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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우 Feb 12. 2023

카자흐스탄의 수도, 누르술탄

21세기 실크로드, 다시 그 길 위에서

카자흐스탄 수도로 가는 길


잘 계획된 현대식 건물들은 21세기의 실크로드 도시를 보여준다. 천년 후 이 도시를 여행할 누군가의 눈에 이 곳은 어떻게 기억될까? 천년의 역사를 간직한 실크로드의 ‘과거’ 속에서 비행기를 타고 훌쩍 ‘현재’로 넘어온 느낌이다. 과거 번성했던 실크로드 도시에 타지역 사람들이 입성했을 때 느끼는 놀라움이 이럴까? 카자흐스탄의 수도, 누르술탄(아스타나), 완벽하게 계획된 이 도시는 모든 것이 편리하고 신속하다. 크질오르다에서 국내선 비행기로 1시간 반이면 카자흐스탄의 수도 누르술탄에 도착한다. 10번 버스는 공항에서부터 신도시와 구도시를 가로지르며 달린다. 공항에 도착한 순간부터 숙소로 이동하기까지 편리한 대중교통과 원활한 의사소통에 감탄이 절로 난다. ‘수도(Capital City)’가 보여주는 강렬한 첫 인상이다. 1991년, 소련으로부터 독립한 카자흐스탄 정부는 북부 지방의 개발을 더욱 촉진시키고, 북부 지방에서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러시아계 주민들의 분리주의 움직임을 차단하기 위해 수도를 알마티에서 이 곳으로 옮긴다. 1997년 정식으로 천도하면서 도시 명칭을 카자흐어로 수도라는 뜻의 ‘아스타나’로 고쳤다. 카자흐스탄의 새로운 수도가 된 이후에 대규모 도시 계획이 진행되어 대통령궁, 최신 시설의 대규모 정부 청사, 바이테렉 타워, 초현대식 문화 센터 등 각종 공공 건물들의 건축이 이루어졌다. 인구도 빠르게 증가했다. 2011년에는 중앙아시아 최초로 알마티와 함께 동계 아시안 게임을 개최했다. 2017년에는 아스타나 세계박람회(EXPO)가 개최되었다. 2019년 3월 23일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전 대통령의 이름을 따 수도 아스타나는 ‘누르술탄’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왼쪽] 현대판 실크로드 도시 카자흐스탄 수도 아스타나  [오른쪽] 과거 실크로드 도시 카자흐스탄 투르기스탄

황금 문화 벨트 문화를 찾아


          중앙아시아의 리더이자 부국 카자흐스탄은 이 도시에서 모두 재현되고 있다. 현대에 완전히 새로 만들어진 이 도시 속에서 ‘유목문화의 정신’과 ‘한국’을 찾는다면 이상하게 들릴까? 그러나 나는 중앙유라시아를 관통하는 유목문화의 역사와 정신을 찾아 이 도시에 왔다. 동과 서로 분리된 ‘세계사’가 아닌 세계를 하나로 연결하는 ‘빅 히스토리’의 세계사를 찾기 위해 이 도시에 왔다. 

아스타나 도심 전경

                           

먼저, 2014년에 개관한 카자흐스탄 국립박물관으로 향한다. 편리한 도심의 교통 시스템과 곳곳에 즐비한 풍부한 음식점들은 어딘가를 찾기 위해 사람들에게 말을 걸 필요조차 없게 만든다. 그래서 도시화가 진행될 수도록 인간관계는 점점 더 피상적이고 삭막해져 가는걸까. 철저하게 계획된 이 도시는 버스의 노선과 주요 관광지가 매우 잘 정돈되어 있는 덕에 관광명소로 쉽게 연결된다. 바이테렉을 중심으로 한 거리에 주요 건축물과 관공소, 대통령 궁이 모두 자리잡고 있다. 현대건축의 모든 것이 한 자리에 있는 느낌이다. 세계에서 가잔 큰 칸의 천막 ‘한 샤트르(Khan Shatyr)와 2012년 제 4차 세계 종교지도자 회의가 열린 평화의 피라미드와 같은 상징적 건물이 모두 밀집되어 있다.


알마티의 국립박물관과 다르게 아스타나에 있는 카자흐스탄 국립박물관은 건축적 예술성과 규모에 완전히 압도된다. 그 바로 앞으로는 하얀 돔이 아름다온 모스크와 평화의 피라미드가 있다. 


[왼쪽] 평화의 피라미드, [오른쪽] 한 샤트르, [아래] 아스타나 국립 박물관


이 박물관의 하이라이트는 2층 황금의 방이다. 알마티의 박물관에서도 보았지만 카자흐스탄의 ‘황금인간’은 유목문명의 상징이다. 새로 만들어진 이 수도의 박물관에서도 예외없다. 모조품이지만 황금인간이 가지는 유목문명의 ‘상징성’ 때문에라도 박물관 전시에서 빼놓을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세계사 지식은 지구를 동과 서로 나눈 이분법적 사고에 기반한다. 이 사고체제 안에서 유목문명은 끼어들 틈이 없다. 동(東)도 아니고 서(西)도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서, ‘동(東)’의 역사, 중국사로 더 깊게 들어가면 유목민은 오랑캐요, 야만의 문화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야만’의 문화가 이렇게도 화려하고 정교한 황금문명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유목민은 늘 이동해야하기 때문에 백성들의 생사를 지켜주는 강력한 절대군주(칸)가 필요했다. 대칸은 유목민들이 숭상하는 천신, ‘텡그리’와 하나가 되고 전사들과 한마음으로 생활하였다. 칸과 한 마음으로 생활하며 생사를 함께하고 새로운 제국을 건설하는 친위조직을 ‘코미타투스’라 한다. 황금인간은 코미타투스의 일원이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이렇게 대칸의 제국은 칸과 죽음과 생사를 같이한 결사대로 구성되어 칸이 죽으면 같이 죽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했다. 살인과 야만의 상징인 유목인들에게 ‘목숨’을 걸고 지켜가는 신의와 맹세가 있는 것이다. 역사가 얼마나 ‘기록한 자’ 중심일 수 밖에 없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남방 농경정주문화에 진과 한이 있을 때, 북방 유목문화에도 흉노가 있었다. 그들은 상호작용하며 서로에게 영향을 주었다. 로마문명과 페르시아문명이 상호 영향을 주고받으며 경쟁했던 것과 같다. 유목민의 역사가 어찌 없었겠는가. 그러나 역사를 기록한 자가 유목민이 아니였으니 유목민의 역사는 정주민의 역사와 함께 균형있게 서술될 수 없었다. 이렇게 문명교류사적 시각에서 역사를 바라보면 중앙유라시아와 한반도의 역사도 전혀 별개가 아니라 상호 연결된 거대한 교류사 안에서 다시 바라보게 된다. 


황금문명의 유목문화: 여성의 복식재현(왼쪽)과 말 안장재현(오른쪽)


중앙유라시아와 한국의 관계


신라의 괘릉과 흥덕왕릉 앞에는 서역 소그드인을 모습을 한 왕릉의 무인석이 있다. 지배선 교수는 <사마르칸트와 고구려의 관계에 대하여(2011)>란 책에서 “고구려 장군 온달(?-590)의 아버지는 소그디아(현재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에서 건너온 왕족일 가능성이 크다”는 주장을 한다. 또 고대 페르시아의 대서사시 <쿠쉬나메Kushnameh>에는 신라공주와 페르시아 왕자의 결혼이야기가 등장한다. 모두 서역과 한반도의 교류를 보여주는 증거들이다. 역사는 단절된 것이 아니며 끊임없이 교류하며 함께 만들어온 것임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일부 학자들은 중앙아시아와 한국의 관계를 단군조선 이전부터 있어왔을 것이라 주장한다. 예컨데, 우리 단군신화 속에 ‘환웅이 풍신, 우사, 운사 3인과 3천명을 거느리고 태백산 신단수 아래 신시를 열고 홍익인간의 이념으로 배달국을 건국했다’라는 구절이 등장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3천명’이 바로 한국 ‘코미타투스’라는 것이다. 한국 코미타투스의 맥을 환웅와 함께한 배달국 3000년 제세핵랑군, 단군조선의 국자랑, 북부여의 천왕랑, 고구려의 조의선인, 백제의 무절, 신라의 화랑, 고려의 재가화상, 조선의 진유와 조선말 60만 동학군으로 내려오는 근원을 유목민의 ‘코미타쿠스’라 본다. 뿐만 아니라 황금인간으로 대표되는 유목민의 황금 문명은 신라의 금관문화까지 연결되어 하나의 황금문화벨트를 이루고 있다. 1970년대 경주 계림로에서 발견된 황금보검도 우리와 중앙유라시아의 관계를 보여준다. 이 황금보검은 황금문화대의 유목국가에서 나온것으로 알려졌으며 훈족의 왕 아틸라가 보검을 가지고 있던 것으로 보아 훈족의 선물로 추정하고 있다.           



신라에서 출토된 페르시아 유리잔, 아랍여인이 새겨진 목걸이, 봉황의 머리 장식이 있는 물병, 말 뒤에 가지고 다니는 동복은 모두 실크로드에서 교역된 물품이다. 실크로드의 출발점이 중국 시안이 아니라 신라라고 보여주는 부분이다. 경주 불국사에서는 돌십자가와 마리아상 조각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기독교가 통일신라 시대에 들어왔을 가능성이 있음을 시사한다. 사실 중국 서안 비림에 있는 ‘대진경교유행비’는 이미 중국에 당시 네스토리우스교가 들어와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대진은 로마의 한문어, 경교는 기독교종파 중 하나인 네스토리우스교이다. 그러니까 이 비석은 당나라때 로마에서 들어온 경교(기독교)가 유행했던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다. 세계에서 출토된 금관은 모두 13개인데 그중 7개 신라금관이고 2개가 가야금관이다. 스키타이는 금관은 아니지만 사슴문명의 아름다운 금장식이 박물관에 보관되어있다. 몽골도 황금문화권이다. 몽골의 카라코롬에는 금관을 비롯하여 금제 봉수명과 금잔 등의 유물들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황금 문화권으로 묶이는 이 모든 지역들에서 발견된 유물들은 당시 실크로드 몽고초원로를 통해 얼마나 활발한 교역이 진행되었는지 보여준다.  

 

신라와 서역의 교류


그 교류는 신라까지도 이어진다. 경주 황남대총에서 출토된 새머리 모양 물병(봉수병)은 전형적인 후기 로마유리계 유리병이다. 신기하게도 이웃인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유사품이 발견된 바가 없다고 한다. 그렇다면 동아시아에서 우리만이 가지고 있는 이 1,600년 전의 유물은 언제 어디서 만들어져 신라까지 전해진것일까? 


정수일은 우리나라에서 유리는 지금으로부터 2,200여 년 전인 철기시대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했으며, 기원을 전후에서는 동아시아 유리보고로 자리매김될 정도로 유리가 많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3세기에 저술된 중국의 사서 <삼국지>에는 삼한인들은 금이나 은, 비단 보다도 유리를 더 귀한 재보로 여긴다고 씌어있다. 지금까지 출토된 여러가지 유리유물로 미루어 우리나라의 유리제품은 크게 장식품과 그릇이 두 가지로 나누어지며, 일찍이 기원전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했을 뿐만 아니라 소재나 기법이 다양하고 그 교류 또한 상당히 광범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우리나라 유리가 납-바륨, 칼륨, 소다, 납 등 다양한 조성성분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삼국시대 전반에 걸쳐 제작된 다양한 유리장식품이 곳곳에서 발견되는데 그중에서 ‘곡옥’은 우리나라 특유의 것이다. 서역과의 교류를 보여주는 구술은 경주 미추왕릉지구 고분에서 출토된 <인물무늬 상감구슬>이 있다. 목걸이의 중심 구슬에는 사람의 얼굴과 새, 그리고 꽃무늬가 검정, 빨강, 흰색으로 아주 정교하게 묘사되어 있는데 정수일은 얼굴의 생김새나 길고 짙은 눈썹 등으로 보아 아리아인 계통의 서역인이 틀림없다고 말한다. 지금까지 출토된 고대 유리용기 중 출토지가 분명한 22점은 모두가 신라 고분에서 출토되었으며 그 연대는 4세기 말에서 5세기 말까지의 약 100년간에 해당된다. 고분에서 나온 이러한 용기들은 소재나 제조기법, 장식 무늬, 색깔등으로 보아 거의 후기 로마유리계에 속하는 것으로서, 4-5세기 경에 지중해 연안에서 제작된 후 흑해로 북상해 남러시아에서 초원로를 따라 북중국을 거쳐 신라에 유입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초원로를 통해 유리가 동쪽으로 전파되었다는 설을 뒷받침해주며, 아울러 신라문화가 초원로를 통해 로마와 접촉했음을 시사한다.


유리교류는 통일 신라시대에도 계속된다. 통일신라 유리용기로는 불국사 석가탑을 비롯한 불사의 사리그릇으로 쓰인 8점의 용기가 있다. 그중 1959년 경북 칠곡군 송림사 5층 전탑에서 나온 금동제 사리그릇은 매우 드문 유물로 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통일 신라시대 초기인 7세기 초에 건조된 이 탑의 중앙부에 안치된 네모난 금동제 사리그릇 속에는 큰 유리잔과 다시 그곳에 작은 녹색 유리병이 들어있다. 유리 잔 표면에는 페르시아 사산계 무늬인 고리무늬가 3단으로 장식되어 있는데, 이것은 사산계 유리제품이나 제조기범이 중국을 통해 우리나라에 들어왔음을 말해준다. 이처럼 로마유리계 용기가 고신라 고분에서 출토되고, 사산계 용기가 통일신라시대의 사리탑에서 발견되었다는 사실은 동서문명교류라는 큰 흐름속에서 신라와 통일신라문화가 지니고 있는 의미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고고학자 권오영은 한반도의 고대 무덤에서 좁쌀 만한 유리구슬이 엄청나게 발견되는 것에 착안하여 발굴조사를 시작했다. 경기도 오산의 한 유적에서만 7만 5천점, 충남 아산의 무덤 1기에서 2281점이 발견될 정도로 많은 양이 매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한반도에서 발견된 고대의 유리구술을 수십만점에 이를 것으로 추정한다. 권오영이 중심적으로 본 것은 해상루트이다. 이 유리 구술의 절대다수는 인도와 태평양 일대의 여러공방에서 제작된뒤 바다를 통해 광범위하게 유통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최대 생산지는 인도 동해안일대, 말레이반도, 타이, 베트남이며 한반도는 주요 수입국이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우리는 흔히 실크로드라고 하면 낙타와 오아시스, 카라반이라고 불리는 대상을 떠올린다. 사막과 오아시스의 길을 통한 동서교류, 그리고 그 북방에서 이루어진 초원길의 교류가 유라시아의 동솨 서를 엮는데에 중요한 구실을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못지않게 바닷길도 중요한 구실을 했다. 


황금인간을 통해 한국까지 연결된 ‘신라’를 본다. 신라의 황금 문화는 유목민의 황금문화권 안에서 육상실크로드, 초원의 길을 타고 전해진 것이다. 신라의 유리에는 로마로 이어지는 오아시스 실크로드가 있다. 신라의 유리구슬에는 동남아시아의 바닷길로 연결되는 해상실크로드가 있다. 그 어떤 유물 하나 주변 국가와의 교류없이 단독으로, 자생적으로 생길 수 있는 것이  있을까. 이 머나먼 땅 아스타나가 한국과 부쩍이나 가깝게 느껴지는 이유다. 


바이테렉(Bayterek), 카자흐스탄은 단군의 나라인가?


더욱 놀라운 것은 2016년, 카자흐스탄 정부에서 단군왕검 기념주화를 2000개를 발행한 사실이다. 카자흐스탄과 대한민국이 문화적으로 얼마나 뿌리가 깊은지를 알려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이 동전에는 단군왕건의 모습과 곰과 호랑이, 봉황새가 그려져 있다. 카자흐스탄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한 김정민박사는 카자흐스탄을 단군의 나라라고 말한다. 도대체 이 도시와 단군의 이야기의 연관고리는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그 연결점을 찾기위해 아스타나의 상징 조형물 바이테렉으로 간다. 천년 후 누군가는 바로 이곳에서 내가 옛 실크로드 도시의 미나렛을 보는 느낌으로 이 ‘타워’를 바라보고 있지 않을까? 중심에 가장 높게 서있는 타워가 바로 ‘바이테렉’이라는 거대한 나무처럼 생긴 건축물이다. 이 타워는 카자흐스탄 대통령 궁 바로 앞에 서있다. 1997년 알마티에서 아스타나로 수도를 옮긴 기념으로 2002년 건립되었다고 한다. <한단고기>를 역주한 안경전에 따르면, 이 타워는 동서 창세문화의 원형정신을 상징한다고 한다. 타워 맨위에 보이는 황금알은 태양새 삼룩(Samruk)이 낳은 생명의 황금알이다. 아래 기둥은 하늘과 땅, 인간이 만나는 신단수(Divine Tree)를 상징하고 있다. 이 바이테렉 타워의 내부로 들어가면 전망대가 있다. 전망대 안에는 기둥이 3개가 있고 꼭대기 위를 보면 현직대통령의 손모양이 담겨진 삼각형의 모형이 있다. 


대통령의 손과 맞춰볼 수 있는 것이다. 현지 사람들은 이렇게 손을 대고 소원을 빌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믿고 있었다. 유목문화를 상징하는 카자흐스탄의 또다른 무늬는 이 나라의 국장이다. 국장의 좌우에는 천마가, 중심에는 유목민들의 집 유르트가 우물정자형으로 3수 문양을 하고 있다. 바이테렉의 가장 높은 천장도 역시 유트르 천막의 문양이 보인다. 카자흐스탄의 국기에는 태양과 태양새(삼룩)이 보인다. 삼룩을 고구려에서는 삼족오라고 불렀다 한다. 한국 사학계는 부정하고 조작한 책이라고 말하는 <환단고기> 의 <단군세기>에는 흉노, 돌궐, 몽골 등 3대 유목민족의 시원이 기록되어 있다. <환단고기>가 위서인지 아닌지에 대한 논쟁보다 중요한 것은 동아시아 단군조선 역사를 곰과 호랑이의 신화로만 한정하여 보면 유라시아 유목문화의 탄생과 역사 경영방식, 문화 근원정신 등을 알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 경우, 우리는 유라시아 유목문화의 원류를 전혀 모른 채 이 문명을 잇는 ‘실크로드’라는 거대한 길 위의 교류사를 놓치게 된다. 천지와 일월, 조상을 숭배하는 유목 문화 정신의 원류는 우리의 문화에서도 강조되는 부분이다. 중앙 유라시아는 지구문명이 탄생지이자, 동서문화가 끊임없이 교류하는 관문이다. 동서의 문화 종교 정치 사상 의식주 생활문화가 만나고 조화되고 융합되는 곳이다. 아스타나는 말한다. 지구를 동과 서로 나눈 ‘세계사’가 아니라 중앙유라시아에서 시작되어 갈라진 하나의 거대한 역사로 보라. ‘빅 히스토리’로서의 세계사 안에서 서면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는 이 도시, ‘아스타나’가 있다.  


카자흐스탄과 중국


유목민의 찬란한 황금문화에서 빠져나오면 중앙아시아를 이끌어가는 경제부국 카자흐스탄의 힘이 보인다. 알마티에 키맵대학이 있다면 아스타나에는 나제르바예프 대학이 있다. 이 대학의 바로 앞에는 2017 세계박람회(EXPO)의 행사장이 있어 늘 관광객들이 발길이 붐빈다. 도약하는 카자흐스탄의 ‘현재’와 카자흐스탄의‘미래’가 마주한 공간에 앉아 중앙아시아와 중국, 동북아시아를 생각한다. 


내가 나제르바예프 대학이름을 처음들은 것은 중국의 ‘일대일로’ 구상 때문이었다. 2013년이었다. 이 대학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일대일로(一帶一路·One belt, One road)’라는 구상을 연설에서‘처음’꺼낸 ‘의미’있는 곳이다. 중국이 일대일로를 언급한 이후, 이 사업에 80개국이 참여했다. 중국은 일대일로 사업의 핵심 협력 국가인 카자흐스탄에 2017년까지 400억 달러를 쏟아부었다. 하지만 카자흐스탄에선 오히려 반중(反中) 정서가 확산하는 양상이다. 일대일로를 통한 경제협력이 철저하게 중국의 이익을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중앙아시아를 여행하면서 중국어를 배우는 이 나라 사람을 본적도 없지만 중국에 대한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만나지 못했다. 중국은 카자흐스탄과 국경을 마주하는 위구르 자치주에 대한 감시로, 국경 경비가 철저하다. 중국은 실크로드를 횡단하는 세계의 여행자들에게 비자를 안내주기로도 악명이 높다. 반드시 자국에서 비자프로세스를 완벽하게 해오지 않으면 국경에서 도착비자를 받아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유라시아 국가들은 일대일로 사업의 핵심 파트너다. 중국은 특히 자국과 국경을 접하는 러시아,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파키스탄 등 유라시아 국가와 교통 물류 사업을 확대하기 위해 거대한 ‘경제 회랑’을 건설하려고 한다. 


우크라이나 크림반도를 점령하면서 2014년부터 서방의 경제 제재를 받는 러시아는 일대일로 사업이 자국 인프라 건설에 도움이 된다며 반기고 있다. 반면 러시아와 같은 경제 규모, 군사력, 정치적 영향력을 갖지 못한 유라시아 국가들에선 일대일로 사업에 대한 우려와 반감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카자흐스탄은 러시아와 중국 다음으로 유라시아에서 큰 면적(세계 9위, 272만4900㎢)을 가진 나라다. 석유 매장량은 약 300억 배럴로 세계 12위 수준이다. 1991년 독립 이후 지금까지 권좌를 지키는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은 러시아와 전통적인 유대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지나친 의존을 탈피하기 위해 미국, 중국, 유럽연합(EU)과의 관계도 중시한다. 그중 중국과의 관계가 핵심이다. 중국은 일찍이 카자흐스탄의 지정학적 위치와 자원에 주목했다. 카자흐스탄 유전의 절반 이상은 중국이 소유권을 갖고 있으며, 카스피해에서 신장성까지는 송유관이 깔려 있다. 또한 카자흐스탄에는 중국의 가장 중요한 가스 수입국인 투르크메니스탄에서 오는 가스관이 3개나 깔려 있다. 중국은 2015년부터 유럽으로 가는 물류 허브로 카자흐스탄에 대규모 투자를 진행하고 있다.  

 

중국과 카자흐스탄의 경제협력의 상징호로고스 자유무역지대


중국과 카자흐스탄의 경제협력의 상징이 바로 호로고스 자유경제구역이다. 중국과 카자흐스탄의 경계 지역인 호르고스는 일대일로의 6대 경제회랑 중 하나인 ‘신유라시아 대륙교량’의 출발지이자 물류 허브다. 호르고스에 집결한 중국 상품이 국제철도를 통해 중앙아시아·러시아·유럽으로 수출된다. 전문가들은 2017년 호르고스의 컨테이너 물동량은 10만 개였지만 2020년에는 50만 개로 급증할 것으로 예상했다. 중국은 호르고스를 유럽으로 가는 내륙 항만(dry port)으로 개발하고 있으며 이미 카자흐스탄에서 지분 49%를 사들였다. 2017년 6월 시진핑 주석은 카자흐스탄을 다시 방문해 “일대일로 이니셔티브는 지난 4년간 제안에서 행동으로, 개념에서 실행으로 옮겨졌으며, 더 빠른 속도로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카자흐스탄 국민은 최대 투자 국가인 중국을 경계한다. 19세기 카자흐 부족은 조공을 강요하는 청나라를 피해 러시아의 지배를 선택했다. 중국을 러시아보다 더 위협적인 국가로 생각했다. 카자흐스탄은 자국 및 중앙아시아로 중국의 영향력이 확장되는 것을 경계한다. 2016년 3월 카자흐스탄 정부가 외국인에게 토지 임대를 10년에서 25년까지 허용하자 카자흐스탄 국민은 이 조치가 중국에 혜택을 주는 것이라며 대규모 반중 시위를 벌였다. 국민의 반(反)중국 정서에 놀란 나자르바예프 정권은 경제 및 농업 장관을 해고했고 토지개혁 정책 실행을 유예했다. 유라시안개발은행의 조사에 따르면, 카자흐스탄 국민 6명 중 1명만이 중국을 ‘우방’으로 여긴다. 중국에 대한 반중정서는 중앙아시아 전 지역에서 지속적으로 느낄 수 있는 부분이다. 


중앙아시아와 일대일로


자원의 양이 많지 않아 다른 중앙아시아 국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가난한 키르기스스탄과 타지키스탄은 중국의 일대일로를 누구보다 환영했다. 키르기스스탄과 타지키스탄은 6대 회랑 중 하나인 ‘중국-중앙아시아-서부아시아’를 연결하는 가스 파이프라인이 지나며 우즈베키스탄과 중국을 잇는 철도가 놓일 예정이다. 키르기스스탄은 중국의 원조로 주변국을 이어주는 도로를 건설했고 비슈케크 시내 도로를 보수했다. 키르기스스탄의 경제학자인 주마카두로프 아코네프는 중국 신화통신 인터뷰에서 “중국의 실크로드 경제벨트는 키르기스스탄에 최적의 기회를 가져다줬다”고 극찬했다.  


타지키스탄도 이미 중국과 교역하지 않고는 경제를 운용할 수 없는 지경이라 한다. 중국은 2016년 타지키스탄 서부 도시 ‘바흐다트~아만’ 간 48.6㎞ 구간의 철도를 개설했다. 이를 통해 타지키스탄은 중부와 남부 지역을 처음으로 철도로 연결할 수 있었다. 또한 타지키스탄 최대 사업인 수력발전에 중국이 적극적으로 투자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이 공짜로 인프라를 깔아준 것은 아니다. 두 나라는 중국 돈으로 철도와 도로, 수력발전소, 가스관을 건설하면서 많은 빚을 졌다. 중국 의존도는 크게 높아졌다. 키르기스스탄의 채무는 일대일로 사업 이후 국내총생산(GDP) 대비 16%나 불어났다. 이중 중국에 빌린 돈이 71%나 치지한다. 타지키스탄은 수력발전소 건설 자금으로 받은 3억 달러를 갚지 못해 중국에 금광 개발권을 넘겼다. 투르크메니스탄도 남부 가스전을 개발하면서 중국에 지분과 물량을 넘겨줘야 했다.  


더 심각한 것은 중국의 투자가 당사국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중국의 인프라 투자는 현지 노동력을 배제하고 저임금 중국 노동자를 대거 유입시키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투르크메니스탄과 우즈베키스탄은 현지 노동자 고용을 의무화하는 법을 제정했지만키르기스스탄과 타지키스탄은 중국 눈치를 보느라고 외국인 노동자 유입에 관한 법률을 만들지 못했다. 이로 인해 그러지 않아도 실업 문제가 심각한 두 나라에서 자국민들이 일자리에서 배제되는 결과가 나타났다인프라 투자 사업을 통한 고용 창출 효과를 못 보고 있는 것이다키르기스스탄 제이-베스트 컨설팅사 제니 제니스의 2015년 조사에 따르면키르기스스탄 국민의  80%는 중국계의 유입을 부정적으로 여기고 있다. 또한 키르기스스탄 국민의 44%는 중국 투자가 자국 독립에 위협이 된다고 본다.

 

키르기스스탄과 타지키스탄 경제는 이미 중국에 크게 의존하고 있지만 사회적·정치적 반감은 계속 증가하는 추세이다. 상당수 유라시아 국가에선 일대일로에 대한 부정적 여론이 계속 높아지는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이 사업이 결국 중국이 돈 버는 구조로 진행되기 때문이다. 중국은 이들 나라에 인프라 건설 비용을 대주면서 이 비용을 이들 나라의 국가 부채로 잡는다. 또 중국 기업들과 근로자들을 동원해 사업을 추진한다.  


파키스탄의 다이메르-바샤댐 사업은 건설 인력 1만7000여 명 대다수를 중국인으로 충원하고 있다. 키르기스스탄에서 중국 자본으로 건설 중인 2개의 도로 건설 프로젝트도 중국인 노동자가 70%에 달한다. 반면 이미 중국의 인프라 건설로 쓴맛을 본 투르크메니스탄은 건설 인력의 70%를 현지인으로 고용하도록 했다. 우즈베키스탄도 경영 관련 업무에만 중국인이 참여하도록 법을 바꿨다. 파키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같은 나라들은 제대로 된 제조업을 갖고 있지 않아 실질 실업률이 40%가 넘는다. 가뜩이나 일자리가 부족한 마당에 중국 노동자들이 그 자리를 다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인프라 건설 과정에서 현지 자재 대신 중국산 철, 시멘트를 사용하고 장비도 중국에서 직접 조달한다. 심지어 식당마저 같은 중국인에게 하청을 준다. 또한 중국 기업들의 불투명한 경영 관행과 국제 경험 부족으로 해당 지역의 반발을 사는 경우도 많다.


중국은 일대일로가 ‘중국이 국제사회를 위해 제공하는 공공재’라고 강조하지만 적어도 중앙아시아의 협력국가들은 ‘일종의 부채’로 받아들이고 있는 듯하다. 이것이 중앙아시아 반중정서의 핵심원인이다.  중국은 이들 국가에 원조해주는 대가로 천연자원이나 계약 패키지에 접근하게 해달라고 요구한다. 또한 양허, 무역 협정, 투자에 대한 협상을 수정하도록 재협상을 강요한다. 중국은 타지키스탄에 일부 국토의 양보를 요구했고, 아프가니스탄엔 군사 요충지의 중국군 주둔을 타진하기도 했다. 이렇게 중국의 원조는 대부분 조건부로 제공되는데, 이는 중국이 내는 돈 중 상당액이 중국 기업으로 들어가고 있음을 의미한다. 결국 중국 기업들은 일대일로 원조를 해외로 손쉽게 진출하는 계기로 삼고 있다.  


자본과 자원이 부족한 국가들은 당장 인프라 투자를 통해 경기를 활성화하고 성장 동력을 확충하기 위해 중국이 요구하는 조건에 굴복하게 된다. 원조나 투자를 받는 국가들은 원금과 이자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요구, 중국 기업을 배려하라는 요구를 받아들여야 한다. 일부 학자들은 “중국이 못 갚을 것을 알면서도 악의적으로 빚의 수렁에 빠뜨리는 방식으로 유라시아 국가에 일종의 약탈적 대출(predatory lending)을 자행한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중국이 원조를 통해 중국 기업과 중국인들에게 일감을 준다. 장기적으로 빌려준 돈을 무기로 유라시아 국가에 시장 개방을 요구한다. 이들 국가를 상대로 무역 흑자를 달성하려고 한다”고 비판한다.  


일대일로가 정말 성공하려면 원조를 받는 국가들이 중국과 교역을 증대하고 중국과의 무역 다변화가 가능하도록 자체 산업을 육성해야 한다. 그러나 현재 중국 산업구조로는 불가능하다. 중국보다 더 싸게 상품을 제조할 수 있는 개발도상 국가가 거의 없기 때문다. 베트남이 자국에 투자하는 한국을 반기지만 중국에 대해 부정적인 것도 이 때문이다. 결국 일대일로는 유라시아 국가들이 장기적으로 중국 경제에 종속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일대일로 프로젝트로 인해 결국 유라시아 국가 사이에서 ‘중국은 위험한 나라’라는 인식이 확산할 수 있다. 이런 중국식 개발 모델에 대한 부작용은 아프리카에서 시작해 유라시아 지역으로 번지는 양상이다. 특히 미국마저 일대일로를 중국의 대외 확장 정책으로 보면서 일대일로의 이미지는 갈수록 안 좋아지고 있다. 적어도 중앙아시아에서 중국 일대일로는 이렇게 민중적 대중정서가 악화되는걸 보면 브랜딩에 실패한 듯하다. 그런데 심지어 일대일로가‘중국식 약탈’이라면, 약탈하는 중국엔 좋은 것이어야 하는데, 중국 내부에서도 일대일로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몇몇 중국 인사는 중국이 보유한 막대한 외화가 일대일로에 투입되는 것과 관련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고 냉소한다.


 중국은 일대일로 정책을 밀어붙이기 위해 2014년 12월 400억 달러 규모의 실크로드 기금을 조성했다. 이후 아시아지역 개발도상국에 인프라를 구축해주겠다면서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을 설립했다. 여기에 매년 100억∼150억 달러의 자금을 투입하겠다는 전략을 세웠다. 그러나 돈이 턱없이 부족한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6대 경제회랑을 구축하는 데에도 막대한 돈이 들었다. 또한 이런 인프라에서 나오는 수익은 별로 없다. 이에 따라 이미 투자한 돈 대부분은 회수하기 어려운 부실채권이 돼버렸다. 게다가 국가마다 다른 제도 때문에 생기는 조정 비용, 부패한 현지 정치세력에 바치는 뇌물 비용, 서로 다른 문화와 종교로 인해 발생하는 매물 비용으로도 돈이 나갔다.이 때문에 중국 인사 몇몇은 “중국의 국부를 중국 영토 안에서 중국인들을 위해 투자해야지 왜 황량한 아시아 내륙에서 쓰나”라고 반문하기 시작했다. 일부 중국 전문가 사이에선 “일대일로가 실패로 귀결되면 중국 내부에서 시진핑 정권도 위기를 맞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현재 격화되고 있는 미중간 무역전쟁에서 중국이 패하고 경제위기를 맞게 되면 일대일로 사업은 중단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런 대규모 인프라 사업이 중도에서 멈추면 유라시아 국가들도 덩달아 중국발 위기의 피해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 중국 기업과 중국 노동자가 휩쓸고 지나가면서 환경이 파괴된 현장도, 장부상으로 남은 채무도 이 국가들에 큰 부담으로 남을 것이다. 여전히 많은 부담이 존재하지만 중앙아시아가 가지는 잠재력만큼은 바로 보아야한다. 풍부한 자원과 엄청난 노동력의 가진 이 무한 잠재력의 땅이 동북아시아에 사는 우리들에게 여전히 너무도 멀게 느껴진다는 것이 안타깝다. 


21세기의 실크로드다시 그 길 위에서


한반도는 북핵문제로‘안보’프레임이 너무나 강력하게 작용하기 때문에 이 거대한 대륙으로 이어지는 물류 전진기지까지 신속하게 다다르지 못하고 있다. 여전히 더 시간이 필요할 듯 보인다. 21세기 실크로드의 마지막 동단, 한반도는 수십세기 동안 끊어진이래 그대로이다. 이 거대한 대륙으로 나가는 통로가 닫혀 우리는 이 위대한 실크로드의 길 위에서 세상을 보지 못했다. 이제 한반도에는 새로운 빛이 보인다. 66년 분단의 군사경계선 위로 무장이 해제되고, 조금씩 경계를 넘어갈 수 있는 지역이 넓어지고 있다. 변화하는 한반도를 살아가는 새로운 세대들은 이제 용기를 내야한다. 실크로드의 길 위에 서서 세상을 바라봐야 한다. 미중간의 대립이 첨예해지며 질 수록, 강대국 러시아, 미국, 중국의 영향력 안에서 언제나 자국의 안보와 미래를 고민하는 중앙아시아를 보아야한다. 미소라는 냉전의 틀을 넘어, 중앙 유라시아라는 더 거대한 문명사적 프레임위에서 진행되는 파이프라인의 경제학을 보야한다. 중앙아시아의 지정학적 위치를 둘러싼 실크로드 국제정치학을 보아야 한다. 그리하여, 새롭게 변화하는 세기를 준비하고 그 변화를 리딩할 능력을 갖추어야 할 것이다. 21세기 실크로드의 도시가 부른다. 지금 짐을 꾸려, 한반짝 나가야할 바로 그 곳, 중앙아시아가 아름답게 지는 해를 등지고 빛나는 얼굴로 나를 마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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