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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우 Feb 01. 2023

카자흐스탄 타라즈

역사의 주역으로서의 중앙아시아

타라즈로 가는 밤기차를 타고


“타라즈(Taraz)? 아무 것도 볼 게 없는데 거길 왜 가?”  


알마티 호스텔의 매니저는 타라즈로 가는 밤기차를 타러 가는 나에게 이렇게 묻는다. ‘볼 것이 없다’는 의미는 관광객이 찾는 곳이 아니라는 뜻일 것이다. 그런데 ‘의미’는 언제나 ‘이야기’ 속에서 만들어지기 마련이다. 아무 것도 없는 황량한 들판도 그 곳에서 있던 과거의 ‘이야기’를 찾아낼 수 있다면 그 곳은 ‘꼭 봐야할 곳’이 된다. 나에게 ‘타라즈’는 그 도시가 갖는 ‘의미’ 때문에 반드시 하루라도 머물러야 하는 도시다. 저녁을 먹고 알마티의 두번째 기차역으로 향한다. 슬리핑 기차를 타는 것은 숙박비와 이동이 동시에 해결되는 꽤 괜찮은 패키지다. 낡은 기차지만 여행하는 기분이 드는 밤 열차가 무척이나 마음에 든다. 기차는 비행기가 주지 못하는 ‘느린 시간이 주는 편안함’이 있다. 창 밖으로 지나가는 풍경이 만드는 느린 순간들은 언제나 이동하는 ‘지금’에 머물게 한다. 밤기차에 누워 있는 시간은 온전한 ‘쉼’이다. 그 어떤 생각도 잠시 멈춰지는 이 시간이 행복하다. 이동하는 시간동안 통신사와도 접속이 끊기니 핸드폰에서 자유롭고 흔들리는 공간이라 노트북도 펼치기 어렵다. 나는 기차가 주는 이 ‘흔들리는 자유’가 참 좋다. 가능한 오랜시간 천천히 이 느린 시간 안에 누워있고 싶다. 눈을 감고 뜨니 벌써 아침이다. 차장이 다음 역이 ‘타라즈’라며 일러준다. 오전 10시, 느린 기차는 그렇게 나를 ‘아무것도 볼 것 없다’는 타라즈에 내려놓는다.  


오전에 도착한 타라즈 역


탈라스 전투 현장을 찾아


‘관광객이 잘 찾지 않는 곳’의 또 다른 의미는 의사소통이 어렵다는 것을 뜻한다. 타라즈는 도착해서 숙소까지 그리고 숙소에서도 그 후에도 영어가 전혀 통하지 않는다. 러시아어를 못하면 그야말로 고생이다. 한 문장을 전달하는데 여러 번 번역앱을 활용해야한다. 기차역에서 숙소까지, 숙소에서 내 방으로 들어가기까지 1시간 반이 더 소요되어야만 했다. 이렇게 언어소통도 힘들고 관광객도 잘 찾지 않는 곳에 ‘굳이’ 찾아온 이유는 751년 이 지역에서 있었던 ‘탈라스 전투’ 때문이다. 정확하게는 그 전투가 가지는 ‘세계사적 의미’ 때문이다. 이 전투의 이름이 ‘탈라스’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키르기스스탄의 ‘탈라스’라는 지명을 찾아 간다. 그런데 정수일 교수는 전투가 일어난 지역을 현재 카자흐스탄 타라즈(Taraz, 구 잠불Dzhambul)의 강 주변으로 고증하고 있다. 키르기스탄의 탈라스와는 약 2시간 거리이며, 알마티에서는 약 500킬로미터, 버스로 약 10시간정도 소요되는 거리다. 정수일 교수는 키르기스스탄의 탈라스와 혼동하지 말아야한다고 지적하고 있는데 어찌 완벽하게 1200여년 전의 정확한 전투 장소를 고증할 수 있을 것인가. 대략적인 지점까지는 추측해 볼 수 있어도 정확한 지점까지 확실하게 알기는 매우 어려울 것이다. 여전히 전투가 일어난 실제 현장이 어디인지에 대해서는 학자들간의 이견이 있다. 그러나 어쨌든 이 지역 연구의 전문가의 말을 따라 나는 카자흐스탄 영역 내의 ‘타라즈(옛 지명 잠불)’를 찾아왔다. 숙소에 짐을 풀고 전투가 있던 강을 찾아 길을 나선다. 현재의 탈라스 강 주변으로는 집들이 들어서 있다. 그 뒤로는 거대한 평원이 펼쳐져 있는데 평원에는 수 많은 무덤들이 있다.



산 언덕에서 찍은 탈라스 강 주변 전경


산 언덕에서 바라본 탈라스 강

                        

탈라스 강
탈라스 강변 주변의 평원지대

   

탈라스 강변 뒤로 펼쳐진 평원에는 모스크 형태를 띈 수 많은 무덤이 있다.


탈라스 강변이 내려다보이는 곳에서


세계사를 바꾼 탈라스 전투


751년, 이 강에서 벌어진 이슬람군과 당나라 군대의 전투는 세계사의 흐름에 거대한 영향을 준 전투였다. 좁게는 중국의 이슬람화를 막았고, 중앙아시아의 이슬람 정착을 가능하게 했다. 넓게는 유럽의 르세상스에 영향을 미쳐 중세의 몰락과 근대의 촉진을 가져왔다. ‘탈라스 전투’라 불리는 이 전쟁은 고구려의 후예이자, 당나라의 장군으로 전투에 참여한 고선지의 서역원정 중 마지막 전투였다. 고선지는 당나라 군사를 이끌고 11년간 (740-751) 다섯 차례의 서역원정을 단행했다. 그 중 다섯 번째 원정 때, 당군과 석국-이슬람 연합군 간에 벌어진 전쟁을 ‘탈라스 전쟁’이라고 한다. 전쟁이 ‘탈라스’라는 지역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고선지의 4차에 걸친 연전연승의 서역원정은 승승장구하는 기세로 중앙아시아와 중국으로 밀려오는 이슬람 물결에 제동을 걸었다. 만약 그가 4번에 걸쳐서 이슬람 군을 막아내지 못했다면 중국까지 이슬람화 되었을 것이다. 마지막 다섯번째 서역원정 ‘탈라스 전투’에서 고선지는 패배했다. 이 전투의 패배는 이슬람이 중앙아시아에 정착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동시에, 고선지의 패배는 중국의 제지기술을 이슬람 세계에 전달하여 이후 유럽각지에 전파하는 계기가 된다. 탈라스 전쟁에서 이슬람군의 포로가 된 2만 당군 가운데는 제지기술자가 있었다. 중국의 제지술은 그들에 의해 점차 바그다드를 비롯한 이슬람 세계로 전해졌다. 12세기 중엽부터 제지기술은 아랍인들을 통해 유럽 각지로 널리 퍼져나간다. 그후 이렇게 전파된 제지 기술은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의 촉매제가 되어 중세의 몰락을 가져온다. 그러니까 751년의 탈라스 전투는 근대의 탄생이라는 거대한 역사적 패러다임의 시작점이라는 측면에서도 매우 중요한 순간이었으며, 동북아시아의 이슬람화를 막고, 중앙아시아의 이슬람화를 정착시켰다는 측면에서도 엄청난 역사적 ‘의미’가 있는 것이다. 


탈라스 전투와 고선지


강 저편으로 내려가면 너무도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는 엄마와 아기 말이 보인다. 말 위에 앉아있는 새 조차 평화로워보이는 이 평원 어딘가에서도 고선지 장군은 이슬람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을 것이다.


타라즈 평원에 한가로운 말 두마리 


 1200여년이 지난 지금은 너무도 한가로워 보이는 말이지만, 두보(712-770)가 살던 당대의 저 말은 고선지 장군의 말 ‘총마’였을지도 모른다. 두보는 고선지 장군의 말 ‘총마’를 찬탄하는 시를 지어 남겼는데 당시 고선지 장군의 명성이 어느 정도였을지 짐작해 볼 수 있는 부분이다. 당나라의 시인 두보는 4차례에 걸친 서역 원정의 승전보가 장안으로 들어오는 상황에서 이 시를 지었다. 



고도호총마행(高都護驄馬行): 도호 고선지 장군의 말인 총마를 노래함


                                                                                                                       두보(杜甫)

안서 도호 장군의 서호의 총마는 

높은 명성 지닌 채 갑자기 와서 동쪽으로 향하네 

이 말은 싸움에서 오랫동안 적수가 없어 

사람과 한 마음으로 큰 공적을 이루었다네 

공을 이루자 은혜롭게 길러져 가는대로 두었으니

이 말은 원래 날리듯 달려서 멀리 사막지방에 왔다네

웅혼한 자태는 마판에서 편히 길러지는 것 바라지 않고 

날랜 기운은 여전히 전장에서 유익함을 생각하게 하네 

관절이 짧고 발굽이 높아 쇠덩어리 뉘어놓은 것 같아

교하지방을 몇 번이나 차고 다려 얼음을 갈라놓았을까 

오색 갈기 흩어져 구름이 몸에 가득한 듯 하고 

만리를 달려야 핏빛 땀이 흐르는 것 보인다 

서울 장안 장자들도 감히 타지 못하나니 

번개치듯 달려는 것을 성안 사람들 모두 알기 때문이네  

푸른 실로 갈기털 묶고 주인을 위해 늙어가려니 

어찌하면 다시 서울 장안 횡문을 지나 전장으로 갈까 



고구려 유민인 고선지는 11년 간 (740-751) 다섯차례나 대군을 이꿀고 파미르 고원과 힌두쿠시산맥, 텐산산맥 같은 험산준령을 넘나들면서 서역원정을 단행했다. 그 중 네 차례는 승전했으나 마지막 한차례는 패전의 고배를 마시고 모함에 걸려 참수당함으로써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감한다. 그러나 그의 서역원정은 중세 동서 관계사에 일대 전기를 마련했다. 그가 아니였다면 어쩌면 나는 이슬람 문화권에서 태어나 오늘 히잡을 두르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만약 그가 751년 마지막 서역 원정에서 승리했다면, 나는 오늘 카자흐스탄에서 모스크를 못보았을지도 모른다. 이슬람의 영향권 내에 중앙아시아이 포괄되지 않았다면 오늘의 이 나라의 역사는 또 어떻게 달라졌을까? 이 모든 역사의 가정을 가능하게 할만큼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 바로 ‘탈라스 전투’ 이기에 이 전투의 지휘관이었던 ‘고선지’는 우리에게 큰 의미로 다가온다. 


고선지는 망국의 비운을 삼키며 이국 땅 당나라에 강제로 끌려간 고구려 유민의 후예다. 아버지 고사계는 고구려가 망한 후 당에 끌려가 처음에는 하서군에서 중급 장교로 있다가 점차 공을 세워 안서군(현 쿠처)의 사진교장으로 승격된다. 이처럼 무인집안에서 태어난 고선지는 어려서부터 무예를 연마하면서 아버지를 따라 안서군에 들어갔다. 그는 무예가 출중하고 용감하여 20대에 유격장군에 오른다. 그가 출세가도를 달릴 수 있던 것은 물론 그 자신의 출중한 자질도 중요한 몫을 했겠지만 당시 당나라의 이민족 장군들을 끌어들이는 ‘번장기용정책’의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정책의 호기를 타고 요직에 오른 고선지는 11년간 총 다섯 차례의 서역원정을 단행하며 이슬람의 동진을 막아내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된다. 


마지막 751년의 탈라스 전투는 사실상 고선지의 제4차 서역원정(750년)이 불씨가 되어서 발생한다. 당시 석국(현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 일대)은 당과 이슬람제국의 틈바구니에 끼어 이쪽저쪽 양면정책을 써오고 있었다. 그러던 중, 파죽지세로 동점하고 있던 이슬람제국에 749년 굴종한다. 석국이 이슬람제국에 굴종하자 서역 경영을 책임진 고선지는 석국에 대한 난폭한 징벌전을 벌인다. 왕이 스스로 성문을 열어 맞이했는데도 불구하고 포로로 취급해 수도 장안에 보내고 많은 사람들을 살상한 것이다. 이것이 고선지의 제4차 서역원정이다. 하지만 당 측의 난폭성은 사태를 진정시킨 것이 아니라 오히려 뒤이은 탈라스 전쟁의 불씨를 낳고 말았다. 석국인들이 석국원정에서 당군이 자행한 난폭성과 망국에 대한 한을 품고 있던 시기에 장안에 호송된 석국왕이 살해되는 일이 발생한다. 이에 석국 왕자는 부왕의 복수를 다짐하면서 서역 각국과 압바스 이슬람제국에 후원을 요청한다, 드디어 751년 7월 고선지가 인솔한 7만 대군과 석국-이슬람 연합군과의 격전이 텐샨산맥의 서북단에 있는 탈라스(현 카자흐 탈라즈)에서 벌어진다. 이것이 고선지의 제5차 서역원정이다. 전쟁 시작 5일 만에 고선지는 전략 전술상의 착오로 패전의 고배를 마신다. 그는 상승일로에 있는 이슬람군의 위력을 과소평가함으로써 대비책을 소홀히 하였고, 당과 동맹을 가장한 카를루크족의 배반을 예견치 못하고 방심함으로써 결국 카를루크족과 이슬람군의 좌우협공을 받아 전멸위기에 빠지게 된다. 이 전쟁에서 당군은 대부분이 사살되고 일부(2만명)는 이슬람군에게 포로가 되었으며, 고선지를 포함해 구사일생으로 패주한 자는 몇 천 명에 불과한 것으로 전해진다. 


실크로드를 오간 사람들과 물건


실크로드는 군인, 상인, 선교사가 오가며 사상과 물건을 전한 길이다. 실크로드의 길 위에 군인 인 고선지가 있었고, 전장에서 평생을 보낸 그의 인생의 마지막 전투는 세계사의 전환점으로 기록된다. 육상 실크로드에 고구려 유민, 고선지가 있었다면 바다에는 장보고가 있었다. 고선지의 탈라스 전투가 있고 약 100년 후, 당나라에서 돌아온 장보고는 828년 흥덕왕에게 당나라의 해적이 신라인을 노략하여 노비로 사고파는 행위가 빈번히 벌어지고 있다고 보고하고 오늘 날의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한다. 그는1만 병사를 지위하여 해적을 소탕하고, 당나라와 일본과의 해상무역을 주도했다. 고선지와 장보고는 동과 서를 오가며, 육지와 바다에서 8세기와 9세기를 누빈 최초의 글로벌 ‘한국인’이라 봐도 될 것이다. 실크로드를 오간 상인과 선교사 중에서 여행기를 남겨 잘 알려진 사람들로는 마르코폴로, 카르피니, 그리고 루브룩이 있다. 마르코폴로는 서양인들의 동양에 대한 인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그는 1271년부터 1295년까지 실크로드를 통해 동방을 여행한 이탈리아 베네치아 상인이다. 중국 각지를 여행했는데 원나라에서는 관직에올라 17년을 머물렀으며, 이후에 이야기 작가인 루스티켈로에서 동방에서 보고들은 것을 필사하게 하여 마르코폴로의 여행기 <동방견문록>을 남긴다. 마르코폴로가 중국까지 들어가는 경로는 타브리즈(현 이란), 발흐(현 아프카니스탄), 파미르 고원을 경유하여 카슈가르를 지나 중국으로 들어가는 육상 실크로드이다. 그가 이 여행기에서 묘사한 동방에 대한 이야기는 이후 서양인들에게 영향을 미쳐, 수많은 탐험가와 상인들이 황금을 찾아 동방으로 오게 했다. 콜롬버스도 마르코폴로(Marco Polo)의 동방견문록 영향으로 황금을 찾아 신대륙으로 떠난 것이다.


 마르코폴로 이전에 그보다 먼저 몽골을 본 이는 이탈리아의 수도사 플라노 드 카르피니(Giovanni Plaono de Carpini)와 윌리엄 루브룩(William of Rubruck)이다. 이 두 사람은 마르코폴로보다 20-30 년 앞서 구육과 뭉케칸의 통치시기, 대몽골국의 수도 카라코롬을 찾았다. 그들은 ‘몽골의 역사’ 와 ‘몽골기행’이라는 귀중한 기록을 후대에게 전해주었다. 이들은 실크로드를 통해 유라시아를 횡단하며 기록을 남긴 ‘최초의 유럽인들’ 이다. 모두 13세기에 기록들이다. 반면, 동양에서 유라시아를 횡단하며 기록을 남긴 ‘최초의 아시아인들’은 대부분 승려들이다. 실크로드 고전 여행기로 지금까지 전해지는 것은 4세기 동진(東晉) 법현의 구법여행 견문록인 <불국기>, 7세기 당나라 현장의 <대당서역기>, 8세기 신라의 혜초가 쓴 <왕오천축국전> 등이 있다. 모두 불법을 구하기 위해 인도로 향한 동방 승려들의 기행기이다.  신라 고승 혜초는 불법을 구하러 중국(당나라)에 갔다가 723년 광저우에서 배를 타고 천축(인도)로 향한다. 


그가 인도로 떠났을 때, 중앙아시아는 이미 전 지역에 불교가 아니라 이슬람영향이 더 강했을 때였다. ‘탈라스 전투’는 혜초가 불법을 구하기 위해 떠난지 30년이 지나 발생한다. 혜초는 723년 인도 전역 뿐 아니라 당시 서역의 요충지인 토화라(오늘의 아프카니스탄)에 얼마간 머물다가 발길을 서쪽으로 돌려 파사(페르시아, 지금의 이란)와 대식(아랍)까지를 방문역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는 귀로에 올라 천신만고 끝에 파미르 고원을 넘어 드디어 727년 쿠처에 이른다. 장장 4년동안의 ‘서역기행’이다. 그 여정을 기록으로 남긴 것이 바로 유명한 <왕오천축국전>이다. 1908년 이 여행기는 프랑스의 동양학자 펠리오(P. Peliiot)에 의해 둔황 막고굴에서 발견되었다. 8세기 실크로드를 알 수 있는 유일한 기록이라는 점에서도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은 세계사적 가치를 가진다. 실크로드를 오간 사람 중에 구마라집도 반드시 기억해야할 인물이다. 그는 350-409년, 당나라의 현장 이전에 불경을 번역한 위대한 역경승이다. 그는 인도인으로 중국어를 배워 불경을 한문으로 번역했다. 그의 명성은 이미 서역 뿐 아니라 중국에도 알려져 있었는데 전진의 부견은 구마라집의 명성을 듣고 작운 여광을 보내 쿠차를 공격하여 구마라집은 붙잡혀 오게 되었다. 그러나 중도에 부견의 멸망이 알려지자 여광은 양주에서 후량이라는 나라를 세웠고(386), 구라마집도 15년동안 그곳에 머물러 있었었다. 후진의 제2대인 요흥이 후량을 토벌하여 구마라집을 장안으로 맞아들인 것은 401년이다. 그의 나의 58세에 그는 대대적인 번역사업을 시작한다. 그는 의역을 통해 중국인이 이해하기 쉽게 불경을 번역했다. 중국인으로, 산스크리트어를 배워 좀더 ‘직역’에 가깝게 불경을 번역한 현장과 더불어, 인도인으로 중국어를 배워 불경 번역사업에 거대한 업적을 남긴 구마라집은 모두 세계 불교사에 위대한 인물로 남아있다. 


실크로드를 따라서는 수 많은 물건들이 오고갔다. 비잔틴, 아랍, 페르시아, 인도 등 서역에서는 포도, 호두, 석류, 파, 마늘, 시금치, 수박, 후추, 완두, 각종 향로, 몰약, 수선화, 개암, 사프란, 무화과, 장뇌, 소먹 등 90여가지 식물이 들어왔다. 면화의 원산지는 아프리카, 목면은 인도와 미얀마를 거쳐 중국의 운남과 해남 동남방에 유입되었다. 원산지가 중국인 차는 아랍인을 통해 서구에 전달되었다. 1559년 베네치아인은 처음으로 아랍인으로부터의 전달받은 문서를 통해 차를 약물로 기록했다. 차를 최초로 서구에 반입한 것은 17세기초 네덜란드인들이다. 17세기 중엽 영국와 미국에도 각각 자가 유입된다. 지금 내가 서있는 유라시아 지역에서 유입된 수출품은 단연 동물이다. 양, 말, 낙타는 모두 유라시아지역에서 유입되었다. 이렇게 실크로드를 통해 오가던 물건들은 대항해시대가 열림에 따라 구대륙에서 신대륙으로 이어지는 환지구적 바닷길를 맞이한다. 신대륙과 구대륙간 교류된 물건은 고구마, 옥수수, 감자, 고추, 담배, 땅콩, 해바라기 등이다. 대항해시대가 열림에 따라 1460년 포르투갈의 엔리케 왕자는 아프리카 서해안을 따라 남하해 인도로 가는길을 모색했다. 바스코다가마는 인도항로를 개척했고(1497-1498), 콜롬버스는 4차 대서양을 횡단(1492-1502)을 한다. 여기서 그는 신대륙 발견한다. 그리고 마젤란일행의 세계일주(1519-1522)가 시작되면서 사상처음, 구대륙에서 신대륙으로 이어지는 환지구적 바닷길이 연결된다. 이는 동서문명 교류사에도 획기적 변화를 가져온다. 그전까지는 유라시아를 포함한 구대륙 내에서만 교류가 진행되어 왔으나 이제는 저 멀리 아메리카 대륙과도 문물이 오가게 되어 명실상부한 범세계적 교류망이 형성된 것이다. 16세기부터 스페인과 포르투갈인들이 필리핀의 마닐라를 중간 기착지로 하여 중국의 비단이나 도자기를 중남미에 가져가고 중남미의 백은을 아시아와 유럽에 가져오는 길은 신구대륙간에 ‘태평양 비단길’로 명명되고 있다. 이러한 세기적 변화의 여파는 동방의 한구석에 자리하는 한반도에까지 이어져, 고려시대까지만해도 수수나 오이, 수박, 호두, 포도 같은 농작물들이 서역일원에서 들어와 우리 전통 농작물로 자리를 굳혀왔다면 조선시대에는 유라시아 대륙을 벗어나 아메리카 대륙으로부터 감자, 고구마, 옥수수, 고추, 담배, 땅콩, 해바라기 등 신기한 농작물들이 우리 농령사회전반을 풍요롭게 했다. 동서 교역로와 그 길의 변화가 우리의 일상 속에 얼마나 직접적 영향을 미치는지를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실크로드 제지술의 전파


치열하고 파란만장한 역사를 안고 흐르는 ‘지금’의 탈라스 강은 고요하다. 그러나 1200여년 전, 이 강에서 있었던 탈라스 전투는 ‘제지술’의 전파라는 문명의 흐름을 뒤바꾼 사람들이 있었다. 탈라스 전투에서 살아남은 2만명의 포로, 즉 당나라 군들 가운데 제지기술자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당시 강국의 수도, 사마르칸트로 끌려간다. 정수일에 따르면, 탈라스 전투이후 많은 제지기술자이 당시 강국의 수도였던 사마르칸트로 보내져 종이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이슬람 문헌에 등장한다고 한다. 


사마르칸트는 이슬람 세력이 동진하면서 한창 중앙아시아가 이슬람화 되어가고 있을 때, 그 중심지였다. 수자원이 넉넉하고 수리 관리가 발달한 오아시스 도시, 사마르칸트는 종이 원료인 아마나 대마를 재배하기에 최적지였다. 아랍-무슬림들은 탈라스 전쟁에서 생포한 중국인 제지 기술자들을 활용해 처음으로 사마르칸트에 제지공장을 세웠고, 질 좋은 종이를 만드는데 성공한다. 얼마 안가서 사마르칸트는 제지업의 중심지가 되고, 종이는 이곳의 주요한 교역품으로 부상한다. 당시 이곳에서 생산되는 종이는 산지 이름을 따서 ‘사마르칸트 지’라고 부리며 고가로 팔렸다고 한다.  탈라스 전투는 사마르칸트에 수 많은 제지공장을 건설하게 했으며, 사마르칸트는 ‘종이의 길’에서 동서를 연결하는 교역의 중심 관문으로 세계 문명교류에 큰 기여를 했다. 


종이의 전파 지도


중국 후한의 채륜에 의해 105년에 처음 만들어진 종이가 그 후 600여년의 시간이 지나 ‘탈라스 전투’에서 처음 서쪽으로 전달될 구심점이 만들어졌음은 놀랍다. 종이가 전달된 경로가 곧 실크로드이자, 전쟁의 길이었던 것이다. 전쟁은 수 많은 사상자와 고통을 야기시키지만 동시에 문명의 교류를 가능하게도 한다. 751년 탈라스 전투로 종이기술이 서양으로 전파되는 길이 열린 것처럼 임진왜란, 정유재란의 발발이후 일본으로 끌려간 한국의 도공들은 일본 자기 문화 발전에 큰영향을 미치게도 했다. 정유재란 당시 조선 침략에 나선 사가번의 번주 나베시마 나오시게의 군대에 잡힌 조선 도공 이삼평은 일본이 자랑하는 아리타 자기의 시조로 추앙받는다. 사실, 17세기까지 도자기에 관한 조선과 일본의 관계는 조선의 발전된 기술을 일본에 전해주는 일방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전쟁에서 끌려간 조선 자기장들을 바탕으로 기술 혁신을 이룬 일본에서 도자기 산업이 번성하면서부터 그 관계는 서서히 역전된다. 그래서 혹자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도자기 전쟁’이라 부르기도 한다. 피터 프랭코팬은 실크로드를 ‘전쟁의 길’이라고 명명했는데 전쟁의 승리가 곧 더 앞선 기술력의 전파와 문물의 교류였음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동양의 인쇄술은 실크로드를 타고 서양 종교개혁으로


마틴 루터는 “인쇄는 가장 고귀하고 소중한 은총의 선물이다."라고 말했다. 1517년 10월 31일,그로부터 시작된 ‘종교혁명’은 중세의 패러다임을 뒤 흔드는 사건이다. 루터(Luther·1483~1546)’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성경 말씀을 통해 하나님과 직접 만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 전까지는 종이보급이 원활하지 않아 성경은 일부 성직자외에 전혀 열람이 불가능했다. 그러다보니 교회의 성직자들은 끼리끼리 뭉쳐 부패하는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인쇄술의 보급은 성경책의 보급에 날개를 달아, 성직자의 권위에 도전하게 했다. 종교개혁의 촉매제가 되었다. 인쇄술이란 일정한 판면(版面·글자 면)에 잉크를 묻힌 뒤 종이 등의 재료에 찍어 문자나 그림을 반복적으로 복제하는 기술을 말한다. 인쇄술이 생기기 전에는 사람이 일일이 글자를 베껴 쓰는 방식으로 책을 만들었기 때문에 대량 지식의 공급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했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인쇄술은 크게 목판 인쇄술과 활판 인쇄술로 나눠진다. 


목판 인쇄술은 나무판에 글자를 음각(오목하게 파는 것)이나 양각(볼록하게 깎는 것)으로 새긴 후 잉크를 묻혀 종이에 찍어내는 기술이고, 활판 인쇄술은 활자(인쇄를 위해 만든 글자)를 하나하나 따로 만든 뒤 그 활자들을 조합해 문서를 찍어내는 기술이다. 재밌는 것은 목판 인쇄술과 활판 인쇄술 모두 동양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인쇄물이자 현재 남아있는 목판 인쇄물 중 가장 오래된 것은 우리나라에 있다. 8세기 통일신라에서 만든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이라는 불경인쇄물인데 이는 1966년 경주 불국사 석가탑 사리함에서 발견되었다. 해인사에 보관되어 있는 팔만대장경은 그때까지 현존하는 모든 불경을 참조하여 만든 우리나라 목판 인쇄술의 집약체이기도 하다. 활판 인쇄술은 11세기 중국의 '필승'이라는 사람이 흙을 구워서 활자를 만들면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나무나 점토로 만든 활자는 쉽게 부서지거나 깨졌기 때문에 활자 유지와 보관을 위해 금속이 사용되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 인쇄물 역시 우리나라에서 만들었다. 고려시대인 1377년 충청북도 흥덕사에서 찍어낸 '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節)이 바로 그것이다. 부처님 말씀을 기록해 놓은 책으로 당시 50~100부 정도 인쇄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직지심경은 백운화상이 입적하고 3년 뒤인 1377년 청주 흥덕사에서 간행하였다. 상·하 2권을 간행했으나, 현전하는 것은 하권 1권인데 이 마저도 현재는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간행 후 500여 년의 행적은 알려진 게 거의 없다. 직지의 존재가 다시 드러난 것은 19세기 말 주한 프랑스 공사 ‘콜랭 드 플랑시’에 의해서이다. 주한 프랑스 공사로 부임한 플랑시는 고서적 수집에 열중했는데, 이 과정에서 직지를 입수했다. 플랑시가 입수했을 때 직지는 이미 상권은 없고 하권도 첫 번째 쪽이 사라진 상태였다. 이후 플랑시에 의해 프랑스로 유출된 직지는 1911년 경매에 부쳐져 골동품 수집가 앙리 베베르에게 180프랑에 낙찰되었다. 


1950년 베베르의 유족이 이를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기증해 현재에 이른다. 이 것이 현전하는 금속활자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밝혀진 데는 박병선 박사의 노력이 크다. 그녀는 이 연구에만 평생을 바쳐 마침내 1972년 ‘직지심체요절’이 현전하는 금속 활자로 인쇄된 책 중 가장 오래된 것임을 밝혀냈다. 그녀의 일생의 공헌으로 그해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 도서의 해’ 기념 도서 박람회에 공개되었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는 2001년 9월 13일, 《승정원일기》와 함께 등재되었다. 놀라운 것은 이렇게 초기 인쇄술을 주도한 것이 동양이며 인쇄기술력에서 한국이 차지하는 역할과 비중이 크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자 문화권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활판 인쇄술은 크게 발달하기가 어려웠다. 수천 자나 되는 한자를 일일이 활판으로 만들어 찍는 것보다 차라리 나무판에 글자를 새기는 편이 더 수월했던 것이다. 그래서 금속활자 인쇄술은 서양에서 비약적으로 발전한다. 


1445년, 독일의 인쇄업자인 구텐베르크(Gutenberg·1397~1468)는 납에다 주석, 안티몬(금속 원소 중 하나)을 적절한 비율로 섞어 녹인 다음, 글자를 새긴 틀에 부어 활자를 만들어내는 방식을 고안한다. 그리고 포도주나 올리브유를 만들 때 사용하던 압착기(프레스)를 응용해 힘이 고루 가해지는 압착 인쇄기를 발명해낸다. 그는 이어 그을음과 아마씨 기름을 혼합한 새로운 잉크를 만든다. 활자, 인쇄기, 잉크, 종이 등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에는 인쇄에 관한 모든 기술이 집약되어 있다. 활자의 배열, 행과 행 간격, 잉크 농도 등 신경 써야 할 것이 많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노력을 기울이며 시행착오를 거듭한 끝에 최고 작품을 만드는데 그것이 바로 1282쪽에 이르는 '42행 성경(구텐베르크 성경·1450년)'이다. 각 쪽마다 42줄씩 인쇄되어 있어 '42행 성경'이라부른다. 이 성경을 찍기 위해 구텐베르크는 서로 다르게 생긴 알파벳과 기호 등 활자 290개를 만들어 당시 180여 권을 찍어냈다고 한다. 이렇게 찍은 당시 180권 중 현존하는 것은 단 3원인데 그중 하나가 바로 예일대학교 바이네키 도서관(Beinecke Library)에 있다. 이 도서관에는 고서들이 가득하다. 고서들을 보관하기 위해 대리석 벽을 투시해 빛이 들어오게 해서 습기를 제거할 수 있도록 특수 설계된 세계에 하나뿐인 유일한 도서관이다. 


예일대학교는 1250만권의 장서를 보유하고 있는데 특히 이 바이네키 도서관은 구텐베르크의 성경을 비롯해서 이집트 파피루스, 티베트 북경 필사본, 한국고서도 44종 등 약 67만 5000권의 희귀본이 있다. 이 도서관의 압권은 도서관 내부 중앙 유리타워 안에 ‘67만 5000권의 희귀본 도서’가 진공상태로 소장되어 있는 것이다. 나는 이 도서관에서 책 읽는 것을 좋아했다. 세계사를 바꾼 ‘위대한’ 인쇄물 구텐베르크의 성경을 매일 한번 씩 보며 책을 읽은 그 느낌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그 한권의 책 속에 동서양 문명가 담긴 천년의 실크로드가 숨쉬고 있기 때문이다. 고선지의 탈라스전투에서 동에서 서로 전해진 ‘종이의 보급’, 이어지는 인쇄술의 발전, 그후 유럽의 르세상스와 종교개혁까지. 이 거대한 인류 문명사의 전환 속에는 언제나 ‘실크로드’가 있다. 동과 서를 이어 문명사적 전환을 만든 중앙아시아가 있는 것이다.   


예일대 바이네키 도서관 내부
예일대 바이네키 도서관에서 


세계사를 바꾼 전쟁 (1) 투르-푸에티에 전투


동서 문물 교류의 관문, 제지기술 전파의 핵심사건이 된 ‘탈라스 전투’의 현장 앞에 서 있는 느낌은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이 전투가 미친 거대한 세계사의 영향을 생각하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오늘도 그저 유유히 흐르는 이 강이 다르게 느껴진다. ‘볼 것 없다(Nothing to see)’는 타라즈가 전혀 다르게 다가오는 순간이다. 해질 녁 탈라스 강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다.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 ‘이 순간’은 미처 알지 못하는 수 많은 ‘이야기’가 쌓여 미래의 ‘오늘’을 만든다. 그렇게 지나온 세계사의 ‘순간’은 비단 탈라스 전투만이 아니다. 탈라스 전투가 이슬람 문명과 중국문명이라는 두 개의 거대한 문명권의 충돌이었다면 서구의 기독교와 문명과 이슬람문명의 충돌은 이 전투보다 20년 전인 731년, 현 프랑스의 투르와 푸아티에라는 지역에서 있었다. 


8세기, 엄청난 속도로 전개되던 이슬람의 팽창을 ‘막은’ 전투는 세계사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그도 그럴 것이 이슬람의 팽창을 ‘막지 못했다’면 서구 기독교 문명권, 동양의 유교문명권 등과 같은 현재의 문명권들은 전혀 다른 지리적 형태의 새로운 역사를 만들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슬람의 팽창이 유럽을 잠식하지 못하게 만든 두 개의 왕국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그 첫 번째가 동유럽 비잔틴 제국이요, 두 번째가 서유럽의 프랑크 왕국이다. 이 두 개의 왕국이 이슬람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했기 때문에 지금 현재의 지리적 형태를 가진 ‘이슬람 문화권’이 형성된 것이다. 


711년, 이베리안 반도를 점령한 이슬람 세력은 718년 비잔티움 제국(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현 이스탄불)을 공격한다. 만약 이 전투에서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레오 3세가 이슬람군을 물리치지 못했다면 현재 그리스 및 동유럽 전역은 이미 이슬람화가 되어 전혀 다른 문명권이 되었을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만약 732년, 현 프랑스 땅에 속한 ‘투르-푸아티에 전투(Battle of Tours)’에서 프랑크 왕국의 카를 마르텔이 이슬람 우마미야 왕조를 물리치지 못했다면 지금 서유럽은 기독교 문명이 아니라 이슬람 문명권 안에 존재했을 것이다. 이 전투의 승리로 이슬람 세력의 서유럽 확장에 브레이크가 걸리게 된다. 서유럽에서는 ‘투르-푸아티에 전투’를 서유럽 그리스도교 세계를 이슬람화의 위기에서 구출한 전쟁으로 매우 중시해서 가르치고 있다. 


카를 마르텔은 이 전투의 승리로 프랑크 왕국 내에서 강력한 집권기권을 마련했으며, 이후에 그의 손자 샤를마뉴는 유럽을 통일하여 현재 EU가 추구하는 ‘하나의 유럽’의 모태가 된다. 현재 EU의 집행위원회가 있는 벨기에 브뤼셀의 빌딩 이름도 그의 이름을 따서 샤를마뉴 빌딩이다. 그러니까 ‘투르-푸아티에 전투’에서 카를 마를텔이 이슬람세력의 공격을 막았기 때문에 카롤루스의 치세가 가능했고, 그의 치세에서 서유럽 게르만-로마 문화가 독자적 문화권으로 형성될 수 있었던 것이다. 



세계사를 바꾼 전투(2) 페르시아 전쟁


역사에서 전쟁은 수많은 살상과 비극을 낳았지만 동시에 문명의 교류를 가능하게 하여 새로운 ‘문명권’을 탄생하게 하기도 한다. 어제와 다를바 없이 오늘을 흐르는 탈라스 강이 역사의 맥락안에서 완전히 다르게 보이듯, 세계사에 큰 획을 그은 전쟁에 ‘페르시아 전쟁(기원전 492~479년)’을 빼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동서양 문명의 첫 충돌을 ‘트로이 전쟁’으로 볼 수도 있지만 역사서 기반한 기록으로 본다면 동서양 문명의 첫 충돌은 ‘페르시아 전쟁’이다. 이 전쟁은 현재 이란을 중심으로 한 페르시아 문명과 현 그리스 아테네를 중심으로한 유럽문명의 충돌이자 두 가지 서로 다른 문화권의 정체성의 확립에 영향을 미친 전쟁이기도 하다.


페르시아 전쟁은 유럽 역사에서 매우 의미심장하다.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친 것처럼 작은 도시국가 시민이 거대 제국의 백성을 물리쳐 승리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만약 페르시아 전쟁에서 그리스 진영이 패했더라면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은 자유국가로 남지 못했을 것이고, 아테네에서 자라기 시작한 민주주의 싹도 개화하지 못하고 고전기 문명도 사라져버렸을 것이다. 만약 페르시아가 승리했다면 그리스를 중심으로한 서구 문명권은 또 어떤 변화가 생겼을까. 페르시아 제국은 오리엔트를 통일한 최초의 거대 제국으로 키루스 대왕 때는 관용정책을 취하여 평화와 질서를 보장하고 다인종·다문화·세계국가의 가능성을 후대에 보여주었다. 페르시아 전쟁에서의 최종 승리가 그리스가 아닌 페르시아였다면 우리는 오늘 날 전혀 다른 ‘유럽’을 보고 있을 것이다. 


전쟁은 문명의 교류와 충돌을 보여주는 극적인 사건이다. 그리고 전쟁을 통해 사람들은 그들의 삶, 가치관, 정체성 등을 성찰하기도 한다. 기원전 472년에 공연된 아이퀼로스의 비극 ‘페르시아인들’은 페르시아 전쟁을 극화한 것으로 그리스인들이 타자 페르시아 제국과 교류하고 충돌하면서 무엇을 성찰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 비극 작품은 페르시아의 왕 크세르크세스를 비극 주인공으로 등장시키고 페르시아인의 관점에서 전쟁을 재현하는 색다른 방식을 취하고 있다. 비극의 주인공을 페르시아 왕으로 삼은 점은 실로 획기적이다. ‘전쟁’이 가지는 비극과 패배의 고통을 함께 나누려는 ‘마음’을 보였다는 점은 상당히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하지만 그리스인들은 전쟁에 패배한 페르시아인들의 운명을 동정하며 함께 울면서도 동시에 그 패전의 원인을 분석해 페르시아라는 ‘타자’를 통해 우월한 ‘그리스’를 보여준다. 페르시아의 전제정치와 위계질서, 엄청난 부와 사치, 감정표현의 과도함, 무질서를 연극 속에서 보여주면서 동시에 그리스의 민주정치와 평등주의, 검약과 절제, 자기훈육과 질서, 용감함을 생각해보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동서양의 충돌이자 서양의 승리로 끝난 페르시아 전쟁은 현재의 동양과 서양의 구별, 유럽과 아시아, 그리스인과 비그리스인, 전제정치와 민주정치와 같은 수많은 ‘구별’과 ‘논쟁’의 시작점이 된 전투였다.       


언제나 전쟁은 승리한 자의 입장에서 기술되기 마련이다. 만약 페르시아 전쟁에서 그리스가 아닌 페르시아가 승리했다면 나는 지금 어떤 역사적 기술과 가치관을 가지고 세계를 바라보고 있을까? 이것이 패배했지만 전투를 대등하게 벌일 정도로 강력했던 수 많은 문명권들을 하나하나 객관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또 다시 걸어가야하는 이유다. 역사의 주역으로서의 중앙아시아의 역사를 복원하고, 세계사를 동서양의 문명교류의 흐름 안에서 통찰해야하는 이유다. 


역사의 주역으로서의 중앙아시아


나는 그동안 ‘유럽 주연, 중국 조연의 세계사’를 배웠다. 유럽 주연의 역사는 서구중심주의적 시각에서 바라본 세계사이며, 중국 조연의 역사는 정주민과 유목민의 이분법적 구분에 기인한 역사인식이었다. 그러나 어떤 단일문명도 독자적으로 생존하고 형성된 것은 없다. 그리스 로마 문명에서 서구의 기독교 사상이 탄생하고 기독교 사상에서 계몽주의가 탄생하고 계몽주의에서 근대시민사회가 시작되었다는 단선적 논리는 서구문명사적 관점에서만 바라본 것이다. 기독교 사상 중심의 중세를 무너뜨린 계몽주의가 기독교 사상에서 나왔다면 과거의 기독교사상과 다른 사고를 가능하게한 외부의 어떤 영향이나 새로운 사상적 바탕이 있었을 것이다. 기독교사상이라는 견고한 틀을 가졌던 천년의 중세를 무너뜨린 그 혁신성과 창조성은 중앙아시아 실크로드에 있었다. 그리스-로마 문명으로 대표되는 서구 문명은 그 자체의 독자성을 가진 문명이 아니라 중앙유라시아 페르시아 문명에 빚을 지고 있다. 정주민 중화 문명으로 대표되는 한(漢)나라의 문명은 미개하고 야만적인 오랑캐들과 철저히 차별된 문명이 아니라 중앙아시아의 유목문명과의 교집합 안에서 가능했다. 우리가 이란이라는 거대 페르시아 문명을 포함한 중앙유라시아를 포괄하지 못한채 세계사를 바라봐야하는 이유다. 


중앙유라시아 지역의 이란을 중심으로 한 고대 페르시아 제국은 로마와 끊임없는 경쟁 및 협력관계를 가졌다. 현재의 내, 외몽골 지역을 무대로 흉노는 한(漢) 나라와 치열한 각축을 벌이며 화친과 전쟁을 반복했다. 흉노의 후예인 훈족은 게르만족의 이동을 촉발시켜 유럽을 새로운 사회로 변화시켰다. 그리고 몽골은 변방에서 일어나 주변의 문명세계를 유린하고 동서를 하나로 통합하여 세계사의 물줄기를 바꾸어놓았다. 이렇게 중앙유라시아의 역사는 특정한 경계를 초월하여 어떤 움직임이 끊임없이 되풀이되고 뒤섞이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복합역사이며 동서양의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는 역할을 담당했다.  


중앙유라시아는 예로부터 동서를 잇는 교역로로 끊임없는 물자의 이동이 있던 지역이다. 물자의 이동은 필연적으로 문화와 사람의 이동을 수반하며, 이 과정에서 물자 중개를 담당한 이 지역 오아시스 정주민은 동과 서의 신문화를 가장 빠르게 접할 기회를 얻었다. 이들은 중국인에 앞서 서방에서 발생한 종교를 받아들이고 서아시아와 유럽인에 앞서 중국의 제지 기술을 체득한다. 선진 문화의 수용은 자연스럽게 새로운 문화창조로 이어졌으며 특히 중개무역을 통해 모은 경제력은 오아시스민들이 동서양의 외래 문화를 통합하여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는 밑거름이 된다. 간다라미술과 이슬람문명은 모두 새로운 문화를 창조한 밑거름이 되었고 이들은 이렇게 동서 두 세계에서 흡수한 이질문화와 스스로 창초한 혼합문화를 세계로 전파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몽골제국은 정주문명의 혁신세력으로 기동력과 군사력을 가진 유목민과 동서 문화교류의 전파자 또는 혼합된 신문화의 창조자로서의 오아시스 정주민이 가진 경제력과 문화력이 동서문명의 접합지점에서 가장 성대하게 통합되어 꽃피운 제국이었다. 몽골제국은 동서문명을 하나로 통합하고 정주민과 유목민을 연결시키면서 이 거대한 제국을 연결하는 실크로드에 ‘이동의 안전성’을 가져온다. 이 과정에서 중국의 인쇄술, 화약, 나침반등이 서양으로 전해지면서 중세를 떠받치던 봉건제도와 기독교문명에 새로운 균열을 만들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천년의 중세를 무너뜨린 그 혁신성과 창조성은 원천은 바로 중앙유라시아의 몽골제국이었던 것이다.


 만리장성 북쪽을 야만인, 오랑캐의 나라로 규정하며 만리장성 이남의 문명화된 정주민의 역사만을 바라본 것은 중화중심주의적 사관에 입각한 편협한 관점이다. 중국 최초의 문명이라고 일컬어지는 은나라와 주나라의 문명은 유목세계와의 접촉을 통해 형성된 것이며, 수나라와 당 제국의 출현도 5호16국 시대라는 유목 세계와 정주세계가 융합된 결과물이다. 그밖에 선비, 유연, 돌궐, 위구르를 비롯한 몽골 고원에서 활동한 유목민 집단은 중국과 주변 세계에 크고 작은 영향을 미치며 상호 발전해왔다. 


그러므로, 중앙유라시아를 이해하는 것은 서구 중심의 사관에서 탈피하여, 유럽주연의 역사를 ‘동서 문명교류사의 주인공’을 공동주연으로 하는 역사로 바꾸는 작업이다. 동시에 문명국 중국만이 중심이 되었던 정주민 중심의 역사에서, 주변국-오랑캐국이 함께 교류한 유목민의 역사를 끌어내는 작업이기도 하다. 동양과 서양은 어떤 교류도 없이 서로 독자적으로 자생한 문명이 아니며, 유목민과 농경민 역시 상호 영향을 주고 받으며 인류의 역사를 움직여왔다. 동양과 서양, 유목민과 농경민을 이분법적으로 구별하여 각각을 하나의 수레 바퀴로만 생각하는 한, 우리는 절대 입체적으로 완성된 하나의 마차, 즉 통사적 관점의 세계사를 볼 수 없다. 개별 부품으로서의 수레바퀴인 동과 서, 유목민과 농경민을 연결시키는 접합체가 바로 ‘중앙 유라시아’인 것이다.


오늘 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실크로드라는 단어를 들으면 중국 서안에서 로마로 연결한 하나의 단일 경로의 길만을 떠올린다. 그러나 이것은 중국중심의 역사안에서만 ‘실크로드’를 이해한 편협한 관점이다. 실크로드는 출발지와 도착지가 하나로 그어진 단선도로가 아니다. 실크로드는 동서를 관통하는 3개의 간선과 남북을 관통하는 5개의 지선을 포괄한 세계의 거대한 네트워크였다. 동서를 연결하는 3개의 주요 간선은 초원로, 오아시스로, 해양로로 나누어지며, 여기에 다시 남북을 연결하는 5개의 지선이 교역물품에 따라 마역로, 라마로, 발타로, 메소포타미아로, 호박로로 세분화된다. 유라시아 대륙의 북방초원을 횡단하는 초원로, 중국에서 중앙아시아를 관통하여 로마까지 이르는 오아시스로, 중국 항저우에서 인도차이나 반도를 거쳐 바그다드 또는 로마로 이르는 해양로를 일컬어 동서를 연결하는 실크로드 3대 간선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바닷길을 제외한 모든 육상길은 중앙유라시아 지역을 관통하고 있다. 남북을 관통하는 5개의 지선은 어떠한가. 몽골 카라코름에서 장안과 베이징으로 연결되는 마역로, 중국 고창 투루판에서 티베트 라싸, 북인도 시킴까지 내려가는 라마로,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에서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 사마르칸트에서 아프카니스탄을 지나 중인도까지 이어지는 붓다로, 코카서스 북부 조지아의 수도 트빌리시와 이란 타브리즈, 바그다드로 이어지는 메소포타미아로, 그리고 러시아 모스크바, 우크라이나 키예프를 거쳐 터키 이스탄불과 에페수스까지 이어지는 호박로- 이렇게 남북을 연결하는 다섯개의 지선 역시 모두 중앙유라시아 지역을 관통하고 있다. 문제는 이렇게 21세기 네트워크 시대의 원형을 간직한 실크로드의 중심지, 중앙유라시아를 우리는 여전히 하나의 거대한 문명권으로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 위대한 실크로드의 길 위에서 동서교역의 중심지였던 중앙아시아와 이란은 세계사에서 다루는 비중이 낮다. 


중앙유라시아라는 명칭과 이 지역이 우리에게 너무도 낯선 것은 여전히 우리가 19세기 서구중심적 관점의 세계관과 20세기 1,2차 세계대전이후 만들어진 냉전적 사고의 틀 안에 머무르고 있기 때문이다. 냉전적 사고의 틀을 벗어나 분단된 한반도라는 지리적 관점을 떠나면 중앙유라시아가 보인다. 이 위대한 실크로드 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보인다.  


탈라스 강에서 페르시아 문명과 이슬람 문명을 가진 거대한 제국, ‘이란’까지 생각이 이어진다. 동서양 문명 교류의 ‘중앙’에 서 있는 나는 이 위대한 ‘실크로드’ 가 전하는 소리를 듣는다. 모든 역사의 순간들이 이 위대한 길 위에서 만들어졌고 상호 교류하며 발전해 왔노라고. 길 위에서 ‘세계사’를 ‘흐름’을 읽지 않고 하나의 ‘사건’으로 단절해서 보는 한 타라즈는 ‘볼 것 없는’ 무의미한 ‘공간’이다. 내 앞을 흐르는 이 강은 그냥 어느 도시에나 다 보이는 물줄기일 뿐이다. 그러나 실크로드라는 위대한 역사의 길 위를 흐르는 탈라스 강은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닌 공간으로 ‘지금’을 ‘특별하게’ 선물하고 있었다. 


아이샤 비비에 대한 전설


한참을 강을 바라보며 앉아있다보니 벌써 시간이 많이 지났다. 다시 시내로 들어오는 버스를 탄다. 세계사를 바꾼 전쟁 이야기는 ‘만약’ 다른 한쪽이 이겼더라면 어땠을까하는 다양한 상상을 가능하게 한다. 그래서 그런지 ‘가정’이라는 ‘상상’이 만드는 복잡한 시나리오에 즐거움이 있다. 하지만 지나치게 복잡한 시나리오를 이리저리 생각해 본 탓일까. 한참 머리로 생각하고 나니 문득 전 인류를 통틀어 ‘공통된 마음’에 호기심이 간다. 그 ‘공통된 마음’이 바로 남녀 간의 ‘사랑’ 아닐까. 간절히 사랑하는 두 연인이 함께 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안타깝다. 이 감정은 문화, 종교권과 무관한 인류의 공통점이다. 그렇게 사랑하는 두 사람이 서로 맺어지지 못할 때 다른 사람을 만나면 더 행복하리라고 말하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그 어떤 문명권이든 사랑하는 두 사람이 오래 함께하며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은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탈리아의 베로나에는 쥴리엣의 집이 있고, 중국의 항주에는 당완과 육우의 사랑이야기가 있는 심원이 있다. 그리고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러한 사랑이야기는 언제나 수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면서 시간을 옷을 입고 더 애뜻하게 각색되어진다. 여기, 내가 있는 타라즈에서 11킬로 떨어진 곳, ‘아이샤 비비’라는 마을에도 슬픈 러브스토리가 전한다. 


타라즈에서 버스를 타고 종점에서 내려, 다시 또 쉐어택시를 타고 한참 들어가야 나오는 마을이 바로 ‘아이샤 비비(Aisha Bibi)’라는 마을이다. 이 마을의 이름은 이 마을에 안장된 아이샤를 기리기 위해 그녀의 이름에서 따왔다. 아이샤 비비의 이야기는 모든 카자흐인들이 알고 있을만큼 유명한 러브스토리이다. 서투르키스탄 지역, 타라즈의 영주였던 젊은 카라한은 1050년, 공무가 있어 사마르칸트를 방문한다. 많은 사람들은 그가 용맹하다는 소문을 듣고 모두 그를 보러 거리로 나왔다. 그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빼어나게 아름다운 용모를 지닌 미녀가 카라한의 눈에 들어왔다. 그녀가 바로 ‘아이샤’였다. 그녀는 사마르칸트 영주의 딸이었다. 그들은 서로 첫눈에 반해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이내 타라즈가 외부의 침입자들로부터 위협을 받게 되었다. 카라한은 타라즈를 지키기 위해 돌아가야만 했고, 그들의 만남은 더 이상 이어질 수 없었다. 


떠나기 전에 카라한은 아이샤의 아버지에게 그녀와 결혼을 허락해 달라고 정중히 요청하였으나 그는 카라한에게 모욕적인 말을 내뱉으며 그를 내쫓았다. 아이샤의 아버지는 단호했다. 그는 보잘 것 없는 카라한에게 절대로 딸을 내어줄 수 없다고 했다. 12세기, 실크로드는 카라한 조에 의해 지배되고 있었다. 카라한 조는 투르크계 유목민들을 중심으로 세워진 왕조로 투르크계 최초로 이슬람을 수용하여 투르크-이슬람 문화가 꽃 핀 곳이다. 카라한조는 크게 동서로 나뉘어 있었는데 서카라한조의 중심지가 바로 사마르칸트와 부하라였다. 당시 부족연합체적인 성격을 갖고 있던 카라한조에서 사마르칸트와 부하라의 지배자는 정통성, 군사력, 경제력에서 다른 지역의 지배자들 보다 확실한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당시 타라즈가 실크로드의 거점으로 무역을 통해 큰 이익을 보았다고는 하지만, 과거부터 실크로드의 중심지로 번영을 누려오던 사마르칸트나 부하라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사마르칸트의 지배자였던 아이샤의 아버지의 입장에서 보면, 타라즈의 영주인 카라한은 작은 동네 골목대장 정도로 보였을 것이다. 아버지의 극심한 반대로 인해 그렇게 그 둘은 서로에게 작별을 고해야만 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사랑이 외부의 반대로 쉽게 없어질 감정은 아니었다. 작별 후 오랜 시간동안 카라한에게 아무런 소식도 듣지 못한 아이샤는 그녀의 아버지에게 자신의 사랑을 털어놓고 카라한과의 결혼 허락을 받기로 결심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그 말을 듣고 격노했다. 그는 아이샤에게 저주를 걸면서 그가 살아 있는 동안 결혼을 승낙할 수 없다고 잘라말했다. 그러나 그녀의 어머니는 그녀의 딸의 행복을 바랐다. 그녀는 아이샤에게 남자 옷을 주고 좋은 말을 내어주며 아이샤가 카라한에게 갈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녀는 아이샤를 위해 바바자 카툰(Babadzha Katun)이라는 이름의 늙은 유모까지 동행시켰다. 두 여인은 타라즈가 수평선 위로 몽롱하게 보일 때까지 몇 개월이고 달렸다. 타사리크(Tasaryk) 강변에서 아이샤는 목욕을 하고 새 드레스로 갈아입었다. 


이 드레스는 카라한과 결혼하는 순간만을 고대하며 아이샤가 직접 짠 것이었다. 그러고 나서 그녀는 머리장식인 사우켈레(saukele)를 안장에서 꺼내 머리에 썼다. 그런데 그 순간, 독사가 그녀의 뺨을 물었다. 맹독은 순식간에 몸에 번졌다. 아이샤는 주저 않았다. 그녀는 유모에게 얼른 카라한에게 가서 그녀의 도착을 알려달라고 말했다. 그러나 늙은 유모는 아이샤의 바람처럼 빨리 달리지 못했다. 늙은 유모가 카라한과 성직자를 데리고 왔을 때, 아이샤는 가뿐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녀의 목숨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았다. 카라한은 절망하며 그가 그녀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음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성직자에게 결혼을 부탁했다. 성직자는 흔쾌히 승낙하며 그 결혼의 증인이 되기로 했다. 아이샤는 죽기 전에 온힘을 다해 결혼을 승낙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샤는 죽기 전에 카라한의 아내가 될 수 있었다. “아이샤 비비”는 “결혼한 아이샤”라는 뜻이다. 카라한은 생애 다른 누구도 사랑하지 않고, 다른 이와 결혼하지 않기로 맹세했다. 그리고 그는 그 약속을 지켰다. 현명하고 공정하게 타라즈를 다스린 그는 훗날 “정의로운 아버지”라는 뜻을 가진 “아울리에 아타(Aulye Ata)”라는 칭호로 불리며 명군으로 추앙받았다. 그는 아이샤가 죽은 자리에 아름다운 묘지를 짓도록 명령했고, 오늘 날 이 묘지는 ‘아이샤 비비’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아이샤 비비 무덤
아이샤 비비를 위한 기도당의 창문에서 본 아이샤 비비 무덤


소박하지만 정교하게 아름다운 아이샤비비의 무덤에서 눈을 뗄 수가 없다. 큰 규모는 아니지만 지금까지 본 그 어떤 무덤보다 아름답게 느껴진다. 온 마음을 다해 바친 ‘선물’을 본 느낌이랄까. 변치 않는 사랑을 지키려 한 카라한의 ‘마음’과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한 아이샤의 ‘마음’이 이 무덤 옆에 세워진 작은 기도 공간에 가득 채워진다. 그 충만한 에너지가 이 공간을 쉽게 떠나지 못하게 한다. 나는 한동안 멍하니 창문으로 아이샤 비비의 무덤을 바라다보았다. 서역 여인의 아름다움은 중국에서도 건륭제와 향비 이야기로 전해진다. 한창 중국어 공부를 하던 시절 재밌게 본 ‘황제의 딸’에서도 ‘향비’는 드라마에 중요한 인물로 등장한다. 그녀는 위그르 왕 아리화탁의 딸로, 카슈카르의 공주로 알려져 있다. 물론 출생신분은 정확하지는 않다.


 1759년 청군이 위구르를 정복하여 청나라 영토로 복속하면서 그녀도 전리품으로 베이징으로 압송된다. 그녀가 청나라 자금성으로 드려온 것은 그녀 나이 22살에서 26살로 추정한다. 전쟁 전 이미 향비의 존재를 알았던 건륭제는 전쟁에 나가는 장군에게 반드시 향비를 데려오도록 명했다고도 전해진다. 타고난 이국적 미고와 몸에서 나는 신비한 향비 때문에 건륭제는 향비를 무척 총애했지만 그녀는 향수병이 무척 심했다고 한다. 또한 궁중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 거의 입에 대지 못했는데 이 야기를 들은 건륭제는 그녀만을 위해 특별히 위구르에서 재료까지 공수한 음식을 만들게 하였고 위구르 전통 복장을 입도록 허락하였으며 그녀만을 위한 이슬람 사원도 세웠다. 그러나 향비에게는 청나라에 끌려오기 전 남편 혹은 정혼자가 있어서 건륭제의 지극 정성에 불구하고 항상 단검을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 지나치게 향비만을 총애한 건륭황제에게 질투한 나마지 황태후가 향비에게 자결을 명했다고 하는데 향비가 정확히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재밌는 것은 향비의 무덤은 2개인데 건륭제가 묻힌 능묘에도 향비묘가 있고 신강 위구르 자치주에 있는 카슈가르에도 그녀의 묘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카슈카르에 있는 향비묘는 개인묘가 아니고 이 지역 종교귀족 72인이 함꼐 안장된 묘인데 사람들은 향비묘라고 부른다. 아이샤비비와 카라한과의 로맨스와는 달리 향비와 건륭제의 관계는 패전국의 설움과 여성의 아픔이 더 강하게 느껴진다. 아직도 중국 신강 위구르 자치구에서는 중국정부에 대항하여 독립운동의 움직임이 있는 걸보면 지역으로 복속은 되었을 지언정 문화적으로 얼마나 두 문명이 이질적인지를 생각해보게 한다. 중국은 지금도 육로로 위구르 자치구로 들어가는 여행자에게 쉽게 비자를 내주지 않는다. 


키르르스스탄의 수도 비슈케크 호스텔에서 나는 육로로 중국으로 들어가는 비자를 발급받지 못하는 수 많은 여행자들이 발길을 돌리는 모습을 목격했었다. 자국에서 모든 증빙서류를 준비하여 따로 비자수속 신청을 하기 전까지 육로로 국경을 통과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중국이 얼마나 위그르 지역에 접근하는 것이 예민한지를 알게하는 부분이다. 중앙아시아에서 과거 ‘서역’이라고 불린 지역이 갖는 문명적 이질성을 몸소 느끼지 않았다면 중국정부가 가지고 있는 강압성과 폭압성을 나는 정확하게 보지 못했을 것이다. 중국은 역사학과 고고학 모든 분야에서 신장 위구르 지역에 대한 연구를 외국인에게 불허한다는 이야기도 현지에서 들을 수 있었다. 길을 내지 않고 개방하지 않는 문명, 벽을 쌓아 닫는 문명은 시들어 사라짐을 실크로드는 전하고 있다. 일대일로로 새로운 실크로드를 만들겠다고 공헌하는 중국정부가 반드시 새겨 들어야하는 부분이다. 


아이샤 비비 무덤은 도심에서 멀리 떨어져있는데도 사람들이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천년이 지난 시간, 수 천키로 밖의 이방인까지 감동시키는 이 ‘사랑’의 힘은 분명 ‘전쟁’보다 위대하다. 타라즈 전투가 있던 현장에는 홀로 바람을 맞으며 외로이 서있었는데 아이샤 비비는 외로울 틈도 없이 수많은 조문객이 전 세계에서 몰려와 그녀를 찾는다. 동서 간의 교역과 만남 속에서 다양한 이야기를 전하는 통로였을 실크로드 도시, 타라즈!

 

다시 시내로 들어가 식사를 하고 나고 나오니 멋진 종교 건물 두 개가 바로 1미터 정도의 거리를 두고 마주하고 있다. 이슬람 모스크와 러시아 정교의 성당이다. 세계사에서 이슬람교와 기독교는 끊임없이 서로를 미워하며 전쟁했다. 그 전쟁은 ‘문명의 충돌’이라는 이름아래에서 아직도 끝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모든 종교의 본질은 갈등과 전쟁보다, 조화와 타협, 포용과 용서를 주장한다. 여기에 종교가 가지는 위대한 철학이 있다. 너무도 자연스럽게, 전혀 이질적이지 않은 모습으로 같은 듯, 다르게 마주하고 있는 모스크와 성당! 조용히 성당 안으로 들어가보니 머리에 스카프를 두르고 기도하는 한 소녀가 보인다. 세계사를 바꾼 거대한 전투 현장, 그 역사적 장소인 타라즈에서 ‘오늘’을 사는 21세기, 실크로드 후예는 전한다. 이질적인 다른 문화가 어색함 없이 전해지며, 종교도 마음껏 자유롭게 스스로 선택할 자유, 그 거대한 포용성이 곧 위대한 실크로드의 힘이라고. 푸른 하늘 만큼이나 상쾌하게 가벼워진 마음이 이 작은 도시에서의 하루를 그 어떤 날보다 ‘의미있게’ 만들고 있다. 이 어매이징하게 ‘볼 곳 있는(Something to see)’ 옛 실크로드 도시가 무척이나 감사한 하루가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1미터 간격으로 서 있는 모스크와 러시아정교회 성당
1미터 간격으로 서 있는 모스크와 러시아정교회 성당
성당에서 기도하는 카자흐스탄 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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