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아시아 민주주의의 섬
비슈케크의 봄, 민주주의의 희망곡
텐산 산맥 설산에서 녹은 물이 대지를 적신다. 물을 한껏 머금은 들판은 초록빛 파도가 되어 넘실거린다.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는 소들의 걸음이 마냥 여유롭다. 거대한 설산은 아직 눈도 녹지 않는 겨울인데 바로 앞 전경은 온통 푸른 대지의 향연이다. 비슈케크 공항에서 시내로 가는 길은 봄의 전주곡이다. 이 땅의 ‘봄’이 전하는 거대한 오케스트라의 서막이다. 그 선율은 거대한 설산처럼 장엄한 민중의 외침을, 기나긴 압제의 얼음이 녹아 부르는 민중의 희망을 전한다. 거기엔 자유와 민주주의를 담은 비슈케크의 푸른 봄바람이 있다. 얼어붙었던 대지에 피어나는 싱그러운 튤립의 향기가 있다. 중앙아시아 민주주의 섬, 비슈케크만이 전할 수 있는 봄이 그렇게 선물처럼 다가온다. 봄 향기 가득한 비슈케크의 소박한 시내풍경에 마음까지 따뜻해진다. 이렇게 소박하고 정겨운 느낌의 수도라니. 그야말로 신선한 첫 인상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렇게 시골 같은 평화로운 공간에서 민주혁명이 두 차례나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중앙아시아 국가 대부분이 장기집권 독재국가인 것을 감안하면 놀라움은 배가 된다.
카자흐스탄의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은 27년째, 타지키스탄의 에모말리 라흐몬 대통령은 20년째 집권하다 최근 아예 종신 대통령이 되었다. 우즈베키스탄은 2016년 9월3일 이슬람 카리모프 대통령이 사망하며 25년간의 1인 독재에서 벗어났다. 투르크메니스탄은 2006년 사파르무라트 니야조프 대통령이 심장마비로 숨진 뒤에야 종신 대통령제를 청산했다. 중앙 아시아에서의 독재란 대통령의 죽음으로만이 끝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환경 속에서 민주주의의 꽃을 피우고 혁명에 성공한 나라가 바로 키르기스스탄이다. 2005년 키르기스스탄 국민들은 1991년 소련 해체 직후부터 장기 집권해온 아스카르 아카예프 대통령을 몰아내고 독재를 종식한다. 그들은 이 혁명을 ‘튤립혁명’이라 명명했다. 이는 2003년 조지아(그루지야)의 장미혁명, 2004년 우크라이나의 오렌지혁명에 이어 세 번째로 옛 소련 지역에서 일어난 무혈혁명이었다. 그 후, 키르기스스탄은 중앙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의원내각제를 채택했으며 야당과 연립정부를 구성했다. 그래서 키르기스스탄은 민주주의의 불모지라고 할 수 있는 중앙아시아의 ‘민주주의 섬’이다. 키르기스스탄의 수도, 비슈케크는 바로 그 혁명의 진원지, 중앙아시아 ‘민주주의의 심장부’인 것이다.
비슈케크에서 만난 북한의사
소개를 받은 호스텔이 있어 장소를 찾아가니, 호스텔 주인과 영어가 통하지 않는다. 언어는 통하지 않지만 반갑게 맞아주는 그 마음은 고스란히 전해진다. 마음이 한켠이 따뜻해져온다. 종이를 가져와 주소와 전화번호를 적어주며 주머니에 넣어준다. 나이 꽉찬 다 큰 애를 마치 스무살 아이인냥 걱정하는 마음이 꼭 엄마같다. 따뜻한 차 한잔을 타주시면서 내일 갈 병원 이야기를 성제에게 들었다며 데려다 주겠다고 음성 번역기로 떠뜸떠듬 이야기하신다. 사실 비슈켁에서의 숙소는 사리모골에서 만난 윤성제 선생님의 추천으로 알게된 곳이다. 이 지역 필드워크로 장기간 체류하신 윤쌤의 소개로 이 곳을 찾게 되었고, 동시에 여기서 북한에서 파견된 한의사가 있다는 사실도 알게되었다. 비슈켁에 가면 꼭 들리라는 윤쌤의 당부가 있어서 한번 찾아갈 생각이었는데 이미 호스텔 주인에게도 전화를 해주신 모양이다. 먼저 알고, 데려다 준다고 친절하게 말씀해주신다. 비슈켁은 생각보다 영어가 잘 통하지 않는다. 거의 음성번역기에 의존하면서 다니고 있는데 북한에서 파견된 의사가 있는 병원으로 가니 한국어가 너무도 잘통한다. 진맥만 잡고도 몸의 이상부위를 전부 술술 이야기하신다. 말을 타면서 다섯번이나 크게 떨어진 공원국 선생님과 윤성제 선생님은 타국에 나와있는 상황에서 이 북한 의사분에게 진료를 받고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했다. 나는 아주 오랜 시간 만성 척추측만으로 고생중이다. 위장도 좋지 않아 소화기능에도 문제가 있는데 진맥을 하자마자 몸 전체의 문제점을 하나하나 짚어주신다. 척추측만증도 20일 정도의 매일 치료가 있으면 어느정도까지 돌릴 수가 있다고 하신다. 선생님은 10대 때 이미 자기를 만났으면 이 지경까지는 가지도 않았을 거라며 안타까워하셨다.
“거 젋은 양반이 안됬구만요. 허리가 이래서 몸 전체 균형이 다 틀어져 있네. 내가 끝까지 책임지고 치료를 해줄수가 없시오. 믿고 와줬는데 안타깝게 되었습니다. 이번주에 돌아가야합니다.”
고칠 수 있는 의사가 있고, 고칠 수 있는 돈도, 시간도 있는데 나는 고칠 수가 없다. 비슈케크에서 만난 김철남 북한 의사 선생님은 이번주에 북한으로 다시 들어가셔야 한다고 했다. 본인이 원한다고 연장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당에서 외화벌이로 파견한 의사이기 때문에 선택의 자유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의사 선생님이 계신 곳이 ‘북한’이라 갈 수가 없다. 한동안의 정적이 흐른다. 오늘 보면 나는 이 분을 다시 뵙고 싶어도 언제 볼 수 있을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3년 전, 중국과 북한, 러시아의 3개 국경이 접하는 방천이란 도시에 아버지와 함께 갔을 때도 단 한발짝 앞에 북한이 있었지만 건널 수 없었다. 가장 가까운 한 나라가 이렇게 멀리 돌아가야만 한다는 사실도 처절하게 괴로운데, 돌아가도 들어갈 수 없다는 사실은 더욱 절망을 가중시킨다. 이렇게 들어갈 수 없는 땅이 된 북한에 대해서 외부에 의해 만들어진 ‘이미지’들은 생각보다 일관성있게 ‘불량국가’, ‘최악의 나라’로 낙인 찍혀 있는 듯하다. 마치 우리가 ‘이란’이나 무슬림 국가들에 대한 선입견을 갖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그러나 내가 만난 배낭여행객들은 하나같이 ‘이란’을 최고의 나라로 뽑았다. 재맜는 것은 이렇게 엄청나게 많은 나라를 여행한 베테랑 여행자들도 한반도에 대한 편견이 상당하다는 것이었다. 그들이 나에게 던진 첫 질문은 “북한도 너희와 같은 언어를 쓰느냐”는 것이다. 유럽인들의 남한과 북한에 대한 인식은 어떤것일까. 정리하면 이렇다. 유럽은 지극히 당연한 ‘선’이고 북한의 김정은은 지상에서 사라져야 할, 인류를 해롭게 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나는 어떤말을 해줄수있을까. 이들의 얘기를 조용히 들어준 후 나는 이렇게 질문을 던졌다. “그렇다면, 외계인이 볼 때 유럽인이 만약 악이라고 한다면 당신들 유럽인을 모두 죽여도 좋은가?” 대답이 없다. 질문은 이어진다. “북핵위험을 악의 근거로 제시하는데 그렇다면 핵은 최초에 누가 만들었나. 그 핵으로 누가 사람을 죽게 하였나.” 그러자 미국이라 대답한다. 나의 질문은 이어진다. 그렇다면 소련 미국 유럽 등은 핵을 만들어도 되고 정권의 생존 위협에 놓인 북한은 안되는 이유가 무엇일까. 선과 악의 실체란 존재하는가? 만약 존재한다면 그것은 사람의 인식속에 존재한다. 안중근과 이또 히루부미가 좋은 예이다. 안중근은 우리 민족에겐 영웅이요 이또 히로부미는 한반도 침략의 원흉이다. 그러나 일본인들에게 안중근은 대정치가 이또 히로부미를 죽인 테러리스트가 된다. 니체의 말처럼 도덕 또한 해석에 불과한 것이다. 천동설이 지동설에 의해 대체되듯, 사람들이 믿는 진리란 착각일 수 있는 것이다.
카라콜로 가는 합승택시를 탔을 때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이 합승택시의 승객이 나에게 내가 한국인라고 하자 South(남한)냐 North(북한)냐 묻는다. 물론 영어가 제대로 통하지는 않는다. 못 알아듣지만 이들의 대화를 들으니 “푸틴, 시리아, 이라크, 사담후세인, 아메리카, 나가사키, 히로시마” 등의 단어들이 들린다. 아마도 미국을 비판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사실 키르키즈스탄은 남한보다는 북한이 더 가까운 나라일 수 밖에 없다. 이 나라는 구소련에 속해있었던 나라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 후에도 여러 차례 만나는 사람마다 남한이냐 북한이냐를 묻는 질문을 받았고, 그때마다 내가 남한이라고 이야기하면 사람들은 북한에 대해 몹시 부정적인 이야기들을 건넨다. 아마도 북한 지도자의 비 도덕적인 행위들, 예컨대, 장성택 처형, 김정남 살해 등의 뉴스를 이들은 메스컴을 통해 익히 들었을 것이고, 또 핵무기, 미사일 실험 등의 뉴스를 통해 북한이 얼마나 위험하고 부도덕한 나라이며 심지어 악의 축의 국가라는 인식을 강하게 하고 있었다. 나는 이런사람들의 이야기에 결코 즐거운 마음이 들 수가 없다. 남북한 분단도 서러운데 다른나라 사람들이 남북을 가르고 북한을 욕하는 것이 마치 미운 형제이지만 남이 내 형제를 욕하는것이 마땅치않듯 세상사람들이 북한에 대해 부정적인 말과 비판을 쏟아부을 때 내 마음은 결코 편할 수가 없는 것이다.
북한에 대해 비교적 우호적인 태도를 수 년간 지녀왔을 키르키즈스탄사람들에게 북한의 핵무기 개발은 용인될 수 있는 사건이 아니었을까. 이들은 이라크 후세인의 몰락, 죽은 리비아 전대통령 알 카다피 등등 미국의 비핵 정책에 협조했다가 죽임을 당한 지도자들의 사건을 잘 알고 있을 것이고 핵무기를 개발한 나라도 미국이고 그 핵을 사용하여 수많은 민간인까지도 죽게한 나라가 미국임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는 것 아닐까. 그렇다면 나는 이들에게 북한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나는 이들에게 질문을 던져본다. 북한 지도자들은 왜 핵과 미사일 도발을 계속할까요?라고. 북한 지도자들은 국가발전 전략으로 ‘핵, 경제병진 노선’을 내세운다. 핵과 미사일의 이차 타격능력이있으면, 외부로부터의 위협을 제거할 수 있고 경제문제를 해결하면 내부의 도전도 없앨 수 있다는 판단 하에 북한 지도자들은 이 노선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남북한을 떠나서 중립적인 나라의 입장에서 한반도를 바라보면 섬나라화 되어버린 남한 속에서 바라보는 북한과 전혀 다른 인식이 가능하지 않을까. 좀더 냉정한 시선으로 남북한을 바라보자. 조선반도의 비핵화는 사실 김일성 김정일의 유훈이었다. 핵무기 금지 조약이 1917년 7월 유엔총회에서 채택되었는데 핵무기개발과 비축 및 사용위협등을 전면금지하는 내용이다. 법적 구속력을 갖는 조약의 형태를 갖추어 핵무기 자체를 불법화한다. 이는 기존의 핵 비확산 조약(NPT)의 불평등성을 극복한 조약이다. 핵 국가의 핵은 용인한 채, 비핵국가만 핵을 개발하지 말라는 비확산 조약의 모순은 한반도에서 첨예하게 드러나고 있지 않은가. 핵무기 금지조약은 이러한 핵 비확산 조약의 모순을 넘어 모든 핵무기를 불법화하여 진정한 의미에서 핵무기 없는 세상을 지향한다. 그렇다면 미국과 한국, 북한, 일본 모두가 환영해야할 조약아닌가! 하지만 오스트리아, 브라질 등이 주도하여 세계 141개국이 참여한 이 조약에 미국도 한국도 북한도 참여하지 않고 있다. 서재정 교수에 의하면, 미국은 핵무기 없는 세상을 주창한 오마바행정부때부터 이 조약의 협상자체에 반대했다는 것이다. 이 뿐 아니라 나토 및 한국과 일본등 동맹국의 결의안 반대를 요구까지했다는것이다. 오바마의 모든 정책을 뒤집는데 바쁜 트럼프 행정부도 유독 핵무기 금지조약은 오바마 정부의 정책을 계승하여 협상과정에 아예 참여하지 않았다. 한국도 북도 일본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의사선생님은 여기 머무르는 짧은 시간동안 할 수 있는 것을 다해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허리는 치료시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에 지금 무언가를 하는 것이 크게 의미가 없을 거라 했다. 나는 내 허리보다 나에게 주어진 이 상황이 더 괴롭다. ‘이동의 자유’가 없는 분단이란 대한민국의 구조적 현실과 ‘선택의 자유’가 없는 북한의 체제적 현실은 말한다. 민주주의와 자유를 지켜가는 운명이 어찌 이 나라만의 과제겠는가. ‘자유’를 지켜가는 것은 인류의 숙명이다. 언제 다시 볼 수 있을지 모를 만남은 그렇게 마음의 빚으로 비슈케크에 남겨졌다. ‘북한으로 치료받으러 오시지요’란 약속도, 연락처도 받지 못한 채, 문을 닫고 나가려는 순간 들리는 말에 한 동안 마음이 먹먹해진다.
“끝까지 책임지고 치료해주지 못해 미안합네다.”
노력없이 지켜지는 것은 없다. 자유와 평화의 길을 끝까지 지속하고 지켜가는 것은 인류가 함께 지향해야하는 가치이다. 일상 속에서 평범한 시민 그 누구도 이동과 선택의 자유를 구속받지 않는 사회, 그 가치를 지켜가는 일이 훨씬 어렵고도 소중한 일임을 다시금 깨닫는다. 혁명의 땅, 비슈케크는 말한다. 혁명의 성공보다 혁명의 가치를 끝까지 지켜가는 것이 인류 공동의 숙제임을. 인류가 그 가치를 함께 지켜나갈 때 바로 거기에 ‘희망’이 있음을. 기약없는 말 속에 그래도 다만 희망을 담아 대답한다.
“선생님께 다시 진료받으러 너무 늦지 않게 가겠습니다. 건강하십시오. “
비슈케크의 전승절 행사
5월 9일은 2차 세계대전 승전국의 전승절 행사가 있는 날이다. 키르기스스탄의 비스케크에도 축하 퍼레이드가 승리광장에서 오전 10시부터 열린다. 오전 일찍 숙소를 나와 승리광장으로 향한다. 벌써부터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다. 옛소련 군복을 입은 사람들과 키르기스스탄 국기를 들고 나온 아이들이 눈에 띈다. 피켓에는 2차세계대전에 참전한 아들, 아버지, 남편의 얼굴이 있다. 참전 시 훈장을 받은 할아버지는 자랑스럽게 군복을 입고 시내를 걷는다. 군악대의 군무와 축하행사가 열리는 승리광장 중심은 수 많은 사람들이 운집해있어 제대로 볼 수 조차 없다. 티비에 중계되는 중심행사가 끝나고 나면 사람들이 거리로 나와 피켓을 들고 걷는다. 2차 세계대전이 중앙아시아에 가지는 의미는 무엇일까?
우리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식민지였고, 일본이 패전하면서 독립이 되었으니 이 전쟁 자체를 기념하는 것이 큰 의미가 없다. 그러나 옛 소련연방 국가들이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승리를 거둔 것은 오랜 시간 거대한 유럽을 잠식한 나치즘을 종식시키고 독립을 이룬 위대한 업적이다. 아무 것도 모른채 옛 소련의 군복과 국기를 들고 나온 아이들은 마냥 귀엽다. 그러나, 전쟁이라는 것은 어떤 각도에서 보느냐일 뿐 승리가 있으면 반드시 패배가 있고 죽음과 고통이 있다. 그 투쟁의 명분이 무엇이건 처참한 비극인 것만은 사실이다. ‘영광스러운 승리’를 축하하는 이 기념일이 나에게 불편한 이유이다. 2차세계대전 승리와 위대한 군인들의 활약상은 아마도 오늘 이 나라 국민들에게 언론을 통해 지속적으로 보도될 것이다. 그러나 언론은 2차세계대전 (1939년 9월 1일부터 1945년 9월 2일)이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인명 피해와 재산 피해를 남긴 가장 파괴적인 전쟁이라는 것을 얼마나 조명할지는 의문이다. 제2차 세계 대전의 전사자는 약 2,500만 명, 민간인 희생자도 약 3천만 명에 달한다. 2차 대전 발발전, 일본 제국은 1937년 중국 침략 때 난징 등에서 대학살을 감행하여 겁탈과 방화를 일삼으며 수십만 명의 난징 시민을 무자비하게 살해하였고, 전쟁 기간 중 포로 학살 등 여러 전쟁 범죄를 저질렀다. 또한 나치 독일은 ‘인종 청소’라는 이유로 수백만 명 이상의 유대인과 집시를 학살하였다. 이렇게 보면 독일과 일본에 대항에서 이들을 항복시킨 연합군의 승리가 위대해보이지만 미국은 1945년 3월 10일 일본의 수도 도쿄와 그 주변 수도권 일대를 소이탄으로 대규모로 폭격한 이른바 도쿄 대공습을 감행해 민간인 15만 명을 살상했고, 같은 해 8월 6일과 9일에 각각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 폭탄 공격을 감행하여 약 34만 명을 살상했다. 영국 공군과 미국 육군항공대는 드레스덴 폭격과 뮌헨 공습을 감행하여 각각 20여만 명을 살상하는 등, 전쟁과는 상관없는 민간인들의 피해도 매우 심했었다. 그럼에도 ‘정의로운 전쟁’은 존재하는 것일까?
정의로운 전쟁에 대하여
‘정의로운 전쟁’이란 개념을 미국만큼 잘 활용하는 나라도 드물다. 세계 평화의 수호자임을 자처하는 미국은 2차 대전 이후 수많은 국제 분쟁이나 전쟁에 개입해왔고 그때마다 국내외의 비판에 직면해야 했다. 대표적인 개입 예를 꼽아보면, 미국은 1991년 쿠웨이트를 침공한 이라크에 대해 유엔과 함께 무력 응징에 나섰고, 2003년에는 대량살상무기 개발 의혹을 빌미로 또다시 이라크 단독 침공을 감행했다. 또 2001년 9·11 테러 사건이 터진 뒤에는 알 카에다의 근거지로 아프간을 지목하고 지금껏 테러와의 전쟁을 벌이고 있다. 역대 미국 지도자는 전쟁에 미군을 파병할 때마다 파병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 애써야겠고, ‘정의로운 전쟁’은 그 명분에 가장 합당한 것이었다. 오바마 대통령은 조지 H. 부시 전 대통령이 벌인 1991년의 이라크 전쟁은 한 나라를 침공한 대가가 어떤 것인지를 명백하게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필요했다고 했다. 그러나 오바마는 조지 W. 부시가 2003년에 벌인 이라크 전쟁은 ‘정의로운 전쟁’과는 거리가 멀다고 본다. 그렇다면 오바마가 벌였던 아프간 전쟁은 ‘정의로운 전쟁’일까?
전쟁의 정당성 여부에 관한 객관적 판단 기준을 처음으로 이론화한 사람은 프린스턴 대학의 유명한 정치철학자 마이클 월저 명예교수이다. 한평생 전쟁을 연구한 월저 교수는 특히 1977년 <정의로운 전쟁과 부당한 전쟁(Just Wars and Unjust Wars)>을 발간해 이 분야 최고 권위자가 되었다. 월저 교수는 미군의 아프간 전쟁 개입과 관련해 자신이 공동 편집인으로 있는 정치평론지 <디센트(Dissent)> 최근 호에서 비교적 소상히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아프간 전쟁은 과연 정의로운 전쟁인가?’라는 제목의 글에서 월저 교수는 미군의 아프간 개입은 처음에는 정당했다고 본다. 그렇지만 그는 부시 행정부가 들어서면서 모든 게 엉망진창이 됐다면서 그 이유를 낱낱이 열거했다. 우선 미군 병력을 충분히 보내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프간 일반 국민과는 동떨어진 세계에 사는 토후들을 통한 대리전을 벌였고,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의 군사원조를 처음에는 거부했다는 점을 들었다. 게다가 테러와의 전쟁에서 어느 정도 승리한 뒤에는 즉각 아프간 재건에 필요한 자원을 제공해야 했는데 그러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뿐이 아니다. 부시 행정부는 부패하고 무능한 아프간 정부를 지원했고, 당초 승리한 것처럼 보인 전쟁이 그렇지 않았다고 판명나자 지상군보다는 공습 위주로 전쟁을 치러 무고한 아프간 민간인을 희생시켰다는 것이다. 또 이처럼 아프간 전쟁이 수렁에 빠졌지만 부시 행정부가 8년 재임 기간 내내 이라크에만 관심을 둔 것은 치명적인 실수였다는 게 월저 교수의 주장이다. 지상군보다는 공습 위주의 전쟁을 일삼는 바람에 민간인을 많이 희생시킨 부시의 아프간 전쟁이 정의롭지 못한 전쟁이라면 지상군 3만명을 추가로 파병하겠다는 오바마의 아프간 전쟁은 과연 정의로운 전쟁일까? 이 같은 물음에 대해 월저 교수는 다소 흥미로운 화두를 제시했다. 부시 대통령이 망쳐놓은 아프간 전쟁을 바로잡기 위해 오바마 대통령이 노력하지만 ‘승리’의 대가가 너무 클지 모른다는 분석이다. 탈레반 세력을 현저히 약화시키고, 아프간 군을 육성하고 파키스탄과 협력해 국경지대의 알 카에다 세력을 근절한다면 ‘승리’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이런 목표를 이루려면 3만명 증파로는 어림없다는 것이다.
설령 3만명으로 충분하더라도 앞으로도 전쟁이 지속된다면 이런 전쟁은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오바마가 아프간 전쟁을 정의로운 전쟁으로 만들려면 철군 예정일인 2011년 8월까지 아프간에 평화를 정착시켜야 한다. 그렇지만 월저 교수는 당시 미군 철수를 주장하지 않았고, 미군이 개입해서 전쟁이 벌어진 이상 미국은 사태를 잘 수습해야 할 ‘정치적·도덕적 의무’를 진다고 강조한다. 아프간 사회에 학교가 다시 세워져 문맹인 학생들이 글을 깨우치고, 공중 보건시설이 재건되고 서양 사회에서 볼 수 있는 이런저런 단체가 생겨나기 시작한 것은 미군이 개입한 덕분인 만큼 이런 제도가 자리 잡도록 미국은 아프간을 도와야 한다는 것이다. 또 이 같은 노력이 대다수 아프간 국민의 지지를 받는다면 이런 미군의 노력은 현실적으로 성공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만약 미군이 아프간 전쟁을 제대로 마무리하지 않은 채 철수한다면 오히려 아프간 국민이 큰 피해를 보게 된다고 경고한다. 적어도 이런 인도주의 면에서 미군의 아프간 전쟁은 ‘정의’를 띤다는 게 월저 교수의 주장이다.
오바마는 2011년 8월께부터는 아프간에서 미군 철수가 시작하겠다고 했는데 과연 현재의 아프카니스탄은 그렇다면 월저 교수가 지적한 대로 아프간 전후 수습을 완전히 이루고 온 것일까? 여행금지국인 아프카니스탄에 대해 아는 아는 바가 없다. 실제 어떤 상태인지는 모르겠으나 다녀온 이란 친구의 말에 따르면 여전히 전후 복구중인 것으로 보인다. ‘정의로운 전쟁’은 어떤 이유로든지 ‘전쟁’ 자체의 당위성을 가지게 한다는 점에서 나는 찬성할 수가 없다. 이 용어는 결국 전쟁을 필연적으로 가능하게 하는 명분으로만 기능할 뿐, 이 끔찍한 모든 비극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국제정치학이 국가간 전쟁의 행위가 세력균형을 위해 당연하다는 논리에서 시작하기때문에 어떤 방식으로든 ‘전쟁’을 막는 기능과는 무관하다는 입장에서 ‘평화학’이라는 학문의 필요성이 대두되었지만 여전히 비주류이다. 평화학의 개념을 처음 제시한 것은 요한갈퉁인데 그는 학문에서의 싸움보다는 이제 미디어를 통한 전쟁의 인식의 변화를 더 집중하고 있는 듯 보인다. 그가 제시한 개념이 바로 전쟁 저널리즘과 평화저널리즘이다.
전쟁저널리즘과 평화저널리즘
우리는 세계 각지에서 일어나는 분쟁이나 전쟁내용을 보통 뉴스를 통해 접한다. 분쟁에 관한 뉴스는 대체로 한 쌍의 적대 관계를 전달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형태로 전달하는가에 따라서 이것은 인간의 인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요한갈퉁은 세계에서 일어난 분쟁을 어떤 방식으로 전달하느냐에 따라 전쟁저널리즘과 평화저널리즘으로 분류한다. 그 중 전쟁 저널리즘은 폭력, 전쟁, 승자에 맞춰진 내리막길의 저널리즘이다. 전형적인 외재적 사고의 발로로서 전쟁저널리즘에 치우친 언론의 보도는 적대관계에 집중하여 사망자의 수, 부상자의 수 등 누가 더 큰 피해를 입혔는가에 초점을 맞춘다. ‘그들’이 문제인 탓에 비인간적으로 사건을 조명하며 폭력이 발생하기를 기다려 보도를 한다. 전쟁 저널리즘이 조명하는 것은 우리의 목소리, 승리와 갈등이다. 이때 갈등은 흔히 폭력이란 말과 동일시된다. 전쟁 혹은 폭력의 저널리즘은 갈등이나 스포츠 경기 등을 다루며 ‘누가 이기고 있는가’ ‘사상자의 수, 물적 피해 등 손실의 통계치는 어떻게 되는가’에 대하여 다룬다. 한마디로 그것은 스포츠 경기의 연장선상으로서 서로를 적과 아군으로 구분한다. 평화저널리즘은 이것에 저항하기 위한 정책적 함의를 정의한 단어이다. 갈등을 조명하되 상대와 우리 입장 모두를 조명하며, 인적 사상자 및 피해에 대한 보도로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피해 역시 포함하되 원인과 문제제기 등 원인-효과 조건-결과의 사슬을 끊어내지 않고 하나로 보도한다. 평화저널리즘의 목표는 평화 지향적이라는 데에 있다. 때문에 갈등 해결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모든 편의 관점을 실음으로서 양극화의 간극을 줄이려 시도한다. 또한 그의 연장선상에 있는 진실 지향적이기 때문에 갈등의 구성을 탐구하고 갈등에 속한 엘리트만 아니라 모든 구성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한다. 평화 저널리즘은 기본 적으로 평화에 대한 옹호운동이 아니다. 다만 평화 저널리즘이란 우리로 하여금 평화적 관점이 더욱 투명하게 보이도록, 결과와 과정이 포함된 갈등 담론을 보다 널리 확산시키기 위한 목적을 가지게 하는 방향성의 일환일 뿐이다. 때문에 평화 저널리즘은 문자 안에 숨겨져 있는 진실을 읽으며 비극이 일어나지 않게 집중해야 한다. 언론인으로서는 어떠한 보도를 해야 하는가, 물었을 때 자극적이고 쉽게 사람들을 끌어 모을 수 있는 기사를 쓰는 것을 외면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기사란 읽는 사람의 생각의 틀을 무의식적으로 형성하는데 일조하는 틀이자 도구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한다. 기사를 보도함으로서 사용되는 언어 그 자체를 경계해야 하며 동시에 폭력과 갈등을 혼동하는 덫에 빠지지 않아야 한다. 갈등을 편중되지 않는 시야로 바라보고 해결을 위한 무수한 시도들을 다시 되돌아볼 때 우리는 비로소 평화로 가는 길에 헌정할 수 있는 기사를 써낼 수 있을 것이며 미디어 역시 이념지향성에 치우치지 않는 보도를 생산할 수 있을 것이다. 생각이 복잡해지는데 거리는 온통 기쁨의 미소로 가득하다. 이 정의로운 전쟁에서 승리한 조국과 아버지, 아들이 자랑스러운 사람들이다.
알타투 광장의 마나스
비슈케크의 정치적 상징, 알타투 광장으로 향한다. 활짝 핀 튤립을 상상하며 걷는데 생각보다 튤립꽃을 찾기가 어렵다. 광장은 분수에서 즐겁게 뛰어노는 아이들과 벤치에서 휴식을 취하는 시민들의 한가로운 오후를 안고 있다. 그 평화로운 풍경을 지켜보고 있는 것은 이 나라의 영웅이자, 국가의 정체성인 ‘마나스’다. 키르기스스탄 국경도시 오시에서 본 ‘마나스’를 이 나라의 수도의 중심에서도 본다. 알타투 광장 중앙에는 용맹한 마나스의 동상이 서 있다.
‘마나스’는 키르기스스탄의 민족 서사시이자 그 서사시의 주인공 이름이다. 구전 서사시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것은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오디세이아》또는 고대 인도의《마하바라타》정도일 것이다. 그러나 키르기스스탄의 <마나스> 역시 길이가 약 500,000행 이상에 달하는 장편 서사시이다. 18세기에 쓰여진 이 서사시는 티무르의 제국 이후가 분열되듯 마나스의 통합과 그의 아들 세메테이(Semetei) 와 손자 세이텍(Seytek)에 이르기까지의 민족의 통합과 분열, 회복의 과정을 서사시의 핵심으로 담고 있다. 마나스는 8~9세기에 사야노알타이(Sayano-Altai)와 예니세이(Yenisei) 지역(현재 러시아)에서 기원하였다. 오랜 시간 유목생활을 하던 키르기스 민족은 이 시기, 자신들의 국가인 대 키르기스 카나트(Great Kyrgyz Khanate)를 건립하였다. 마나스는 키르기스 민족사의 기억을 담고 있으며, 역사를 하나로 통합함으로써 전 키르기스 민족의 바탕이 되는 민족 정체성을 형성한 것이다. 특이한 것은 마나스는 키르기스에서만 볼 수 있으며, 이 서사시의 내용이나 공연 형태는 투르크-몽골 민족의 다른 작품에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세계 여타의 서사시와 달리 마나스는 무반주 음악으로 공연되며, 특이한 낭독 기법이 포함되어 있다. 마나스는 입만을 사용하여 공연하며, 구전으로 세대 간에 전승되어 왔다고 한다. 서사시의 전 내용, 구성, 등장인물, 그들의 이름이 기록이 아닌 이야기꾼의 기억력으로만 남아온 것이다. 50만 행에 이 엄청난 양이 전부 외워져 전해져왔다니 경이롭지 않은가! 이 서사시를 전하는 이야기꾼을 마나스치(Manaschy)라 한다. 키르기스스탄의 호메로스인 셈이다. 그들은 기록하지 않고 마나스의 모든 내용을 암기했는데 더욱 놀라운 것은 양도 양이지만 그 내용에 일관적 흐름이나 논리성이 없다는데 있다. 대체 어떤 틀이나 맥락이 없는 50만행의 이야기를 무슨 수로 다 기억한단 말인가. 그래서 이야기꾼들은 그것을 외울 수 있는 능력이 어떤 신성한 힘에 의해 가능하다고 믿었다. 우리나라의 무당과 같은 능력처럼 신이 부여한 어떤 특별한 능력이 마나스치에게 주어진다고 믿은 것이다. 이렇게 영적인 마나스치에 의해 전해져 온 마나스는 민족 통합, 독립투쟁과 관련된 이야기를 담고 있다. 마나스는 <일리아드>와 <오딧세이>가 그렇듯 서사시 전반에서 주인공의 투쟁과 영웅주의를 강조한다. 그러나 이 책은 마나스의 영웅적 행적의 서술 외에도 키르기스스탄 사람들의 세계관과 종교, 지리, 철학, 의학, 국가체계 및 생활풍습, 민족적 정체성을 찾을 수 있는다는데 그 서사적 가치가 있다. 이 같은 이유로 1995년 제49차 유엔 총회는 키르기스의 국가 서사시 마나스 탄생 1,000주년을 기념하는 결의문을 채택하기도 했다. 2013년 마나스는 인류무형유산 대표목록에 등재됨으로써 다시 한 번 세계의 인정을 받았다. 서사가 가지는 힘은 놀랍다. 이 거대한 민족을 하나로 엮을 수 있는 힘이 ‘글’ 속에 담겨 있다는 것이다. 마나스의 힘이 이 광장에, 이 나라의 후예들에게 오랜 시간 함께했을까. 이 엄청난 서사시를 가진 이 마나스의 후예들은 중앙아시아에서 최초로 민주주의 혁명을 두 번이나 성공시킨다.
키르기스스탄 정치의 상징, 알타투 광장
혁명의 중심지, 그 광장의 한복판에 서서 14년 전 지금이 광장을 가득 메웠을 열기를 생각한다. 지금은 이렇게도 평온한 시민의 휴식처가 2005년엔 대규모의 시위의 진원지였다. 발단은 2005년 총선이었다. 키르기스스탄 국민은 이 선거가 부정선거이며 아카예프 독재 정부가 부정을 주도했다고 믿었다. 아카예프의 비리와 부패에 대한 저항으로 야권과 시민의 불만이 폭발하면서 대규모 시위가 이어졌다. 야당 대표인 쿠르만베크 바키예프가 같은 해 대통령에 당선하면서 혁명은 성공했다. 아카예프 대통령은 러시아로 망명해야했다. 처음으로 국민의 손으로 직접 대통령을 결정하게 된 것이다. 물론 위대한 국민의 승리였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단지 ‘선거’의 여부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그 어떤 국가도 자국을 ‘비민주적’이라 말하지 않는다. 독일의 나치즘은 90%이상의 득표율로 당선된 민주주의 정권이었다. ‘실질적’ 민주주의 결정하는 것은 선거가 아니라 선거로 뽑은 지도자가 부정부패 및 문제를 저질렀을 때, 스스로 권좌에서 내려오도록 할 수 있는 ‘국민의 힘’에 있다. 그 힘이 국민에게 없다면 정부는 ‘공권력’의 이름으로 독재를 정당화한다. 국민은 노예처럼 정권에 휘둘려 그 어떤 발언의 기회도 차단 당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실질적’ 민주주의를 말할 때는 ‘선거의 여부’가 쟁점이 아니라, ‘선거 이후의 권력과 그 권력에 대한 견제장치’의 역할이 얼마나 원활한가에 그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
바키예프 대통령은 집권 초기 언론과 집회의 자유를 헌법에 명시했다. 전임 정권이 어떻게 정권을 잃었는지를 지켜보았고 그 권력을 끌어내리는 선봉에 섰던 사람이 아니던가. 하지만 정권을 잡은 후에는 달라졌다. 서서히 언론과 야당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세상을 꿈꿨던 키르기스스탄 국민은 또 한번 실망해야만 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공공요금과 물가는 계속해서 올랐다. 경제는 악화되었다. 정치적 자유는 배고픔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혁명을 통해 얻었다고 생각한 자유마저 온전히 누린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국민은 배신감을 느꼈고 불만은 누적되었다. 혁명은 국민이 했는데 대통령은 그 혁명의 열매를 국민과 함께 나누고 있지 않았다. 2010년 ‘2차 튤립혁명’의 발단은 1차 혁명을 통해 온전히 얻지못한 정치적 자유, 그리고 경제적 빈곤의 축적이었다.
그렇게 다시 5년이 지난, 2010년 봄, 반정부 시위대 5000명이 이 광장에 모였다. 이들은 정부의 무능함과 부패청산을 들고 대통령 청사를 향해 행진했다. 행진하는 시민에게 경찰은 최루탄과 고무탄을 발사하며 진압에 나섰다. 키르기스스탄 보건부는 이때 47명이 사망하고 400명 이상이 부상했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야당은 최소 100여 명이 숨졌다고 주장했다. 2005년 ‘1차 튤립혁명’은 무혈혁명이었지만 2010년 ‘2차 튤립혁명’ 때는 사망자가 발생했다. 위협을 느낀 바키예프 대통령은 소형 비행기를 타고 수행원들과 수도 비슈케크를 탈출해 고향인 남부 도시 오시로 향했다. 야권은 의회를 해산하고 과도정부를 구성했다. 새로운 과도정부 수반은 로자 오툰바예바 사회민주당(SDP) 대표였다. 그녀는 바키예프와 함께 1차 튤립혁명을 이끈 영웅이었다. 그녀는 기자회견장에 항상 노란색 튤립 모양의 브로치를 꽂고 나와 자신이 혁명의 중심에 있음을 과시했다. 바키예프는 수도를 비운 지 열흘 만에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부인과 두 자녀만 데리고 카자흐스탄으로 도망쳤다. 1차 튤립혁명을 성공적으로 이끈 대통령의 비참한 최후였다. 인간의 권력욕을 어떻게 설명해야할까. 자신의 권력이 전임정권의 무력과 독재에서 나온 것임을 알면서도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것이 인간이다. 이미 2000년 전에 사마천의 <사기>는 인간과 권력에 대한 통찰과 인간의 모든 군상을 담아 놓았다. 2천 년 전의 역사는 이미 인간의 본성을 바라보게 했건만, 2천년이 지나도 무지한 인간은 그 어리석은 실수를 반복한다. 그 와중에 위안이 되는 것이 있다면, ‘무지한’ 지도자를 일깨우는 ‘현명한’ 백성들의 ‘등장’이다.
튤립혁명을 기념하는 기념비를 찾아
알타투 광장 마나스 동상의 옆에서는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 하나의 상징물이 있다. 2010년 튤립혁명을 기념해서 만든 것이다. 거대한 벽을 있는 힘을 다해 밀어내는 사람들의 표정이 인상적이다. 견고한 권력의 틈을 시민들이 온 힘을 다해 밀어내자 거대한 검은 독재의 벽이 갈라진다. 밀어낸 어두운 벽 사이로 잃어버린 ‘자유’의 햇살이 비친다.
나는 한동안 이 기념비의 두 벽 사이에 앉아 있었다. 독재의 그림자가 사라진 조형물의 ‘상징적’ 틈에 앉아 2019년 현재의 키르기스스탄을 생각한다. 주변국에서는 가능하지 않았던 민주주의 혁명이 어떻게 이 나라에서는 가능할 수 있었을까? 두 차례의 성공적인 혁명으로 이 나라 국민들은 진정한 평화를 얻었을까? 민주주의는 평화를 보장하는 전제조건일까? 이들이 힘겹게 얻은 정치적 자유는 그들에게 경제적으로도 그 전보다 풍요로운 삶을 제공하는 동력이 되었을까? 그리하여 현재의 키르기스스탄은 2019년의 ‘마나스’를 찾았을까?
장기 독재와 반정부 시위의 진상이 제대로 밝혀지지도 못한 채 오늘을 사는 우즈베키스탄에서 넘어온 여파일까. 국경이라는 선 하나를 넘었을 뿐인데 전혀 다른 현대사를 만든 이 나라가 궁금하다. 광장을 거니는 사람들은 근심없는 하루의 일상을 즐기는 듯 편안한 모습인데 머리 속이 복잡해지는 것은 이 도시에 오늘 처음 온 낯선 이방인이다. 이 조형물의 두 개의 벽만큼이나 큰 간극이 오후의 알라투 광장을 가득 채우고 있다.
키르기스스탄 민주주의 혁명의 동력
중앙아시아에서 유일하게 민주주의를 시민의 힘으로 만들어낸 키르기스스탄, 대체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 학자들은 키르기스스탄의 분위기가 인접국과 차이가 있음을 지적한다. 특히 카자흐스탄이나 우즈베키스탄처럼 자원이나 자금을 수단으로 지도자가 강력한 통제정책을 처음부터 실행하지 못한 것이 혁명을 가능하게 한 배경이라는 것이다. 초대 대통령 아카예프(1991~2005재임)는 장기 집권을 했지만 강력한 통제 정책을 실시하진 않았다고 한다. 다시말해, 혁명이전 키르기스스탄은 권력 누수 현상이 생겨 독재 정권의 통제력이 약화될 경우 여기저기서 다양한 목소리가 일시에 터져 나올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이와 함께 꼽는 두번째 원인은 키르기스스탄의 지역 불균형이다. 연구자들에 따르면 비슈케크와 오슈를 중심으로 하는 북부와 남부의 경제력 차이는 심각하다고 한다. 남부의 경우 1인당 지역 총생산(GRDP)이 키르기스스탄 1인당 국내총생산(GDP)의 58~63% 수준에 불과하다. 빈곤층도 북부는 국가 평균(30.6%) 이하인데, 오슈를 비롯한 남부의 빈곤율은 모두 국가 평균치를 웃돈다. 경제력 격차에 따라 상존해 온 북부와 남부의 ‘지역 갈등’이 ‘정치 불안정’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이러한 불안정성이 혁명에 더욱 적극적으로 가담하게 만들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세번째 원인은 ‘씨족 갈등’이다. ‘씨족 갈등’은 키르기스스탄 사회문제의 핵심이다. 법령에 따른 공식 절차가 아니라 비공식적인 사적 관계가 우선시되는 사회인 것이다. 키르기스스탄에선 키르기스스탄이란 국가 정체성, 키르기스인 또는 우즈베크인이란 종족 정체성, 이슬람교도란 종교 정체성보다 ‘씨족 정체성’을 중시되는 ‘비공식적 사적 관계’가 강력하다. 그러다보니 다양한 인사들의 정치 참여, 삼권 분립, 언론과 시민사회의 권력 견제가 잘 이뤄지지 못하는 문제가 생겼다. 선거 입후보자들은 씨족의 지원을 받는 지역사회의 유지 또는 사업가들이 대다수였다. 이렇게 정계로 진출한 인사들은 씨족들의 눈치를 보며, 전체를 위한 ‘개혁 정책’을 시행하지 못하고, 친인척에게 권력을 나눠주면서 씨족의 환심을 샀다. 당연히 입법과정에서도 자신의 씨족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이 우선시될 수 밖에 없었다. 국민과 주민이 아니라 씨족을 대표하는 의원들이 가득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핵심은 ‘씨족집답’ 가지는 이중적 역할이다. 집권 세력은 강력한 씨족 후견망을 동원함으로써 권좌를 연장하기도 하지만, 반대 세력 역시 씨족을 중심으로 결집하여 강력한 힘을 만든다.
집권 초반, ‘개혁’을 외치며 ‘씨족 정치’에서 탈피하려 했던 아카예프가 혁명에 의해 망명할 수 밖에 없었던 것도 연임을 위해 씨족 세력에 의존한 원인이 크다. 그는 자신과 부인의 씨족 망과 동맹 세력을 동원해 정권을 연장했다. 그 과정에서 국가 자산은 북부 씨족들의 사유재산이 됐다. 국가 요직도 이들의 차지가 됐다. 권력을 장악한 씨족 엘리트들은 다시 자신들의 기득권 공고화를 위한 ‘개혁 저지’와 ‘국가 자산 사유화’에 치중할 뿐 ‘민생’은 등한시했다. 이 과정에서 새로 챙길 ‘이권’이 부족해지면 기존에 동맹 관계였던 씨족 사이에 ‘갈등’과 ‘내분’이 생기게 된다. 만약 에너지 자원의 개발처럼 무언가 지속적으로 국부가 창출될 동력이 있다면 유력 씨족들에도 충분히 배분할 몫이 존재하며 그들의 이해관계에 일종의 균형을 맞출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권력의 공고화 기반이 강화되어 무너질 가능성은 그만큼 줄어든다. 그러나 키르기스스탄의 경우는 주변국에 비해 지하자원도 부족하고, 산업시설도 거의 전무한 조건에서 권력의 기반은 상대적으로 취약할수 밖에 없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혁명이 가능한 원인은 여러가지로 생각해볼 수 있다.
민주화와 그 이후, 키르기스스탄의 현재
기념비에서 일어나 넓게 뚫린 중앙도로를 걷는다. 보통 이런 거리에서는 도시를 상징화한 관광상품이라도 파는 상점이 있을 법한데 아무리 뒤져도 보이지 않는다. 여행한 도시마다 마그넷을 모으는 취미가 있어 어느 도시를 가든지 나는 마그넷을 하나씩 꼭 구입한다. 그런데 우즈베키스탄에서는 한 도시에서 2개씩 다양한 디자인의 마그넷을 구입해서 이미도 10개가 넘은 마그넷을 가방에 짊어지고 다니는데 키르기스탄에 들어온 이후, 도시 마그넷은 고사하고 ‘키르기스탄’이라고 적힌 마그넷 하나 구입하질 못했다. 질문은 이어진다. 그렇다면 키르기스스탄은 두 차례의 혁명을 통해 ‘형식적’ 민주주의에서 탈피하여 ‘실질적’인 민주화를 이루었는가? 그들의 삶은 혁명 이전 보다 훨씬 풍요로워졌는가? 그들의 새로운 ‘마나스’는 살기좋은 이 땅을 약속하고 실천하고 있을까?
2011년 대선에서 당선한 ‘마나스’는 현재 키르기스스탄 대통령 알마즈베크 아탐바예프이다. 그 또한 2005년 튤립혁명 당시 시위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다. 2010년 2차 튤립혁명 때 바키예프 대통령을 축출하는 데도 주도적 구실을 했다. 친러시아 성향 온건파인 아탐바예프는 북부뿐 아니라 민족 간 유혈 충돌이 벌어진 남부에서도 지지를 받고 있다고 한다. 대외정책에서는 러시아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미국과도 원만하게 지낼 수 있는 적임자로 기대를 모으는듯 하나 경제적으로는 아직 성과가 미흡해보인다. 현재 키르기스스탄의 가장 큰 문제는 빈곤이다. 키르기스스탄은 국토 전체의 40%가 해발 3000m 넘는 산간 지대이다. 절대적으로 농지가 부족하고 이렇다 할 제조업도 발달하지 못했다. 키르기스스탄의 전체 GDP는 9억3240만 달러로 세계 134위이다. 한 집에 한 명씩은 러시아나 카자흐스탄으로 노동하러 떠난다. 오르는 물가에 대해 월급은 200달러는 밑돌고 있다. 대통령 두 명을 권좌에서 끌어내고 두 차례 혁명에 성공했음에도 여전히 가난은 국민의 발목을 잡고 있다. 아탐바예프 대통령은 취임 8년이 다 되도록 아직 빈곤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최근에는 SNS에 자신을 욕하는 글을 올린 20대 젊은이를 상대로 법적 소송을 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등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그 역시 전임자들의 과거를 그대로 답습하는 듯하다. 어떤 의견도 다양하게 표출될 수 없다면 그것은 민주주의 국가라 할 수 없다. 민주주의 혁명에 성공했다면 수준높은 민주화의 수준이 기대되어야 하는데 이 나라의 민주화 점수는 답보상태인 것이 오히려 아이러니다. 1980년부터 세계 각국의 민주화 지수를 발표하는 미국의 비정부기구 ‘프리덤하우스’에 따르면 ‘튤립 혁명’ 직전 연도인 2004년 당시 키르기스스탄의 민주화 점수는 5.67, 2018년 현재는 6.07이다. 프리덤하우스는 점수가 ‘7’에 가까울수록 해당 국가의 민주화 수준이 낮은 것으로 해석한다. 이를 감안하면, 키르기스스탄의 민주주의는 오히려 두 차례 ‘혁명’을 거치면서 ‘퇴보’한 셈이다. 혁명의 성공이 곧 ‘실질적’ 민주화를 가져오지 않음을 보여준다. 혁명은 표면적으로 성공했을지 모르지만 과거보다 시민사회 역량, 부정부패, 독립 언론의 자유, 사법부 독립성은 악화되었다는 말이 아닌가. 출구를 찾을 수 없는 청년들에겐 이슬람국가(IS)의 자국민 포섭 공세가 매력적인 모양이다.
2015년, 키르기스스탄 주재 중국 대사관에는 100㎏이 넘는 폭약을 싣고 돌진한 자살폭탄차량 테러 사건이 터졌다. 2017년, 터키 이스탄불 나이트클럽 테러 사건의 범인도 키르기스스탄 사람이었다.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는 키르기스스탄인 500여 명이 IS 대원이 되려고 시리아로 향했고, 약 2000명이 IS의 급진 사상에 물든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가난의 굴레에서 이슬람 급진주의를 선택하는 젊은이들이 늘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우려스럽다. 우즈베키스탄의 카리모프를 외부에서 장기독재라고 비판하지만 자국민들은 그가 급집이슬람세력으로부터 자국을 안전하게 지켰다고 믿고 있는 것과 대비되는 부분이다. 아마도 시민들은 두 차례의 민주주의 혁명과 그 성공에서 많은 희망을 보았을 것이다. 기대도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냉혹하기만 하다. 그렇다면 ‘민주주의’란 가치는 대체 어떤 의미일까? 무엇이 실질적 민주주의인 것일까?
민주주의는 평화의 전제조건인가
칸트는 민주주의를 평화의 전제조건이라 말한다. 칸트가 쓴《영구 평화를 위하여. 철학적 논고》는 크게 두 가지 핵심 가정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 번째 명제는 민주주의 국가들 사이에서 전쟁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두 번째 명제는 민주주의 국가와 비민주주의 국가 사이의 전쟁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평화가 민주주의 국가 하나에서 내재적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두 국가간 상호관계에 따라 결정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일부 이론가들은 '상호민주평화주의'(mutual democratic pacifism)나 '민주주의간 비적대 가설'(inter-democracy nonaggression hypothesis) 등의 용어를 쓰기도 한다. 현실과 동떨어진 이상주의라는 입장을 포함하여 여전히 이 가설은 논란이 많지만 그럼에도 민주평화론(民主平和論, Democratic peace theory)의 영향력은 적지 않아 보인다. 민주주의 국가들 사이에서는 무력 충돌 가능성이 낮다는 칸트의 이론적 전제가 여전히 미국의 대외정책에 기반을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은 대외정책에서 " 민주주의의 확산이 평화를 담보하는 지름길"이라는 기본 입장에 변함이 없다.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전 세계 폭정의 종식”을 외치며 미국의 미래 안보와 세계평화는 ‘자유’의 대의명분을 지켜가는데 있다고 강조했다. “민주주의의 확산이 곧 평화”이기 때문에 ‘민주주의’가 아닌 모든 폭정은 평화를 위한 전쟁의 명분이 되었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영역이 확대될수록 평화의 영역도 함께 넓어진다’는 전제하에 자행된 수 많은 전쟁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전쟁으로 인해 만들어진 또 다른 원한과 복수의 고리는 과연 전쟁의 ‘승리’로 단번에 사라져 순식간에 평화를 가능하게 하는가? ‘독재국가의 폭력’을 ‘민주국가의 폭력’으로 저지하는 것은 정당한가? ‘평화’를 위해 전쟁이란 ‘폭력’을 불사하는 것은 정의로운가? 이라크의 사례를 보자. 사담 후세인은 잔인한 독재자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전쟁으로 민주주의를 '강요'하려는 전략은 결코 '평화적'이지 못했다. 그것은 엄청난 피바람을 불렀고, 피의 악순환은 지금도 끝날 것 같지가 않다. 최근엔 총선도 치렀지만 평화는 여전히 요원하다. 팔레스타인은 어떤가. '선거'라는 민주주의 제도를 통해 새롭게 등장한 하마스는 테러를 신봉하고 이스라엘의 파괴를 공언하고 있다.
이 땅에서 전쟁은 끝날 것 같지가 않다. 전쟁을 위한 명분으로의 ‘민주주의’를 파는 것은 ‘민주주의’가 지향하는 본질적 가치가 아니다. 또 실질적 민주주의가 아닌 ‘선거 민주주의’집착하여 문명과 문화, 역사가 다른 군가에 새로운 정치체계를 ‘강요하는’ 모든 것은 폭력이다. 실질적 민주주의가 정착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서양에서는 민주주의가 정착되는 데도 최소 200년이 걸렸다. 자유 선거로 국민의 지도자를 선출할 수 있다는 것이 ‘민주주의’의 모든 것이 아니다. 정치.경제.사법.언론의 영역과 시민의 수준이 민주주의를 받아들 일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이것은 모든 국가마다 다를 것이다. 어느 한 나라에서 성공한 사례가 다른 나라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되리란 보장은 없다. 나라마다 가지고 있는 내외적 조건이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칸트가 민주주의를 평화의 전제조건으로 받아들일 수 있던 것은 다양한 생각이 외부의 그 어떤 억압과 압력없이’ 자유롭게 표현될 수 있는 체계라는 전제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나와 다른 생각이라는 이유로 억압되고 어떤 이야기도 꺼낼 수 없다면 그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다.
키르기스스탄은 국민의 목소리가 억압되지 않고 표출되었고 그것이성공했다는 점에서 위대한 역사를 썼다. 그러나 그렇게 만든 민주주의를 정부가 실질적으로 국민의 삶 속에서 실현시킬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정부를 관리 감독하는 과정 역시 중요하다.
알타 투 광장을 걷다가 발견한 튤립이 무척이나 반갑다. 이 광장에 흐드러지게 피었던 2005년과 2010년의 튤립보다 어쩌면 그 시간을 지켜보고 있는 오늘의 튤립이 안쓰럽게 고마워서였을까. 화단 한구석에 피어있는 튤립 한송이가 전한다. 민주주의를 ‘혁명’으로 만들어내는 것보다 그것을 지켜가는 것이 얼마나 더 힘들고 어려운 시간인지. 이 역사의 현장에서 아직 남아 자리를 지켜가고 있는 나를 조금 더 예뻐해주고 봐달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