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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우 Jan 04. 2023

우즈베키스탄 부하라

티무르 제국의 영광

사마르칸트에서 부하라로 가는 길


사마르칸트에서 부하라로 가는 고속 기차에는 ‘서역인(西域人)’이 가득하다. 원래 ‘서역’이란 단어는 2세기부터 9세기까지 중국, 한국 등 동아시아 지역의 국가들이 ‘중앙아시아 사람들’을 부르던 말이다. 그런데 21세기 부하라로 가는 열차에는 ‘서양(서유럽)에서 온 사람들(서역인)’이 더 많은 것 같다. 수 많은 ‘서역인’인 사이에 있으니 어쩐지 내가 흔치않는 ‘동역여인’이 된 듯한 기분이다. 기차 안에서는 미국 NBA농구의 하이라이트를 연속으로 상영하고 있다. 창 밖은 집들이 거의 보이지 않는 긴 황무지가 끝도없이 펼쳐지는데 고속열차는 구 소련시대의 주적인 미국 영상을 틀어준다. 실크로드의 중심지의 역사는 창 밖으로 지나가고, 불과 한 50여년 전의 주적은 이제 친구처럼 일상에 녹아있다. ‘서역인’ 가득한 이 열차 칸에 홀로 앉아있는 ‘동역여인’같은 기묘한 조화다. 낙타를 타고 15일은 꼬박 걸려 갔을 이 길은 이제 고속기차로 2시간 밖에 걸리지 않는다. 21세기 타슈켄트에서 사마르칸트, 부하라까지는 모두 고속열차로 연결되어 1일 생활권역이 되었다. 아침은 타슈켄트에서, 점심은 사마르칸트에서, 저녁은 부하라에서 먹을 수 있을만큼 가까워 진 것이다. 잠깐 사이에 기차는 도착을 알린다. 오전 9시 50분에 출발한 기차는 12시가 되지 않아 부하라에 도착했다. 


부하라,  반가운 쉼처럼 편안한 도시


부하라는 반가운 ‘쉼’이다. 그 옛날 머나먼 사막으로부터 낙타를 타고 온 상인들에게 이 오아시스 도시 부하라는 얼마나 귀하고 반가운 휴식처였을까. 그들은 이 도시에서 꿀맛 같은 휴식을 취했을 것이다. 역에서 내려 택시를 타고 구도심으로 들어간다. 택시기사의 순박한 미소가 적당한 안도감을 준다. 공원국은 그의 여행기<유라시아 신화여행>에서 이 지역 사람들의 ‘차갑지도 부담스럽지도 않은 미소’를 언급했다. 짐 가방을 들어 옮겨주는 이 곳 택시 할아버지의 미소가 딱 그렇다. 대도시 사마르칸트나 타슈켄트의 택시기사와는 다른 편안한 기분좋음이 있다. 그 ‘과하지 않은 편안한 미소’는 구도심으로 이어진다. 구시가지는 황토색 벽돌 건물이 도시 전체를 에워싸고 있다. 눈과 마음이 편안해진다. ‘번쩍거림’없는 황토빛 건물에 눈이 편하고, 큰 길이 바로 보이는 구도심의 규모에 마음이 편하다. 


부하라 전경


나는 지도를 안보고 걸어다닐 수 있는 구시가지가 좋다. ‘화살표’에서 벗어나는 ‘자유로음’ 때문이다. 지도를 못 읽는 심각한 ‘방향치’인 나는 늘 어딘가를 가기 위해 핸드폰 지도를 켠다. 그런데 핸드폰만 보고 길을 걷고 있노라면, 어느 순간 ‘화살표’만 보고 있는 나를 보게 된다. 기다리는 이도, 해야할 일도 없는 낯선 땅에서는 마음껏 자유로워야 할 것 같은데 어찌된 일인지 늘 핸드폰 속 방향표시 ‘화살표’에 나는 자유를 도난당한 느낌이었다. 목적지를 지정한 순간, ‘시야의 자유’를 화살표에게 빼앗겨 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핸드폰을 내려 놓을 수 있는 부하라의 구도심은 진정한 쉼터이자 자유다. 


과거에서 만난 현대, 현대에서 만난 과거


2500년의 역사를 가진 이 도시는 18세기, 대항해의 시대가 도래하기 전까지 실크로드를 오가는 상인들로 늘 활기찬 도시였다. 정수일은 부하라를 ’한권의 통사책’, ’도시 전체가 역사박물관’이라 했다. 지구상에 남아있는 역사 유적은 대부분 단대사적으로 한 조대나 몇 개의 조대만을 대표하는 유적인데 부하라는 일국의 역사가 한 도시에 통시적으로 그대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도시 전체가 박물관이라고 한 이유도 그 때문이다. 8세기의 건물부터 18세기의 건물까지가 구 도심안에 모두 보인다. 그래서인지 부하라는 오래된 과거와 현재를 계속 넘나드는 느낌이 든다. 과거에서 현대를 만나고, 현대에서 또 과거를 만난다. 내가 예약한 숙소도 18세기의 사이드 카몰 마드라사(Said Kmol Medressa)건물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내가 있는 바로 이 공간에서 300년 전, 신학교의 학생도 잠을 자고 책을 읽었을 것이다. 이 호텔은 전통적인 분위기에 현대식 편리함을 적절히 갖춘 곳이다. 직원들의 친절함도 과함없이 편안하다. 호텔 관리인은 내가 예약한 방의 열쇠는 건네주면서 개조하기 전에 찍어둔 이 건물 사진을 한 장 보여준다. 사진 속에 작은 문을 가리키면서 “바로 이 방이 당신이 머물 방이예요.” 라고 말하는데 마치 과거를 만나는 기분이다. 높이가 낮은 방문을 조심스레 열어본다. 방문을 열면 300년 전 이 방에서 ‘꾸란’을 읽던 한 학생이 금세라도 나올 것 같다. 문을 열고 보니 조그마한 방에 우즈베키스탄의 수요 수출품이었던 아름다운 손자수 침대보와 카펫이 깔려있다. 작은 방이 품격있고 따듯하게 느껴진다. 작은 책상에 앉아 가져온 보이차를 꺼내 한잔 마신다. 문득 300년 전 이 방을 썼을 신학교의 학생이 궁금하다. 그가 본 부하라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또 그는 어떻게 생활했을까? 점심을 해결하고 이제 부하라의 과거와 여행을 떠난다.     


18세기 마드라사를 개조한 숙소

실크로드 심장의 좌심실, 부하라


어느 땅이든 주인이 있다. 어느 나라나 무력을 앞세운 외래인이 침입한다. 낯선 침입자들은 정복자가 되어 원주민을 학살하고 재물을 약탈한다. 그리고 그 땅을 파괴하고 떠나기도 하고 또 정복한 땅에 정착하기도 한다. 자신의 땅에서 주인노릇을 하지 못하는 선주민은 새 삶을 향해 떠나거나 비겁한 굴종의 삶을 택하기도 한다. 부하라는 톈산 산맥 북쪽 기슭을 따르는 실크로드 초원로와 파미르 고원을 넘는 실크로드 육로 북도가 만난다. 여기서 다시 키질쿰 사막과 카라쿰 사막을 뚫고 페르시아와 카스피 해 쪽으로도 길이 이어진다. 부하라가 가진 지정학적 위치는 부하라를 ‘실크로드 중심의 중심, 심장의 좌심실’의 기능하게 만들었다. 심장의 좌심실이 대동맥을 통해 온몸으로 피를 보내듯 부하라를 통해 동서 문명이 교류했고, 실크로드는 번성했다. 그래서 부하라는 동서문명 교류의 관문, 번영의 실크로드를 고스란히 품고 있는 도시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이 땅은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자유로울 날이 없었다. 


중앙아시아 역사는 ‘유목민과 정주민의 다이나믹스’다. 스키타이, 흉노, 돌궐, 몽골 등의 유목민은 중국, 러시아, 페르시아 등의 정착민과의 대립했다. 한 때는 흉노, 돌궐, 몽골이 중앙아시아를 휩쓸기도 했고, 또 중국, 러시아, 페르시아에 복속되기도 했다. 부하라는 이 도시가 가진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서 ‘유목민과 정주민’의 세력이 늘상 교차되고, 그 세력이 서로 다투는 각축장이었다. 


부하라는 기원전 6세기, 페르시아의 침략으로 150년간 페르시아 문화권에 있었다. 기원전 4세기에는 알렉산더의 점령으로 이 지역은 제국에 복속되었다. 기원전 2세기 동쪽에서는 월지가 왔고, 순차적으로 흉노가 왔다. 기원전 1세기는 쿠샨왕조에 복속되었다. 사산조 페르시아가 위세를 떨치던 시절에는 서양학자들에 의해 에프탈이라는 백흉노가 한동안 이 곳의 주인행세를 했다. 이 후 돌궐이 이 일대를 지배했다. 중국도 필요에 의해 텐샨을 넘어 강국(사마르칸드), 안국(부하라), 석국(타슈켄트)등의 도시국가를 지배하려 하였다. 기원후 5-8세기까지를 부하르후다트 왕조라고 하는데 이 시기에 생긴 아르크성은 부하라의 상징처럼 구도심을 둘러싸고 있다. 7세기가 되자 낯선 종교를 들고 무함마드의 신봉자인 무슬림들이 왔다. 중앙아시아의 이슬람화가 시작된 것이다. 8세기에는 이슬람의 진출로 부하라도 이슬람의 영향을 받는다. 9세기부터 11세기는 사마니드 왕조가 들어서는 이때 부하라는 이슬람의 영향 하에 교육, 문화, 과학 모든 면에서 가장 번성한 시기를 누렸다. 13세기-14세기에는 몽골의 지배를 받았으며, 15-16세기에는 티무르의 지배하에 있었다. 티무르의 사후에는 그 후손간의 세력다툼이 끊이질 않아서 크고 작은 왕국으로 분열된다. 16세기부터 18세기에는 히바 칸국, 부하라 칸국, 카자흐 칸국이 동시에 존재한 시기다. 우리나라의 고구려, 백제, 신라가 분리되어 동시에 존재한 것과 비슷하다. 고구려, 신라, 백제가 주변국인 중국와 왜와 상호작용하며 영향을 받았듯, 이들 역시 페르시아, 호레즘, 몽골, 티무르 그리고 러시아와 상호작용하며 끊임없는 영향을 받아 온 것이다. 


『아틀라스 중앙유라시아사』김호동 저,  사계절, 2021 

                             

이렇게 분열된 지역들은, 20세기 들어 내몽골 신장 티벳 등은 중국에, 중앙아시아 5개국, 코카서스 3국, 발트3국 등은 러시아에 흡수된다. 1991년 중앙아시아는 모두 독립하지만 중국의 지배지, 티벳, 신장, 내몽골은 여전히 중국 영역으로 남아있게 것이다. 실크로드의 서쪽 끝 세계는 기독교이고, 동쪽 끝 세계는 유불의 세계였다. 그러나 그 중심은 언제나 사상과 사람, 물건이 교류하고, 거대한 정주민 세력과 유목민 세력이 교차할 수 밖에 없었다. 부하라의 역사는 곧 정주민과 유목민의 세력의 승패에 의해 결정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상, 사람, 물건의 교류가 가장 활발했던 이 지역은 다양성과 개방성이란 다이내믹스, 그 DNA를 태생적으로 물려받았을 것이다. 그것이 ‘오아시스’를 가진 국가의 운명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다양성과 개방성이 주는 열린 태도는 외부의 어려움 속에서도 삶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하는 토대가 되기도 한다. 나는 그 여유와 유머를 ‘나스레딘’이라는 전설 속 현자에서 본다.  


나스레딘 동상과 라비하우스


황토 벽돌로 둘러싸인 길을 따라 입구로 들어가면 나디르 디반 베기 마드라사(Nadir Divanbegi Medressa)가 보인다. 그 앞에는 커다란 연못을 끼고 있는 식당, 라비하우스가 있다. 마드라사와 식당 사이에 두고 나귀를 탄 동상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현명한 바보’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나스레딘’이다. 호자 나스루딘(Hoja Nasruddin)이라 불리기도 한다. 나귀를 타고 익살스런 웃음을 짓고 있는 모습이 근엄한 티무르 동상과는 전혀 다른 편안함을 준다. 이 사람은 터키에서 중국의 타림분지 일대까지 ‘나스레딘 아판티’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부하라의 명물이다. 나스레딘이 이름이고, 아판티는 ‘선생님’, 영어로 Sir에 해당하는 말이다. 시골에서 부하라로 여행 온 현지 여행객부터 외국 관광객들까지 나스레딘 동상 앞에서 사진을 찍기 위해 줄을 서 있다. 타슈켄트와 사마르칸트에서 본 티무르 동상에서는 볼 수 없던 광경이다. 포용력을 갖춘 제국의 경영자라기 보다 정복자와 약탈자로 더 많이 인식되는 잔인한 티무르보다 ‘어리석은 현자’ 나스레딘이 더 민중의 삶 속에 더 큰 위안이기 때문 아닐까. 그는 전설적 인물이었다고 하는데 지금까지도 그와 관련된 수많은 코믹하고 재밌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부하라에서는 4월 1일, 나스레딘을 기념하기 위한 ‘농담의 날’ 축제가 이 동상의 정면에 있는 ‘나디르 디반 베기 마드라사’에서 열린다고 한다.


나스레딘 동상


러시아의 유명한 문학가 솔로비요프는 스탈린 통치가 한창일 때 나스레딘을 의적으로 묘사한 『고요를 깨는 자』를 발표했다. 이 책은 바로 영어로 번역되었는데 영어번역본의 제목은 『부하라의 모험(Adventure on Bukhara)』이다. 이 이야기는 민담에 기초한 창작물인데 여기서 묘사된 나스레딘은 투르크의 ‘정의로운 봉이 김선달,’ ‘부하라의 임꺽정’, ‘로빈후드’의 느낌이다. 나스레딘은 민중이 창조한 얼굴로 수 많은 얼굴을 가지고 있는 듯 하다. 때로는 인기있는 개그맨이고, 때로는 정의로는 자가 되어 소설 속에 의적으로 등장하기도 하니 말이다. 공원국은 그의 책에서 의적으로써의 나스레딘을 강조한다. 그래서 그는 압제자와 고리대금업자를 나스레딘이 어떻게 통쾌하게 혼내는지를 보여주는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그가 부하라의 유쾌한 친구, 반가운 쉼이 되는 이 도시의 말벗이였으면 싶다. 그래서일까. 스카프와 양털모자가 가득한 기념품 가게를 뒤져 어렵게 발견한 나스레딘 농담집이 혼자 걷는 여행에 만난 오래된 반가운 친구같다.


여행의 긴장감이 풀어지는 느낌이다. 무더위에 지친 몸으로 도착한 오아시스 도시에서 나스레딘은 얼마나 유쾌한 친구였을까. 스카프 더미 사이에서 발견한 나스레딘의 농담집을 한 권들고 라비하우스로 향한다. 나스레딘을 술 동무 삼아 시원한 맥주 한잔에 이야기를 듣고싶어서다.  옛날 실크로드를 건너간 수많은 상인들도 이 연못에 앉아 나스레딘의 이야기를 들으며 껄걸 웃으며 하루의 피로를 풀었을 것이다. 소박한 일상의 즐거움이 부하라의 라비하우스에는 가득한 느낌이다. 사마르칸트의 레지스탄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랄까. 로컬 비어를 한잔 주문하고 책을 펼쳤다. 


옛날에 어떤 사람이 지나가다 맛있는 냄새가 나서 멈춰섰다. 킁킁 냄새를 맡고 있는데 주인이 다가와 대뜸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냄새값을 내시오’ 

“아니, 내가 먹은 것도 아니고 산 것도 아닌데 냄새값을 내라니 그게 말이 되오?”

난감한 행인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그러자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나스레딘이 그 주인에게 이렇게 말한다. 

“냄새값이 얼마요?” 

주인에게 가격을 들은 그는 동전을 땅에 떨어뜨리며 이렇게 말했다.

“동전 떨어지는 소리 값을 방금 들었으니 그 소리 값을 내시오”


나스레딘으로부터 전해지는 이야기만 봐도 이 도시에서는 유쾌한 시간을 보낼 것만 같다. 라비하우승의 맞은편에는 500년 된 뽕나무가 있다. 뽕나무는 물을 많이 필요로하지 않는다. 뽕나무가 있는 곳에는 지하수가 많다고 한다. 자체적으로 뿌리가 지하수의 물을 끌어들여 생존하는 것이다. 누구하나 세심하게 돌봐주지 않는 사막의 기후에서 생존하는 뽕나무가 대견하다. 마치 수많은 정주민과 유목민의 대립 속에서도 지금껏 살아남은 ‘부하라’를 보는 느낌이랄까. 공원국의 <유라시아 신화기행>의 부하라 편에도 500년된 뽕나무가 등장한다. 다만 그 때는 뽕나무에 푸른 잎사귀가 무성했던 모양이다. ‘쇠락해가는 실크로드의 파수꾼’처럼 500년 된 나이든 뽕나무의 잎은 무성했다는 구절이 있다. 그런데 그가 2012년 이 곳을 다녀간 후로 7년이 지난 지금, 500년된 뽕나무에의 잎은 다 말라 앙상해져 있었다. 주변에 다른 뽕나무와는 사뭇다르게 힘없이 쳐져있는 모습이다. 문득, 조조가 쓴 귀수수라는 시의 마지막 구절이 생각난다. “늙은 천리마는 마구간에 있어도 천리를 건너고, 선비는 늙어도 웅장한 포부는 가시지 않네” 비록 잎은 다 떨어지고 처량하나 500년을 지킨 그 뿌리의 힘으로 여전히 그는 실크로드의 파수꾼을 자청하고 있는 지도 모를 일이다. 주문한 맥주를 한잔 다 들이켜고 자리에서 일어선다.


성스러운 부하라, 이슬람의 흔적을 찾아


부하라 전체에는 이슬람 사원과 마드라사가 150개가 넘는다. ‘부하라 샤리프(성스러운 부하라’)라는 도시의 닉네임을 도시 전체에서 실감하게 된다. 현장이 실크로드를 답사한 7세기까지의 실크로드는 불교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었지만 혜초가 실크로드를 다녀간 8세기에 이 곳은 이미 이슬람의 영향권 안에 있었다. 8세기에 실크로드의 세상은 크게 변하였다. 이슬람의 정복 때문이다. 이슬람 세력의 중앙아시아 진출은 페르시아의 붕괴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슬람 팽장 시기 페르시아는 사산조 페르시아(224-651)의 통치하에 있었다. 그러나 637년 오늘 날의 이라크 영역인 카디시야에서 벌어진 전투와 642년 이란 서부 고대 도시 니하반드에서 벌어진 전투, 현 아프카니스탄의 헤라트 전투에서 아랍에게 패하면서 결국 역사속으로 사라진다. 사산조 페르시아의 마지막 황제는 비잔틴 황제와 연합해 아랍 무슬림을 상대하려 했으나 운명은 이슬람의 편이었다. 사산조 페르시아의 정규군을 격파한 아랍군은 중앙아시아 영역까지 계속해서 영역을 확장한다. 바야흐로 실크로드의 중심부에 이슬람의 물결이 가득한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중앙 아시아는 20세기 구소련의 치하에서 사회주의의 영향으로 종교적 요소가 많이 파괴되었지만 여전히 도시 곳곳에 남아있는 이슬람 문화의 뿌리는 깊다. 천년의 이슬람 영향을 러시아의 한 세기 영향력으로 덮어버리기는 역부족이었을 것이다. 구소련 시대에 이 지역 내에 있던 무슬림들은 율법으로 정한 메카로의 순례를 실천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무리였다. 그래서 그들은 메카에서 가장 가깝게 자리한 부하라를 자신들의 순례성지로 간주한 것이다. ‘성스러운 부하라’라는 닉네임은 이러한 배경에서 탄생했다. 부하라는 707년부터 아랍인들이 이슬람 포교를 목적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9-10세기에 부하라는 이슬람 세계의 한 센터의 역할을 하게 된다. 그 때의 건물이 부하라에 남아있다. 최근에 만든 것으로 보이는 놀이공원을 지나면 905년에 지어진 건물을 만난다. 천년 전의 건축물이 현대 놀이공원 안에 아무런 이질감 없이 서 있는 것이다. 


이스마엘 영묘, 부하라의 오랜 역사


707년, 아랍인들이 압바스 왕조를 건설하면서 중앙아시아 지역은 이슬람의 영향에 놓인다. 부하라는 바그다드에 기반을 둔 이슬람 압바스 왕조 칼리프의 통제를 받기를 하지만 샤마니 왕조(또는 사만왕조) 때의 왕(아미르) 이스마일이 수도를 사르칸트에서 부하라로 옮기면서(892년) 크게 번성했다. 샤마니 왕조는 829년부터 999년까지 지속되는 이 시기를 부하라 문화 예술의 전성기라고 한다. 아랍의 침공으로 사산조 페르시아 제국이 붕괴한 후 이란과 중앙아시아에 출현한 토착 페르시아 왕조인 사만조는 발흐(현 아프카니스탄) 근처 사만지방의 지주였던 사만 후다(Saman Khuda)에서 시작되는데 그의 증손자가 ‘이스마일(Abu Ibrahim ismail ibn Ahmad)’이다. 그로 인해 부하라는 10-11세기 문화 예술의 꽃을 피운다. 그는 문화 예술활동의 보호자로, 이슬람 세계에서 명 군주로 칭송받고 있다. 905년, 10세기에 건설된 그의 영묘가 부하라에 남아 있는데 이곳은 부하라 관광의 하이라이트이다. 현존 중앙아시아 최고(最古)의 이슬람 건축물이기 때문이다.

51년에 걸쳐 지어진(892-943) 이 건물은 일찍부터 그 특수한 건축기법으로 인해 고고학계와 건축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원래는 샤만 조의 건국자 이스마일 사마니가 선친을 기리기 위해 세문 묘당이나 그가 죽은 후에는 그 뿐만 아니라 그의 후손들까지도 묻혀 사실상 사마니 조의 왕족 묘당이 되었다고 한다. 이 묘당은 1925년에 한 러시아의 고고학자에 의해 발견되었다. 너비가 각각 9미터고 벽두께가 1.8미터에 달하는 이 정방형 건물은 햇볕에 말린 벽돌을 올려 반구형 돔을 얹은 형태이다. 벽돌을 다양한 모양으로 쌓아 그 자체로 아름다운 디자인을 만들고 있으며 4개의 문으로 들어오는 빛의 조화가 시간마다 다른 느낌을 준다. 벽돌을 구운 방법만도 27가지 사용된 건축의 미학이다. 샤마니 영묘 주변으로 더 많은 영묘들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 많은 유적들은 모두 칭기스칸에 파괴되었다고 한다. 샤마니 영묘가 그 엄청난 침략 속에서 살아남은 것이 오히려 신기할 지경이다. 그러나 힘겹게 살아남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스마일은 편하게 잠들고 있을 것 같지 않다. 그가 가진 ‘상징성’ 때문이다. 

샤머니 영묘 사진

타지크인, 이스마일 샤머니와 분쟁문제


부하라는 오늘날 우즈베키스탄에 속하지만 우즈베키스탄의 어느 도시보다 타지크인의 문화적 요소가 강하다. 부하라에서는 타지크인과 타지크어의 비중이 크다. 우즈베키스탄어와 타지크어는 다른데 부하라에서는 타지크어를 쓰는 사람이 훨씬 많다. 크게보면 타지크인은 페르시아 이란계에 속하고 카작이나 우즈베키스탄은 투르크계에 속한다고 보면 된다. 이스마일 샤마니는 타지크인의 민족적 상징인물이다. 그런데 그의 영묘는 현재 타지키스탄이 아니라 우즈베키스탄의 부하라에 있다. 이로 인해 아직까지도 우즈베키스탄과 타지키스탄은 불화상태이다. 부하라의 영유권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재 타지키스탄의 수도는 듀샨베인데, 듀산베의 중앙광장은 모두 이스마일 샤마니의 상징으로 채워져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샤마니 왕조의 유산은 현재 타지키스탄과 부하라에 각각 분리되어 있는 것이다. 유적은 부하라에, 전통은 타지키스탄에 나뉘어 전승되고 있는 셈인데 이는 두 나라 사이의 국경선 문제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현재 중앙 아시아 여러 나라의 국경은 구소련 지배 초기에 확정되었다. 우즈베키스탄 서북부의 국경은 1924년에 확정되었고, 1950년대에 흐루시초프가 조정을 한 것이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 국경이 다수 민족의 거주 영역과 일치하지 않는데 있다. 중앙아시아 지역은 1928년에 이르러 구소련에 의해 완전히 복속되었다. 스탈린은 이 지역에 대한 분할 지배 전략을 세우면서 민족문제에 대한 깊은 고민없이 국경선을 그어버렸다. 구소련 시절에는 소비에트 형제국 이데올로기에 묻혀 이러한 국경문제가 별로 노출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1990년대에 중앙아시의 여러나라들이 민족국가화되고 독립을 요구하면서 국경을 둘러싼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이런 이유로 부하라 영유권문제도 타지키스탄과 우즈베키스탄의 잠재적 갈등으로 남게 된 것이다. 부하라에 잠들어 있는 이스마일 샤머니가 편할 수 없는 이유다. 이스마일은 10세기, 번창한 부하라의 이슬람을 보여준 왕이지만 그의 사후 이 곳은 칭기스칸 몽골군에 의해 무참하게 파괴되었다. 현재 남아있는 이슬람 유적과 유물들은 모두 칭키스탄 정복전쟁 이후의 것들이다. 그런 칭기스칸이 파괴하지 못한 것이 또 하나 있으니 그것이 바로 칼린 첨탑이다. 



칼론 첨탑(Kalon Minaret)과 칭기스칸의 침략


부하라의 또 하나의 하이라이트는 12세기 당시 중앙아시아 최고 높이를 자랑하던 건축물, 칼린첨탑이다. 10세기 말엽 사만 조를 이은 카라한 조시대에도 부하라는 여전히 번영을 누렸다. 불운은 칭키스칸과 함께 13세기에 찾아온다. 부하라는 칭키스칸이 유일하게 직접 입성한 도시이기도 하다. 1220년 내침한 칭키스칸은 마스지드(사원)에 모인 무슬림들 앞에서 경전 <꾸란>을 발로 차면서 건물을 닥치는대로 부쉈다. 그러나 단 하나의 건물만은 손을 댈 수 없었으니 그것이 바로 예배시간을 알리고 카라반들의 등대구실을 했던 칼린 첨탑이다. 기단부 지금이 9미터, 높이가 무려 46미터인 이 첨탑은 부하라의 상징물로, 1127년 카라한 조 때 지은 것이라 한다. 그런데 칭기스칸이 부하라를 정복하면서 이 칼리안 미나렛을 파괴하지 않은 이유가 첨탑의 아름다움 때문이라는 말은 언뜻 이해가 가지 않는다. 당시 가장 높은 건축물을 본 경외심이 아름다움으로 느껴졌던 걸까. 현지인은 좀 다른 이야기를 전한다. 칭기스칸이 부하라에 입성해서 칼린 첩탑을 쳐다보는 순간 그의 모자가 바람에 날려 떨어졌다고 한다. 자기도 모르게 떨어진 모자를 주우려고 몸을 숙인순간, 칭키스칸은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이 탑은 내 허리를 숙이게 한 탑이니 예사롭지 않다. 부수지 말고 남기어 두어라.” 


칼론첨탑 


이것이 사실인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첨탑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남았다는 이야기보다는 좀더 그럴싸하게 들린다. 내 머리 속에도 이미 칭기스칸은 아름다움도 모르는 ‘약탈자’라는 인식이 이미 고정되어 있는 것일까? 문득 궁금해진다. 티무르제국의 왕, 아무르 티무르에 대해서는 거의 모든 학자들이‘잔인한 약탈자’, 무자비한 침략자’로 그를 규정한다. 그렇다면 칭키스칸은 어떠한가? 칭기스칸에 대한 평가는 엇걸린다. 칭기스칸의 군대는 무시무시한 학살로 악명이 높다. 그들은 적에게 공포를 심어주기 위해 더욱 더 잔인하게, 더욱더 많은 사람들을 죽였다고 한다. 여러나라의 왕들이 칭기스칸의 발아래 엎드렸고 사람들은 그의 이름만 들어도 겁에질려 벌벌 떨었다고 한다. 칭기스칸은 ‘저주받은자, 악마’라고도 불렸다. 칭기스칸은 정말 그렇게 잔인하기만 한 사람일까?


몽골이 지켜낸 실크로드 평화시대


몽고 사람들에게 칭기스칸은 지금까지도 최고의 영웅으로 기억된다. 그는 합리적으로 군대를 조직한 뛰어난 군인이었을 뿐 아니라 충성을 다하는 사람들에게 더없이 관대한 군주였기 때문이다.자기가 보호했던 약한 사람들을 끝까지 지켜주고 평생동안 그들을 돌보아 주었다.그는 넒은 땅을 정복하고 많은 부를 얻었지만 화려한 궁전에서 살기보다 초원을 게르에서 소박하게 사는 것은 것을 더 좋아했다.칭키스칸을 ‘좋다 나쁘다’도 간단하게 말하기는 매우 어려울 것 같다. 그가 세운 몽골제국이 가지는 의미 때문에 더욱 그렇다. 몽골제국은 많은 나라와 사람들을 파괴하고 죽여서 고통을 주었지만 한편 평화를 가져오기도 했다. 여러 나라를 하나의 제국으로 만들고 똑 같은 법으로 다스리게 되면서 오히려 이제까지 끊이지 았던 전쟁이 줄어들었다. 그리고 실크로드를 안전하게 만들어서 누구든 동양과 서양을 오가며 활발하게 교약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중국과 내륙 아시아는 물론이고, 유럽과 서아시아, 인도, 동남아시아, 고려와 일본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길로 연결되었다. 칭기스칸 시대에 대해 당시 아라비아의 어떤 학자는 이런 칭찬을 남겼다. 


“ 칭기스칸의 치세 아래에 있는 모든 나라의 사람들은 어떤 위험도 없이 황금쟁반을 가지 머리에 이고 해가 뜨는 땅에서 지는 땅까지 여행할 수 있을 만큼 평화를 누렸다.“


사람들은 몽골이 제국을 만들 수 있던 이유로 가차없는 살육과 냉정함을 이야기하지만 그는 한편에서 실크로드 시대의 평화를 만든 사람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기에 칭키스칸이 세운 몽골 제국에서는 13-14세기 동안 100년 넘게 자유로운 국제 무역이 이루어졌다. 유럽상인들과 아시아 상인들이 실크로드를 통해 서로 오가며 장사했다. 실크로드는 가장 안전하고 이득이되는 길이었고 몽골은 동양과 서양간에 교류가 활발했던 로마시대보다 더 큰 번영을 누렸다.교역을 방해하는 장애물을 없애고 모두가 안전하게 오랫동안 여행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제 외국의 신기한 상품들이 실크로드를 통해 들어왔다. 베네치아의 유리제품, 아프리카의 상아조각품, 콘스탄티노플의 모자이크, 인도의 향수와 신선한 과일, 향신료 등이 실크로드를 통해 들어왔다. 칭기스칸의 잔인함이 수많은 유적들을 파괴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로 인해 몽골제국시대에 실크로드는 또 한번 크게 번영할 수 있었던 것이다. 


부하라의 시장


실크로드의 중심지인 부하라의 구도심에는 총 3개의 시장이 있다. 환전소 시장(Takki-Sarrafron Bazaar), 모자시장(Taki Telpak Furushon Bazaar), 금 시장(Taki-Zargaron Bazaar)이 바로 그것이다. 지도가 필요없는 하나로 쭉 난 거리를 걷다보면 사거리나 오거리가 교차되는 장소를 만나게 되는게 이런 곳은 어김없이 시장(Bazaar)라고 쓰여져 있다. 높은 반구형 지붕과 사람의 키를 훨씬 넘는 큰 문이 인상적이다. 뜨거운 사막기후에서 열을 막기 위해 지붕을 평면으로 짓지 않고 돔형태로 지은 것이라 한다. 사거리나 오거리의 교차점은 항상 문이 있는데 일반적인 사람의 키를 훨씬 넘는다. 낙타를 끌고 들어오는 상인들에게 맞춰진 것이라 한다. 트럭 높이에 맞춰진 터널 입구랄까. 부하라의 외환 보유고는 당시 세계최고였을지도 모르겠다. 환전소는 인도나 중국으로 또는 유럽으로 물건을 사기 위해 떠나는 상인들이 돈을 맡겨두는 곳이었다고 한다. 머나먼 길을 떠나면서 돈을 뻇길 수도 있는데 그 많은 돈을 다 들고 어찌 낙타를 타고 가겠는가. 상인들은 환전소에서 돈을 맡기고, 환전소는 상인들이 가려고 하는 지역에서 살 물품 리스트만을 써서 주었다고 한다. 그러면 그 상인 물건을 사려고하는 지역에서 환전소와 거래된 사람을 찾아 그 물품리스트만을 보여주고 물건을 찾은 것이다. 이슬람 법상 무슬림은 이자나 금전거래와 관련된 일을 할수 없었기 때문에 대부분 환전소 일은 인도사람들이 담당했다고 한다. 실크로드에서 교역된 상품은 부하라의 아르크 고성 박물관에서 만날 수 있다. 





 유럽 르네상스의 태동,  미드 아랍마드라사


칭키스칸을 이슬람을 파괴했고, 스탈린의 사회주의도 이슬람을 몰아내려 했지만 이슬람은 부하라에서 여전히 살아있다. 부하라의 구도심 안에는 150개의 마드라사(신학교)가 아직도 존재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 중에서 현재까지도 신학교로 운영되고 있는 미드아랍 마드라사는 칼린 첨탑의 왼쪽에 있다. 매년 20명의 학생들을 선발하며, 이 곳은 실제 학생들이 공부하고 있기 때문에 외부에 공개하지 않고 있었다. 


미드아랍 마드라사

미드아랍 마드라사는 이슬람 부흥을 누렸던 15세기 티무르 시대에 지어졌으며 청백색 모자이크 타일이 아름다운 당대 건축미술의 백미로 손꼽힌다. 소련체제하에서 중앙아시아에서도 유일하게 미르 아랍 마드라사(신학교)만이 공식 인가를 받아 7년 간의 신학교육과정이 지금도 운영되고 있다. 미드 아랍 마드라사는 이슬람 부하라 학맥을 이어가는 학문의 요람이자, 유럽 르네상스의 태동이 시작된 곳이다. 부하라는 8세기 이슬람화되면서 서서히 동방 이슬람 세계의 학문중심으로 부상했다. 이슬람은 사막이라는 문명의 불모지에서 출현했지만 교육과 학문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꾸란>을 보면 알라의 첫계시는 “읽어라, 창조주이신 알라의 이름으로’라는 한절이다. 무함마드는 문도들에게 읽고 쓰기를 배우며 지식인을 존경하라고 거듭 강조했다. 그는 전쟁포로 한 사람이 무슬림 어린이 10명에게 읽고 쓰기를 깨우쳐주기만 하면 곧 석방했다고 한다. 그가 얼마나 배움을 중시했는지 알 수 있는 구절이다. 중세 이슬람 문명을 르네상스의 태동으로 보는것은 유럽이 중세동안 그리스-로마의 헬레니즘에 기반한 학문을 버리고 헤브라이즘의 유일신의 기독교 신학에 몰두하는 동안 ‘헬레니즘’을 간직하고 있던 문명이 이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슬람은 지식과 학문의 탐구를 속세와 내세를 포함한 모든 곳에서 인간 생활과 활동의 필수로 의무화했다. 내세를 위한 신학만 배운 것이라 아니라 수학, 천문학, 의학 등의 학문을 고루 연구한 것이다. 10세기 이슬람 문명의 황금기는 아랍의 고유학문과 외래 학문이 이슬람 문명이라는 하나의 용광로 속에 체계를 갖춘 시기이다. 이 체계 속에서 바그다드를 중심으로 한 이슬람 세계 곳곳에서 학문의 다극화가 진행된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일찍이 헬레니즘 문화와 페르시아, 인도, 심지어 중국문화의 영향을 늘 받으며 성장한 실크로드의 중심지, 부하라는 학문의 중심지로 성장할 수 있는 조건을 이미 갖추고 있었다. 부하라에서 부하라 학맥의 삼총사로 불리는 성훈학(하디스) 학자 부하리와 의학자 이븐 시나, 수학자 알 콰리즈미가 탄생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부하라 학맥의 삼총사


성훈학의 아버지, 부하리

부하라 학맥의 삼총사로 불리는 부하리, 이븐 시나, 알 콰리즈미는 이슬람 세계를 답사하고, 자신들의 학문세계를 개척했다. 그들은 부하라에 돌아와서 여러 신학교와 사원들을 돌며 후학들에게 학문을 전수했다. 이들 삼총사의 학문적 업적은 이슬람 세계 뿐만 아니라 유럽세계에도 널리 알려져 유럽의 르네상스와 근대적 학문의 기반에 공헌했다. 이슬람 성훈학의 태두인 부하리(810-870)의 본명은 무함마드 이븐 이스마일 알 주아피다. 부하리는 부하라 출신이라는 뜻으로서, 무슬림들은 출신지를 강조하기 위해 가끔 이런식으로 출신지를 성명으로 대용한다고 한다. 성훈학이란 이슬람에서 교조 무함마드의 언행록을 말한다. 생전에 무함마드가 행한 말과 취한 행동 뿐만 아니라 남의 말이나 행동에 대한 입장(인정이나 거부, 묵과 등)까지를 포함하는 것이다. 성훈록인 <하디스>는 무함마드의 언행을 곁에서 지켜본 제자들을 구두나 기록으로 약 100년 간 전승되어 오다가 다시 또 백년의 시간이 지나 비로소 성훈 학자들에 의해 정본으로 엮어졌다. 그 대표적인 학자가 바로 부하리다. 그는 10세때부터 성훈을 공부하기 시작해, 16세 때 메카의 성지순례를 계기로 이집트와 이라크, 시리아 등지를 16년 간이나 돌아다니면서 천여명의 전승자들을 만나 약 60만 조항의 성훈을 수집했다고 한다. 


위대한 의학자, 이븐 사나 

부하라 학맥의 두번쨰 학자는 의학자, 이븐 사나이다. 유럽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학문은 단연 의학이다. 무슬림 의학자들은 페르시아나 그리스-로마의 의술을 고스란히 받아들여 임상에 도입했고, 그 과정을 빠짐없이 기록해 놓았다고 한다. 그것이 곧바로 라틴어로 번역되어 유럽에서 의학교재로 채택되고 임상치료에 도임됨으로써 유럽 현대의학의 밑거름이 되었다. 천연두와 홍역의 병원체를 발견한 라지(865-925)에 이어 이슬람 의학의 중흥기를 선도한 의학자는 사만 조 시대 부하라의 귀족가문에서 태어난 이븐 시나(980-1037)이다. 그는 10세때 벌써 경전을 몽땅 암송할 정도로 총명했었따고 한다. 평생 242권의 저서를 남겼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이 <의학법전>(총 5부, 100만자)과 <치유의서>이다. 의학에 철학이나 심리학을 접목시킨 특징을 가진다. 그가 병리현상과 심리현상을 아우른 ‘심신의학법’으그의로 한 왕자를 치료한 이야기는 유명하다. 망상증에 걸린 왕자는 자신이 소라고 믿고 소의 울음소리를 내면서 자기를 잡아 먹어달라고 애원한다. 그러자 이븐 시나는 도살꾼으로 가장하고 이왕자가 너무 여위어 앙상하니 우선 살찌워 놓아야 잡아먹을 수 있다고 한다. 이에 왕자는 마음껏 먹다보니 ‘병세’는 어느새 말끔히 가시고 건강은 회복되었다. 이른바 심신의학법의 효험이다. 그밖에 그는 알코올을 소독제로 추천한 최초의 의사이기도 하다. 그의 의학전서는 저술된지 얼마되지 않아 (12세기) 라틴어로 변역된 후 15세기 후반 밀라노에서 출간되어 16세기까지 유럽 각지의 의학학교에서 주교과서로 채택었다고 한다.


대수학의 아버지, 알 콰리즈미 

부하라 학맥의 세번쨰 학자는 수학자, 알 콰리즈미이다. 중세 무슬림들은 수학에도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 수학 발전에서 그들은 0의 도입과 대수학의 정립이라는 두가지 특출한 기여를 했는데 그 진두에는 대수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알 콰리즈미(780-850)가 있다. 그는 페르시아와 인도로부터 의학이나 천문학의 기초학문인 수학은 전수받아 일대 혁명을 일으켰다. 그는 부하라 서북쪽에 있는 히바에서 태어났다는 설이 있으나 주로 부하라에서 학문활동을 했기 때문에 부하라 학맥의 삼총사중 한 사람으로 간주한다. 그는 인도의 숫자 서법을 아랍어 서법에 맞게 변형시켰을 뿐만 아니라 인도에서 받아들인 영이라는 전혀 새로운 숫자 개념을 도입해 수학에서 일대 변혁을 가져왔다. 그가 쓴 <집합과 분할의 서>라는 논문이 12세기 <인도 숫자에 대한 콰리즈미의 서>라는 제하에 라틴어로 번역됨으로써 유럽인들은 처음으로 영을 포함한 숫자를 알게 되었다. 

미드 아랍 마드라사에서 만난 부하라학맥의 삼총사는 서구중심적 관점으로 바라본 ‘유럽의 르네상스’를 다시 생각해보게 한다. 나는 지금껏 학교 교육을 통해 ‘유럽은 르네상스를 통해 근대의 기반을 만들었다’라고 배워왔다. 서양의 압도적인 승리로 정리된 오늘 날, 발전된 모든 것은 우수한 서양의 자체적인 개혁과 고민 안에서 이루어졌다는 믿음은 의심할 틈을 주지 못했다. 그리하여 내가 배운 전제에 나는 한번도 의문을 제기할 생각을 못했을지 모른다. 그런데 우즈베키스탄 부하라의 미드아랍 마드라사는 새로운 질문을 제기한다. ‘중세에서 르네상스를 가능하게 한 물줄기는 어디에서 왔는가?’ 천년의 시간을 기독교 중심의 ‘신학’안에 머물러 있으면서 어느 날 ‘갑자기’ 인간 중심의 사고로, 과학, 천문학, 의학과 종교의 개혁필요성이 생겨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동과 서는 끊임없이 교류하며 서로에게 영향을 주었고, 그 연결의 중심지에는 부하라가 있었다. 부하라의 학맥에서 서양 르네상스의 태동을 보았다면 그것은 지나친 과장일까. 아직도 이 도시에는 150여개의 마드라사(신학교)가 있다. 이제는 많은 사원과 신학교가 원래의 기능을 하지 못하고 관광객을 위한 물건을 팔고 있지만 쿠칼도쉬 메드라사 (kukaldosh Medrassa)는 300년 전 이슬람 기숙사의 모습을 잘 재현해두고 있어 눈길을 끈다. 이슬람 사원과 신학교를 구별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은 기숙사의 유무이다, 신학교는 강의실과 학생의 거주지가 한 건물안에 붙어있지만 사원은 예배장소의 역할이 더 크기 때문이다. 300년전 신학교의 학생들은 어떻게 생활했을까. 방문을 열면 또 다른 방이 세개가 연결되어 있다. 아래층은 욕실로 윗층은 침실로 쓰고 있는데 18세기 이 곳은 이미 완전한 배수시설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쿠칼도쉬 메드라사 (kukaldosh Medrassa)의 기숙사 내부 모습 사진


 부하라는 학문과 문화의 도시였다. 이슬람의 마드라사(신학교)에서는 이슬람 경전 뿐 아니라 다양한 학문을 공부했다. 실크로드를 따라 온 상인들과 성지순례를 위해 온 순례자들로 언제나 바자르에 북적였다. 학문은 신학교에서 시장을 따라 상인들을 통해 책으로 전해지고, 성지 순례자들은 각지에서 건너와 새로운 문물을 보았다. 부하라는 언제나 도시의 역동성이 가득찬 공간이었을 것이다. 오늘 날의 부하라도 다른 것 같지 않다. 이 오래된 도시 박물관에는 지금도 전 세계에서 온 관광객과 현지인들이 바자르를 가득채우며 분주하게 움직인다. 나도 동역 어디선가 온 방랑자처럼 보였을까. 펑퍼짐한 체격에 인심좋은 우즈베키스탄 아주머니들이 말을 건다. 하나도 알아듣지 못할 말인데 “아가씨 어디서 왔수?”라는 말인 것을 대충 ‘까레이와 자뽀네”라는 단어를 통해 유추했다. “까레이(한국인)”라고 하니 또 한참을 알아듣지 못할 말을 하신다. 서로 알아듣지 못할 말을 한참 하며 하하웃는데 한 아주머니가 사진을 한 장 찍자고 하신다. 우르르 같이 여행온 아주머니 친구들이 몰려온다. 어디 부하라 근교의 시골에서 단체 관광을 오신 아주머니 친구들인 것 같다. 언어는 통하지 않지만, 부하라에 왔다는 것만으로 이렇게 신나면 그만 되었다. 쇠락한 실크로드의 후예면 어떻고, 거대한 티무르제국의 명성이 아니면 또 어떠랴. 오늘 하루 부하라에서 얻은 이 호탕한 아주머니들의 웃음만으로 나는 모든 것을 다 얻었다. 나귀를 잡은 나스레딘의 익살스러운 웃음소리가 멀리서도 귀에 들리는 것만 같다. 유쾌한 도시, 부하라의 선물이 라비하우스를 햇살 가득 따듯하게 비추고 있었다. 


부하라로 여행온 시골 아주머니 여행단의 모습: 직접 찍어드렸는데 잘나왔다며 정말 좋아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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