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마의 고향을 찾아
타슈켄트에서 페르가나로 가는 길
한국대통령의 방문으로 우즈베키스탄의 수도는 거리마다 태극기의 물결이다. 방문을 환영하는 글귀가 타슈켄트 도심의 전광판 곳곳에 써있다. 핸드폰을 켜니 우즈베키스탄 정부가 한국정부에 120억 달러 규모의 프로젝트를 제안했다는 기사가 보인다. 양국 관계는 이번 순방을 계기로 ‘특별’ 전략적 동반자 관계로 격상되었다. 경제, 교육, 에너지를 포함한 전 분야의 교류 규모와 수위가 모두 전방위적으로 한단계 업그레이드된 것이다. 새로 취임한 우즈베키스탄 대통령의 개혁의지도 한-우즈벡의 상호협력에 더 많은 기대를 가지게 한다. 양국 관계를 환영하는 태극기 거리를 빠져나와 공항으로 간다. 시내에서 공항까지는 차로 30분이 채 걸리지 않는 가까운 거리다. 오후 2시반 출발 페르가나행 비행기에 탑승했다. 비행기는 눈 붙일 틈도 없이 50분이 되지 않아 페르가나 공항에 착륙한다.
서역의 시작: 명마의 고향, 페르가나
‘서역’이 시작되는 곳, 명마 ‘한혈마’의 고향, 대완국(大宛) 페르가나! 이 곳은 한 무제 때, 실크로드의 개척자 장건이 다녀간 곳이다. 장건은 이 도시에서 바람처럼 날쌔게 달리는 훌륭한 ‘말’을 보고 놀랐을텐데 나는 이 도시에서 ‘한국’을 먼저 만난다. 공항에 내리자마자 보이는 것은 온통 ‘대우차’요, 들리는 것은 ‘안녕하세요’ 한국어다. 대우차를 몰고 있는 택시 기사가 한 명이 다가와 한국어로 숙소를 묻는다.
“제 이름은 라임입니다. 2011년부터 2015년까지 4년간 김해에서 일했어요.”
한국에서 일했다는 것에서 큰 자부심을 느끼는 택시기사 라임은 숙소로 향하는 내내 한국칭찬을 쏟아낸다. 표현할 수 있는 단어가 많지 않지만 서투른 한국어로 그는 ‘한국이 얼마나 좋은 나라’인지를 강조했다. 숙소에 도착했는데도 짐가방을 들고 따라오더니 숙소 주인에게 무엇이라고 한참을 말하고 떠난다. 체크인을 하자 4인실 도미토리가 1인실로 무료로 ‘업 그레이드’ 되었다. 라임과 호스텔 주인은 서로 잘 아는 사이였는데 아마도 택시기사가 ‘손님을 잘 모셔달라’고 특별히 요청한 듯했다. 한국에 대한 고마움을 낯선 이방인에게 이렇게라도 갚고 싶었던 모양이다. 타국에서 내가 ‘한국인’인 덕을 톡톡히 본다. 장건이 명마를 구하기 위해 오늘날 대완국 페르가나에 왔다면 한국인인 나를 따라다녔어야 할 것이다. 여기서는 ‘니하오’가 아니라 ‘안녕하세요’가 더 잘 통하니 말이다.
영어보다 한국어가 더 잘 통하는 곳, 페르가나
페르가나는 도시가 크지 않아 금방 도시 전체를 돌아본다. 짐을 풀고 도시를 걷는다. 도로를 걸을걸을 때마다 우즈베키스탄 청년들이 한국어로 말을 건다. 한국과 이렇게 멀리 떨어진 길 위에서 영어보다 한국어를 듣는 것이 신기하다. 코이카에서 파견되어 한국어 교육으로 봉사를 하고 있는 두 분을 만나기 위해 식당에 앉았다. 나이 어린 점원이 주문을 받는다. 영어로 메뉴판에 음식을 주문했는데 한국어로 대답한다. 내가 세상 어느 나라를 가서 이런 경험을 할까 싶다. 전세계 공용어인 영어보다 한국어가 더 잘 통하는 곳이라니! 모국어가 영어인 애들은 외국에서 여행하면 이런 기분이겠구나 싶다. 이 식당을 지나오면서도 한국어를 가르치는 커다란 학원 건물을 봤는데 페르가나에서 ‘한국어’의 열기가 어느 정도를 가히 짐작하게 한다. 현지 고교에서 한국어 교육을 하고계신 김명구 선생님과 페르가나 국립대에서 한국어 교육을 하고 계신 박호숙 선생님을 만나기로 되어으니 자세한 상황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오래지 않아, 수업을 마치신 두 분 선생님을 뵐 수 있었다. 하루 종일 수업이 있어 피곤하실 법도 한데 멀리서 온 나그네를 반갑게 맞아주신다.
페르가나에서 만난 한국어 교육 봉사단원과의 대화
나: 서역이 시작되는 한혈마의 고향이라 멋진 ‘말’들일 많은 것 같았는데 페르가나에서는 ‘한국’이 먼저 보이네요. 주문받는 학생도 한국어를 하더라구요. 영어보다 한국어가 잘 통하는 도시가 처음이라 놀랐어요. 우즈베키스탄에는 왜 이렇게 한국어 붐인 건가요?
박호숙: 현재 우즈베키스탄 사람들에게 한국은 로망이예요. 지금도 여기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의 70%는 한국어를 공부해요. 영어보다 한국어의 인기가 더 높죠. 한국어의 위상이 이렇게 높은 곳이 세계 어느 도시에 있을까 싶어요 얼마전에 학생한테 들은 이야기인데 페르가나에서 어떤 두 아저씨가 싸우는 걸 봤대요. 한참을 다투다가 갑자기 싸움이 멈췄는데 한 명이 이렇게 말하더래요. “내 아들 한국에 있다.” 그 말을 듣고 있던 다른 한 아저씨가 고개를 숙였다는 거예요. ‘한국에 있다’는 것이 곧 부의 상징이고 자랑이 되는거죠. 한국에서 몇 년만 일하고 와도 여기서 건물을 사서 집세를 받든, 사업을 해서 돈을 벌든, 차를 사서 택시기사를 하든 뭐든 할 수 있는 기본 바탕을 만들 수가 있거든요.
김명규: 이 나라에 청년들은. 회사도 없고, 취직이 안되서 갈때가 없어요. 고등학교를 졸업하건 대학을 졸업하건 할 수 있는 일이라는게 식당에서 서빙하고 청소하고 하는 게 다예요. 산업이 없으니 회사가 없고, 농업이 주다보니 갈곳이 없죠. 저기 서빙하는 우즈베키스탄 학생의 한달 원급이 우리돈으로 6-7만원이예요.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일하고 평균적으로 이 나라 사람들이 받은 원급이 한달에 100달러 정도인데, 러시아에 가면 300달러, 한국에 가면 1500달러는 받을 수 있어요. 그러니 어떡하든 한국어를 배워서 나가려고 하는거예요. 학원에 학생이 100명 있으면 60명은 한국어를 배우고 나머지 20명 정도가 영어를 해요. 내가 지금까지 가르친 애들이 2천명은 될건데, 한 70명은 이미 한국으로 갔어요. 한국을 가는 방법은 3가지예요. 한국 학교를 입학하거나, 산업인력으로 가거나, 한국인과 결혼해서 가는 거죠. 그런데 학교 입학이라는 것도 순수한 공부 목적보다는 비자를 얻기 위해 일단 학교를 입학하고 그 후에는 알바를 해서 돈을 벌죠. 하지만 뭐 알바하면서 공부한다는게 말이 쉽지 가능한가요? 사실상 공부는 거의 못한다고 보는게 맞는거죠. 실제로 내 학생중에 하나는 학교는 전남대를 들어갔는데 사는 곳이 수원이예요. 이해가 되나요? 그러니까 학교에 소속은 걸어놓고 일자리가 광주보다는 서울에 많으니 서울에서 사는 거예요. 수업은 일주일에 한번 정도 듣고요.
나: 그래서 한국어의 열기가 가득한거군요. 여기서 일하시면서 가장 힘든 일은 뭔가요?
박호숙: 아무래도 이 곳은 공교육이 제대로 운영되지 못하는 게 가장 어려운 부분인 것 같아요. 학생이 50명이여도 출석하는 사람이 5명일 때도 많아요. 졸업장도 돈을 주면 받을 수 있으니까요. 결석이나 지각의 이유도 정말 가지각색인데 손님이 온 것도 지각의 이유, 작은 아버지가 집에 오오신 것도, 아버지의 생일도 지각의 이유예요. 사회 공동체 전체에 대한 정의나 공평성은 없는데 ‘내 가족’ 내친적’의 관념만은 철저해서 동생이나 친구를 위해 컨닝하는 것은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러다보니, 우즈베키스탄의 교사들도 친구가 오거나 다른 약속의 이유로 수업을 늦게 가거나 대충하는 경우도 많다나봐요. 공교육 수업현장은 붕괴된거죠. 교사나 의사 등의 지식인층이 워낙 낮은 연봉(한달 100달러)에 사회적 존경이 없다보니 누구도 학문자체에 대한 동경과 갈망으로 공부하려고 하는 마음은 없죠. 실용적 필요에 의한 어학은 발달해도 다른 기초학문 수준들은 너무 낮아서 우즈베키스탄의 대학생 수준은 심각한 수준이예요.
나: 부천대학교 타슈켄트 캠퍼스에서 현지 대학 행정총괄 업무를 담당하고 계신 박상우 선생님께 저도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번 대통령 순방때, 우즈베키스탄에 있는 한국 대학을 졸업하면 한국대학의 졸업장으로 학위를 받을 수 있는 방안을 검토했다고 하더라구요. 우즈베키스탄 자체 교육의 질이 너무 낮다보니 여기 학사학위는 다른 나라에서 인정이 안된다고 해요. 현재는 인하대의 IT학과, 유아교육이 특화된 부천대학교, 경인여자대학교, 여주대가 들어와 있고, 내년까지 신한대와 아주대까지 타슈켄트에 들어올 것 같다고 하시더라요. 5년안에는 좀더 교육개혁에 진전이 있지 않을까요?
김명규: 교육개혁은 정말 절실하다고 봅니다. 쉽지 않겠지만 말이죠. 공교육이 제대로 운영되지 않는 것도 문제지만 18-20세에 결혼을 하다보니 한창 공부할 나이에 많은 부분이 단절되는 것도 있어요. 수업을 하다보면 임신한 학생이나 20살인데 아이가 이미 2명인 학생도 만나요. 부모세대는 지금보다 더 어린 16세-17세 전후로 결혼했던 건데 조금씩 혼인 적령기는 늦어지는 중이긴 합니다만 상대를 거의 모른 상태에서 중매 결혼이 이루어지다보니 이혼율이 거의 50%에 달해요. 결혼은 보통 남자 집안의 어머니의 주도로 이루어지는데 주변에서 괜찮은 아가씨가 있으면 물색해서 만나보라고 권하고 주변에 평판을 물은 후 여자집에 이야기를 하죠. 결혼 전에 한번 정도 잠깐 만나고 바로 결혼을 하는 거죠. 여기에서는 결혼 전에는 평판때문에, 결혼 후에는 다른 남자와 따로 차를 마시는 여자도 보기가 어려워요. 남녀간의 만남도 자유롭지가 않죠. 그런데 또 이 나라는 결혼문화가 성대해서 사실상 결혼식을 위해 평생 돈을 모은다고해도 과언이 아니예요. 월급이 평균 100달러인데 3일에 걸쳐 신랑, 신부집, 마을에서 잔치를 하는 결혼 비용이 최소 3000불에서 15000불까지 드니 상상을 초월하죠? 결혼식을 위해 돈을 빌리기는 경우는 허다해요.
나: 이렇게 ‘보여지는’ 결혼식에 들이는 비용을 줄이고, 좀더 교육의 가치를 알고 자녀의 유학이나 교육을 위한 투자가 있다면 한국처럼 우즈베키스탄도 느리지만 천천히 교육과 행정개혁이 가능해질텐데 말이죠. 선생님들꼐서는 우즈베키스탄 학생들이 한국으로 유학갈 수 있는 교량의 역할을 하고 계신데 한국어 가르치시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언제셨나요?
김명규: 아프리카나 동남아로 봉사가신 분들에 비하면 이쪽이 훨씬 더 편할거예요. 기후도 그렇고생활환경도 그렇고. 감사하죠. 보람은 많아요. 내가 가르친 학생이 나한테 한국어를 배워서 한국에 가서 잘 적응하는 걸 볼 때 뿌듯하죠. 교과서에 쓰는 “화장실 다녀오겠습니다.”라는 표현말고 한국인들끼리만 알아들을 수 있는 “물 좀 버리고 오겠습니다”라는 표현을 가르쳐줬는데 한국에 간 이 녀석이 그 말을 써서 다들 빵 터진거예요. 너 어디서 한국어 배웠니 이런 말이 나오지 않았겠어요? 한국어에 자신감이 붙으니까 더 많이 쓰고 주변에서도 이 친구를 더 챙겨주려고 하고 선순환이 된거죠. “선생님, 저 일자리 구했어요.” “학교에서 1등했어요.”이런 말들을 전해올 때 뿌듯해요. 명절에 알바하는 주방 한 구석에서 핸드폰을 놓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큰 절을 하는 동영상을 담아서 보냈는데 마음이 찡하더라고요. 그 보람은 이루 말할 수 없죠.
나: 감동이네요. 그렇다면 우즈베키스탄 행정부는 어떤 지원을 해주나요? 교실이나 비품 지원은 원활한가요?
김명규: 우리가 우즈베키스탄 정부로부터 받는 것은 수업하는 교실 외에 아무것도 없어요. 그런데빈 공간 하나만 덩그라니 있을 뿐 난방시설도 없어서 칠판에 글씨 쓰기가 힘들었어요. 학생들도 추워서 공부하기 어렵구요. 지금은 한 2년 정도 지나서 제가 교실에 필요한 물품을 넣어두었습니다. 전보다는 좀 나아졌죠. 엊그제 한국어 시험(토픽)이 있었어요. 모의 테스트를 위한 프린트 물을 전달하면서 이 종이는 어디서 온거죠? 라고 물었어요. 학생들 대답이 이래요.
“한국 국민의 세금이요! “
딱 반세기 전에 대한민국이 그랬다. 우리도 다른 나라의 원조를 받아 책과 공책을 사고, 음식을 먹었다. 60년대 유학생들은 단돈 100불을 손에 들고 머나먼 미국 땅으로 떠났다. 그렇게 돌아온 사람들이 대학에서 교수가 되어 학생들 가르치고 또 제자들을 유학보냈다. 부모는 못입고 못먹어도 자식 공부를 위해서는 논도 팔았다. 그렇게 만들어진 대한민국이 이제 우즈베키스탄 사람들의 로망이다. 나는 이제 영어보다 내 모국어를 먼저 만나는 타국 땅에 서 있다. 한국어 교육을 위해 봉사하시는 분의 많은 노고가 이 땅에 있음을 본다. 봉사의 마음으로 먼 나라에서 고생하고 계시는 선생님 두 분은 참으로 존경스럽다. 크게 힘들게 없다고 하시지만 2년을 타국에서 봉사하는 선택은 쉬운 결정이 아니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 선생님들의 2년의 시간이 많은 우즈베키스탄 현지인들의 인생에 ‘희망의 씨앗’이 되었을거라 믿는다. 한국어를 공부하는 학생들이 궁금해서 수업참관이 가능할지를 물었더니 흥쾌히 허락해주셨다.
페르가나 고등학교 학생들과의 만남
코이카에서 파견되어 페르가나에서 한국어 수업을 2년간 해오신 김명규 선생님의 수업 참관을 위해 페르가나 3번 고등학교로 간다. 페르가나 3번 고등학교는 큰 도로 변에 자리잡고 있는데 그 교실의 일부를 코이카에서 한국어 교육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 두리번거리니, 바로 학생이 와서 한국말을 건넨다. 부끄러워하면서도 계속 말을 걸고 싶어하는 눈치다. 옆에 있던 친구가 친구를 불러 여학생들이 5-6명이 우르르 몰려 내려왔다.
“누구 찾아오셨어요? 한국에 엑소 알아요? 한국 너무 좋아요.”
정말 대통령 부럽지 않을 황송한 에스코트를 받으며 3층 코이카에서 진행하는 한국어 교실반을 찾았다. 16명의 학생들이 모여 반짝이는 눈으로 선생님을 바라보고 있다. 수업에 누가 될까 죄송한 마음으로 조심스레 교실로 들어갔는데 학생들이 박수치며 환영해준다. 아니, 세상 어느 나라에서 누가 나를 단지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이만큼이나 반겨줄 것인가. 한국어를 수업하는 교실이 옆 교실과 달리 시설이 좋아 여쭈니 김명규 선생님이 직접 계획서를 써서 코이카 올린 것이라 하신다.
“ 그 전에 오셨으면 정말 말도 못해요. 환경이 너무 열악해서 아이들도 선생님도 너무 힘들었죠. 시설 개선을 위한 금액을 코이카 요청하면 계획서를 보고 코이카에서 선별을 합니다. 이 아이들과 앞으로 후임으로 오실 분들을 위해서 꼭 해야할 일이라 생각했어요. 덕분에 지금은 이렇게 좋은 환경에서 수업하고 있습니다.”
큰 일 아니라듯 말씀하셨지만 나랏돈 받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음을 안다. 받는 것도 복잡하고 받고나서도 얼마나 일이 많은가. 그야말로 내가 아닌 우즈베키스탄 아이들과 후임으로 오실 선생님을 위한 ‘희생’이다. 그 덕에 이 학생들은 좋은 환경에서 공부하여 한국을 가는 기회를 얻게 된 것이리라. 교실 뒤쪽 벽면에는 ‘조선시대 초가집 마을’ 사진이 벽 전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화려한 현대 서울 모습을 사진 보다 가장 평범했던 한국의 과거 모습을 벽 전면에 넣은 것은 거리감을 좁히고 싶으신 선생님의 배려가 아닐까 싶다.
“선생님, 마침 오늘 좋은 소식 있어요. 오늘 우리반에 우마르라는 친구가 산업연수생으로 내일 밤 비행기로 한국으로 떠납니다. 수원에 한 중소기업 공장에서 일하게 되었어요. 학생들이 축하파티를 하려고 음료랑 빵을 좀 사왔는데 같이 드시죠.”
코이카 옷을 입은 키 크고 듬직한 우마르라는 아이의 눈에는 먼곳으로 떠난다는 두려움보다 한국으로 갈 수 있다는 기쁨이 가득해보였다. 누군가는 헬조선이라 불평하는 그 땅을 이들은 이렇게나 간절히 가고자 하는 것이다. 주변 친구들이 부러운 시선으로 우마르를 본다. ‘나도 꼭 공부 열심히 해서 한국 갈거야’라고 다짐하는 듯 하다. 김 선생님께서 가져온 빵과 음료를 테이블마다 잘 나누라고 하니 남학생들이 일어나 일사불란하게 빵과 주스를 배분한다.
“처음에는 이런 일은 다 여학생들이 했어요. 제가 수업하면서 가르쳤죠. 아직 우즈베키스탄은 여성권리가 약하고 남성중심의 가부장문화가 강하거든요.”
언어를 배우는 것은 또 하나의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이는 일임을 실감한다. 이 아이들은 일상 속에서 ‘당연히 해 온 것’에 이미 ‘질문’하기가 시작된 것이다. 어느 정도 음식 배분이 끝났는데도 아이들은 먹지 않고 기다리고 있다. 한 학생이 질문한다
“선생님, 먼저 드셔주시죠.”
어른이 숟가락을 들기전에 음식을 먼저 먹지 않는 한국문화를 정확히 알고 하는 질문이다. 선생님께서는 주스를 다 채우라고 하고, 한국으로 멀리 떠나는 우마르의 건강을 축원하는 건배사를 하셨다. 이 작은 우즈베키스탄 고등학교의 교실에서 ‘한국’이 그대로 재현되는 느낌이다. 16세에서 20세가 되는 이 아이들의 꿈은 대부분 한국에서 가는 것이다. 자동차, 컴퓨터 공학, 경영학, 통번역 등의 학과에서 가서 공부하며 돈을 벌고 싶단다. 아이들은 정말 순수하다. 수업 후에도 같이 버스를 탔는데 기어코 버스비를 받지 않는다. 귀한 곳에서 온 손님이 돈쓰게 할 수 없단다. 버스에 내려서도 숙소까지 바래다주면서 사탕하나를 사서 먹어보라 건넨다. 역시나 내가 사준다고 하는데도 결코 돈을 받지 않는다. 덕분에 난 이 아이들에게 집에 오는 길까지 황송한 에스코트를 받았다. 얼마나 맑고 순수한 마음인지 그 배려가 너무도 고맙다. 오늘 내가 만난 16명의 아이들은 모두 우즈베키스탄어를 모국어로, 16명 모두가 한국어를 할줄 알며, 10명이 러시아어를 그리고 4명이 영어를 할 수 있다고 했다. 최소한 1인이 3개국어를 한다는 것이다.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곧 나와 다른 세계를 더 알아가 사고의 지평을 넓히는 과정이다. 이렇게 열심히 언어를 배워 다른 나라에서 유학하고 온 아이들이 이 나라의 희망과 미래가 되기를 기도한다.
한혈마의 땅, 페르가나에서 장건을 생각하다
저녁을 먹기 위해 숙소를 나선다. 페르가나는 도로 정비가 참 잘되어있다는 느낌이다. 작은 도시지만 번잡함이 없다. 잘 뚫린 도로에는 온통 대우차가 가득이다. 2100년, 이 땅에 왔던 장건은 아마 차 대신 멋진 말을 보고 놀랐을 것이다. 그는 이 땅에 얼마나 절박한 마음으로 와서 월지의 위치를 물었을까. 그의 여정을 생각하며 걷는다.
“절박한 마음이다. 흉노의 침입이 하루가 멀다하고 계속되고 있다. 변경을 방어하는 수비대가 최선을 다해 방어하고 있지만 역부족이다. 위협은 하루하루 증가하고 있다. 흉노로 인해 황제 폐하는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으시다. 얼마 전 포로로 잡힌 흉노를 심문했더니 월지도 흉노의 공격으로 크게 패했다고 한다. 월지 왕의 머리는 술잔으로 만들어졌다고 하니 그 원한을 어찌할 것인가. 월지와 손을 잡고 흉노에 대항하는 것만이 현재로서는 유일한 답이다. 황제 폐하가 내려주신 100명의 사신단과 함께 나는 내일 월지로 떠난다. 위험하고 어려운 길이지만 누군가는 가야할 것이다. 흉노의 위협으로 황제폐하와 백성의 근심이 어제 저녁 황제를 알현하고 길을 떠나겠다 말씀드렸다. 무사히 임무를 완수하고 다시 서안으로 돌아올 수 있기를. “
기원전 139년, 실크로드로 떠나기 전날 밤, 장건은 아마도 이런 기록을 남기지 않았을까. 그는 월지와의 군사동맹을 목표로 서안에서 길을 떠났지만 가는 길에 흉노에게 붙잡혀 10년을 포로생활을 했다. 기원전 129년경 마침내 탈출에 성공하여 파미르 고원을 넘어 대완(현 페르가나)에 도착한다. 장건은 대완 사람들의 길 안내와 통역으로 대월지를 찾아갔다. 비록 월지와의 동맹에는 실패했지만 장건은 이때 페르거나에서 최고의 말을 보게된다. 다시 중국으로 돌아간 그는 한 무제에게 그가 본 말을 소상히 알렸다. 그렇게 해서 중국에 알려진 ‘한혈마’, ‘천리마’가 바로 이 지역, 페르가나의 말이다.
한혈마, 땀과 피를 흘리는 말이라는 뜻이다. 이 말의 뒷목과 어깨 사이의 피하조직에는 기생충이 서식하는데 그 때문에 달릴 때면 혈관이 늘어나 땀과 피가 함께 흘러내리는 데서 ‘한혈마’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사기>가 천마의 후손이라고 한 이 한혈마는 강인하고 주력이 뛰어나 하루에 천리를 달린다고 하여 ‘천리마’라고도 불리운다. 말만큼 철저하게 이용당한 동물을 찾기도 어렵다. 아직 현대사회에서 여전히 동력 측정단위로 ‘마력’을 사용하지 않는가. 사실, 기관차의 발명전까지 세계의 모든 힘의 동력과 원천은 말의 힘이었다. 황소는 힘이 있지만 빠르지 않고, 낙타는 다양한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다. 배는 물 밖에서 움직이지 못하고 치타는 빠르지만 장기간 달릴 수가 없다. 말처럼 빠른 속도로 장거리를 달릴 수 있는 동물은 없다. 말은 사람을 태우고 물건을 싣고 열대우림부터 남극에 이르기까지 갈 수 있는 모든 곳을 함께 했다. 이토록 철저하게 이용당한 동물을 찾기도 어려울 것이다. 조금 위안될 것이 있다면 철저히 이용당한 만큼 수 많은 문학작품 속에서 상당히 ‘멋지게’ 등장한다는 것이다.
문학 작품 속에 등장하는 말
동양에서 천리마는 상당히 많은 문학작품에 등장한다. 기원전 2세기 서역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온 장건은 이 ‘최상의 말’에 대해 한무제에게 보고한다. 그러자 무제는 한혈마를 얻기 위해 다시 대완으로 사신을 파견한다. 그러나 대완은 거절하고, 한무제는 장군 이광리(李廣利)로 하여금 두 차례의 원정을 보내 순종을 구해왔다고 한다. 이 말을 얻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을 것인가. 자기 백성의 죽음보다 한혈마를 얻은 기쁨이 무제에게는 더 컸던 모양이다. 무제는 한혈마를 얻은 후 감탄하여 「서극천마가」(西極天馬歌)를 짓게 하였는데 이 노래에서 첫 구절 「천마」(天馬)가 바로 한혈마를 뜻한다.
<서극 천마가>
천마가 오네 서극에서 오네
만리를 넘어 중국으로 오네
신령한 위엄을 이어받아 외국을 항복시키니
유사를 건너 모든 오랑캐가 복종하네
천마, 또는 천리마는 중국의 문학 작품 속에서 흔하게 등장한다. 그러고보면 말은 상당히 영특한 동물로 우리 인간의 삶속에 깊숙이 파고들어 있는 듯하다. 중국 <삼국지>에는 ‘붉은 몸체에 토끼처럼 날쌘 말’이라는 뜻의 적토마(赤兎馬)이야기가 나온다. 이 말은 원래 동탁의 소유였는데 정원을 살해하기 위해 동탁이 부하 여포에게 하사한다. 그후 여포가 살해되자 조조의 손에 넘어가는데 조조는 항복한 관우에게 적토마를 선물로 준다. 고락을 같이한 관우가 죽자 오나라의 마충이 가져가지만 먹이를 거부해 며칠 후 굶어죽는다. 충절을 지키는 말의 또 다른 이야기가 <사기>에 등장한다. 사마천 <사기>의 항우 본기에는 초나라의 항우가 해하(垓下)에서 한(漢)나라 고조에게 포위되었을 때 지은 시가 나온다. 자신의 절박한 상황을 그린 것이다.
<해하가(垓下歌)>
力拔山兮氣蓋世(역발산혜기개세) 힘은 산을 뽑을 만하고, 기운은 세상을 덮을 만한데
時不利兮騅不逝(시불이혜추불서) 때가 불리하여, 오추마는 나아가지 않는구나
騅不逝兮可奈何(추불서혜가내하) 오추마가 달리지 않으니, 이를 어찌 할 것인가
虞兮憂兮奈若何(우혜우혜내약하) 우희야, 우희야, 이를 어찌한단 말이냐?
이 시에 등장하는 ‘오추마’가 바로 항우가 탄 준마이다. 오추마는 충성심이 강하고 용맹해서 항우와 함께 전장을 누비고 다녔다. 해하전투에서 패한 항우가 오강에 이르러 죽음을 결심하고 오추마를 뗏목에 태워 보냈으나 오추마는 주인의 죽음을 예감하고 구슬피 크게 울다가 스스로 물에 뛰어 들어 죽었다고 한다. 천리마가 등장하는 또 다른 대표적 문학작품에는 조조의 시<귀수수>가 있다. 특히 유명한 구절이 ‘老驥伏櫪 志在千里(노기복력 지재천리), 烈士暮年 壯心不已(열사모년 장심불이)’인데 늙은 천리마는 마구간에 엎드려 있어도 뜻은 천리에 있고, 열사는 나이를 먹어도 그 뜻은 웅대하다라는 뜻이다. ‘천리마’의 용맹함은 나이가 들어도 변치 않음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현 페르가나와 키르지스스탄의 오손을 에워싸고 있는 톈산 산맥의 남, 북쪽 기숡에 펼쳐진 초원지대는 명마의 주산지였다. 페르가나의 한혈마를 얻은 한 무제는 오손(현 키르기스스탄의 중서부지역)으로부터도 또 다른 명마인 ‘서극마(西極馬)’를 들여왔으며 후한대에는 멀리 월지(현 아프카니스탄 동부지역)로부터도 ‘월지마’를 수입했다. 그리하여 한 무제 때 이미 중앙정부가 관장하는 군마는 이미 40만필이나 되었다고 한다. 군마 40만필을 얻기 위해 400만의 사람이 죽었을지도 모른다. 즉, 사람의 목숨보다 말이 더 중요했던 것이다. 좋은 말을 얻는 것이 곧 기마병력의 핵심이요, 국력이었던 시대, 페르가나는 ‘최고의 말’을 보유한 누구나 탐내는 땅이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