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자흐스탄의 옛 수도, 알마티
비슈케크에서 알마티로 가는 길
가끔 길을 잃으면 어떨까 생각해본다. 지도도 없고, 물어볼 이도 없는 길 위에서 홀로 서 있는 기분은 어떨까. 돌아갈 곳도 없고 누구도 지금 내가 어디 있는지도 알 수 없는 그 어딘가에 홀로 서 있다면 그것은 두려움일까 자유로움일까. 자유롭지만 두려운, 두렵지만 또 자유로울 것 같은 차창 밖 설산과 평원이 만드는 대조적 아름다움이 묻는다. 오늘 처음 넘어 보는 경계, 태어나서 처음 밟아보는 낯선 땅으로 떠나는 너는 지금 어떤 상태인지.
키르르스탄의 수도, 비슈케크에서 카자흐스탄의 옛 수도, 알마티로 가는 버스가 국경에 선다. 낯선 땅에 들어서면 인터넷이 끊긴다. 언어도 통하지 않는다. 가지고 있는 통화도 사용되지 않는다. 내리쬐는 뜨거운 태양을 마주하며 낯선 도시의 입국심사를 기다린다. 몰려드는 인파는 엄청난데 아무도 줄을 서지 않는다. 담당하는 직원은 어떤 이유로 저기 서 있는지 알 수가 없다. 대체 유니폼을 입고 저기 서서 그가 하는 일은 무엇일까. 그 어떤 컨트롤도 없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동선과 시간낭비인데 불만을 제기하거나 해결하려는 사람이 없다. 줄 사이를 계속 비집고 들어오는 예의 없는 사람들뿐이다. 입국심사를 맡은 카자흐스탄 사람들은 웃음기가 하나도 없다. 기계적으로 일을 처리하고 있을 뿐이다. 15분이면 처리할 수 있을 것 같은 입국심사가 1시간이 걸린다. 필요한 서류를 받는 과정도,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는 과정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시간낭비’가 이어진다. 사람들은 서로 빨리 가려고 난리인데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할 담당자는 아무 일을 하지 않는다. 이 문제가 하루 이틀이 아닐 것 같은데 아무런 개선없이 이 상태가 유지되는 것이 더 신기하다. 정말 아무도 이 문제를 해결하려 들지 않는 건 대체 무슨 이유인가. 이 어이없는 상황에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난다. 그러자 옆에서 같이 줄 서 있던 배낭여행객이 지쳐보이는 나를 향해 말한다.
“소비에트 시대로 온 걸 환영해.”
구소련 연방 시절을 겪었다는 슬로바키아에서 온 여행객은 이런 상황이 익숙하다는 그냥 웃고만다. 이 불편한 상황이 계속될 것 같아 새로운 땅을 미처 밟기도 전에 두려워진다. 옆에 줄을 선 여행자에게 ‘넌 괜찮냐’고 물었더니 뭐가 안 괜찮은지를 묻는다. 전혀 이상할 것도 없다는 듯한 태연한 태도에 오히려 내가 더 당황스럽다. 그는 이런 ‘불편함’이 익숙한 듯했다. 하지만 동시에 내가 불편해하는 이유도 공감하고 있다. 그는 밀고 들어오는 사람들이 있으면 자리를 내주고 따가운 태양빛아래 배낭을 내려놓고 앉아서 멍하기 기다렸다. 시간도, 상황도, 사람도 모든 것에부터 자유로워 보이는 그와 모든 것이 불편한 내가 한 공간에 있다. 같은 상황에 놓은 두 사람을 다르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똑 같은 상황을 ‘다르게’ 받아들이는 ‘마음’이 묻는다. 길을 잃으면 어떤 느낌일 것인지는 ‘길을 잃은 상황’이 아니라, 그 상황을 받아들이는 ‘마음’에 따라 달라진다고. 기다리는 사람도 없는데 도대체 급할게 무엇인가. 어딘지 모를 새로운 공간이면 어떤가. 어디든 걷다보면 도착하게 될 곳이 있으리라. 이제 짊어진 가방을 아예 편하게 내려놓고 입국심사를 기다린다. 시간이 걸렸지만 심사는 어쨌든 끝났고 차는 이제 알마티 시내를 향해 달려간다.
알마티 시내에서
거대한 도심이다. 도시 전체의 규모도 엄청나지만 계속해서 건설중인 고층건물이 곳곳에 보인다.카자흐스탄이 중앙아시아 국가 중 최고의 경제력을 가진 나라임은 도심에 들어서는 순간 느낄 수 있다. 물론 좀 더 예민한 사람은 국경을 넘어오면서 느꼈을 것이다. 비슈케크 국경에서부터 알마티 오는 도로의 포장상태는 그 전과 확연하게 다르기 때문이다. 굴곡 없는 평평한 고속도로가 어색할만큼 우즈베키스탄과 키르기스스탄의 도로는 울퉁불퉁했다. 알마티는 잘 정렬된 도로와 도심 곳곳에 공원이 인상적이다. 많은 현대적 고층건물과 건설 현장이 카자흐스탄이 중앙아시아의 부국임을 보여준다. 버스정류장에서 내려 몇몇의 베낭여행자들과 택시를 공유하여 시내로 들어온다. 해 질 녘 시원하게 뚫린 도로로 ‘삼성’간판이 보인다. 카자흐스탄 제1 경제중심도시인 알마티는 제정 러시아시대인 1854년 국경 요새로 출발했고 당시 이름은 ‘베르니’였다.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이 도시는 카자흐어로 ‘사과의 할아버지’라는 뜻의 러시아식 표현인 아마아타로 명명됐고 1991년 카자흐스탄이 독립한 이후 순수 카자흐말인 ‘알마티’로 불리어졌다. 1920년대 미국의 문호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방문해서 눈 덮인 톈산 산맥과 지천으로 널린 사과밭의 정경에 취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라고 찬탄을 했던 곳이기도 하다 알마티의 정취를 기록에 남기고 과수원에서 사과를 수확하며 맛보았던 인물 중 하나는 레닌과 함께 러시아혁명을 이끌었던 레온 트로츠키이다. 트로츠키가 1928년 스탈린과의 권력싸움에서 밀려 모스크바를 떠나 처음으로 귀양살이를 산 곳이 바로 알마티였던 것이다. 지금은 번화가로 변한 알마티 시내의 아파트에서 망명생활을 하며 답답한 심정을 달랬던 트로츠키는 사냥과 집필로 소일하면서 톈산 산맥과 알마티의 아름다운 정경, 사과에 대한 추억을 기록으로 남겼다. 지금도 알마티 인근의 구릉지대 산에는 야생 사과나무가 수종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고 한다.
도시의 가장 중심부로 들어서니 백화점 규모의 상점이 이어서 들어서 있다. 거대한 몰 안에 ‘한국’상품이 많이 보인다. 삼성과 LG뿐만 아니라 한국브랜드의 화장품도 가득하다. 중앙아시아에서 한국제품이 가지는 위상을 실감한다. 생각해보면 참 재밌다. 760년 전이었다면, 한국에서 ‘M-Food’와 ‘M-Fasion’이 유행했을텐데 21세기엔 반대로 ‘K-Food’와 ‘K-Fasion’이다. 몽골풍’이 아니라 ‘한류’가 된 것이다.
중앙아시아의 한류와 몽골풍
중앙아시아에서 한국제품에 대한 브랜드 인지도는 매우 높다. 한국 제품에 대한 이미지도 매우 ‘고급화’되어 있다. 그런데 한류의 원형은 사실상 13세기, 중앙아시아 전체를 지배했던 몽골과의 ‘관계’에서 찾을 수 있다. 1259년, 몽골과의 강화 이후 고려는 수 많은 여성을 공녀로 몽골에 바쳐야만 했다. 이렇게 공녀로 간 수 많은 고려여성들은 원나라에 고려식 복식과 음식, 기물을 전파하게 된다. 이와 같은 고려식 패션과 음식을 두고, ‘고려양’, ‘고려풍’이라고 했다. 물론 공녀들이 고려풍을 일으키는데 한 몫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원에 유입된 선진 고려 문물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고려는 원에 불전 사경본을 수출했다. 고려의 명의 설경설은 원 세조와 성종의 병을 고쳐주었다고 한다. 고려 바둑고수들도 원나라에 초빙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760년 전에 이미 ‘한류’의 원형이 ‘고려풍’에 있었던 셈이다. 그런데 어디 일방적이고 단선적인 문화의 전파만이 있으랴. 고려 역시 몽골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고려에 유행한 몽골의 M-Food와 M-Fasion를 ‘몽골풍’이라 불렀다. 몽골풍은 주로 복식과 음식, 언어 등 생활문화 영역에서 광범위하게 나타났다. 그 영향은 오늘 날에도 찾을 수 있을 정도이다. 흔히 우리나라 복식사에서 말하는 ‘호복’은 고려때 들어온 몽골식 복장을 말하는데 대표적인 것이 바로 ‘철릭’이다. 원래 고려인들은 윗옷과 아랫도리를 하나로 잇고 소매가 헐렁한 포를 입었다고 한다. 그런데 몽골의 영향으로 윗 옷과 아랫도리를 따로 재단하여 이어붙이고 아랫도리에 주름을 많이 잡아 활동에 편하게 만들었다. 이를 ‘몽골식 철릭’이라 한다. 이와 같은 의복 형태의 유행으로 조선시대에는 문무관료들의 평상복으로도 이 형태가 사용되었다. 전통 혼례식때 신부가 쓰는 ‘족두리’도 원래 ‘고고’라고 하는 몽골 여인들의 외출용 모자였다. 그 모자가 고려에 들어와서 예모로 변한 것이다. 신부의 뺨에 연지도 몽골 풍습이었다. M-Fasion뿐 아니라 M-Food도 유행했다. 원래 고려는 불교국가라서 육식을 꺼려왔으나 유목민 출신의 몽골인들이 들어오는 바람에 고기소를 넣는 만두 같은 육식품을 접하게 되었다. 오늘날의 설렁탕도 양을 잡아 삶아 먹는 몽골어의 ’슐루’라는 음식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제주도를 통해 조랑말이 들어온 것도 이때부터이다. 한국어에도 몽골의 잔재가 남아있다. 왕과 왕비에게 붙이는 ‘마마’, 세자와 세자비를 가리키는 ‘마누라’, 임금의 음식인 ‘수라’, 궁녀를 뜻하는 ‘무수리’ 몽골출신 공주들의 활동무대였던 궁중에서 쓰이던 이런 호칭들은 몽골어에 그 어원ㅇ르 두고 있다. ‘벼슬아치’나 ‘장사치’, ‘양아치’란 단어의 ‘치’는 모두 ‘다루가치’나 ‘조리치(청소부)’, 화니치(거지). 시파치 (매사냥꾼) 등의 몽골어의 끝글자 ‘치’를 취한 것이다. 매나 말과 관련된 ‘보라매’, 송골매, 아지게말 (망아지), ‘가라말(검은말)’도 모두 몽골어에서 유래한 것이다.
술과 고려, 그리고 이슬람
대형 쇼핑몰 안에 있는 슈퍼마켓의 크기도 놀랍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이슬람 국가에서 주류판매대가 매장 전면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주류 소비량이 적지 않음을 말한다. 여전히 무슬림이 주류인 국가지만 엄격하게 규율을 지키지는 않는 것이다. 그 만큼 자유로워 보인다.
그런데 중앙아시아를 천년간 지배한 이슬람과 고려의 교류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소주’이다. 흔히 우리나라 소주의 연원을 고려시대로 알고 있는데 원조는 아랍이다. 세번 고아 내린 증류주를 일컬은 소주는 원래 기원전 3000년 경,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에서 처음 만들어졌다. 그렇게 만들어진 증류주는 오늘날까지 중동아랍지역에서 ‘아라끄”라는 이름으로 줄곧 전승되어 오고 있다. ‘아라끄’의 제조법은 몽골군이 1258년 이슬람 압바스 왕조를 공략할 때 아랍 무슬림들로부터 배워왔다고 전해진다. 그렇게 양조법을 배운 몽골군이 일본 원정을 위해 한반도 진출했을때, 개성, 안동, 제주도 등 주둔지에서 처음으로 빚기 시작했다. 원정군이 가죽 술통에 넣고 다니면서 마시는 ‘아라끄’를 공급하기 위해 고려인들이 만들어 낸 것이 고려 소주다. 고려소주의 본산인 개성에서는 근세까지도 소주를 ‘아락주’라고 불렀다. 아랍어로 ‘증류’라는 뜻에 어원을 둔 이 소주는 몽골어로 ‘아라킬’ 만주어로 ‘알키’, 중국어로 ‘아랄길주’ 힌두어로 ‘알락’이라고 한다. 이슬람은 늘 우리와 멀게 느끼지만 사실 한국과 이슬람의 교역은 고려시대에 번성했다. 고려 초에는 아랍상인들이 대거 몰려와 교역을 했고 말엽에는 주로 원나라 통해 이슬람이 본격적으로 한반도에 전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고려사>나 <고려사절요>같은 책을 펼쳐보면 이슬람을 지칭하는 ‘회회’나 이슬람교 신봉자인 무슬림을 일컫는 ‘’회회인’에 대한 내용을 찾아 볼 수 있다. 한국의 덕수 장씨, 경주 설씨, 임천 씨 등은 모두 귀화한 무슬림을 그 시조로 한다. 무슬림들이 고려에 귀화하고 정착해 활약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여러가지 유물과 전승들은 지금까지도 남아있다. 무슬림들이 고려사회에 적응하여 ‘고려화’되다 보니 당시 유행하던 풍자가사의 주인공으로까지 등장하게 된다. 유명한 고려가요 <쌍화점>이 그 일례다. 이 속요는 4절로 되어있는데 그 첫절이 회회남자와 고려 여인간의 로맨스다. 지금 말로 풀이하면, “ 쌍화점에 쌍화를 사러가니 회회아비가 내 손목을 쥐었다.
이 소문이 상점 밖에 퍼진다면 조그마한 새끼 광대인 녜가 퍼뜨린 것인줄 알리라.”
여기 등장하는 ‘회회아비’가 가 곧 무슬림이다. 정수일 교수는 여기서 ‘쌍화’는 무슬림 고유의 빵을 지칭한다고 본다. 쌍화와 함꼐 전래된 무슬림들의 음식으로는 송도 설씨가 만든 데서 유래한 설적이 있는데 이것은 소의 고기가 내장을 양념해 쇠꼬창이에 꿰어 구운 음식으로서 오늘까지 유행하는 중동의 ‘케밥’에서 유래한 것으로 본다. 고려와 이슬람의 교류는 조선으로도 이어진다. 조선 시대에는 이슬람의 과학을 수용했다. 우즈베키스탄의 울륵벡의 천문대를 보면 이슬람의 수준높은 과학기술에 놀란다. 조선시대 과학사에서 중요한 부분이 바로 ‘이슬람 역법의 도입’이다. 세종은 새로운 역법을 창제하기 위해 정인지를 비롯한 학자들에게 명하여 원나라의 수시력과 명나라의 대명력, 이슬람의 회회력을 구해다가 연구토록 했다. 수시력이나 대명력은 모두 당시로서는 가장 발달한 이슬람력을 참조하여 만든 것이기는 하나 여러가지 미흡한 점이 발견되었다. 다방면으로 연구한 끝에 만들어낸 것이 이른바 <칠정산내편>와 <칠정산외편>이라는 조선조의 역법이다. 그 중 <칠정산 외편>은 순태음력인 이슬람력의 원리를 도립하여 만든 것으로서 ‘조선의 이슬람력’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일상에서 이슬람은 멀게 느껴지지만 사실 가까운 곳에 함께 하고 있는 것이다. 직접 그 영향권 안에 들어와서 보면 더 자세하게 보인다. 마켓에서 저녁거리를 사서 숙소로 돌아간다.
알마티의 편안한 호스텔
여행에서 숙소는 매우 중요하다. 그 지역 여행의 8할을 결정한다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위치와 청결도, 직원의 친절도 모든 것들이 많은 여행을 미친다. 특히 나처럼 원고를 쓰는 사람에게는 노트북 사용에 적절한 책상과 의자가 주어진다면 더할나위 없다. 그런 면에서 이 모든 것들을 갖춘 알마티의 호스텔은 최고의 숙소였다. 게다가 하루 숙박 요금도 10불이 되지 않으니 부담도 없다. 호스텔에 젊은 직원들은 러시아어는 기본이고, 영어도 훌륭하게 구사한다. 그런데 나이가 모두 어리다. 가장 많은 직원의 나이가 23살이다. 이 나이에 모국어를 제외한 2개 국어로 완전한 소통이 가능하다는 것이 놀랍다. 전등까지 주어진 책상공간까지 있으니 더할나위 없다. 마음에 쏙 드는 이 숙소가 알마티까지 온 장시간 버스 여행의 피로를 풀게 한다.
카자흐스탄 국립박물관에서 만난 황금인간
상쾌한 아침 햇살이 공원에 가득한 푸르른 나뭇잎을 더욱 아름답게 보이게 한다. 알마티에는 거리 곳곳에 공원이 있다. 햇살을 받으며 푸른 녹지를 걷는 기분이 상쾌하다. 둘러보면 저 멀리는 천산산맥의 설산이요, 바로 앞은 푸른 나무의 향연이다. 숙소에서 가까운 거리에 국립박물관이 있어 산책하듯 걸어간다. 오전 10시, 이제 막 가게 문을 여는 사람들의 분주한 움직임에서 도시의 하루를 느낀다. 가까이로 푸른 돔의 큰 건물이 보인다. 가까이 다가가서 사진을 한장 찍고 박물관 안으로 입장한다.
국립박물관은 오전 9시 반부터인데 오전에 들어가니 사람이 없다. 박물관을 들어서자 마자 보이는 것은 ‘황금인간’이다. ‘골든맨’으로도 불리는 이 유물은 1969년, 카자흐스탄 ‘이식’이라는 고분 밀집지역에서 발견된 엄청난 고고학 유물이다. 광활한 초원지대, 카자흐스탄 이식에는 크고작은 고분이 밀집해 있었다. 1969년, 이 곳에서 공장 부지를 찾던 인부가 우연히 고분군을 발견했는데 그 발견을 시작으로 이 사건은 역사적 대 발굴의 시작점이 된다. 발굴에 나선 고고학자들은 처음에 중심부 큰 무덤부터 파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큰 무덤은 이미 도굴당한 상태였다. 고고학자들은 무덤이 도굴된 것을 아쉬워하며 낙심했다. 그러다가 혹시나해서 무덤 주변을 파보았고 갑자기 굴착기에 통나무가 걸렸다. 그 통나무를 천천히 파헤치고 나타난 ‘황금인간’! 이 무덤의 주인공은 ‘황금인간’의 별칭을 얻으며 세계 고고학계를 흥분시켰다. 도굴꾼의 침입을 피한 작은 무덤에는 인골과 부장품이 매장된 상태로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발견된 인골이 온몸에 황금을 두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목관 안을 뺴곡히 채운 보석들은 하나하나가 놀라웠고 그 양도 엄청났다. 황금인간은 약 4000개의 황금장식과 함께 묻혀있었다. 무덤에서는 36개의 다양한 그릇과 은잔 2개도 함께 출토 되었다.
학계의 관심은 황금인간의 정체에 집중되었다. 단서는 4000여개의 황금장식인데 여기에는 공통된 특징이 있다. 뿔 달린 동물과 맹수, 그리고 새 장식 등 특징적인 동물문양이 반복적으로 확인된 것이다. 그것은 수천년전 초원에서 일어난 전사들, 스키타이의 문양이었다. 스키타이 인들은 맹수의 문양을 통해 무기가 더욱 강력해진다고 믿었다. 발굽있는 동물과 새들은 속도를 높여주는 존재이며 마법적인 요소를 가진다고 믿었다. 그들은 이러한 동물이 가진 특성들을 장신구와 그 장신구의 소유자에게 부여했던 것이다. 고고학계는 이제 수천년전의 황금인간복원을 시작한다. 그것은 매우 어려운 작업이었다. 목재의 금박을 씌운 장식들은 지금 기술로도 놀라울 만큼 섬세했다. 마침내 복원 전문가들은 ‘황금인간’을 재현하는데 성공한다. 금장식이 빽뺵히 달린 붉은 옷, 그 위로 허리띠에 장식된 뿔달린 황금장식! 작은 무덤의 주인이지만 왕의 지위를 생각하게 하는 화려한 칼집을 지닌 황금 인간! 그는 대체 누구였을까? 인류학자들은 황금인간은 약 2400년 전에 살았으며 키는 168센치 정도, 15-18세의 젊은 나이에 부상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한다. 황금인간의 복장은 평상복이 아닌 예복이었다. 일반병사의 복장은 아니라 사령관들이 행진할 때 입는 제복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왜 이런 복장을 하고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다가 어린 나이에 사망한 것일까?
황금인간은 그는 초원에서 일어난 스키타이족의 강력한 전사집단 ‘코미타투스’의 일원이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코미타투스는 칸과 생사를 같이 하는 친위결사대이다. 칭키스칸은 1만명, 그 손자 쿠빌라이는 1만 2천명까지 두었다고 한다. 훈족의 경우 ‘로가디스’라는 친위조직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훈족 아틸라왕이 직접 임명한 친위 결사대를 말한다. 코미타투스는 자원입대지만 훈족의 친위 결사대는 임명을 했다. 몽골제국은 칸과 죽음과 생사를 같이한 결사대로 구성되어 칸이 죽으면 같이 죽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했다. 코미타투스와 로가디스는 칸이 대제국을 건설하고 나라를 이끌어 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된 것이다. 아마도 이 황금인간 역시 칸의 친위결사대로 맹렬하게 싸우다가 전사했을 것이다. 그가 입은 ‘황금’금박 옷은 ‘황금벨트 문화’권으로 분류되는 중요한 상징성이 있다. 황금벨트 문화는 유목민인 스키타이족에게서 보이는 것인데 이 영향은 신라까지도 이어진다. 신라의 금관문화 역시 북방민족의 전통문화를 잘 결합한 결과물인 것이다. 우리의 역사와 스키타이 유목민의 연관성을 잘 보여주는 부분이다.
북방민족들의 전통문화를 잘 융합한 결과물, 신라금관
지금으로부터 약 90년 전인 1921년 9월 어느날, 경주 노동리 봉황대주변! 자그마한 주막을 운영하던 박씨는 장사가 무척 잘되자 주막을 늘리기로 작정하고 뒤뜰의 나지막한 언덕을 파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나타난 것이 바로 1500년 여년의 긴 잡에서 깨어난 금광총 금관이다. 무덤의 주인이 누군지는 모르고 그저 금관이 나왔다고해서 ‘금관총’이라 불렀다. 3년 후 역시 봉황대 아래의 민가 사이에 있는 무덤을 조사하다가 두번째 금관이 발견되었다. 금관에 매달려 있는 특이한 한쌍의 금방울 보고 무덤 이름을 ‘금령총’이라 지었다. 그로부터 다시 2년이 지난 어느 날, 역시 봉황대 서편 얼마 떨어지지 않은 무덤에서 세번째 금관이 나왔다. 금관에는 봉황으로 여겨지는 새가 그려져 있었다. 당시 스웨덴 왕세자의 신분으로 아시아를 탐방하고 있던 44세의 고고학자 아돌프 구스타프 6세(현 카를 구스타프 16세 국왕의 선친)이 소식을 듣고 서둘러 발굴 현장에 이르렀다. 그의 이 뜻 깊은 동참을 기념하기 위해 스웨덴의 한자표기인 ‘서전(瑞典)’의 첫글자와 ‘봉황’의 첫 글자를 각각 따서 무덤을 ‘서봉총’이라 이름하였다. 아름다운 국제 친선의 사연이다. 그후 천마총 황남대총 북분에서도 금관이 속속 출토되었다. 그 밖에 도굴되었다가 압수된, 경주 교동에서 발견된 것으로 알려진 금관도 한점 더 있다. 모두가 왕릉급 무덤에서 나온 것이다. 전 세계 각지에서 발견된 고대 사회의 금관은 모두 합해서 10점 밖에 안되는데 그 중 신라금관이 6점, 가야금관 1점이라 한다. 그런데 신라 천년 역사중에서 그런데 금관 연구에서 아직까지 가장 큰 수수께끼로 남아있는 문제는 “왜 갑자기 5-6세기에 이러한 찬란한 황금문화가 나타나게 되었는가”이다. 정수일에 따르면, 금관이 출토된 무덤들은 예외없이 4세기에 나타나서 5세기에 대형화되다가 6세기 전반까지 존재한 ‘돌무지 덧널 무덤’이라 한다. 이것은 지하에 무덤구덩이를 파고 상자형 나무덧널을 넣은 뒤 그 주위와 위를 돌로 덮은 다음 다시 그 바깥을 봉토로 씌우는 무덤형태이다. 이런 무덤은 청동기시대의 고인돌 돌무지 전통을 이은 것으로 볼 수도 있으나 북방문화의 유입과 더불어 전형적인 스키타이-알타이식 쿠르간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중요한 것은 ‘금’이 알타이 지방을 중심으로 시베리아 동서를 관통한 고대 황금 문화권의 공통 유물이란 것이다. 역사의 여명기를 빛나는 황금으로 장식한 그 시기는 대체로 기원전 5세기부터 기원후 6세기까지 근 1000년의 시간을 헤아린다. 이 시기 알타이 지방에서 발생한 황금문화는 스키타이가 개척한 동방교역로를 통해 서방으로 그리스까지 전해졌다. 알타이족을 비롯한 북방기마민족들의 동진으로 신라까지 그 영항권 안에 든 것이다.
황금 인간이 다시 보인다. 이 유물이 머나먼 나라, 카자흐스탄을 무척이나 가깝게 느껴지게 한다. 박물관이 아쉬운 것은 ‘만지지 마시오’라는 내용을 제외하고는 전부 러시아어로만 씌여있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내부 촬영도 금하고 있어서 찍을 수가 없다. 유목민의 생활을 알게하는 유르트와 유목민의 전통복장을 지나 2층을 가면, 현대 ‘카자흐스탄’의 자부심이 보인다. 언뜻 보면, 나제르바예프 대통령을 위한 공간인가 싶기도 하다. 그를 위한 전시관이라고 해도 크게 잘못된 표현은 아니리라. 어쩄든 오늘 날 카자흐스탄의 자부심과 자랑이 2층 전시관에는 한가득이다. 특히 외교를 맺은 국가들에게 받은 선물을 소장하여 전시하고 있다. 가장 중요한 나라부터 전시되어있는데 제1번이 러시아, 제2번이 중국이다. 미국보다 중국이 앞서는 것도 놀랍다. 카자흐스탄에게 러시아와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을 잘 보여주는 전시가 아닐 수 없다. 미국에 이어 한국과 일본과의 외교관계 및 친선교류를 위해 받은 선물이 있다. 여기서 한국정부가 전달한 선물이 바로 ‘신라 금관’의 모조품이다. 황금벨트 문화권이라는 카자흐스탄과의 연계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대표성 때문에 선택한 선물일 것이다. 중앙아시아의 중심지로, 많은 성장을 보인 카자흐스탄의 외교정책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러시아와 중국과 같은 대국과 접하고 있으면서 많은 자원을 가진 이 국가는 언제나 주변국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이다. 현재도 카자흐스탄은 에너지자원을 둘러싼 여러 국가의 경쟁에 직면해 있다.
카자흐스탄 외교정책
역사적으로 중앙아시아는 19세기 인도와의 교통로에 러시아의 진출을 배제하려는 영국과 부동항을 찾아 남으로 팽창하려는 러시아 사이의 소위 그레이트 게임의 장이었다. 이제는 카자흐스탄을 비롯한 카스피해 연안국의 에너지 자원을 두고 주요국가들간의 뉴 그레이트 게임이 벌어지고 있다.
중앙아시아 국가들은 원유, 가스등 자원의 새로운 공급처, 그리고 동서를 잇는 교통로로서 그 지정학적 중요성이 높아지고 있다. 중앙아시아가 차지하는 지정학적 중요성이 높아짐에 따라 주요국가들과의 대외 관계에 활용하는 한편, 국가간 협력을 강화하여 지역 경제 공동체로서의 역량을 키워가려는 움직임이 있다.
카자흐스탄은 러시아, 중국, 키르기스스탄, 우즈베키스탄 및 투르크메니스탄과 접경하여 있다. 그중에서도 러시아와는 매우 밀접한 관계이다. 카자흐스탄은 러시아와 7,500km에 달하는 국경을 가진다. 인구의 27%도 러시아계이다. 카자흐스탄산 에너지 자원의 대외 수송로는 대부분 러시아를 경유한다. 양국 정상은 매년 열차례가 넘는 공식, 비공식 접촉을 할 정도로 긴밀한 관계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카자흐스탄은 러시아와의 관계를 중시하면서도 원유, 가스, 광물 등 풍부한 천연자원을 기반으로 중국, 미국, EU 등과 전방위 외교를 추진하고 있다. 중국과는 송유관을 연결하여 에너지 수출 경로의 다변화를 꽤했고, 투르크메니스탄,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중국을 잇는 가스관 건설도 2009년 완공되었다. 중국은 자원의 확보, 중국 신장과 카자흐스탄에 거주하는 위구르 민족의 분리 독립운동 억제를 위한 협력 필요성 등을 감안하여 카자흐스탄과의 관계를 중시하고 있다.
카자흐스탄은 신생 둑립국이면서도 1993년부터 아시아 교류와 신뢰구축회의(Conference on Interaction and Confidence-Buidling Measures in Asia, CICA)를 주도하여 현재는 그 회원국이 러시아, 중국, 인도, 파키스탄, 이란, 터키 등 20개국에 달한다. 2002년부터 4년마다 카자흐스탄에서 정상회의가 열린다. 한국은 2006년 18번째로 CICA 정상회의에 정회원국으로 가입하여 중앙아시아와 유라시아 안정을 위한 카자흐스탄의 외교노선을 지지하는 한편, 유라시아 신뢰구축 과정에 적극 참여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카자흐스탄은 세계 종교, 문명간의 갈등해소와 이해진작을 위해 주도한 세계 종교지도자 회의를 2003년부터 3년마다 개최하고 있다. 2006년도 2차 회의는 때 맞추어 완공된 아스타나의 평화와 화합 피라미드에서 개최되기도 했고 우리나라 대표도 참석했다.
카자흐스탄은 유럽안보협력기구(Organization for Security Cooperation in Europe, OSCE)의 2010년 의장직을 맡기도 했다. 이 부분은 국제사회의 많은 주목을 받았다. 유럽안보협력기구는 인권과 민주주의 창달을 목표로 유럽 모든 나라와 미국 등 50여 개국이 참가하는 권위 있는 국제 기구이다. 그런데 권위주의적 정치체제를 유지하면서 인권보호와 민주주의 발전 정도가 국제기준에 못미치는 국가가 OSCE의장을 맡는 것에 대한 반론이 없을 수가 없었다. 주변국에서는 카자흐스탄이 의장직을 맡는 것은 시기상조라는 지적했다. 그러나 카자흐스탄이 빠른 경제 성장을 바탕으로 국내적 정치 안정을 이루면서 민주화를 향해 올바른 방향으로 전진하고 있다는 평가가 우세해 결국 구소련 공화국 중에서는 처음으로 권위있는 국제기구의 의장직을 맡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물론 일부에서는 카자흐스탄이 석유, 가스, 광물 등 자원 부국이라는 점에 대한 미국, 유럽연합 등의 실리적 고려가 카자흐스탄의 OSCE의장국 자격 부여에 실제적 배경이라 말하기도 한다. 그 배경이 무엇이건 카자흐스탄이 만들어낸 부와 성장에 대한 자부심만큼은 이 박물관에서 충분히 느낄 수 있다. 박물관을 나와 독립광장을 향해 걷는다. 중앙아시아 어느 국가의 수도를 가도 ‘독립’광장이 있다. 소련으로부터의 ‘독립’이후 다른 경제수준과 삶의 수준을 가지고 있지만 역사 상 그들의 역사안에서 가지는 ‘독립’이 얼마나 큰 의미인지를 짐작하게 한다.
알마티의 독립광장에서 만난 오늘의 카자흐스탄
알마티 독립광장은 카자흐스탄의 정치, 경제의 중심이다. 물론 1998년 수도를 아스타나로 옮기긴 했지만 독립광장은 그 이전의 모든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1986년에는 모스크바 통치에 대한 폭동이 바로 여기에서 있었다. 광장의 남쪽에는 대통령궁, 구 정부청사, 국영 티비방송국이 있으며, 동쪽으로는 알마티 국군병원, 중앙박물관이, 서쪽으로는 5성급 아카라 호텔이 있는 카자흐스탄의 센터이다. 이 광장 중앙에 건축가 쇼타 발리카노브가 만든 독립 기념탑이 있다. 1986년 모스크바 통치에 대항한 폭동을 기념하기 위해 광장 중앙에 세워졌다. 대리석 기념탑 꼭대기에 날개달린 표범과 황금인간의 동상이 놓여있다. 기원전 4세기 경, 스키타이가 현재 카자흐스탄의 정체성으로 재 탄생한다. 황금인간은 이제 카자흐스탄의 새로운 상징이다. 대체 언제부터 이 땅은 ‘카자흐스탄’이란 정체성을 가지게 된 것일까?
카자흐인들은 오랫동안 통일국가를 형성하지 못하고 드넓은 땅에서 느슨한 몇 개의 세력권으로 나뉘어 있었다. 그러다가 13세기, 몽골제국이 카자흐스탄을 점령하여 이 지역이 차카타이한국이 되면서 현 카자흐스탄 지역에 거주하던 주민들을 카자흐인으로 통칭하게 됐다. 이후 카자흐 영토에는 15세기 경 카자흐인이 주축이 된 카자흐칸국이 출현했고 이후 대올다(Great Horde, 카자흐 남부), 중올다( Middle Horde, 카자흐 중북부), 소올다(Little Horde, 카자흐서부)로 분열되어 호족들이 할거하는 양상을 보였다. 3개 올다는 18세기 중엽 동쪽으로부터 몽골계 민족인 중가르족의 침입을 받아 러시아 황제에게 보호를 요청하면서 점차 러시아의 영향권에 들어가게 됐다. 1700년대 초 표트르 대제 시대부터 중앙아시아 공략을 시작한 러시아는 코사크 기병대를 앞세워 알타이지역과 텐산 지역에 현재의 알마티를 비롯한 지역에 국경 요새를 건설했고, 1860년대 이르러서는 카자흐스탄 땅을 러시아 제국에 편입했다.1917년 러시아 혁명 후 카자흐스탄은 공산당의 민족정책에 따라 1923년 자치 공화국이 됐다가 1936년 연방공화국으로 승격됐다. 그러나 소련시대에도 카자흐인의 민족의식은 살아있었다. 1986년 소련 당국이 카자흐스탄과 전혀 연고가 없던 볼가 지역 출신 당서기장 콜빈(Kolbin)을 카자흐스탄 서기장으로 임명하자 카자흐인들은 알마티에서 반대시위를 벌였다. 이 시위 장소가 바로 이 독립광장이다. 평화적 시위로 시작된 집회는 소련 당국의 경찰을 동원한 강경진압으로 수명의 사망자와 수백명의 부상자를 남겼고 카자흐인의 신망을 잃은 콜빈은 3년 후 나자르바예프에게 카자흐스탄공화국 당 서기장 자리를 물려주어야만 했다.
1991년 8월 모스크바에서 쿠데타가 발생하고 소연방의 해체가 가시화되는 가운데 나자르바예프 서기장은 독립을 앞둔 소연방공화국들의 결집을 주도했다. 1991년 12월21일 알마티에서 소련의 해체와 CIS 결성을 선언하는 조약이 서명됐다. 뒤이어 1991년 말 카자흐 민족이 건설한 최초의 주권국가인 카자흐스탄공화국이 탄생했다.
카자흐스탄은 소련해체 이후 독립한 CIS제국 중 전쟁이나 인종 간의 갈등을 겪지 않은 거의 유일한 국가로서 정치적 안정을 누리고 있다. 약 4500개에 달하는 NGO가 활동하고 100여개의 독립언론이 있는 등 시민 사회로 진입하는데 필요한 저변이 확대되고 있다. 2006년 1월부터 국가 민주개혁위원회를 구성하여 정부 형태에 대한 검토, 의회의 권한강와, 지방자체의 확대, 정당의 기늘 활성화, 선거법, 언론법 등의 조치를 취해온 결과, 2007년 5월 위원회의 의견을 수렴한 개헌이 이루어졌다. 카자흐스탄은 또한 사형제도를 사실상 폐지하여 국제적인 인권기준에 부합하는 사회 분위기를 조성하려는데 의욕을 보이고 있기도 하다. 독립광장을 지나 거리를 걷는다. 잘 정돈된 도로도 놀랍지만, 유럽과 같은 분위기의 까페가 즐비하다. 곳곳에 분수와 공원, 벤치가 있다. 여행한지 한달이 넘었는데 한국에서 마셨던 커피는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까페에 들어가서 커피한잔을 주문한다. 얼마만에 마시는 가루커피 아닌 커피인지 단숨에 한 컵을 비운다. 커피맛에 감격하여 기억하려고 사진도 한장 남겨둔다.
타슈켄트에서 찍은 아이스커피에 이어 한달만에 찍는 커피다. 직접 와보니 더더욱 그 경제발전 성과와 높은 생활수준에 감탄하게 된다. 카자흐스탄은 무슬림 국가이지만 종교적 분위기를 거의 느낄 수가 없다. 종교에 대한 관용의 폭이 넓고 국민 대다수가 급격한 경제성장의 결실을 향유하고 있는 느낌이다. 어쩌면 빠른 경제성장으로 인한 생활수준의 향상에 이어 이슬람 과격 원리주의자들이 들어설 자리를 막았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카자흐스탄은 이슬람 과격 원리주의자가 뿌리를 내리지 못한 나라로서 현재 중앙아시아 평화와 안정을 확산하는 역할을 하고 있음은 분명해 보인다. 점점 더 이 나라가 궁금해진다. 맨 처음 카자흐스탄을 접하게 된 것은 이 나라가 ‘자체 핵 포기국’이었기 때문이다. 북한 핵문제 해결에 모델로 적용할 것을 검토해야한다는 논의가 있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파이프라인의 경제학
카자흐스탄은 1991년 소련이 해체되자 갑자기 1000여개의 핵 탄두를 가진 세계 4위의 핵보유국이 됐다. 그러나 카자흐스탄의 1990년 세미팔라틴스크의 핵 실험장을 폐쇄한데 이어, 1992년 우크라이나, 벨로루시와 함께 핵보유국으로서는 처음으로 핵무기를 자진 포기했다. 카자흐스탄 등 CIS 3국은 미국과 러시아로부터 안전을 보장받고 미국으로부터 핵무기 해체와 이관에 필요한 재정지원을 받는 조건으로 핵보유국의 지위를 포기했다. 핵 실험장의 폐해를 직접 경험한 카자흐스탄은 자발적으로 비핵화의 길을 선택했고 현재도 핵 비확산에 적극적 입장이다. 2006년 9월에는 중앙아시아 5개국 외무장관이 카자흐스탄의 세미팔라틴스크에 모여 중앙아시아 비핵화 조약에 서명하기도 했다. 카자흐스탄과 우크라이나의 핵무기 포기방식이 북한 핵문제 해결에도 유의미한 결과를 만들 수 있길 바라는 마음이다. 자체적으로 핵을 포기한 이후, 카자흐스탄은 러시아와 미국으로부터 안전을 보장받았다. 그렇다면 그 후 카자흐스탄은 어떻게 가진 자원을 이용하여 강대국의 이권부터 자국을 지켜나가는 외교력을 가질 수 있었을까?
나는 그 외교력의 핵심을 ‘파이프라인의 경제학’ 속에서 본다. 자발적 핵포기 이후, 카자흐스탄은 에너지 자원을 활용한 파이프라인을 외교적을 잘 활용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에너지 자원을 거의 100% 해외에 의존한다. 그러나 분단으로 인해 섬이 된 한반도는 원유나 가스 파이프라인을 내륙으로 연결시킬 수가 없다. 한 떄, 러시아의 이르쿠츠크 지역 코비트카(Kovitika)가스전과 중국을 경유하여 서해를 거쳐 평택까지를 파이프라인으로 연결한다는 계획이 있긴 했지만 분단현실로 인해 그 실현은 여전히 요원해 보인다. 우리나라가 세계 4위의 원유수입국이면서도 모든 에너지 자원의 수입을 해상 선박수송에만 의존하는 실정은 세계적으로 보면 매우 예외적인 경우다. 반면, 카자흐스탄은 내륙국으로서 생산 에너지 자원을 바다를 통해 수출할 수 있는 길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원유나 가스를 해외시장으로 수송하는데 파이프라인 의존도가 거의 절대적이다. 카자흐스탄은 소련시대에도 산유국이었기 때문에 이미 러시아와 연결된 원유과 가스 파이프라인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독립 이후 유전 개발 역사상 30년 만에 최대의 발견이라고 일컬어지는 카스피해의 유전이 본격 개시됨에 따라 새로운 원유를 수송할 파이프라인의 건설은 더 다급해졌다. 그래서 러시아를 비롯한 카자흐스탄 내 에너지개발에 관련된 거의 모든 중요 플레이어들은 컨소시엄을 구성하여(Caspian Pipeline Consortium, CPC) 연간 수송능력 2,800만톤의 CPC 파이프 라인을 건설했다.
2001년 첫 가동을 시작한 CPC파이프라인이 러시아 주도라면 이에 대항하여, 2002년 미국, 영국등의 석유 메이저 회사들이 주축이 되어 만든 것이 바로 BTC 파이프 라인이다. 이 라인은, 러시아를 거치지 않고, 카스피해의 전통적인 산유도시 바쿠와 그루지아의 수도 트빌리시, 그리고 지중해상의 터키항구 세이한을 잇는 파이프라인이다. 이 파이프라인이 건설되기 전에 카자흐스탄의 해외 원유수출은 모두 러시아 영토를 경유할수 밖게 없었다. 카자흐스탄 원유산업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와 입김이 강할 수 밖에 없는 이유다. 그런데 미국과 영국 등이 약 36억 달러를 들여 BTC라인을 건설한 것은 러시아의 영향력이 배제된 경로를 통해 카스피해의 원유를 해외 시장으로 나르기 위한 것이었다. 2006년 7월에는 카자흐-아제르바이잔 간 카자흐산 원유의 BTC송유관을 통한 운송에 합의가 이루어졌다. 카자흐스탄의 원유가 BTC라인에 연결되기 위해서는 카스피해를 건너야 한다. 이에 러시아는 카스피해의 법적 지위가 연안국에게 합의되지 않았다는 점, 내륙해인 카스피 해에 송유관을 설치하는 것은 환경 훼손의 위험성이 크다는 이유 등을 들어 카스피해 송유관 건설에 반대한다. 모두 CPC라인의 수송용량을 늘리기 위함이다.
카스피해의 가스관 건설도 같은 문제를 안고 있다. 러시아에 가스공급의 40%가량을 의존하고 있는 EU는 투르크메니스탄과 카자흐산 가스를 카스피해에 해저 가스관 건설을 통해 들려오는 방안을 카자흐스탄에 제안했다. 2006년 11월 열린 EU와 흑해-카스피해 연안국 회의에서 이 문제는 공식제기됐다. 이러한 움직임에 대응하여 2007년 5월 푸틴 대통령은 카자흐스탄과 투르크메니스탄 대통령과 회동하여 기존의 투르크메니스탄-카자흐스탄-러시아를 잇는 가스관을 확장, 신설하기로 합의하여 EU와 미국이 추진하는 카스피해저 가스관 건설 계획을 차단하려 했다. 그러나 러시아를 경유하지 않는 가스관 건설은 카자흐스탄이나 투르크메니스탄에는 매력있는 사업일 수 밖에 없다. 투르크메니스탄 대통령은 푸틴 대통령의 제안에 동의하면서도 카스피 해저 가스관 건설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지 않는다는 단서를 붙여 가스 운송에 있어 러시아에 대한 전적인 의존에서 탈피하고자 하는 내심을 비치고 있다. 카자흐스탄도 마찬가지다. 여기, 파이프라인의 경제학과 카자흐스탄의 외교력이 있다. 카자흐스탄은 파이프라인의 경제학을 잘 활용한 외교력을 구사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이제 중국까지 합세했다.
중국과 카자흐스탄의 교류 협력
중국의 일대일로 정책에서 중앙유라시아와 만나는 첫도시는 알마티이다. 2005년 12월 카자흐스탄의 카스피해 인근 산유지역과 중국의 서부를 잇는 약 1000km의 원유 파이프라인 1단계 공사가 마무리되었다. 2009년 7월에는 카자흐스탄의 악토베, 쿰콜 지역 원유가 중국에 안정적으로 수출된다. 현재 연간 수송능력 1000만톤인 이 파이프라인의 완공으로 중국은 동북아 에너지 수입국중 처음으로 생산국과 파이프라인을‘직접’연결한 국가가 되었으며 카자흐스탄은 서쪽으로만 향하던 유라시아 대륙의 파이프라인 패턴을 동쪽으로 다변화한 최초의 국가가 되었다. 현재 중국 회사들의 카자흐내 원유 생산점유율은 20%가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카자흐스탄이 BTC라인을 통해 원유를 수송할 수 있는 선택권을 확보하고 중국으로 가는 파이프라인을 완성하자 러시아는 독점적 에너지 수송경로를 일부 내주게 되었다. 그러나 달리 생각하면 중국이 만든 파이프 라인을 통해 시베리아산 원유를 직접 중국에 판매할 수도 있는 상황이다. 카자흐스탄은 과거 소련방이었던 국가 중에서는 러시아와 가장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나라이다. 그러나 국가의 사활이 걸린 에너지 수송로 문제에서 카자흐스탄은 러시아에 대한 의존도를 줄여가는 정책을 일관성 있게 추진하고 있다. 이것은 국가 전략상 당연한 선택일 것이다. 이와 같은 이유로 카자흐스탄은 중국의 투자를 환영하고 있다.
2012년 4월 14일 정식으로 개장된 호르고스 자유경제지대(the Khorgos Free Economic Zone:FEZ)는 카자흐스탄과 중국간 국경협력의 중심무대의 역할을 하고 있다. 호르고스 자유경제지대는 중국에서 출발한 물류가 호르고스 지역 국경을 통해 카자흐스탄을 경유하여 중앙아시아, 러시아 및 유럽으로 이어지는 루트의 출발점이다. 중국-카자흐스탄은 호르고스를 통과하여 카자흐스탄 영내로 2,639km의 육로가 통과한다. 2011년 12월에는 호르고스 자유무역지대를 통과하는 철도건설에 착수했다. 2014년 카자흐스탄 국영철도는 호르고스 국경을 통과하는 물류 루트를 카자흐스탄 서부의 악타우 항구까지 연결했다. 2013년부터 2016년 4월까지 호르고스를 통과하여 수송 된 철도 화물의 규모는 258만 톤 규모이며, 2020년까지는 1,800만 톤 규모, 2035년까지는 3,150만 톤 규모 에 달할 것으로 예상한다. 또한 관련 통계수치에 따르면 2012년 호르고스 자유무역지대를 교역 목적으로 방문한 사람의 전체규모는 계속 증가하고 있다. 2012년에는 240만명 수준이었는데, 2015년에는 이보다 15배 증가한 336만명, 그 다음해인 2016년에는 381만명으로 증가했다. 2016년 기준, 이 지역을 통해 중국과 카자흐스탄이 교역한 양은 약 119억 달러 규모였다. 중국에서 출발한 물류가 카자흐스탄, 중앙아시아 및 유럽으로 진입하는 거대 관문이 생긴 것이다. 자유무역지대는 중국-카자흐스탄 양자간의 경제 및 교역 협력에서 중요성을 지닐 뿐만 아니라 중국과 여타 유럽 국가들간의 경제 및 무역관계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지역은 중국 쪽 신장 위구르 자치지역과 카자흐스탄 및 여타 유럽 국가들의 경제발전에 모두 기여하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중국과 카자흐스탄의 육상 차량 국경 가운데 그 물동량이 가장 많았던 호르고스 국경지역은 과거 육상 차량물류 거점에서 중국의 일대일로 이니셔티브라는 조건과 연계되어 중국과 유럽을 연결하는 새로운 시스템의 철도물류의 시작점이 되고 있다. 이러한 중앙아시아와 중국간의 국경지대 협력 및 개발모델은 신장 위구르자치지역 경제발전이라는 지역 안정화의 부수적 효과를 중국에 가져다주었다. 동시에 중국이 유럽으로 나아가는 육상 물류 루트를 다변화할 수 있게 했다. 중국과 카자흐스탄 양국 모두은 물론이고, 특히 카자흐스탄에게는 러시아, 벨라루스, 아르메니아, 키르기스스탄과 함께 유라시아경제연합의 주축국으로 경제적인 역할과 위상을 확대할 저변을 만들어주었다. 분명한 것은 카자흐스탄과 중국이 공동으로 추진한 호르고스 자유무역지대는 유라시아경제연합과 중국의 경제적인 연계가 더욱 긴밀해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카자흐스탄을 둘러싼 중, 러, 미간의 경쟁이 언제까지 계속 지속될지, 또 그 과정에서 카자흐스탄 정부는 이 미묘한 관계를 어떻게 활용할지가 궁금해진다.
알마티의 고려극장
한참 생각을 이어 글을 쓰다보니 오후가 훌쩍 지나버린다. 배가 고파 핸드폰으로 알마티의 맛집을 검색하려다보니 바로 몇 주 전, 고려극장을 찾은 문대통령의 이야기가 가장 상위기사로 뜬다. 고려극장! 고려극장은 1932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창립된 한민족 최초의 극장이다.
이 극장은 지금도 우리말로 연극을 하며, 극장 산하의 가무단이 있어 다양한 전통춤을 선보이고 있다고 한다. 그 길로 즉시 택시를 잡아 고려극장으로 향한다. 소수민족이 자기 극장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자긍심을 느끼게 한다. 고려극장은 알마티 중심부에서 조금 떨어져 있다. 오랫동안 전용 극장 건물이 없다가 1997년에 카자흐스탄 정부로부터 건물을 기증받아 수리를 한 뒤 2002년 가을에 입주했다고 한다. 고려극장은 고려인 협회와 카자흐스탄, 한국정부의 후원을 받아 한국, 유럽 등 해외 순회 공연을 비롯해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재외 한민족이 설립한 최초의 극장이라는 자긍심 때문일까, 얼마 전 한국 대통령방문 때문일까. 매우 정돈된 느낌이 인상적이다. 그러나 안에 들어가서 관련 기관자를 만나려고 하니 ‘방문증’ 또는 ‘공문서’를 들고오지 않으면 안된단다. 국가기관이라 엄격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면서도 한사코 차갑게 방문자를 밀어내는 모습이 발길을 돌리게 한다. 얼마전 대통령이 방문해서 본 “홍범도 장군”이란 연극의 포스터라도 얻으려고 들어갔는데 허가증이 없으면 들어올 수 없다며 대화하기도 거부한다. 고려극장은 우리 나라의 독립운동가 홍범도 장군이 말년에 수위로 일한 곳이기도 하다. 내쫓기듯 밖으로 나와 숙소로 발길을 옮긴다. 말년의 홍범도 장군도 그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한 채 떠나는 느낌이었을까. 스탈린의 강제이주 정책으로 인해 타향 땅으로 쫓기듯 온 모든 고려인에 대한 연민이 생긴다. 현재 알마티에 거주하는 고려인은 약 2만명 이상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중앙아시아전체에 거주하는 30만이 넘는 고려인들은 다른 의미에서 우리와 중앙아시아 국가를 연결해주는 교량이자, 소중한 자산이다. 동양적 문화 정서, 우랄 알타이 어족으로서 갖는 언어적 연계성도 우리와 중앙아시아 국가들의 관계를 가깝게 하는데 한 몫을 한다. 강대국에 둘러싸인 지정학적 현실이 비슷하다는 점도 우리와 중앙아시아 국가들이 서로에게 공감하면서 국제 무대에서 협력할 수 있는 근거일 것이다. 실크로드를 찾아온 이 길에서 생각한다. 지금 우리에게 ‘중앙아시아’는 또 어떤 의미일 수 있을까? 한국의 미래와 중앙아시아의 연결 고리를 더 찾아보기 위해 떠나는 길, 나는 지금 한국인 총장이 있는 키메프 대학으로 향한다.
키메프 대학에서 만난 미래
캠퍼스에는 언제나 에너지가 넘친다. 젊음이 주는 특권일까. 중앙아시아 최고의 대학 ‘KIMEP’ 캠퍼스에서 만난 학생들의 얼굴도 하나같이 밝다. 푸른 녹음이 가득한 캠퍼스를 걷고 있으니 학교 생각이 난다. 언제나 학생들은 ‘희망의 미래’다. 키메프 대학의 북한연구소로 들어가니 한국 여자 교수님이 계신다. 중앙아시아에서 북한에 대한 연구가 이렇게 자세하고 체계적으로 진행되고 있음은 놀랍다. 이 대학은 누구에게나 개방된 공간으로 학문의 ‘경계’없이 사유할 수 있는 최적화된 공간이란 생각이 든다. 연구소 사람들은 다들 개인 용무로 많이 바쁜 일정일텐데도 전혀 불편한 기색없이 따뜻한 차 한잔을 건넨다.
중앙아시아 최고의 대학 ‘키맵 대학교’의 총장은 한국인이다. 이 학교는 러시아어가 공용어인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영어로 수업을 진행하고 일반 대학에 비해 10배 이상의 등록금을 받음에도 학생들이 몰려온다. 카자흐스탄에 진출한 세계 유수의 기업과 국제 금융기관은 키맵대학교의 졸업생을 데려가기 위해 몰려든다. 대통령까지 나서서 ‘국립대학은 키맵대학을 보고 배우라’라고 말할 정도이다. 공산주의의 낡은 습관이 남아있는 카자흐스탄의 척박한 교육환경에서 중앙아시아 최고 대학을 만든 사람이 바로 방찬영 총장이다. 그의 교육철학과 열정을 담은 다큐멘터리가 2012년 <글로벌 성공시대>에서 방영되기도 했다. 방찬영 총장은 1964년에 연세대 상경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유학길에 올라 1972년부터 UCLA와 샌프란시스코 대학에서 경제학과 종신교수로 활약했다. 샌프란시스코 대학 아시아 태평양 연구소장으로 재직하던 1989년, 자신의 지식이 연구소가 아닌 그것이 실제 필요한 사회에서 쓰이길 바랬다. 그래서 눈길을 돌린 곳이 바로 개혁개방의 바람이 부는 신생 독립국 카자흐스탄이었다. 그렇게 방 총장은 따뜼한 캘리포니아를 등지고, 머나먼 카자흐스탄으로 떠나 역사상 최초의 대통령 외국인 고문이 된다. 그는 대통령의 경제 특별 보과관으로서 개혁 정책을 진행한다. 하지만 70여년 묶은 공산주의 고나행을 그의 개혁정책을 더디게했고 그래서 그는 이 나라의 역사를 바꾸기 위한 인재의 필요성을 절감했다고 한다. 그래서 만든 것이 바로 카자흐스탄 미래를 이끌어간 인재의 요람, 대학교의 설립이었다. 이 나라의 경제와 교육을 변화시킨 핵심 동력인 된 사람이 한국인이라는 사실만으로도 너무나 뿌듯하고 자랑스럽다. 이제 카자흐스탄은 평균 경제성장률이 10%에 달하는 세계가 주목하는 나라가 되었으며, ‘교육으로 세상을 바꾼다’는 그의 이상은 현실을 만들었다. 그는 키맵 대학교가 지금의 자리에 있기 깨지 구소련의 체제의 낡은 관습과 끊임없이 싸워야했다고 한다. 그러나 청렴성과 투명성의 원칙을 지키고 끝까지 싸워 공산당 간부학교를 국가의 미래를 짊어질 인재 양성소로 변화시켰다. 그는 여든이 넘은 나이지만 여전히 건강하며 에너지가 넘친다. 지금 가장 바라는 것을 물어보니 북한 지도자 김정은 만나는 것이라고 한다. 지금의 카자흐스탄 대통령을 데리고 한국, 일본, 싱가폴을 보여주었듯, 카자흐스탄 경제개혁과정에서 쌓은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북한 경제개혁에 이바지하는 것이 마지막 꿈이라는 것이다. 지식인이 가져야할 철학, 그리고 나이와 상관없는 삶에 대한 가치와 열정을 가진 방총장과의 만남은 짧지만 깊은 여운을 남긴다. 지도자 언어분석으로 박사논문을 받았다는 말에 북한 지도자 김정은의 정책언어 분석에 대해 열정적으로 질문하는 모습은 총장과 방문자의 대화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궁금한 것이 있으면 알기 위해 손아래 사람에게 묻기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신의 의견에 대해 ‘yes’가 아니라 ‘No’를 이야기해달라고 말하는 모습이 여든 살, 이 대학 총장의 모습이라면 꼭 한번 이 대학에서 나도 학생들 가르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이 카자흐스탄의 미래이며, 그 밝은 미래를 만드는 것이 ‘지식’의 역할이자, 한국인이라는 사실이 기분좋게 뿌듯해진다.
노을 지는 알마티의 밤
희망에 가득찼던 스무살의 마음이 되어 뭔지 모를 뿌듯한 마음을 안고 학교에서 나와 중심거리를 걷는다. 7시 반이 넘었는데 이제서야 조금씩 해가 질 준비를 한다. 여름이 성큼 다가온 느낌이다. 이 아름다운 도시의 풍경을 담기 위해 알마티의 ‘남산타워’로 향한다. 해 질녁 설산을 둘러싸고 내려다보이는 도심의 전경이 아름다워 한참을 바라본다. 번쩍이는 불빛이 과하지도 않고, 너무 암흑처럼 없어서 싸늘해보지도 않는 편안한 오후의 하루해가 지나간다. 도시가 주는 편안함 때문인지 예상 일정보다 긴 시간 이 도시에 있었다. 급할 것없이 지나가는 하루도 그래서 느긋해지는 마음이 기분좋은 저녁이다. 여행이 아니라 늘 지내던 도시에서 익숙한 ‘일상’을 보낸 것 같은 알마티! 카자흐스탄이 전한다. 국민의 평범한 삶의 질과 생활 수준의 향상, 곧 만족할만한 구조적 조건을 갖추는 능력이 곧 ‘국력’이라고. 그것이 현대 중앙아시아를 이끌어가는 리더, 카자흐스탄의 ‘힘’일지도 모른다. 내일 아침이면 또 익숙한 도심의 거리에서 찾게될 따뜻한 커피향 같은 알마티의 저녁 노을이 설산 너머로 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