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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우 Jan 17. 2023

키르기스스탄 오쉬

평온한 날의 불편한 기억 

일요일 오후, 오쉬 시내를 걸으며


당연한 모든 것이 특별해진 하루를 걷는다. 평범한 모든 ‘일상’에 걸음이 멈춘다. 따뜻한 햇살이 도심을 포근하게 감싸고 있다. 공원의 푸른 나무 그늘에선 놀러나온 사람들의 유쾌한 웃음소리가 가득하다. 엄마, 아빠의 손을 잡고 나온 아이의 얼굴엔 세상 근심이 없다. 재잘거리는 새소리조차 특별한 아침이 된다. 따뜻한 햇살, 언제든 마실 수 있는 물, 항상 쉴 수 있는 나무그늘, 언제라도 떠날 수 있는 택시, 그 모든 ‘일상’이 어제와 다른 오늘이다. 일상은 너무 당연해서 전혀 특별할 것이 없어보이지만 작은 변화 앞에서 그 무엇보다 소중한 하루가 된다. 지난 3일간 해발 3000미터의 고산지대, 사리모골에서 보낸 타격은 꽤 컸던 모양이다. 키르기스스탄 남부의 국경도시 오쉬, 이 도시에 와서야 조금씩 ‘추위’가 녹고 있다. 케찹 가득 든 햄버거 하나를 먹고 도심을 걷는다. 일요일 오후라 그런지 아이 손을 잡고 나온 가족들이 많이 보인다. 눈 덮힌 설산 속에 있던 3일이 순식간에 햇살 가득한 초록의 오후가 된다. 어제의 추위가 오늘의 햇살에 덮히듯, 이 도시도 고통과 눈물의 기억을 그렇게 덮어버렸을까. 유쾌하고 행복한 주말을 보내고 있는 오쉬 사람들, 저 맑은 눈이 우즈베키스탄 사람들을 그렇게 잔인하게 죽였다는 것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다. 이렇게 평온한 도심에서 잔인한 인종갈등이 있었던 것이 불과 9년 전이다. 


2010년, 오쉬폭동을 기억하며


2010년, 이 곳에서는 우즈베크계 주민과 키르기스계 민족 간 충돌이 있었다. 이 충돌이 내전양상으로 번지면서 우즈베크계 주민 10만여 명이 국경을 탈출했고 423명이 사망했다. 이 때 오쉬 주에서만 355명이 죽었고, 잘랄-아바드 주에서는 68명이 목숨을 잃었다. 당시 경찰관도 10명이 사망했으며, 170명 이상의 사법기관 요원들이 부상을 입었다. 오쉬 주는 키르기스스탄의 7개 주 가운데 남서부 지역에 위치하면서 우즈베키스탄과 가장 인접한 주이다. 그 주도인 오쉬 시는 수도 비슈케크 다음으로 큰 키르기스스탄의 주요 산업 도시다. 분쟁이 일어날 무렵, 130만 명의 오쉬 주 인구에서 압도적 다수를 이루는 민족 집단은 60%의 키르기스인이었고 우즈베크인의 비율은 26%였다. 그런데 그 주도인 오쉬 시 인구비율은 우즈베크인이 46%로 24%의 키르기스인보다 두 배 가까이 많았다. 이에 더해 우즈베크인은 오쉬 시 상업의 약 80%를 장악하고 있었는데, 키르기스인은 이를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 그러니까 오쉬 지역 인구의 다수는 키르기스인이었지만, 이들은 주로 농촌이나 산간 등 비도시 지역에 거주하였고, 도시 지역에서는 우즈베크인이 인구나 경제 면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키르기스인의 불만은 이 지역에서 계속해서 누적되어가고 있었다. 반면, 오쉬 지역 우즈베크 주민들이나 그 지도자들은 그들대로 자신들의 인구적·경제적 비중에 비해 정치적 대표성이 미미한 것에 대해 불만이었다. 그들은 ‘지역 내 우즈베크 자치 지역 설립’이라는 급진적인 요구를 제기하기도 했다. 우즈베크인은 전체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단일 민족 집단으로는 가장 인구 수가 많다.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등에서도 명목 민족 다음으로 인구 수가 많은 집단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사회적, 정치적 지위에서 계속 소수민족으로 분류되고 있었다. 이와 같은 구조적 모순이 가장 첨예한 지역이 ‘오쉬’였다. 이 지역은 이미 키르기스인과 우즈베크인 간의 민족적 긴장관계가 잠재되어 있었다. 여기에 소비에트 말기에 이를수록 사회경제적 어려움이 더해지면서 토지, 주택, 직업 등 경제적 자원을 놓고 두 민족 집단 간의 경쟁은 더욱 극한대립으로 접어들게 된다. 그 갈등이 가장 처음 폭발한 것은 1990년이었다. 그러니까 2010년의 사건은 1990년에 이미 그 도화선이 있었던 것이다.  


1990년 5월, 키르기스 민족주의 단체 ‘오쉬 아이마기(Osh Aimagy)’는 우즈베크인이 거주하던 집단농장의 토지를 키르기스인에게 이양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대해 지역 당국도 동조하자, 우즈베크인이 크게 반발하면서 이는 두 민족간 대규모 유혈충돌사태로 발전하게 된다. 당시 소련 검찰의 수사 자료에 의하면 키르기스 측에서만 우즈겐, 오쉬, 오쉬 주 마을들에서 약 1200명 가까이가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그러나 키르기스스탄이 독립을 이루자 그 당시 폭동을 주도했던 우즈베키스탄계 범죄자들은 모두 석방되었다. 그러니까 2010년의 두 민족 간의 갈등은 이미 20년 전의 원한관계에서부터 내재되어 있던 것이다.  


슐레이만 투, 민족 갈등을 넘어


일요일 오후의 도심에선 언제나 가족과 연인들의 느린 발걸음을 어렵지 않게 본다. 그 발걸음이 향하는 곳을 따라 나선다. 도심 위로 솟은 다섯 개의 바위산이 보인다. 주말 오후, 오쉬 시민들은 편안한 복장으로 이 바위산을 오르고 있다. 이 바위산이 이름은, 슐레이만 투(Suleiman Too). 수 세기 동안 이슬람의 성지였던 곳이다. 예언자 무하마드가 여기서 기도를 드렸다고 알려져있다. 이 바위산은 동굴이 여러 개 보이는데 각 동굴마다 어떤 병이 치료가 되었다거나, 혹은 이 동굴안에 들어가면 아이를 가질 수 있다거나 하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그래서인지 현지인과 여행객들의 발걸음이 끝도 없이 줄을 잇는다. 우즈베키스탄계든, 키르기스탄계든, 한국계든, 러시아계든, 아픔을 치료하고 싶은 마음과 아이를 가지고 행복한 가정을 갖고 싶은 마음에 어찌 차이가 있으랴. 이 바위산에서만큼은 외국인도 현지인도 모두 하나가 되어 바위산 정상까지 가는 길을 돕고 있다. 정상에 오르니 오쉬 시내 전체가 한눈에 들어온다. 알라가 바라보는 인간세상 역시 그렇지 않을까. 종족을 나누어 서로를 악으로 규정하고 치열하게 죽고 죽였지만, 아프지 않고 행복하길 바라는 마음은 어느 누구하나 덜 할 수 없다. 건강하고 싶다는 우즈베크계의 소망이 어찌 키르기스탄계보다 더 중요할 것이며, 행복하고 싶다는 키르기스탄 계의 소망이 어찌 우즈베크계의 소망보다 우선할까. 그들은 모두 ‘같은’ 마음으로 알라를 찾은 ‘다른’ 종족일 뿐이다. 알라의 눈에는 ‘똑 같은’ 소망을 기원하는 ‘같은’ 인간일 뿐이다. 그러나 인간은 서로를 적으로 규정하고 그렇게 치열하게 싸운다. 많은 사람들은 역사가 선형으로 보다 진보되었다고 하지만 서로를 적으로 규정하고 학살한 이 증오의 역사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그 비극의 역사는 단지 여기, 키르기스스탄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슐레이만 투


1994년 르완다에서는 인종대학살이 있었다. 이 비극의 근원은 1950년대 벨기에가 르완다에서 실시했던 후투족과 투치족에 대한 분리통치정책에 있다. 벨기에는 근거 없는 인종 우세론을 내세우며 투치족에게는 기초교육과 식민지 경영에 필요한 최소한의 교육을 제공했지만, 후투족에게는 그런 기회를 주지 않았다. 이런 정책에 힘입어 투치족은 자신들이 에티오피아와 수단, 이집트에서 남하한 후 야만국을 문명국으로 개조한 우수한 종족이라 생각하게 되었다.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사회적 인식 때문에 투치족은 도시의 공무원이나 사업가, 지주 등으로 등용된 반면, 후투족은 소작농으로 전락하여 하층민의 삶을 영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세계경찰을 자처하며 인도주의와 민주주의 등의 가치를 내세워 다른 나라의 내정과 각종 분쟁에 개입해온 미국은 르완다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학살당할 때 사활적인 이해관계가 걸려 있지 않다고 판단해 개입하지 않았다. 오히려 미국은 르완다의 참상이 언론에 알려진 뒤에 후투족 민병대의 인종청소가 대량학살로 규정되지 않도록 하는 데 신경을 썼다. 왜냐하면 대량학살로 규정될 경우 제네바협정과 유엔 헌장에 따라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입장에서 책임을 회피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1994년 4월 30일 통과된 유엔 안보리 결의안에서는 대량학살이라는 단어가 빠지게 된다. ‘대량학살’이라는 비극도 모자라, 그 역사를 정확하게 규정할 명분마저 힘의 논리로 사라지는 현실, 이것이 인간의 추악한 모습, 비극과 비극의 그림자다. 참혹한 비극은 끝나지 않고 21세기에도 이어진다. 남수단의 내전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남수단은 오랜 내전 끝에 2011년 수단으로부터 독립한, 아프리카의 두 번째 신생독립국이다. 하지만 남수단에서는 독립 후 2년 만에 지도자들 간 권력투쟁을 계기로 내전이 시작돼 현재에 이르고 있다. 남수단의 대통령, 부통령을 맡게 된 살바 키르(Salva Kiir)와 리엑 마차르(Riek Machar)는 독립투쟁을 주도한 수단인민해방군(Sudan People's Liberation Army, SPLA)의 지도자들이었지만, 이들 사이에는 뿌리 깊은 갈등이 있었다. 독립 이후에도 2인자의 자리에 머무른 마차르가 종종 키르 대통령의 권력을 위협하자, 살바 키르가 선제 조치를 취한 것이 분쟁의 발단이었다. 2013년, 키르 대통령은 마차르 부통령을 포함한 내각 전체를 해임했다. 분쟁의 결정적 도화선이 된 것은 2013년 12월 14일부터 수도 주바에서 개최된 SPLM 민족해방위원회(National Liberation Council) 회의였다. 회의가 진행되는 동안 대통령 경호원들 중 살바 키르(Salva Kiir) 대통령 추종세력과 마차르(Riek Machar) 부통령 추종세력 간의 충돌이 벌어져 수십 명이 사망하고, 이튿날에도 대통령군 인근에서 고강도 교전이 벌어졌다. 키르 대통령은 이 사건을 마차르 추종세력에 의한 쿠데타로 규정하고, 정부가 성공적으로 격퇴하였다고 밝혔다. 하지만 키르 행정부가 의도한 것과 달리 지도부의 권력 갈등은 남수단 전역에 확산되었다. 키르 대통령은 남수단 최대 부족(인구의 15%)인 딩카족이고, 마차르 전 부통령은 두 번째로 큰 부족(인구의 10%)인 누에르족이기 때문이었다.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확산되자 키르 대통령은 결국 아프리카 정부간 개발기구(Intergovernment Authority on Development, IGAD)의 중재로 2014년 1월 23일 휴전협정을 체결하였다. 그러나 정부 측 협상대표가 "반군은 엄격한 지휘체계가 없어 전투원들이 휴전협정을 준수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우려한 바와 같이 휴전협정을 체결한 이후에도 충돌은 중단되지 않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현재를 ‘진보의 시대’라 규정한다. 20세기 이후 인류는 엄청난 경제성장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연평균 성장률은 열 배 이상 높아졌고 기술은 발전했으며 지식은 축적됐다. 그래서 인간은 그 어느 시대보다 더 오래 장수하는 시대를 산다. 사람들은 효율적인 노동으로 이전보다 훨씬 더 많은 여가 시간을 갖게 됐다. 민주주의와 복지 개념이 확산됐다. 그러나 동시에 20세기는 그 어떤 시대보다 잔인하고 폭력적이었다. 수 많은 ‘인종학살’의 역사는 21세기도 끝나지 않고 있다. 과연 우리는 ‘증오의 시대’가 아닌 ‘진보의 시대’를 산다고 말할 수 있을까? 


산 정상에 올라 오쉬 전경을 바라보고 있으니 현지인들이 수줍게 사진찍기를 요청한다. 낯선 이방인인 나에게도 이렇게 쉽게 함께 기념사진을 찍자고 반기는 이들인데 오랜 시간 함께 살아온 사람들을 단지 ‘다른 종족’이란 이유로 서로를 적으로 규정하고 죽였다는 사실은 여전히 미스터리다. 슐레이만 투, 이 바위산은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이 도시에서 일어난 비극의 역사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소리도 없이 공포 속에 희생되고 죽어갔는지를, 알라는 알고 있을 것이다. 똑같은 비극의 역사를 반복하는 이 어리석은 인간의 모습을. 


오쉬 도심 전경

                                    

2010년 오쉬폭동 기념비를 찾아


너무도 평온한 일요일 오후,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은 2010년의 이 ‘불편한 기억’을 나는굳이 끄집어낸다. 레닌동상은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데 이 비극의 역사를 추모하는 탑 하나가 이 도시에 없을까? 인터넷을 찾아보니 2015년, 당시에 숨진 사람들을 위로하는 '어머니의 눈물'이라는 추모탑에서 추모식이 열렸다는 기사가 보인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오쉬 참사 5주기 행사에 참석한 것이 기사화된 듯했다. 그는 이 행사에서 키르기스탄 국가 지도자들에게 2010년 갈등과 연관된 모든 인권위반 사례들을 다시 조사하라고 호소했다. 물론 그후로 4년이 된 지금, 이 나라에서 이 문제가 얼마나 공정하게 다시 조사되고 있는지 나는 알 방법이 없다. 이 탑을 찾아가야겠다는 생각으로 큰 길가에 서서 지나는 택시마다 세워가며 사진을 보여준다. 그런데 하나같이 어디있는지 모르겠다며 썡하고 지나가버린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뭐라 말해서 찾아가니 다른 탑이다. 다리에 힘이 풀린다. 다시 발길을 돌려 바위산 아래 공원으로 향한다. 


도심공원에서 만난 은퇴한 영어교사, 알마르


공원의 오후는 여느 도시처럼 늘 그랬던 듯 평온하다. 그 어떤 비극의 기억도 없었던 것처럼 해맑은 아이들이 웃음 소리가 공원을 가득채운다. 공원 한켠에서는 키르기스스탄의 노인들이 앉아서 체스를 즐기고 있다. 벤치에 앉아 바라본 2019년 ‘오늘’의 이 도시는 살을 에는 듯한 바람이 지나간 그 어떤 겨울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듯하다. 지금, 이 순간의 초록빛 봄, 오늘 일요일 오후의 사람들만 있을 뿐. 벤치에 앉아 있으니 80세는 족히 된 것 같은 나이든 노인이 놀랍게도 영어로 말을 건다. 키르기스스탄에서 ‘영어’로 말하는 80세의 할아버지, 알마르는 은퇴한 영어교사다. 외국인인 나를 만나 하는 말이 여느 할아버지과 다를 바가 없다. 아들과 손주 자랑이다.  그는 우즈베키스탄에서 살았다가 이쪽으로 이주했다고 한다. 아들은 키르기스탄 여자와 결혼해서 오쉬에 살고 있는데 현재 손주만 15명이란다. 이 할아버지에게 2010년의 오쉬폭동을 묻는 것이 대체 무슨 소용일 것인가. 40분 거리의 우즈베키스탄과 키르기스스탄을 나누는 것은 또 무슨 의미인가. 내 며느리, 내 아들, 내 손주가 될 수 있는 ‘누군가’를 ‘적’으로 규정하고 싸우는 인간은 또 얼마나 어리석은가. 무언가를 더 물으려다 머뭇거리는 사이 할아버지는 손주사진을 보여주느라 여념이 없다. 한참이 첫째 손주, 둘째, 셋째, 넷째, 손주이야기다. 15명까지 다 가려니 얼마나 바쁘려나. 보여주는 사진 한장을 바라보다 대뜸 말했다.  


“엄마가 키르스탄계고 아빠가 우즈베키스탄계라 그런지 아들 딸이 다 너무 예쁘네요.” 


알마르와 함께 공원에서


이 할아버지 세대가 저지른 어리석은 인간이 비극이 적어도 이 손주들이 살아가는 세상에는 다시 일어나지 않길. 우즈벡계면 어떻고 키르기스탄계면 어떠랴. 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내 손주 같은 마음으로 함께하면 그만이다. 흐뭇하게 웃는 알마르 할아버지가 미소가 공원 하늘을 가득 채운다. 호탕한 할아버지의 웃음 소리가, ‘공존의 희망’이 되어 이 도심 공원의 저녁노을 너머로 살포시 내려앉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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