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자흐스탄에서 본 한국 현대사
삭막하고 척박하다. 크질오르다(Kyzylorda)는 건조하고 메마른 느낌이다. 해는 한여름처럼 뜨겁게 내리쬐는데 마음은 웃음기 없는 사람들의 표정에 금세 얼어버린다. 웃음기 없는 러시아 사람들 사이에서 마음까지 차가워졌던 지난 날 모스크바 거리가 생각난다. 영어가 전혀 통하지 않은 이 곳은 홀로 고립된 느낌이다. 이 도시는 내리자마자 자체적인 ‘침묵’모드로 전환된다. 어차피 나는 러시아어를 모르고 그들은 영어를 모르니 번역앱으로 문자를 써서 보여주는 거 외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1937년 스탈린의 강제이주 정책에 의해 아무 것도 모른 채 이 땅에 던져져야했던 고려인들이 이런 마음이었을까. 불편함과 답답함이 도시에서부터 숙소를 찾아오는 내내 이어지고 있다. 이렇게 불편한 도시를 ‘굳이’ 찾아온 것은 이 곳에 한국 독립운동사에 거대한 획을 그은 홍범도 장군의 묘가 있기 때문이다. 묘지의 정확한 주소를 러시아어로 몰라 어떻게 찾아가야할지 난감할 때는 언제나 한국의 파워블로거들이 답이다. 고맙게도 미리 이 곳을 다녀간 사람들이 남긴 사진이 있다. 가끔은 친절하게 주소까지 지도로 연결해서 블로그에 올려두기도 한다. 나는 이렇게 먼저 이 곳을 찾았던 사람들의 정보 덕에 고생없이 홍범도 장군의 묘를 찾을 수 있었다.
홍범도 장군의 묘지 앞에서
이른 아침인데도 15명 정도의 사람들이 홍범도 장군의 무덤 주변을 둘러보고 있다. 이 시간에 여기를 찾은 사람이라면 한국인일 수 밖에 없다. 단체여행을 오신 분들인 듯하여 조심스럽게 여쭤보니 한 교회의 성도들이 선교여행으로 크질오르다를 방문한 것이었다. 다부진 입매가 인상적인 홍범도 장군의 흉상이 정면에 보인다. 흉상 아래로는 “홍범도, 1868-1943”이라는 생존연도가 큰 글자로 새겨져 있다.
1868년, 일본의 메이지 유신이 단행되었던 시절에 태어나 광복을 2년 앞두고 돌아가신 것이다. 75년의 삶이 곧 일본 제국주의의 극렬한 전개와 패망으로 가는 길에 겹쳐 있다. 삶의 반을 ‘대한민국’이란 주권이 없던 망국 ‘식민지의 백성’으로 살았다. 그는 나라잃은 백성이 가진 설움 속에서 주권을 되찾을 날만을 고대하며 한 평생 독립운동에 헌신한 분이다. 홍범도 장군은 독립군이 일본군을 상대로 싸워 첫 승리를 거둔 ‘봉오동전투(1920)’의 영웅이다.
그는 봉오동전투에 이어 김좌진 장군의 청산리대첩에도 참가했고 여기서도 대승을 거뒀다. 2020년은 봉오통 전투 100주년이었다. 홍범도는 포수들의 권익을 보호하는 포계를 만들어 사회운동을 시작하고 포수를 향한 착취를 막고자 했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일본은 총포 및 화약류 단속법을 만들어 총포를 빼앗기 시작했다. 일본은 한국인에게 총포를 등록만 하면 돌려주겠다는 거짓말로 68정을 가로챘다. 가만히 있을 수 없던 홍범도는 부대를 이끌고 총을 싣고 가던 마차를 잡기 위해 후치령에서 전투를 준비했다. 이 전투에서 홍범도는 일본군을 완벽하게 제압하고 빼앗겼던 총도 고스란히 되찾았다. 도올 김용옥은 이 후치령 전투를 ‘독립전쟁의 역사적 출발’이라고 평가한다. 후치령 전투에 이어, 홍범도를 기억하게 하는 가장 중요한 전투는 바로 1920년 ‘봉오동 전투’이다.
봉오동 전투
1920년 6월, 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해 일본 야스카와 아라요시 군대가 초모산(봉오동)에 도착했다. 홍범도 부대가 근거지로 삼은 이 지역일대를 일본군이 수색해 온 것이다. 그러나 홍범도는 이미 주민들을 대피시켜 놓고 있었다. 홍범도는 일본군부대를 봉오동 골짜기 깊숙한 곳으로 유인했다. 일본군은 중대 규모는 283명이었다. 홍범도는 골짜기 요지에 부대원을 매복시켜 놓았다. 길 아래 목표물이 다가오자, 일본군을 향해 홍범도 군대의 총알이 날아 갔다. 당황한 일본군은 후퇴하였고, 일본군 46명이 홍범도 군대의 총알을 피하지 못하고 쓰려졌다. 나는 처음, 일본군 전사자가 46명에 불과한 것에 놀랐다. 이것이 대승이라니? 그러나 만주에 주둔한 일본군(관동군)은 정규군이다. 이들을 상대로 일본군 한명을 사살한다는 것이 어찌 쉬운 일일까. 그런데 봉오동전투와 청산리 전투에서 홍범도, 김좌진은 당시 암울한 식민지 조선에 환희와 희망을 주는 전과를 올린 것이다. 봉오동은 두만강의 도시 도문, 토성리가 그 현장이다. 해란강 가야하, 그리고 두만강이 만나는 곳이다. 이곳은 1880년대에 함경도 회령, 종성 사람들이 이주하여 부락을 이룬 곳이라고 한다.
홍범도 유해 송환문제
홍범도는 친일단체의 대표로 불리는 일진회에 가담한 인물도 처단했다. 그렇게 만주일대에서 무장투쟁을 지휘했던 홍범도는 1937년 스탈린의 강제이주 정책에 의해 멀리 중앙아시아 땅으로 보내져 카자흐스탄의 알마티에서 말년을 보냈다. 홍범도 장군이 말년에 수위로 근무한 곳이 바로 알마티에서 본 고려극장이다. 그리고 현재 그의 유해는 알마티로부터도 한참 떨어진 크질오르다란 지역에 있다.
문재인 대통령의 카자흐스탄 방문 때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국내로 봉환하려는 노력이 있었고 그는 마침내 2021년 본국으로 귀환했다. 계봉우 선생과 그의 부인의 묘도 내가 방문했을 당시 유해송환이 되어 모두 파헤쳐진 상태였다. 사실 홍범도 장군 유해 봉환 문제는 카자흐스탄과 수교 이래 수십 년째 풀리지 않는 난제였다. 노태우 전 대통령이 추진했던 북방정책의 일환으로 1990년 구소련과 수교한 이래 역대 대통령은 모두 홍범도 장군 유해 봉환을 타진해왔다. 구소련 붕괴 후에는 그 대상이 카자흐스탄이 됐다. ‘역사 바로세우기’를 내걸었던 김영삼 전 대통령 역시 홍범도 장군 유해 봉환을 카자흐스탄 측에 요청했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햇다. 이 같은 답답한 상황은 거의 30년 가까이 이어졌다.
가장 큰 문제는 홍범도 장군과 북한과의 연고다. 홍범도 장군은 구한말인 1868년 평양에서 태어나 수렵을 생업으로 한 포수 출신이다. 일제의 총기 회수령에 분개해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서 무장독립운동을 해왔다. 남한과 달리 북한은 만주 일대의 무장독립운동을 정통으로 봐왔다. 홍범도 장군은 고려공산당 내 이르쿠츠크파와 상하이파의 내분으로 발생한 1921년 자유시 참변 직후 소련군에 정식 편입됐고, 1927년에는 소련공산당에 정식으로 입당했다. 카자흐스탄 고려인 사회 역시 그간 홍범도 장군의 한국 이장을 반대했다고 한다.
백주현 전 주카자흐스탄 대사에 따르면, 현지 고려인 동포 조상들의 70%는 평안도, 함경도 등 북한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한다. 백 전 대사는 “북한과 이념적으로 가깝지 않다고 해도 심리적으로 남한으로 가는 데 대해 거부감을 가질 수도 있다”고 말한다. 한국 정부 역시 홍범도 장군에 대한 연고권을 주장해왔다. 박정희 정부 때인 1962년에는 홍범도 장군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수여했다. 박근혜 정부 때인 2016년에는 해군의 1800t급 최신 잠수함을 ‘홍범도함’이라고 명명하기도 했다. 홍범도 탄생 150주년 기념우표를 발행하기도 했다. 문재인 정부는 봉오동전투 100주년을 맞춰 홍범도 장군 유해 봉환을 재추진할 계획이라 밝혔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2019년 문재인 대통령의 방문 때, 수도 누르숱탄(아스타나) 공항에서 독립운동가 유해 봉환식을 직접 주재한 일이다. 현직 대통령이 직접 봉환식을 주관하고 전용기로 모셔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하는데 이때 모셔온 분이 바로 독립운동가 계봉우 지사와 부인 김야간, 황운정 지사와 부인 장해금 등 모두 4인이다. 그런데 만약 한반도가 분단상태가 아니였다면 홍범도 장군의 유해송환이 30년이 넘도록 해결되지 못한 채 남아있었을까? ‘분단조국’은 분명 일제 강점기를 살았던 독립운동가들에게 또 하나의 통탄할 슬픔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일본으로부터 잃어버린 주권을 찾아오면 문제가 해결될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주권을 찾아오니 이제 ‘어떤 나라’를 만들것인가를 두고 치열하게 노선갈등을 했다. 그렇게 갈등하는 과정에서 동족상잔의 비극이 생겼다. 같은 민족끼리 단지 ‘이념의 차이’를 이유로 죽고 죽여야만 했다. 다같이 잘먹고 잘사는 국가, 독립된 해방조국을 만들겠다는 신념은 같았다. 그러나 그 ‘방법’의 차이는 공존을 허락하지 않은 채 전쟁이란 비극으로 남았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도 여전히 이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66년이 지난 시간 동안 분단조국은 계속 ‘정지상태’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했다. 좀 앞으로 가나 싶으면 다시 뒤로 돌아가기를 반복했다.
아직 오지 않은 독립운동가들이 꿈꾼 세상
난 가끔 이런 질문을 해본다. “만약 내가 일제강점기에 살았다면 나는 어떻게 살았을까?” ‘지금’ 내가 현재를 지금의 모습으로 살 수 있는 것은 일제강점기를 살았던 다른 누군가의 ‘생각’이 합쳐져 만든 ‘미래’다. 그러므로 오늘 나의 ‘생각’은 내일 누군가의 ‘미래’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모두가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며 편안한 길을 선택하려 할 때 ‘대한민국의 주권’을 찾기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쳤던 사람들! 우리 모두는 그들의 ‘생각’과 ‘행동’에 빚진 ‘오늘’을 살아간다. 나는 이를 ‘평화무임승차자’라 명명했었다. 나는 무지했다. 나의 ‘오늘’이 가능한 ‘과거’에 무지했다.
나는 지금의 대한민국을 가능하게 한 독립 운동가들 앞에 부끄러웠다. 그들이 살았던 시대와는 너무도 달라진 오늘을 살고 있지만 오늘은 여전히 그들의 과거에서 이어진 시간이다. 독립운동의 역사조차 반쪽으로 찢어진 이 땅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나라도 나서서 그들의 발자취를 직접 따라가 보는 일이었다. 먼저 그 길을 떠난 것은 아버지였다. 아버지가 다녀온 순례의 길을 나 역시 똑같이 밟아보며 나 스스로 오늘 내가 누리고 있는 ‘평화’에 대한 무임승차자임을 고백했다. 나는 책을 집필하는 과정을 통해 그들을 ‘기억’하려 애썼고 그것으로 무임승차에 대한 ‘승차권’을 대신하려 애썼는지도 모른다. 이 과정에서 집필한 책이 『평화무임승차자의 80일(서해문집, 2016)』이며, 아버지와 함께 만주 독립운동가를 찾아나선 10일 간의 집필여행으로 만든 다큐멘터리가 “난잎으로 칼을 얻다(임경희 감독 작, 2016)”이다.
독립투쟁은 일제의 감시가 덜한 해외에서 활발했다. 특히 만주, 중국내륙, 러시아 땅에서 가장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하와이와 샌프란시스코 등지에서도 독립운동이 있었다. 해외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들은 많다. 우선 상해 임시정부의 백범 김구, 김규식, 여운형, 그리고 북경 3걸이라 불린 우당 이회영, 단재 신채호, 심산 김창숙, 미국에서 활동한 이승만, 박용만, 그리고 의열단, 조선의용대를 창설한 약산 김원봉, 안동 임청각의 주인 석주 이상룡, 무오독립선언을 주도한 조소앙, 블라디보스톡의 신규식, 이상설, 김알렉산드리아 스탄케비치 그리고 봉오동 전투의 홍범도와 청산리 전투의 영웅 김좌진 등 우리의 자랑스런 항일 독립지사들은 수 없이 많다. 그런데 기억할 것들이 있다. 항일투사 만큼이나 많은, 아니 그보다 휠씬 더 많은 이들이 항일이 아니라 친일을 한 분들이란 사실이다. 국내에서 국권을 일제에 팔아넘긴 ‘을사5적’과 친일조직인 ‘일진회‘의 송진우 등은 물론, 지식인과 경제인들도 친일에 나서야 했다. 박흥식 등 당시 재벌들도 일제에 물질적 공헌을 했다.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등장하는 <혈의 누>의 작가 김인식, ‘산넘어 남촌에는 누가 살길래~’하는 아름다운 시를 남긴 시인 김동환, 그리고 이화여대 총장을 지닌 김활란, ’사슴’의 시인 모윤숙, <무정>의 작가 춘원 이광수 등이 자의든 타의든 간에 친일을 해야 했던 사실 앞에 나는 괴롭다. 이들은 성전을 위해 조선 청년들이 일본제국주의 전쟁에 참전해야 한다는 연설을 하고 글을 써야 했던 것일까. 만주에도 항일 만큼이나 많은 친일이 있었다. ‘협화회’, ’간도특설대‘등의 조직이 친일조직이었다.
특히 일본이 만주에 세운 만주군관학교 출신 중에 친일을 넘어 우리 독립군을 토벌하는데 앞장선 이들도 많다. 정일권, 백선엽, 박정희 등이 그 대표적 인물이다. 여기서 논란이 가장 심한 인물이 1960년 5.16 군사구테타의 주인공 박정희, 그리고 그와 깊은 인연으로 현대사를 장식한 정일권, 백선엽 등이다. 만주에는 건국대학이 있었다. 만주에서 활동한 지식인들 특히 역사학자들중 일본 식민지 사학을 토대로 친일활동을 한 이들이 있다. 서울대 교수를 지낸 이선근, 그리고 최남선 등이 그들이다. 항일과 친일로 얼룩진 일제 식민지 시대의 우리의 모습들, 누군가를 탓하기 전에 이 모든 것이 다 민족의 비극인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우리가 독립군의 ‘승리’로 자축하는 봉오동과 청산리 전투도 마찬가지다. 승리의 이면에는 더 거대한 보복이 있었기에 수많은 사람들은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전쟁의 비극을 너머
1920년 봉오동, 청산리 전투 이후, 경신참변으로 만주 무장항쟁은 붕괴상태가 된다. 경신참변이후 우리의 독립군들은 흑룡강성 북쪽 밀산으로, 그리고 러시아 혁명으로 높아진 기대감을 앉고 러시아의 자유시로 갔다. 그런데 자유시에서는 같은 독립군끼리 총을 쏘는 비극을 겪는다. 홍범도 장군은 무장해제 당한 후 카자흐스탄으로 가 극장일을 돌봐주며 생계를 유지하다 크질오르다에서 사망한다. 김좌진은 암살범에 의해 암살당한다. 1920년 이후 만주는 3부 시대, 즉 정의부, 참의부, 신민부로 나뉘어 만주에서의 자치를 추구한다. 1930년대에는 한국 독립단의 지청천과 조선혁명군 양세봉이 버텼다. 그러나 1930년대는 만주사변 후 만주 전체가 이미 일본 세상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1935년 김책, 최용견 등의 동북인민혁명군과 동북항일연군으로 각각 무장투쟁을 했다. 이 당시, 중국인에게 만주는 관심 밖이었다. 장작림의 군벌이 지배하고 일본군이 와도 자기들과 무관하게 여겼다. 만주엔 국민당 군대가 없었다. 조선인들도 망국노, 얼꾸이즈(二鬼子)등의 비아냥을 받았다. 이런 상황에서, 1932년 윤봉길 의사의 상해 홍커우공원 의거는 중국인들이 조선독립운동을 새롭게 보게 된 계기가 된다. 윤의사의 의거로 상해 임시정부는 이 시기 중국 국민당의 재정 지원을 받는다. 이회영 또한 만주에서 총독 사이토를 저격함으로써, 조선독립운동의 의열투쟁 맥을 이어 다시한번 조국의 독립의지를 만방에 떨치려 했다. 남한에서는 이들 무장항쟁을 단순히 게릴라로 본다. 그러나 1930년대는 반파쇼시대다. 스페인 내란에 헤밍웨이, 앙드레 말로, 조지 오웰 등이 무장투쟁에 참여한 맥락에서 만주의 게릴라 운동을 보아야 한다. 1938년부터 44년 해방까지의 기간중 중국정부가 혁명열사로 지정한 사람 중 98%는 조선족이었다. 이들에게 중국이 말하는 해방전쟁은 곳 조선의 독립전쟁이었던 것이다.
역사를 찾아서
역사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컨텍스트 속에서 하나의 ‘의미체’다. 그러나 역사가 반드시 의지대로 흐르는 것은 아니다. 나의 의지와 타인의 의지가 불일치할 때, 역사는 어떤 의미로 해석될까. 헤겔의 역사철학은 ‘정반합’을 말한다 ‘정(正)’이 있으면 반드시 ‘반(反)’이 출현한다. 이것이 ‘합(合)’이 되고 다시 ‘합’에 대한 ‘반‘이 나타난다. 분명 역사는 고정 되어있지 않다. 모든 사상도 자유와 인권을 기초로 하여, 평등을 두고 갈등하는 역사다. 그렇다면 한국전쟁은 역사에서 어떤 ‘의미체’인가? 1950년 6월 25일 새벽, 38도선 전역에서 일어난 전쟁! 3여 년의 전쟁에서 승자도 패자도 없는 전쟁! 몇 가지 질문을 던져보자. 중국은 왜 한국전쟁에 참전했는가? 한국전쟁은 여전히 휴전상태이니 아직 승자도 패자도 없는 전쟁인데, 왜 승자가 없는 전쟁이 되었는가? 혹시 승자가 있다고 생각한다는 누구인가? 중국은 한국전쟁을 ‘캉메이위엔차오(抗米援朝)’전쟁이라 부른다. ‘미국에 대항하여 조선을 지원한 전쟁’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 단어 뒤에 또 다른 말이 따라온다. ‘빠오자웨이궈(保家衛國)’ 즉 가족과 국가를 보위하자는 것이다. 그러니까,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은, 조선을 돕는 것만이 아니라, 턱밑까지 온 적, 미군을 퇴치하여 국가를 지키자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북한에게 한국 전쟁은 제국주의의 압제로부터 민족을 해방시키기위한 투쟁이었으니 그들은 이 전쟁을 ‘조국해방전쟁’이라 부른다. 미국은 ‘한국인’에 초점을 맞춰 한국인들끼리 싸운 전쟁이라는 의미에서 ‘한국전쟁(Korean War)’이라 부른다. 유럽에서는 한국이라는 ‘지역’에서 벌어진 전쟁이라는 의미로 ‘한국에서 일어난 전쟁(War In Korea)’이라 한다. 한국이라는 지역에서 단순히 한국인들만이 싸운 전쟁이 아니었다는 인식을 포함한 이름이다. 한국은 전쟁이 일어난 ‘시간’에 중점을 두고, 6.25라 명명하거나 혹은 한국전쟁이라 부른다.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벌어진 하나의 사건에 대한 ‘이름’ 안에 이미 그 사건을 바라보는 ‘의미’가 담겨있는 것이다.
한국전쟁은 스탈린과 모택동의 예상대로 북한군이 낙동강까지 순식간에 점령했다. 이승만은 서울시민을 속이고 또 북한군 도강을 막기위해 한강다리까지 폭파시키고, 후퇴하여 부산에 가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오끼나와 주둔 미 연합군이 인천상륙작전으로 밀고 들어와 북진하여 압록강까지 진격한다. 유엔군은 크리스마스 전까지 전투를 끝내겠다고 공언하며 거침이 없었다. 중국의 입장에서는 신중국(중화인민공화국) 건국을 선포한 후 1년도 안되어 미군이 국경까지 바로 근접에 왔음을 느낀다. 건국한지 얼마되지 않은 중국은 이미 국민당과의 국공내전으로 지쳐있는 상태였다. 사실 한국전쟁의 참전을 찬성한 관료는 없었다. 자국 청년들을 사지에 총알받이로 내몰아야한다는 것도, 국가건설 이후에 해야할 일도 태산이었다. 한국전쟁의 참전을 밀어붙인 것은 모택동 1인의 단독결정이었다. 외교정책결정과정에서는 가장 비합리적인 결정의 대표사례로 늘 거론하는 예시사례다. 여기서 합리성이라 함은 전시 파병결정과정에서 최소한의 파병으로 최대의 경제적 이익을 창출하는 것을 말한다. 중국인들은 이 사례를 들어 중국인들이 경제성으로 측정되는 합리성 이외의 ‘의리’와 ‘신의’를 존중하는 외교적 결정을 하는 사례로 들기도 한다. 어찌 되었든, 중국은 펑더화이를 사령관으로 하는 중공군을 지금은 끊어진 압록강 철교를 통해 파병한다. 한국전쟁을 단순히 남한과 북한의 전쟁에 유엔군과 중국군이 참전한 사건으로만 인식하면 거대한 세계사적 구조를 읽지 못한 것이다. 한국전쟁은 일본 제국주의가 물러난 바로 그 자리에서 미국이라는 또 다른 제국주의가 벌인 동아시아 30년 전쟁 중 한 가운데의 가장 치열한 국제전쟁이다. 그래서 도올은 한국전쟁이라는 이름을 ‘동아시아 30년 전쟁’으로 명명하고, 1945년 일본의 패망부터 1975년 미국의 베트남전 개입이 종료될 때까지의 프레임 속에서 읽어야함을 강조한다. 1945년 일본 패망으로 일본제국주의가 아시아에서 빠져 나가자 중국은 국공내전으로 접어든다. 이어서 한국전쟁, 그리고 인도차이나 반도 베트남전쟁으로 이어진다. 미국 제국주의와 이에 반대하는 중국과 소련간의 30년에 걸친 국제전쟁인 것이다.
한국전쟁의 현대사적 의미
1950년 6월 25일 새벽, 38선은 무너진다. 그러나 한국 전쟁은 1950년 6.25일 일어난 ‘단순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동아시아 30년 전쟁의 맥락에서 이해해야 하는 국제적 사건이다. 당시 북한에는 해방 후, 조선의용대 화북지대 용사 등 10만 명이 들어와 있었다. 남한에서는 남노당이 비밀리에 활동하고 있었다. 김일성, 박헌영은 모택동을 만나 원조를 약속받는다. 러시아의 스탈린 또한 북한을 직간접적으로 지원한다. 모스크바 외교비밀문서가 해제되면서 이러한 정황은 속속 밝혀지고 있다. 다시 6. 25의 그날로 가보자. 38선이 무너진 그날 이후 국군은 북한 인민군에 밀려 낙동강까지 후퇴한다. 대통령 이승만은 서울시민들에게 안심하라는 방송을 해 놓고, 자신은 한강을 넘어 대전으로 후퇴한다. 인민군의 남하를 막는다고 한강다리를 폭파시키는 명령을 내린다. 그러나 인민군은 한강을 넘어 남하했다. 낙동강까지 밀고 내려갔다. 이제 부산이 마지막 선이다. 그러면 통일이다. 유엔은 즉시 안보리를 소집했다. 북한의 남침을 인정하고 유엔군의 개입을 결의했다. 안보리 이사국 러시아가 반대표를 던지지 않고 회의에서 기권한 것이다. 유엔사무총장은 53개국에 한국전 참전을 호소했고, 콜롬비아, 필리핀, 에디오피아, 터키 등 16개국이 참전했다. 주력은 미군이다. 오키나와의 미군은 맥아더 장군을 지휘관으로 하여 인천 상륙작전을 감행한다. 그리고 낙동강 국군은 북진한다. 전세는 역전된다. 국군과 미군, 유엔군은 북진을 계속한 것이다. 북진통일의 완성이 눈 앞인 듯했다. 그러나 이 전쟁은 국제전이었다. 압록강 넘어 중공군이 함정을 파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미군과 유엔군을 북쪽 깊숙이 유인한 것이다. 중공군은 압록강을 건너 인산인해를 이루며 내려오기 시작했다. 1951년 1월 4일의 1.4후퇴다. 후퇴 또 후퇴. 유엔군은 1월의 혹한 속에 괴멸되고 후퇴한다. 이때, 맥아더 장군은 트루먼 대통령에게 ‘만주 핵폭격’을 건의한다. 그러나 3차대전 발발을 우려한 트루먼은 맥아더를 해임시킨다. 한반도의 허리에서 밀고 밀리는 접전이 연일 계속된다. 한국 전쟁은 결국 중국과 미국의 대리전으로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에 들어온 것 같았다. 마침내 1953년 7월27일, 판문점에서 종전이 아닌, 휴전을 체결한다. 그러나 한국은 휴전체결 당사자가 되지 못했다. 한반도의 전쟁에서 휴전협정의 당사자는 중국과 북한 그리고 미국이었다. 승전국도 패전국도 없었다. 다만 수백 명의 사상자와 천만명의 이산가족을 양산해 낸 비극만이 남았을 뿐이다. 그리고 우리는 여전히 이 비극의 ‘분단상태’를 거의 한세기가 다되도록 살아가고 있다. 세계사적으로 냉전은 끝났지만 한국은 여전히 냉전의 프레임에서 자유롭지 않다. 한국는 48년 남한정부 수리부터 지금까지 반공이데올로기의 체제 속에서 살아간다.
나는 이 깊고 깊은 ‘안티 콤뮤니즘(반공)’의 기원을 ‘자유시 참변’, ‘임정을 둘러싼 갈등’, 그리고 ‘6.25’라 본다. 공산주의는 붉은 색으로 상징된다. 그 붉은 색은 남한사회에서 빨갱이, 악의 상징이다. 반대로 북한에서는 남한의 사상은 쳐부수어야 할 부르조아 계급사상으로 악이 된다. 그러나 이념 자체는 순수할 수 밖에 없다. 개별인간의 순수한 열정은 이념을 받아들이는 순간 엄청난 폭발력을 발휘한다. 그 대표가 김알렉산드리아 스탄케비치다. 19세기 중반 두만강을 넘어, 연해주로 가 러시아인이 된 조선인 아버지를 통해 민족의식을 잃지 않았고, 철도 근로자의 비참한 삶을 보며 평등사회를 구현하려는 조선 여인은 공산주의를 받아들여 조국광복과 프로레타리아 중심의 세상 만들기를 삶의 목표로 삼았다. 그리고 레닌의 볼세비키 혁명에 뛰어 든 것이다. 그러나 김알렉산드리아 스탄케비치는 반혁명의 백군에 의해 체포되어 하바로프스크 아무르강 변에서 총살당한다. 총살 전 열 세 발자욱을 걸으며 러시아 혁명의 성공을 통해 조국 13도의 해방을 기원한 조선 여인은 봉건잔재와 제국주의에 의해 배반당한 채 아무르 강의 물결 속에 자신의 인생을 흘러 보내야 했던 것이다.
나라 잃은 조선백성으로 우리는 어떻게 일본의 덫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가? 또한 해방 후 조선은 어떤 나라로 만들어야 하는가? 조선의 지식인과 독립운동가들이 찾아 헤매던 여러 사상 중에 하나가 공산주의다. 분명, 그것이 공산주의던 아니던, 아니 그 무엇이던 간에 혁명은 곧 조선의 독립인 것이다. 조선 독립이외에 무슨 선(善)을 추구할 것인가. 그러나 이 순수한 독립운동가들은 혁명으로부터도 제국주의로 부터도 배반당해야 했다. 해방의 감격은 잠시뿐, 조선은 남과 북의 이념이 독립과 통일보다 더 우선하는 가치가 되어있었던 것이다. 해방은 우리민족 스스로 미래를 결정할 상황을 부여하지 않았다. 얄타회담에서 강대국끼리 결정된 대로 한반도는 38도 선으로 갈라지고 만 것이다. 김구, 김규식이 남북협상을 통해 이 38선을 무너뜨려 보려 했으나 이미 권력화한 남한과 북한의 정치세력은 독립의 순수성을 유지할 수 없었다. 러시아와 미국이라는 승전국의 손에 좌우되는 운명이었던 것이다. 1948년 8월, 남한은 이승만 단독정부를 수립한다, 그리고 그 다음해 9월, 북한도 정권 수립을 선포한다. 그렇게 분단은 고착화되었다.
항일운동을 했던 남북한 정치세력은 통일이 독립의 완성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한 때 남북한은 화해가 가능해 보였다. 1972년 7.4 남북선언은 이산가족에게 꿈같은 소식이었다. 그러나 남한은 유신체제를, 북한은 김일성 유일사상 체제를 구축하고 적대적 공생관계를 유지한 다. 그러던 20세기 후반, 2000년 6월, 남북한에는 기적 같은 일이 실현되었다. 김대중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하여 김정일을 만나고 6.15선언을 한 것이다. 금강산 관광이 시작되었다. 경의선의 개통되고, 개성공단이 열렸다. 남한에서의 진보정권 10년간 남한은 이른바 '포용정책'(engagement policy)으로 세계에 남북한 화해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남북한은 다시 얼어붙어 버렸다. 금강산 관광객의 피살사건으로 금강산 관광이 닫히고, 이른바 5.24조치를 취해 남한은 북한에 대한 지원과 교류를 중단해 버리고 만다. 박근혜 정부 들어와서는 개성공단 마저도 전면 닫히고 남북한은 더욱 경색국면에 빠져들었다. 남한에서는 종북친북 프레임으로 통일에 대한 논의 주체가 사라져 버렸다. 문재인 정권 때는 전례없는 일이 벌어졌다. 2012년 북한 김정은 체제로의 전환, 한국, 미국, 중국의 리더쉽 교체가 동북아에서 거대한 전환기를 이루었다. 2018년, 십여 년 만에 한반도에는 전례 없던 ‘평화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세 차례의 남북정상회담을 비롯해 북중정상회담 세 차례, 북미정상회담 한 차례 등 북핵 문제의 주요 당사국간의 7차례의 정상회담이 불과 7개월 만에 진행되었다. 현대 국제관계사를 통틀어도 한 가지 목표를 향해 이렇게 단기간에 이처럼 많은 정상회담이 진행된 사례는 없었다.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질 것 같은 희망이 가득했다. 2019년 2월 북미정상회담의 결렬을 예측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러나 냉전의 마지막 문을 닫고 새로운 시대를 마주하는 듯 희망에 가득찼던 분위기는 2019년 북미정상회담 결렬 이후 다시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또 얼마나 기다려야할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는 아무도 모른다.
독립운동가들의 염원, 통일 한국으로 가는 길
남북한 통일은 한중일 세 나라와 미국과 러시아, 이렇게 주변 강대국의 상호작용 속에서 이루어 진다. 분명한 것은 통일 당사자인 남한과 북한의 통일에 대한 의지와 현명한 정책이다. 많은 전문가들은 통일 코리아의 위상이 현재보다 월등하게 높아질 거라 기대한다. 경제적 협력부분에서 북한의 역할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값싼 노동력을 아시아 시장에 공급하고 북한의 일자리를 창출하여 국내 경제를 활성화한다면 서로에게 윈윈이 되는 시나리오가 가능하다. 중국의 동북공정이나 일본 독도문제와 같은 역사문제에서도 북한과의 협력을 통해 더욱 강력한 힘을 가질 것으로 기대한다. 또한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문명권과 미국 중심의 서양 문명권이 G2를 형성하는 패러다임의 전환기에서 한반도의 위상은 더욱 높아질 것이라 본다. 한국은 역사적으로 중국과 함께 동아시아의 중요한 구성원이었고 이제는 세계 패권국 미국 아시아 태평양 안보라인의 주요 동맹국가이다. 분단 체제에서도 이 정도의 영향력을 발휘하는데 만약 우리가 통일 한국이 됐을 때 세계 중심축의 중심 국가인 중국이나 미국으로부터 그야말로 필수 불가결의 나라가 되지 않을까란 것이다.
물론 통일 한국이 가지는 위상을 이상주의라 비판하며 좀더 현실적으로 이 문제를 보는 사람들도 있다. 통일 한국이 가지는 위상을 모르는 바는 아니나 실제로 어떤 것이 가능한가로 봤을 때 통일은 도달하지 못할 수도 있는 목표라는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통일에 대한 논의보다 평화의 조건을 만들어 내는 것이 필요함을 역설한다. 평화의 조건을 만들고 중단된 남북교류 협력을 진행하는 것이 ‘통일논의’에 우선해야한다는 것이다. 현재 안정적 평화조차 확보되지 못한 상황 속에서 공고한 평화의 토대를 만드는 일에 집중하기도 모자란 시간이라는 것이 주요 논점이다.
현 국제 정세를 보더라도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진정으로’ 바라는 나라와 세력이 있는지 나는 의문이 든다. 물론 그 어떤 나라도 ‘표면적인’ 외교 수사에서 한반도의 평화을 바라지 않는다고 말하는 나라는 없다. 그러나 자국의 이익 입장에서 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훨씬 더 미묘한 상황이다. 오히려 한반도의 분단상태 자체가 주변국 모두의 이익에 부합할 수 있도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대한민국 국민들과 미래세대가 통일에 대한 구체적 상상과 대안이 없다면 미래는 더욱 암담하다. 과거에는 한민족이란 통일 당위성만으로도 이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지만 현 젊은 세대는 당위적 통일은 받아들이지 못한다. 이는 교단에선 여러 학생들을 만나면서 느꼈던 부분이다. ‘통일은 무조건 해야 하는 것‘이라는 당위적 논리로는 분단시대에 태어나 자란 젊은이들을 설득할 수 없다.
1997년 IMF시대에 유년기를 보내고 과거보다 더 치열한 경쟁시대를 살아온 아이들이다. 이들에게 무엇보다 ‘공정’의 가치가 화두일 수 밖에 없다. 2008년 평창동계올림픽에서 남북단일 아이스하키팀을 구성하겠다는 정부 발표에 가장 많이 반대했던 세대는 20대였다. 평화라는 가치를 일시적으로 만들어내기 위해 4년을 함께 동고동락하며 연습한 동료들과 찢어져 정치적으로 ‘남북 단일팀’을 구성한다는 논리가 그들에게는 ‘불공정성’이었던 것이다. 완전히 다른 정치체계 속에서 66년을 살아온 두 나라가 하나의 국가체제로 또는 1국가 2체계로 어떤 방식의 통일을 이룰것인가도 문제지만 지금은 ‘과정으로서의 통일’을 준비하는 새로운 가능성을 다양하게 모색하며 분단을 먼저 지워가는 작업이 우선되어야할 것이다. 그 후에 우리는 어떤 통일을 이룰 것인지를 매우 진지하게 다시 논의하고 재검토 해보아야 한다. 남북 연합론은 여전히 강력한 대안일 수 있지만 수년간 실제로 작동한 적이 없다. 흡수통일론은 전쟁의 위험이 있다. 새로운 통일론에 대한 논의로 일부에서는 다(多)연방제를 하나의 대안으로 두기도 한다. 남한 안에서 지방분권을 이루고 준 연방제로 나가면서 남북통일 이후에도 북한의 각 지방도 참여할 수 있는 제3의 새로운 모델이다. 앞으로도 더 활발하고 다양한 논의가 지속되어야 할 부분이다.
독립운동가들의 ‘생각’을 따라간 ‘과거’는 찾아갈 수는 있었지만 ‘스스로’ 만들 수는 없었다. 미래는 찾아갈 수는 없지만 ‘스스로’ 만들 수 있다. 핵심은 우리 ‘의지’와 ‘역량’이다. 1894년, 홍범도 장군의 26살로 돌아가 본다. 그 당시 우리는 자강과 사대 사이에서 갈등했다. 우리의 주체적인 역량을 만드는 데 더 노력하기보다는 외부의 힘을 끌어들이기에 바빴다. 조선이 청을 끌어들어자 일본이 개입했고, 청일전쟁에서 청이 패배함으로써 동북아는 일본의 수중에 들어가 버렸다. 결국 1910년, 대한민국은 일본에 의해 강제병합된다. 1945년에도 우리 힘으로 제국주의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미국과 소련의 힘으로 해방을 맞았기 때문에 또 다시 남북분단이라는 비극을 마주해야했다.
여기서 기억해야할 역사적 교훈은 스스로 강해질 의지와 역량, ‘자강’이다. 어차피 한반도의 평화는 주변국 손에 달렸다라던가,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하는 생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한반도의 평화를 바라지 않는다고 말할 주변국은 없지만 실제로 관심을 갖고 평화를 만들어 갈 사람은 미국인이나 중국인, 러시아인이 아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분명히 직시해야한다. 한반도는 우리가 살아갈 땅이지, 그들이 살아갈 땅이 아니다. 이 땅에서 살아가며, 여기서 역사를 만들어간 우리 선조들의 ‘생각’이 오늘을 만들었듯,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생각’이 미래를 만들 것이다. 한반도의 평화가 곧 세계 평화라는 확고한 인식 속에 주제적이고 적극적인 미래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과거 홍범도 장군이 살았던 그 시대의 아픔을 다시 겪을 수도 있다. 그들이 목숨걸고 지키려 했던 이 땅, 그들이 치열하게 고민한 ‘미래’ 가 있었기에 ‘독립된’ 대한민국이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분단된’ 대한민국에 살고 있다. ‘분단된’ 대한민국은 아직 완전한 ‘독립’이 아니다. 홍범도 장군이 평생을 바쳐 이루고자 했던 완전한 의미의 ‘독립된’ 대한민국으로 가는 역량과 의지, 그것은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 있다. 아직 우리가 가야할 길은 멀다. 우리가 해야할 일도 많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한국에 갇혀있지 않고 끊임없이 경계를 넘어 더 넓은 세상을 향해 걷고 있는 이유다.
여행과 평화
여행은 ‘경계넘기’다. 경계를 넘는 순간, 새로운 나를 마주한다. 기존의 고정된 사고 틀에서 벗어나면 그 곳엔 과거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내가 서 있다. 그래서 여행은 언제나 고정된 관점의 틀을 깨고 인식의 전환을 만들 수 있는 중요한 모멘텀이 된다. 나는 더욱 더 많은 사람들이 갇혀진 틀을 깨고 세상 밖으로 나가기를, 그리하여 ‘아니다’라고 생각했던 무언가에 ‘왜 아니지’를 물을 수 있기를, 늘 옳다고 생각했던 무언가에 ‘아니다’를 외칠 수 있기를 바란다. 바로 그 순간이 닫혀진 마음이 기적처럼 열리는, 관용과 포용의 세상을 마주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평화공존이란 이렇게 열린 마음이 가득한 시민들이 만드는 세상이다. 그러기에 나의 여행은 언제나 ‘악의 축’, ‘가난하고 미개한 나라’라는 고정된 관점으로 매몰된 국가들로 향한다. 그 고정관념을 깨려는 의지 속에 ‘평화의 씨앗’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여행을 ‘그랜드 피스투어’라고 명명한다. 스스로 갇혀진 관점을 깨려는 ‘의지’를 낸 사람들이 많은 나라, 그 국가에는 희망이 있다. 열린 마음과 관용성은 위대한 국력을 만드는 역량이기 때문이다. 배낭을 메고, 미지의 나라, 미디어가 만들어진 틀 속에 갇혀진 ‘최악, 미개, 가난, 전쟁, 악의 축’으로 떠나보면 언제나 나는 그 곳에서 선량한 사람들을 만났다. ‘발전, 선진, 첨단’이라는 문명국을 걸으면서는 ‘행복, 자유, 공존’의 가치를 다시 묻고 찾기도 했다. 중요한 것은 단 하나의 유일한 답, 단 하나의 고정된 관점만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식하려는 노력이다.
남북문제 역시 고정된 관점의 틀을 깨는 ‘인식의 전환’에서 그 해결점을 찾아봐야할 것이다. 내가 와세다 대학에 잠시 교환학생으로 가 있을 때 일본 내에 있는 조선대학 출신 강사를 보고 한국 친구는 말도 걸려고 하지 않았다. 내가 질문하려고 하자, 내 팔을 잡으며 아예 접촉도 하지 말라고 했다. 괜히 이후에 불미스러운 상황이 생길 수 있다며 미리 조심하자는 것이었다. 북경대학교 박사과정 재학시절, 나는 기숙사에서 적지 않은 수의 북한 유학생을 마주했다. 그러나 거기서는 그들도 한국 유학생들과 말을 섞으려고 하지 않았다. 북경대학교 기숙사의 엘리베이터에서 북한 유학생 2명과 한국 유학생 2명 사이에 흐르던 그 ‘정적’은 여전히 잊지 못할 순간으로 남아있다. 학문적으로 궁금한 것도 말하지 못하는 그 두려움, 편안한 안부인사조차 할 수 없는 설명할 수 없는 불편함, 그것은 마음작용이 만들어낸 ‘틀’이다. 그 틀을 깨려는 마음이 곧 상대를 포용할 수 있는 열린 태도, 관용의 정신, 그것이 곧 평화로 가는 시작이 아닐까.
긴 시간 얼어붙어있는 한반도는 여전히 겨울이다. 그러나 추운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온다. 봄이 오면 얼어붙었던 강도 녹아 다시 생명의 물을 흘려보낼 것이다. 그리하여 죽은 듯 고요했던 이 적막한 땅에도 모든 생명이 소생하는 푸른 대지와 싱그러운 햇살이 다시 비출 것이다. 얼음이 녹아 봄이 오듯, 닫혀진 경색된 사람들의 마음도 녹아내기를, 차갑게 얼어붙은 한반도에도 평화의 봄바람이 가득하기를 바라며 크질오르다를 떠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