, 세상 짜증날 근심은 또 무엇일까. 촐폰아타의 작은 놀이터에서 나는 웃으며 한가로운 마음이 만드는 세상 가장 평화로운 오후를 보낸다. 



이백 <산중문답(山中問答)>


묻노니, 그대는 왜 푸른 산에 사는가.  問余何事棲碧山

웃을 뿐 답은 않고 마음이 한가롭네. 笑而不答心自閑

복사꽃 띄워 물은 아득히 흘러가나니 桃花流水杳然去

별천지 따로 있어 인간 세상 아니네. 別有天地非人間   


 

루흐오르도, 아이트마토프 평화공원


아이트마토프 평화공원 전경


천산산맥의 만년설을 가진 거대한 산과 바다 같은 이식쿨 호수는 이 도시 전체를 대자연으로 품고 있는 느낌이다. ‘이 곳’과 ‘저 곳’을 가르는 것이 무의미해지는 거대한 포용력, 그것이 바로 자연이 전하는 관용정신 아닐까. 촐폰아타에는 ‘정신의 중심(spiritual center)’이란 뜻을 가진 “루흐 오르도”라는 공원이 있다. 아름다운 호수가에 세워진 루흐 오르도는 종교의 공존을 테마로하는 테마파크이다. 이곳 파크에는 다섯종교가 공존한다. 조그마한 사원이 모두 다섯 개가 있는데 같은 모양이지만 지붕의 상징이 각각 다르다. 기독교, 유태교, 이슬람교, 불교, 그리고 그리스 정교의 상징이 이 곳 파크에 공존하는 것이다. 5가지 종교가 대자연의 관용이란 ‘정신의 중심’ 안에서 ‘공존’한다. 시즌이 아니여서 그런지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잔디 가득한 공원을 걷는다. 공원의 정면에 보이는 이식쿨 호수는 한동안 눈을 뗴지 못하게 한다. 설산 아래 바다 같은 호수는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모든 것을 다 포용할 것 같은 느낌이다.  



정신의 중심에서 정신문명을 생각한다


이 엄청난 정신문명은 언제 생긴 것일까. 우리가 정신문명이라고 말하는 것이 기원전 9세기부터 2세기에 모두 형성되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특정 지역이 아니라 전 세계에 걸쳐 공통적인 현상이었다는 것은 매우 놀랍다. 독일의 철학자 칼 야스퍼스는 이 시대를 일컬어 ‘축의 시대(The Age of Axis)’라 부른다. 인류의 모든 지혜가 탄생한 시대란 뜻이다. 메소포타미아의 쐐기문자 문명, 이집트 문명, 그리스 문명, 인도의 산스크리트어와 빠알리어 문명, 그리고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문명과 같은 세계 문명은 거의 같은 시기에 형성된 것이다. ‘자기 비움’이라는 ‘공’의 개념은 그리스에서는 ‘Kenosis’로, 인도에서는 ‘수냐타(Suyata)’라 했는데 중국에서 이 수냐타라는 개념을 공으로 번역한다. 춘추시대의 ‘예’ 그리고 노자의 ‘도(道)’가 여기에 해당되는 개념이다. 다른 지역에서, 비슷한 시기에, 공통적인 정신이 모두 나타난 것이다. 5개의 종교, 즉 인류의 모든 정신문명을 대표하는 공통점,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자기 비움’이다. 자기비움이란 자신의 경험 내에서 존재하는 생각은 편견과 오만임을 알고 고착화된 생각을 깨는 것을 말한다. 이 고착화된 생각을 깨뜨릴 때, 자아는 자유와 해탈을 얻게 된다. 인류의 모든 갈등과 전쟁은 결과적으로 ‘나의 생각’에만 사로잡혀있을 때 발생한다. 인류의 정신문명은 말한다. 반드시 옳다고 생각하는 모든 고착화된 생각을 깨라, 그 틀을 깨는 것이 인류가 기원전 9세기부터 강조해온 위대한 정신문명인 것이다. 



불교와 세계 평화에 대한 사색


평화공원 내 불교사원 앞 동종


익숙한 곳으로 발이 옮겨진다. 불교사원앞에는 동종이 걸려있다. 그런데 가까이 가보니 ‘한국의 소리’라 부조되어있다. 그리고 “한국 조계종 기증”이라고 쓰여져있다. 조그마한 사원안에 그려진 각 종교를 상징하는 그림들이 생동감 있게 펼쳐져있다. 불교는 평화의 종교이다. 그렇다면 갈등을 조화로, 전쟁을 평화로 만드는 붓다의 가르침은 무엇인가? 우선 붓다는 계율을 지킴으로써 평화를 만들 수 있다고 보았다. 불교의 계율은 두 가지 차원의 평화를 가능하게 한다. 첫째는 인간 내면의 평화이고, 두 번째는 사람과 사람 사이, 민족과 민족 사이, 국가와 국가 사이, 나아가 인간과 자연까지를 포함하는 관계에서의 평화이다. 첫번째 계율로 붓다가 가장 강조하는 것은 살아있는 생명을 죽이지 말라는 것이다. 법정스님 역의 <숫타니파타>에 첫 구절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살아 있는 것을 직접 죽여서는 안된다. 

또 남을 시켜 죽여서도 안된다. 

그리고 죽이는 것을 보고 묵인해도 안된다. 

난폭한 짓을 두려워하는 모든 생물에 대해서 

폭력을 거두어야 한다. 

                         - 『숫타니파타 394』- 


그러니까 불살생을 지킨다는 것은 즉, 사람은 물론이요, 살아있는 모든 생명을 살리라는 말이다. ‘살인’이 아니라, ‘살생’이 핵심이다. 인간계와 자연계를 포함한 넓은 의미의 사유이다. 또한 생명을 죽이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누군가가 죽이는 것을 묵인해도 안된다고 한다. 타인에 의한 부정의하고 억울한 죽음에 대해 항거하고,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에 대한 폭력을 거두라는 것이다. 붓다가 설파한 첫번째 계율에서 상생과 평화를 지향하는 비폭력정신을 읽을 수 있다. 이러한 비폭력 무저항운동의 예가 바로 간디의 아힘사 운동이다. 영국에서 유학하며 법학을 배우고 변호사가 된 청년 간디는 백인들에게 박해 받는 인도인들을 보고, 인종차별 반대운동의 지도자가 된다. 그의 삶에 사상적 기반이 된 것이 바로 인도어로 비폭력을 뜻하는 ‘아힘사(ahimsa)’이다. 아힘사는 단순한 비폭력이 아니라 '의지나 모든 행동에서 모든 생명체에 해를 입히는 것을 삼가는 것'을 의미한다. 간디는 대중적인 반식민투쟁과 시민적 불복종운동을 ‘비폭력 저항운동’이라는 숭고한 정신세계안에서 구현한 것이다. 


살아있는 모든 생명에 대한 폭력과 살생을 중지하는 것은 곧 생명을 살려내는 일, 무지와 무명에 의한 죽이려는 악한 증오심을 거두는 행위이다. 누군가를 죽이겠다는 마음, 그 ‘증오심’이야말로 인간세상의 모든 갈등과 전쟁의 주 원인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유대인의 증오심으로 나치가 일으킨 홀로코스트, 캄보디아의 킬링필드, 아프리카 다이푸르와 르완다에서의 인종대학살, 코소보 사태 등이 모두 인간의 증오심에서 발생한 비극적인 사건들이다. 9.11테러나 IS와 같은 사건에서 비롯된 이슬람에 대한 혐오도 현대사회에서 심각한 문제이다. 우리 나라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해방 후의 이념갈등, 제주 4.3, 여순사건, 한국전쟁, 보도연맹의 비극 등 이러한 모든 사건들이 무지, 무명에 기인한 증오심과 폭력이 불러일으킨 사건들이다. 그렇다면 타민족, 타종교, 타인에 대한 증오가 불러오는 이 비극적 갈등과 전쟁의 원인은 무엇인가? 


미국의 국제정치학자 로버트 저비스는 그 원인을 ‘오인식’이란 개념으로, 심리학자 제니스는 ‘집단사고’라는 개념을 통해 설명한다. 로버트 저비스(Robert Jervis)는 어떤 국가나 개인의 참전 결정이 상당부분 ‘편견과 오해’에 근거한 선택임을 이론을 통해 설명한다. 정책결정과정에서 misperception 즉, 오인식이 많은 영향을 미친다는 이론인데 그에 따르면, 사람들은 한번 어떤 대상에 대한 자기의 입장이 설정된 후에는 본인이 생각한 것과 다른 의견이나 정보는 일부러 외면하고 나중에 그렇지 않은 것으로 판명이 나도 교정하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집단사고는 미국 예일대학의 심리학 교수인 재니스(Irving L. Janis)가 창안한 개념으로서, 응집력이 높은 집단의 경우 그 집단의 입장이나 인식이 어느 방향으로 설정되면 객관적인 분석을 하기보다 집단이 결정한 틀에 맞는 정보만 수용하고 다른 정보를 배재하여 정책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오인식과 집단사고는 모두 ‘오해와 편견’을 지닌채 전쟁을 결정하는 정책결정자를 설명한 이론이다. 그러니까 전쟁은 언제나 대상에 대한 오해와 편견에서, 악에 대한 선의 응징이라는 명분으로 시작되는 것이다. 이러한 잘못된 인식 속에서 전쟁에 참전했다고 하자. 그렇다면 적국과의 치열한 전쟁을 끝낸 정전, 또는 일시적 휴전상태는 승리라고 할 수 있는가? 그것은 진정한 승리인가? 진정한 승리가 전쟁이 끝난 상태일 수 없으며 완전한 비폭력의 상태를 상정하지 않는 그 어떤 전쟁도 평화로 다가갈 수 없다는 것이 바로 평화학의 창시자 요한갈퉁의 핵심 주장이다. 전쟁은 이미 시작되는 순간 승패없는 파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하면 ‘살생’에서 ‘살림’으로, ‘상극’에서 ‘상생’으로 갈 수 있는가? 붓다는 이렇게 말한다.


 “이 세상에서 원한은 원한에 의해서는 결코 풀리지 않는다. 

원한을 버림으로써 풀린다. 이것은 영원한 진리이다. “         

-『담마빠다 5』- 


이러한 붓다의 사유는 연기법에 기반한다. 즉, 갈등과 전쟁은 인과법에 의해 발생하는 것이며 이 인과의 구조를 알 때 갈등과 전쟁은 사라지고, 평화가 구축된다는 것이다. 하나뿐인 정답은 없다. 하지만 종교가 자신의 교류만이 무오류이며, ‘이것만이 유일한 정답이다’라고 주장할 때 그것은 위험한 도그마가 된다. ‘하나만이 정답’이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집단을 이루면 때때로 그것은 극단주의로 무장한다. 이슬람극단주의(IS), 미국의 백인우월주의(KKK)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미국의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은 기독교를 세계에 전파하는 것이 신에 의해 주어진 자신들의 운명이라도 믿는다. 부인할 수 없는 ‘명백한 운명 (Manifest density)’! 이것이 종교적 도그마인 것이다. 이 도그마의 연장 속에서 서유럽에서는 약 150여년에 걸친 십자군전쟁의 비극을 가져왔고, 또 30년 전쟁 등에서 보듯 신교와 구교간의 갈등으로 많은 사람들의 생명이 희생되었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로 나누어졌던 냉전시대도 역시 하나의 답만이 정답이라는 인식 속에 생겨난 비극이었다. 이 냉전의 구조안에서 한국도 남한에서는 ‘빨갱이’ 색출에, 북한에서는 ‘반동분자’로 나누어 서로를 ‘악’으로 규정한 비극이다. 이것이 바로 정치 이데올로기적이 도그마인 것이다. 이러한 도그마에 의해 갈등이 극대화된 것이 바로 전쟁이다. 그런데 ‘전쟁’의 발생원인을 해체해 보면 그것은 곧 증오심과 분노라는 마음작용에서 시작함을 알수 있다. 증오와 분노는 편견과 오해에서 생겨나고 상호 불신이라는 악순환을 통해 이러한 편견과 오해는 더 확대되고 증폭된다. 불교에서는 편견과 오해가 생기는 이유를 두가지로 설명한다. 하나는‘공’사상에 대한 무지, 두번째는 연기법적 사유의 부재이다. 첫째, 불교에서는 ‘대상’ 대한 무지로부터 편견과 오해가 발생한다고 본다. 우리가 ‘나쁘다’ ‘좋다’라고 인식하는 모든 ‘대상’은 그 ‘대상이본질이 아니라 우리 ‘마음’이 만들어놓은 ‘상(相)’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예컨데 까마귀는 한국에서는 흉조이지만 일본에서는 길조이다. 왜 같은 대상을 어떤 사람은 좋은 새로, 어떤 사람은 불길한 새로 인식하는가? 이것이 바로 우리가 가진 ‘상’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상’을 만들어 ‘인간’이라는 ‘대상’을 흑인, 백인, 정상인, 장애인, 이성애자, 양성애자, 동성애자, 여성, 남성 등으로 구분한다. 그리고 이렇게 ‘이름’ 붙여 구별한 ‘대상’에는 분별심이 작동하여 ‘옳다’ ‘그르다’’싫다’’좋다’ 등으로 판단을 내린다. 그렇게 내려진 판단은 오해와 편견을 만들고 이것은 갈등을 증폭시키는 기제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불교는 이 대상을 해체하고, 그것이 표상 또는 심상임을 알라고 말한다. 즉, ‘대상’으로 명명된 모든 것의 실체가 ‘공’임을 깨달아야 평화의 가능성을 열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 불교에서는 ‘이것만이 정답이다’라는 도그마를 벗어나기 위해 ‘연기법적 사유’를 제안한다. 모든 존재들은 상호의존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모든 것은 원인과 조건에 따라 결과가 나타나므로 독자적 실체가 없다라는 진리를 알면 ‘도그마’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쓰는 펜 하나도 우리가 적이라고 생각하는 누군가의 노동을 통해 나온 것일 수 있다. 이렇게 모든 것이 상호 연결되었다는 관점에서 문제를 바라보면 나와 남을 가르는 경계와 차별을 벗어날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 공원안에 5가지 종교가 모두 자신의 교리만이 ‘진리’라고 할 때, 그것은 분명 ‘진리’로부터 멀어지는 길이다. 


진리에 다가가는 길


요한복음에서 예수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하리라’ 고 했다. 그렇다면 진리란 무엇인가? 진리란 보편성, 불변성, 절대성을 지닌 것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진리란 모든 종교의 공통 분모가 될 것이다. 즉, 모든 종교가 ‘진리’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만이 ‘참된 진리’가 되는 것이다. 모든 종교의공통점은 이기심을 벗어나, 이타심을 가지라는 것이다. 물론, 불교는 ‘자리리타(自利利他)’ 즉, 나의 이익이 곧 타인의 이익이 되니 이기심과 이타심은 둘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도 하나님을 공경하고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는 아가페적 사랑을 제시하였다. 공자는 ‘극기복례(克己復禮)’하라 했다. 이기심을 벗어나 이타심을 지니고, 타인과의 공생을 만들라는 것이다. 공자가 말한 ‘극기복례’는 예수와 붓다가 말하는 사랑과 자비의 개념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니까 모든 성인들의 공통 가르침은 이타성에 있다. 나와 남이 둘이 아니요, 하나라는 것이다. 이는 우리 고유의 사상인 동학과 연결된다. 동학은 ‘인내천’, 사람이 곧 하늘이라 했다. 내 속에 신이 거주한다는 기독교 사상, 그리고 내 안에 불성이 있다(見性成佛)는 불교사상과 일치한다. 그리하여 동학은 ‘사인여천(事人如天)’ 즉, 사람 섬기기를 하늘처럼하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현실을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진리가 무엇인지를 알기는 여간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진리라 무엇인지는 몰라도 우리가 신뢰하고 신앙할 수 있는 성인들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 이것이 진리에서 가장 가깝게 살아가는, 가장 ‘안전한’ 길이 아닐까?! 

 

아이트마토프를 기념하며



아이트마토프가 앉아있는 벤치와 그의 기념관


이 공원은 5개의 종교의 공존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지만 구소련시절 키르키즈스탄 출신의 유명작가인 친기스 아이트마토프(Aytmatov, 1928-2008)를 기념한 곳이기도 하다. 소비에트 연방 중 하나인 키르기스 공화국의 친기즈 아이트마토프는, 당시 주류였던 이데올로기의 문학을 거부한 작가이다. 중앙 아시아에 위치하는 소비에트 연방 변두리의 나라 키르기스는 10월혁명 때까지는 러시아에 학대받는 유목민의 나라였고, 구비문학(口碑文學)을 제외하고 문자로 기록한 문학이 없었다. 


아이트마토프는 러시아 혁명 후에 등장한 키르기스 최초의 작가 중 한 명이다. 키르키즈스탄인의 삶을 문학적으로 표현하여 존경을 받는 아이트마토프는 『Early Cranes (1975)』, 『The White Steamship (1910)』, 『Djamil (1967)』, 『Piebalddog Running the Shore (1978)』등의 유명한 소설을 남겼는데, 1978년에 쓴 이 작품은 영화로도 만들어져 1990년 러시아영화로 수상을 하였다고한다. 또한 그의 작품은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로 번역되었다는데 우리에겐 잘 알려지지 않다. 아이트마토프를 기념한 공원 안내 팜플렛에 이런 구절이 씌여져있다. “백년보다 긴 하루(The day lasts more than a hundred years)” 아이트마토프의 대표작이다. 


나는 이 책을 작년 겨울에 읽었는데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고문’이 등장한다. 물론 세상에는 아주 잔인한 육체적 고통을 가하는 고문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러나 육제적 고통과 아울러 정신적 고통을 병행하는 고통이야말로 가장 잔인한 고통이 아닐까. 중앙아시아의 소국 키르기스스탄의 정신적 지주였던 친기즈 아이뜨마또프의 소설 『백년보다 긴 하루』는 바로 그 인류 최악의 고문, ‘만꾸르뜨의 전설’을 자세히 묘사한다. 소설에 등장하는 츄안츄안(Zhuan Zhuan) 부족은 스텝의 다른 부족들을 잔인하게 정복한다. 그들은 생포된 젊은이들의 머리를 빡빡 밀고 ‘사리’라고 하는 암낙타의 유방 가죽(낙타 한 마리에서 다섯 개가 나온다)을 모자처럼 씌운다. 그런 다음 포로의 손발을 묶어 족쇄를 채우고, 머리를 땅에 대지 못하도록 큰칼을 씌운 채 풀 한 포기 하나 없는 사막으로 데려가서 살을 태우는 태양 아래, 물도 음식도 주지 않고 내놓는다. 가죽이 마르면서 접착제처럼 머리를 옥죈다. 그 고통이 얼마나 큰지, 그들은 끊임없이 비명을 지른다. 아무리 강한 사내라도 그런 비명을 끊임없이 듣다 보면 그것 자체가 또 다른 고문이 된다. 사나흘 간 고문이 계속되면 대여섯 명 중에서 고작 한둘만이 살아남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살아남은들 그는 이미 살아있는 사람이라고 볼 수가 없다. 왜냐하면 뻣뻣하고 잘 구부러지지 않는 머리카락이 자라다가 낙타 가죽에 막혀 거꾸로 머리를 파고들기 때문에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고, 결국 모든 기억을 송두리째 잃고 말기 때문이다. 츄안츄안 부족이 노린 것도 그것이었다. 기억을 상실한 노예 - 그들은 자기가 어디에서 왔는지, 아버지가 누구인지, 어머니가 누구인지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한마디로 스스로 인간이라고 인식하지 못하는 노예 만꾸르뜨가 되는 것이다. 


어떤 노예 주인에게든 노예가 반란을 일으킬지 모른다는 게 가장 큰 두려움이지만, 이것도 만꾸르뜨에게는 예외였다. 그들은 살아있으되 이미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만꾸르뜨의 원래 부족도 자기 동료가 그렇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면 아예 찾기를 포기하고 만다. 찾아봐야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그는 그저 몸만 살아있는 시체인 것이다. 소설 속에 졸라만이라는 청년이 그렇게 살아남았다. 자신의 이름도, 가족도, 부족도 그 어떤 과거도 기억하지 못했다. 그저 츄안츄안 부족이 시키는 대로 복종할 따름이었다. 졸라만은 한적하고 너른 초원에서 양을 쳤다. 졸라만의 어머니 ‘나이만-아나’가 혹시나 하고 그를 찾아갔다. 그녀는 천신만고 끝에 졸라만을 만났지만, 졸라만이 어머니를 기억할 리 없었다. 


"너는 졸라만이야. 나는 네 어머니고. 네 아버지가 네게 활 쏘는 법을 가르쳤어. 너는 명궁이야. 

그러다 츄안츄안 부족이 왔고, 어머니는 낙타를 타고 도망쳤다. 어머니는 자기 아들이 만꾸르뜨가 되었음을 알고 울부짖는다. 츄안츄안 부족은 졸라만에게 “저 여자 누구냐”고 물었다. 졸라만은 “자기가 내 어머니라 하더라”고 대답했다. 츄안츄안 부족은 졸라만에게 활과 화살을 주며, 다음날 또 여자가 오면 쏴 죽이라고 명령했다. 다음날 졸라만의 어머니 나이만 아나가 다시 나타났다. 졸라만은 활을 겨눴다. 어머니는 쏘지 말라고 했지만, 화살은 이미 시위를 떠났고, 나이만 아나는 죽고 말았다. 나이만 아나가 죽을 때 그녀의 머리에서 하얀 스카프가 떨어져 내려 하얀 새가 되어서 이렇게 지저귀면서 날아갔다. 사로제끄 사막에서 밤이면 날아다니는 그 새는 도넨바이로 알려지는데, 나그네들이 나타나면 가까이 다가가서 이렇게 속삭인다고 한다. 


“네가 누구 자식인 줄 아니? 네가 누구지? 네 이름이 뭐지? 네 아버지는 도넨바이였어. 도넨바이, 도넨바이, 도넨바이, 도넨바이...” 


이 전설은 매우 잔인하지만, 사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고문 그 자체가 아니라 기억의 소중함, 고향과 어머니의 사랑이다. 물질적으로 아무리 풍요로운 삶을 산다 해도 기억이 없으면 인간은 무엇이겠는지, 이 전설은 키르기스 민족이 소련연방 해체 이후 부딪친 조속한 국가 정체성의 확립 문제를 말한다. 한 개인을 넘어서서 민족의 특정한 집단적 기억이 소중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친기즈 아이트마토프의 소설 중 이식쿨 호수를 배경으로 한 것은 <하얀배>라는 작품이다. 1972년 출판된 이 작품은 주인공은 부조리한 현실의 삶 속에서 지속적으로 갈등하다가, 품고 있던 단 하나의 희망인 ‘엄마사슴’에 대한 동경조차 짓밟히자 꿈꿔오던 추회의 목적지인 하얀배로 다가가겠다고 이식콜 호수로 들어간다. 부조리한 현실 속에서도 순수의 이상향을 잃지 않는 그 모태의 장소로그려진 곳이 바로 이 이식쿨 호수이다. 1995년 이상문학상 수상작인 윤후명의 <하얀배>역시 아이뜨마또프의 동명소설에 감화를 받아 중앙아시아와 이실쿨 호수를 직접 방문하는 내용을 담아 소설을 썼다고 한다. 문학의 불모지 같은 키르기스스탄 이 땅에 아이뜨마토프는 그야말로 이 나라의 자랑이다. 러시아 작가로서의 ‘이데올로기’가 아닌 키르기스스탄의 정체성을 표현하려고 한 그의 작품이 한국에서도 많이 읽혀지길 바래본다. 


촐폰아타의 암각화


   

촐폰아타 암각화단지


익숙하지 않은 이 지역 작가만큼이나 잘 알려지지 않은 유적이 바로 기원전 2000년경의 암각화단지이다. 촐폰아타 시내에서 3km정도 떨어진 곳에 거대한 야외 박물관이 있다. 말이 박물관이지 사실상 거의 돌덩어리의 방치에 가깝다. 2002년 독일 정부의 지원이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 관리가 되고 있는지는 매우 의심스럽다. 돌무더기에는 낙서가 너무나 많았고 돌과 돌 사이에는 염소와 양 등의 배변이 그대로 널려있었다. 문화재 보호도 튼튼한 국가재정의 기반에서 강력한 정책의지가 뒷받침되어야 간으할 것이다. 거대한 규모의 ‘야외 박물관’은 실상 완전한 방치수준으로 보이니 말이다. 이 암각화 단지에서 가장 눈에 띄는 그림은 조련된 설표와의 사냥(Hunting with Tame Snow Leopards’이다. 


설표와의 사냥(암각화)


이 암각화는 기원전 8세기에서 기원후 5세기 사이라고 기록되어있는데 연도 차이가 큰것으로 봐서는 정확한 연대추정이 어려워보인다. 이 돌무더기의 그림이 대체 무슨 의미인가? 인간이 동물과 분리되는 중요한 지점에 ‘예술성’이 있다. ‘적자생존’과 ‘양육강식’을 통해 살아온 우월한 ‘인간’을 보다 인간답게 만드는 속성이 ‘예술’인 것이다. 인간이 남긴 최초의 예술작품으로, 현재까지 가장 오랜된 것으로 밝혀지진 것은 프랑스와 스페인 동굴에 남긴 지금부터 3만~1만 년 전까지의 벽화들이다. 구석기 시대 동굴벽화가 처음 발견된 장소는 스페인 알타미라 동굴이다. 이 동굴은 사우투올라는 아마추어 고고학자에 의해 발견되었으나 학회는 구석기 시대 작품이라는 그의 주장을 믿지 않았다. 이 그림들의 위작을 주장한 학자는 프랑스의 저명한 고고미술학자인 에밀 까르따이약(1845-1921)이다. 찰스 다윈의 진화론을 신봉한 그는 2만 년 전 구석기 ‘동물’들은 그런 정교한 그림을 가질 수 없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림은 문화적으로 풍요롭고 여유로운 문명사회에서나 가능한 귀족들의 전유물로 생각한 것이다. 


구석기 시대 예술에 대한 획기적인 전환점은 에밀 까르따이약의 (Mea Culpa d’un Sceptique,1902) 즉 <의심하는 자의 고해성사>라는 책의 출판이다. 그는 이전에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고 알타미라 동굴의 벽화가 구석기 시대의 작품임을 과학적으로 증명한다. 이곳을 방문한 피카소는 ‘알타미라 이후에 모든 것이 쇠퇴했다’고 고백하였다. 이렇게해서 2만 년 전의 벽화가 구석기 시대 인류의 조상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의 작품이란 사실이 확정된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왜 이런 그림을 그렸을까? 처음 발견할 때부터 이 동굴들을 연구한 고고학자 앙리 브루이 (AbbeHenri Breuil,1877-1961)는 동굴의 그림들은 원시인들이 잡고 싶은 동물들을 그림으로써 더 많이 잡을 수 있다는 원시적인 풍요제사의식이라고 주장하였다. 실제로 동굴벽화에 남겨진 동물들 중 뾰족한 칼이나 창으로 긁힌 흔적이 있어 신빙성을 더해주었다. 이 이론은 간단명료하여 매력적으로 보이나 원시인들이 가진 신비에 대한 경외심을 설명하지 않았다. 그것은 왜 구석기 시대 사람들은 자신들이 거주하는 장소가 아닌 지하로 내려가 이런 그림을 그렸는지를 설명하지 못한다. 학자들의 조사에 의하면, 현재 프랑스 남부와 스페인 북부에는 3만 년 전부터 1만 년 전까지 형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300개 이상 정교한 벽화들이 발견된다고 한다. 그런데 그 벽화 속에 등장하는 사라진 맘모스, 순록, 곰, 사자 등은 구석기 시대 사람들의 주식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구석기 시대의 암각화가 단순히 제사의식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예술성’의 시작, 그 기원을 볼 수 있는 암각화를 이 곳 촐폰아타에서 본다. 그런데 우리는 알타미라 동굴의 암각화만 알지, 중앙아시아의 암각화는 모른다. 


우리나라는 구석기 돌도끼가 발견되어 그제서야 한반도의 역사가 구석기까지 올라갈 수있었다. 만약 진화론이 맞다면, 인류는 아프리카에서 시작되어 동쪽으로 이동을 했고 그렇다면 중앙유라시아가 중국과 한반도보다 구석기시대가 이를 수 밖에 없다. 한반도의 암각화는 울산 반구대암각화가 유명하다. 약 8천년전 것이라는 반구대 암각화에는 돌고래 그림도 그려져있는데 이곳 암각화는 최소한 1만년전 이전의 것이다. 암각화 속에는 산양류의 동물인 아이벡스가 주류다. 중앙유라시아의 전통문양은 바로 이 아이벡스의 긴 뿔모양이 변형되어 이루어진 것이다. 고대인(유목민 스키타이)의 생활상, 신앙형태를 보여주는 2000여개의 암각화 중 약 90프로는 아이벡스라 불리는 야생 염소와 아르갈이라는 야생 양을 그린 것이라 한다. 그렇다면 촐폰아타 이 일대가 수렵과 유목의 현장이었다는 것이다. 


암각화를 보고 내려가는 길은 시간이 멈춘다. 내일 떠날 곳도, 오늘 정리할 글도, 처리해야할 몇가지 일들이 모두 사라진다. 복잡한 모든 것들을 사라질만큼 아름답고 장엄한 이식쿨 호수와 마을을 한동안 바라본다. 그 어떤 날 보다 소박하게 아름다운 저녁이 호수 너머로 지나가고 있다. 

   


평화로운 촐폰아타
촐폰아타 마을에서 짆행되는 폴로경기
촐폰아타 지역을 둘러싼 설산
촐폰아타 마을길 


촐폰아타의 마을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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