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우 Jan 09. 2023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

불가능성이란 변주가 만드는 멜로디 

타슈켄트에서 사마르칸트로


여행은 재즈다. 예측 불가능성이란 변주가 만드는 멜로디다. 변박은 언제나 기습적으로 등장한다. 기습 공격은 익숙함과 단조로움에 균열을 낸다. 그 균열의 순간을 사람들은 ‘여행의 묘미’라고 부른다. 오직 ‘예측불가’라는 성질에서 오는 즉흥의 미학이다. 사마르칸트로 가는 길은 떠나는 순간부터 도착까지 예측불가의 음악을 듣는 것만 같다. 여행의 묘미를 실감하는 순간이다. 사마르칸트의 바람은 황금 빛 낭만일거라 꿈꾸며 기차에 올랐다. 황금은 언제나 욕망을 자극하는 원천이 아니던가. 마르코 폴로도, 콜롬버스도 황금의 땅을 찾아 먼 길을 떠났었다. 그 옛날 수많은 상인들이 낙타를 타고 매서운 모래바람을 뚫을 수 있었던 동력도 황금 빛 사마르칸트의 환상 때문이었다. 1913년 제임스 엘로이 플레커(James Elory Flecker)도 이 땅을 여행하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단지 장사를 위해 여행하는 것은 아니니, 뜨거운 바람이 우리의 타는 가슴을 덮치네

알아서는 안 될 것을 쫓아, 우리는 사마르칸트로 황금빛 여행을 떠나네.’


황금 빛 사마르칸트! 그 단어만으로도 풍요로운 햇살과 낭만의 이야기가 바람처럼 사람들에게 날아들었을 것이다. 매서운 모래바람을 뚫고 갈 희망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천년이 지난 지금, 타슈켄트에서 사마르칸트를 가는 길은 낭만의 바람이 멈출 틈도 없는 ‘고속도로’다. 타슈켄트에서 사마르칸트까지는 고속열차로 2시간 밖에 걸리지 않는다. 황금빛 모래바람의 낭만이 창밖에 펼쳐질 것이라는 상상은 ‘푸른 들판’의 변주에 화들짝 놀라고 만다. 


타슈켄트에서 사마르칸트로 가는 길은 ‘푸른 들판’의 변주, 낭만의 바람이 멈출 틈도 없는 고속도로다.


사막에서 낙타를 타고 먼 길을 건너온 소그드 상인의 모습을 그리고 앉았다면 사마르칸트로 가는 길은 그 상상할 시간마저 허락하지 않을 만큼의 속도감이다. ‘고속열차’라는 문명의 이기는 타슈켄트와 사마르칸트의 거리를 2시간으로 단축시켜주었다. 하지만 줄어든 시간만큼 사마르칸트의 황금 빛 바람 이야기도 자취를 감춘듯 하다. 열차 모든 칸은 빈틈도 없이 사람들이 빼곡히 앉아있다. 15분이 채 지나지 않아 카트가 돌아다니며 음료를 판다. 흙냄새, 모래바람, 내리쬐는 태양을 하나하나 몸으로 느끼며 황금 빛 사마르칸트를 상상할 시간은 2시간 안에 오지 않는다. 오래된 황금 바람 대신 들은 것은 푸른 고속도로의 변주다. 순식간에 당도한 사마르칸트에서 또 한번 두 번째 변주가 이어진다.  


친절한 우즈베키스탄 청년, 알리


타슈켄트에서 박미언니를 통해 현지인에게 추천받은 곳을 예약했다. 본인이 사마르칸트에서 지내며 괜찮았던 곳을 소개시켜준 것이다. 나는 1박에 15불을 넘지 않는 곳을 찾아달라했으니 그 선에서 선택을 했을 것이다. 현지인의 추천이기도 했지만 인터넷으로 사진을 보니 깨끗해보였다. 가격도 적당해서 큰 주저없이 그 곳을 예약하겠다고 했다. 덕분에 사마르칸트에서도 적당한 가격에 잘 지내겠다고 매우 안심하면서 기차역을 내린 것이다. 역에서 내리니 택시기사들이 달라붙는다. 주소를 보여주는데 모르는 눈치다. 한 사람이 여길 안다며 20,000숨(2.5불)을 달라고 부른다. 타슈켄트 공항에서 숙소까지 현지인들은 3불을 넘지 않는다고 했는데 기차역 시내 거리가 3불 가까이 한다는게 말이 안된다고 생각해 계속 깎았다. 5000숨을 아무리 불러도 다른 기사들한테 가보라고 오히려 배짱이다. 담합을 한건지 내미는 주소를 모른다고 한다. 흥정하면서 버리는 시간이 아까워 그 주소지를 안다는 기사에게 일단 숙소로 가자고 했다. 그러나 그렇게 찾아온 숙소는 페인트 냄새가 너무 심하고 아예 밖에 화장실이 있어 도저히 이틀을 묶을 수가 없었다. 중앙광장과의 거리도 멀었다. 더 답답한 것은 그 숙소 내에 그 누구와도 소통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서 있는 사람은 5-6명이 되건만, 그 누구도 영어를 못했다. 수도가 아닌 도시로 갈수록 영어가 더 안될 것이라고 들었는데 수도 타슈켄트를 떠난 순간 맞닥드린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러시아어의 필요성을 절감하는 순간, ‘안녕하세요’와 ‘고맙습니다’를 제외한 그 어떤 영어도 통하지 않는 이 답답함으로부터의 탈출은 또 한번 예상치 못한 ‘문명의 이기’로부터 왔다. 전세계 언어의 자동 번역을 위해 애쓰고 있는 이 세상 모든 과학자들은 존경받아야 한다. 얼마나 많은 이들을 ‘소통부재’란 고통의 바다로부터 건져준 것인가. 고속기차를 타고 오면서 문명의 이기가 앗아갔다며 그리워한 ‘낭만’은 1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이 놀라운 현대 과학기술 앞에 미련없이 헌납해버렸다. 나는 일단 그 자리에서 즉시 론리플래닛에서 추천하는 게스트하우스를 찾아 6인실 도미토리를 예약했다. 그리고 구글 번역기를 이용해 예약한 지금 숙소를 취소하고 이 쪽으로 옮기겠다고 말했다. 다행이 친절한 직원들은 전혀 문제가 없다고 했다. 문제는 예약한 다음 숙소로 가기 위해 택시기사와 흥정하는 일이었다. 여행지에서 가장 피곤한 일 중 하나가 교통비 흥정이 아닐까 싶다. 택시기사에게 이야기를 해서 금액을 확정할 수 있겠냐고 물으니 직원이 직접 자기차로 데려다주겠다고 한다. 고맙기도해라. 멀지 않은 거리였지만 핸드폰에 있는 번역앱을 통해 감사인사를 전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사마르칸트 시내 모든 지역에서 택시는 5000숨(0.5불)을 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외국인에게는 4배 이상을 부르고 있었다. 아마도 이 숙소에 머물렀던 현지 우즈베키스탄 사람은 택시비가 워낙 싸기 때문에 크게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매번 흥정을 해도 2-3배를 더 내야하는 외국인 입장에서는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다. 이후로 나는 사마르칸트에서 숙소까지 5000숨에 가자고 수 없이 불렀으나 다섯 번이나 택시가 가지 않고 딴 기사를 알아보라며 떠나버렸다. 많지 않은 돈이니 우즈베키스탄 국가경제에 기여한다고 생각하고 그냥 내도되련만 어쩐지 ‘외국인’에게 바가지 씌우는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다. 어딜 여행하든 이렇게 모든 가격을 흥정하는 곳에서는 쉽게 피로해진다. 중앙아시아 사람들은 흥정마저도 즐기며 긴 시간을 아낌없이 쓴다는데 나에겐 그저 피로감일 뿐이다. 가격 흥정을 편하게 받아들이기엔 내 마음의 여유가 없는걸까. 다행이 친절한 ‘알리’에게 도움을 받아 그의 차를 얻어타고 무사히 새로운 숙소에 도착했다. 도착하자 마자 부하라로 향하는 기차표를 사러 나갔다. 주인이 알려준 곳을 지도에 표시갔는데 1시간을 헤메고 그 티켓파는 곳에서는 항공권만 취급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기차역에 가서 사야한다는 것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기차역에서 표를 아예 사서 왔어야하는 건데. 한참을 기차표 파는 곳을 찾아 돌아다니다보니 배가 고파진다. 기차를 못타면 버스를 타자는 마음으로 허기부터 해결하기로 한다. 우즈베키스탄을 대표하는 음식은 둥그렇게 생긴 ‘논’이라 불리는 빵이다. 특히, 사마르칸트의 빵이 유명하다는 말을 들었기에 거리를 돌아다녔다. 아주머니들이 많이 사는 곳으로 다가가서 5000숨을 주고 빵 하나와 거스름돈을 달라하니 빵 하나가 5000숨이라고 한다. 아니, 방금 한 아주머니가 5000숨을 내자 거스름돈을 주었는데 5000숨이라고?! 너무 어이가 없어 말도 까먹고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자 우즈베키스탄 아주머니 두명이 빵 파는 아저씨에게 한참을 뭐라고 한다. 그러다가 손에 들고 있는 돈을 ‘뺏어서’ 3000숨을 나에게 다시 돌려준다. 어느 나라나 아주머니들은 불의를 참지 못하는 위대함이 있다. 아주머니들 덕분에 3000숨을 무시히 돌려받고 빵 하나를 입에 물었다. 오, 그런데 정말 그 맛이 예술이다. 바게트와 도넛을 교묘하게 섞은 맛이다. 그런데 그 크기는 한국에서 파는 일반 도넛을 10개정도 합친 양이다. 양이 적은 사람은 ‘과장을 좀 붙여서’ 일주일 정도는 먹을 수 있을 것 같다. 큰 빵을 손에 움켜쥐고 하염없이 사마르칸트의 중앙광장을 향해 걷는다. 


사마르칸트에서 다시 만난 우즈베키스탄의 광개토대왕티무르


사마르칸트의 상징, 레기스탄을 향해 걸으니 ‘티무르’ 동상이 보인다. 사마르칸트를 티무르 제국의 수도로 만든 장본인이자, 우즈베키스탄의 자랑이다. 타슈켄트에서 본 티무르를 말위에 올라선 역동적 모습인데 사마르칸트의 티무르는 더 거대한 크기의 좌상이다. 근엄하게 앉아 제국을 내려다 보고 있는 티무르에게는 꽃 바구니가 헌화되어 있다. 

티무르 동상의 뒤로는 넓은 공원이 펼쳐져 있어 시민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다. 티무르가 태어난 곳은 사마르칸트에서 가까운 ‘사흐리삽스’라는 지역이다. 사마르칸트는 티무르 제국의 수도였다. 티무르는 몽골제국을 이어가고자 했다. 1336년 사마르칸트 부근의 케쉬에서 출생한 그는 부족 내부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1369년 여러 유목집단들을 통합하는데 성공한다. 당시는 몽골제국의 전통이 강하게 남아있었기 때문에 칭기스칸의 후예가 아니었던 티무르는 ‘칸’을 칭하지 못하고 부마의 지위에 만족해야했다. 그의 정복활동은 1370년과 1405년까지 계속되는데 정복한 지역의 이동경로가 나의 중앙 유라시아 여행 루트와 상당부분 겹친다. 1370년부터 초기 10년간 그는 가장 가까운 적대세력 모굴칸국(현 카자흐스탄 Balkhash호수 부근), 서부의 호레즘(우즈베키스탄 우르겐치) 북부의 주치 울루스(현 카자흐스탄 서쪽 우랄강 부근)를 원정한다. 1380년 이후 티무르의 관심은 다시 남쪽으로 향하여 아들 미란샤를 후라산 (현 이란 사브제바르)총독으로 임명하고 1381년에는 아프간 지방의 헤라트를, 1383-84년에는 칸다하르(현 아프카니스탄)를 점령했다. 이어 서부 이란으로 진출하였다가 1386년 귀환한다. 1395년에는 이란 원정을 계속 단행하여 타브리즈(현 이란)를 파괴하고 인도로 관심을 돌린 티무르는 1398년 델리를 약탈한 뒤 돌아온다. 1399년부터는 서아시아를 목표로 7년원정을 단행하는데 이때, 아나톨리아(현 터키) 동부에 근거지를 둔 흑양부 세력을 격파한뒤, 시리아 지방을 차지하고 있던 맘루크를 몰아내고 알레포와 다마스코스(현 시리아)를 점령했다. 1402년에는 오스만 제국과 전쟁을 벌여 앙카라 전투에서 술탄 바야지드를 생포했고 1404년 사마르칸드로 귀환했다. 
    

사마르칸트 구르 아미르에 있는 티무르 정복 지도


1404년 중국원정을 단행하기 전 그는 스페인 국왕의 사신, 루이 곤살레스 데 클라비호(González de Clavijo)를 만난 것 같다. 클라비호는 15세기 초 에스파냐의 외교관 ·여행가이다. 에스파냐, 엔리케 3세의 왕명에 따라 사마르칸트의 티무르 궁정에 사절로 간 그는 《타메를란 대제사》란 여행기를 남긴다. 클라비호의 책 《타메를란 대제사(大帝史) Historia del gran Tamerláne》에는 이 때 회견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고 한다. 1404년 사마르칸트에 방문한 클라비호의 기록에 따르면, 티무르의 수도에는 15만명이 살았다고 한다. 투르크인, 아랍인, 무어인, 그리스인, 아르메니아인을 비롯하여 세계 각지에서 온 여러 종교를 믿는 사람들로 북적였으며 러시아와 타타르 지방에서는 가죽과 린넨, 북중국지방에서는 비단과 사향, 인도에서는 육두구 정향, 시나몬 등의 향로가 들어왔다고 한다. 티무르는 중국에서 온 사신들을 자기 보다 낮은 자리에 앉혔다고 한다. 


티무르는 1404년 가을 중국원정을 시작했지만 그 다음 해 사망하면서 중국원정을 마무리한다. 티무르가 죽고 난 이후 1405년부터 1526년까지 티무르와 명의 사신 왕래가 계속된다. 이 경로는 지금의 아프카니스탄 헤라트에서 시작해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 타쉬켄트, 탈라스를 거쳐 중국의 투르판에서 돈황, 숙주, 감주, 난주, 회맹을 거쳐 북경까지 이르는 길이다. 


티무르의 죽음 이후 실질적 통치자가 된 티무르 아들 샤루흐(당시 수도는 현 아프카니스탄 헤라트)는 아버지와 달리 중국에 대해서는 아버지와 달리 평화적인 외교관계를 모색한다. 1413년 북경을 방문한 샤 루흐의 사신이 귀환할때, 영락제는 진성과 이달을 헤라트로 파견했고 이들은 1415년 귀환하여 <서역행정기>와 <서역번국지>라는 글을 남겼다. 티무르는 중앙아시아에서 서아시아에 이르는 광대한 영역을 정복하고 대제국을 건설했다. 당시는 몽골제국과 칭기스 일족의 정치력과 영향력이 비교적 확고하게 자리잡은 시대였다. 그의 끊임없는 원정도 권력의 합법성이 취약한 그가 부족민들의 내부적 불만과 반발을 밖으로 돌리려 한 측면도 있을 것이다. 그는 이슬람의 수호자로 수행하는 ‘성전’, 그리고 대 몽골 울루스의 재건이라는 명분과 목표를 내세워 통합을 이루려고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티무르의 죽음과 함께 시작된 계승분쟁으로 그가 생전에 만든 제국은 빠른 속도로 분열되었다.


사마르칸트가 내려다보는 중심지에 앉아있는 티무르는 근엄하고 웅장한 모습이다. 어느 나라나 영광의 역사는 도심의 중앙을 차지 한다. 그리고 그 영광은 대부분 ‘최대 영토를 차지한 왕’에게서 찾기 마련이다. 문제는 ‘최대 영토’가 곧 ‘국가 번영’이다라는 전제가 수 많은 사람들의 희생과 잔인한 전쟁을 종종 망각하게 한다는 것이다. 우즈베키스탄 사람들은 티무르 동상의 전면에서 사진을 찍는다. 그의 정면은 승리요, 영광이요, 번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의 뒷 모습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아무르 티무르의 정면과 뒷 모습 사진


아무르 티무르의 고향, 사흐리삽스에 있는 동상



70세까지 산 그의 인생은 전쟁이었다. 한 지역을 정복하고 나면 쉬지 않고 또 다른 지역을 침략했다. 정복은 그의 죽음으로 끝났다. 아무도 찍지 않는 티무르의 뒷 모습을 나는 애처롭게 바라본다. 영광과 번영으로 기록된 역사 속에서 ‘전쟁’을 생각한다. 수천만의 피와 희생, 수 천 방울의 눈물과 고통이 그의 뒷 모습에 있다. 그는 죽음으로 비로소 자유로워진 게 아닐까. 동상 저 편에 그가 잠들어 있는 무덤, ‘구르 아미르’가 보인다. 구르 아미르는 위대한 왕을 참배하러 온 수많은 내국인과 외국인들으로 발 디딜 틈이 없다. 그들은 어떤 마음으로 티무르를 만나는 걸까. 


왕의 무덤구르 아미르


거대한 푸른 돔이 먼발치에서도 선명하다. ‘구르 아미르’, ‘왕의 무덤’이란 뜻을 가진 이 곳은 아미르 티무르, 2명의 아들, 2명 손자, 그리고 티무르의 스승이 묻혀있는 무덤이다. 가장 아름다운 돔이라고 불리는 왕의 무덤에는 63개의 홈이 있다. 63개의 홈은 마호메드 예언자가 죽은 나이가 63세인 것에서 연유한다고 본다. 아무르 티무르가 무함마드가 죽은 나이, 63세를 존경해서 그 숫자만큼의 홈을 돔에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 돔을 사이에 두고 양 옆으로는 두 개의 미나렛(탑)이 있다. 원래 미나렛은 불을 올려두는 조로아스터교에서 왔다. 이슬람교 생긴 이후, 이 탑이 기도시간을 알리는 미나렛으로 바꾸었다. 사원에는 코란 경전이 씌여져 있다. 예전에는 ‘눈이 먼 남자’만이 미나렛 위에 올라가 ‘기도 시간’을 알릴 수 있었다고 한다. 남성이 여성을 보는 것을 불경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구르 아미르 사진

티무르는 사마르칸트에 12개의 궁전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애석하게도 하나도 남은 것이 없다. 칭기스탄의 후손이 아무르 티무르를 싫어하여 이 지역을 침략하면서 모든 궁전을 파괴시켰다고 한다. 구르 아미르가 묻혀 있는 무덤은 지하에 있는데 입실이 가능한 곳은 무덤의 비석이 있다. 수많은 우즈베키스탄 청소년과 청년들이 보인다. 자랑스러운 선조를 보며 어떤 생각을 하는 걸까. 다시 한번 제국의 수도를 만들 날을 기다리고 있을까. 세계 최대의 흑옥으로 만든 그의 비석은 언제나 이렇게 전 세계에서 온 수많은 사람들을 마주하며 있다. 사람들은 말한다. 티무르는 전쟁의 신이 수호했기에 이토록 거대한 영토를 얻을 수 있었다고. 나는 묻는다. 전쟁의 신으로 인해 그는 단 한순간도 편안한 적이 없었던 게 아닐까하고.   



티무르는 희대의 정복자였다. 그가 수행한 수많은 전쟁으로 파괴와 살육이 자행되었다. 그러나 그는 정복지로부터 각종 장인들을 이주시켜 제국의 수도 사마르칸트를 위대한 건축의 도시로 만들었다. 오늘날에도 위용을 뽐내고 있는 그의 무덤을 비롯해, 비비하늠 모스크, 샤히 진다 등은 그시대의 영광을 보여주는 좋은 예다. 사마르칸트에 몰려드는 수 많은 사람들은 이 도시가 가진 역사성에 주목한다. 고대로부터 티무르 제국시대에 이르기까지 천년이 넘는 시간 사마르칸트는 실크로드의 중심, 정중앙이었기 떄문이다. 그리고 그 실크로드의 심장이 바로 사마르칸트의 레기스탄이다. 


실크로드의 중심이 사마르칸트임을 보여주는 지도


실크로드의 심장레기스탄 광장

실크로드의 심장, 레기스탄

 

사마르칸트의 레기스탄은 실크로드의 찬란한 황금 빛 심장이다. 번영의 욕망은 황금빛 모래바람으로 이 땅을 가득 채웠다. 실크로드의 심장을 통해 전 세계에 사람, 사상, 물건이 모세혈관처럼 퍼져나갔다. 동과 서는 하나로 연결되었다. 이 ‘모래의 땅(레기스탄)’에는 기원 전부터 수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1300년 전 중국의 현장이 이곳을 다녀갔고 그로부터 약 100년 후 신라의 혜초도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곳에 발을 딛었다. 물론 현장과 혜초의 이전에도, 이후에도 수많은 상인, 선교사, 군인이 이 실크로드의 중심을 지나갔을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그들을 기억하는 것이 그들이 남긴 ‘기록’에 있다. 실크로드의 이야기가 담긴 고전 여행기로는 『대당서역기』, 『왕오천축국전』, 『불국기』, 『대당서역구법고승전』, 『송운행기』 등 이 있다. 실크로드를 기록한 여행기 중에 가장 오래된 것은 4세기에 쓰여진 『불국기』이다. 동진(東晉)의 법현은 동아시아권 최초로 399년 도반 10여명과 함께 장안을 출발하여 중앙아시아를 경유, 인도로 들어가 약 8년동안 불적을 순례하고 산스크리트어를 배웠다. 율전을 구하여 스리랑카로 건너가 약 2년동안 체류하고 412년 수마트라에서 해로로 중국 산동반도로 돌아왔다. 그 동안에 지나온 30여 개국에 대한 최초의 인도 구법여행기록이 바로 『불국기』인 것이다. 그 다음으로 유명한 실크로드가 담긴 여행기는 7세기 삼장법사 현장의 『대당서역기』이다. 중국 당나라 고승 현장(玄裝, 602-664)법사가 17년동안의 인도 여행중의 견문을 이야기한 것으로 제자 변기(弁機)가 646년 당 태종의 칙령으로 편찬했다. 총 12권으로 이루어진 <대당서역기>는 여행기 중의 백미로 인류 최고의 여행기로 꼽히고 있다. 인도와 중앙아시아의 138개국의 역사, 지리, 산천, 성읍, 교통, 풍습, 산물, 정치, 문화, 생활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현장이 본 사마르칸트


현장이 『대당서역기』에서 묘사한 사마르칸트는 강력한 군사력과 비옥한 땅의 경제력을 갖춘 국가였던 듯하다. 요즘 언어로 풀어쓰면 ‘종합국력을 갖춘 영향력 있는 중견국’ 정도가 아닐까. 그가 『대당서역기』에서 묘사한 모습을 보자. 


사마르칸트(Samarqand/삽말건국/颯秣建國) 

사마르칸트국은 주위가 1,600-1700리이고 동서로 길고 남북으로 좁고 큰 도성의 둘레는 20여 리에 달하는데 매우 험하고 견고하며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다. 여러 나라에서 나는 보배와 화폐들이 이 나라에 많이 모인다. 토지는 비옥하고 농사짓기에 적합하다. 숲은 울창하고 꽃과 열매가 무성하며 뛰어난 명마를 많이 배출하고 있다. 그리고 옷감 짜는 기술이 다른 나라들보다 특히 뛰어나다. 기후는 화창하며 풍속은 사납다. 

여러 호국(胡國)들은 이 나라를 중심으로 원근의 이웃나라들이 모두 이 나라의 의례 등을 본보기로 삼는다. 왕은 호기롭고 용감하여 인근의 국가들은 그의 명령을 따른다. 병사와 말이 강성하다. 용감한 자갈이란 전사는 성품이 용맹하여 죽음을 마치 귀향하는 것과 같이 생각하므로 싸움에 임해서는 그들을 당해낼 자가 없을 정도이다. 이곳으로터 동남쪽으로 가면 미말하국에 도착한다. 

-현장 <대당서역기> 안에서 묘사된 사마르칸트 P.69 


7세기 현장에 이어 8세기에는 신라의 승려 혜초(慧草, 704-787)가 사마르칸트를 방문한다. 혜초의 여행기는 『왕오천축국전』이란 이름으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 신라 고승 혜초는 불법을 구하러 중국(당나라)에 갔다가 723년 광저우에서 배를 타고 천축(인도)로 향한다. 해로를 먼저 이용한 것이다. 인도양을 건너 동천축(동인도)에 상륙해 볼교성지들을 두루 돌아본 후에는 남천축과 서천축을 거쳐 북천축에 이른다. 정수일에 따르면, 혜초는 당시 서역의 요충지인 토화라(오늘의 아프카니스탄)에 얼마간 머물다가 발길을 서쪽으로 돌려 파사(페르시아, 지금의 이란)와 대식(아랍)까지를 방문했다고 한다. 그리고는 귀로에 올라 천신만고 끝에 파미르 고원을 넘고 드디어 727년 구자(쿠처)에 이른다. 장장 4년동안의 ‘서역기행’이다. 그 여정을 기록으로 남긴 것이 바로 유명한 <왕오천축국전>이다.

신라의 승려 혜초가 고대 인도의 5천축국을 답사한 뒤 쓴 이 여행기는 1908년 프랑스의 동양학자 P.펠리오에 의해 둔황 천불동에서 발굴되었다. 『왕오천축국전』 은 ‘육로와 해로를 모두 언급한 인도 여행’ 기록이다. 또한 8세기 인도와 중앙아시아에 관한 세계 유일무이한 ‘기록’이기도 한다. 일반적인 정치정세 이외에 사회 상황에 대한 묘사도 상세해서 높은 사료적 가치를 가진다.  


혜초가 본 사마르칸트


그렇다면 혜초가 본 사마르칸트는 어떠했을까? 현장이 이 곳을 다녀간 후 한 세기가 지나서 본 사마르칸트는 이미 이슬람의 세력이 영향을 미치고 있을 때이다. 그러기에 그는 이 지역이 ‘불법을 알지 못함’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혜초는 『왕오천축국전』에서 사마르칸트를 어떻게 묘사했을까? 그가 묘사한 사마르칸트를 보자. 



호국

대식국(우마이아조 제 5대 칼리파 압둘 말리크 Abdu’l Malik, 685-705재위, 아랍제국 전성기)의 동쪽에는 여러 호국이 있으니, 바로 안국(安國, 부하라 Buhara), 조국(曹國, 카부단 Kabudhan), 사국(史國, 킷쉬 Kishsh), 석라국(石騾國, 타슈켄트), 미국(米國, 펜지켄트Penjikent), 강국(康國, 사마르칸트 Samrkand)등이다. 비록 나라마다 왕이 있기는 하나 모두 대식의 관할하에 있다. 나라가 협소하고 군사도 많지 않아 자위(自衛)란 불가능하다.


이 땅에서는 낙타, 노새, 양, 말, 모직물 같은 것이 나며, 의상은 모직 상의와 바지 따위 그리고 가죽외투가 있다. 언어는 다른 여러 나라들과 다르다. 또한 이 여섯 나라는 천교(祆敎, 배화교, 조로아스터교)를 섬기며 불법은 알지 못한다. 유독 강국에만 절이 하나 있고 승려가 한명 있기는 하나, 그 또한 (불법을) 해들하여 경신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들 호국에서는 모두 수염과 머리를 깍고 흰 펠트 모자를 즐겨쓴다. 


풍속이 지극히 고양해서 혼인을 막 뒤섞어서 하는바, 어머니나 자매를 아내로 삼기까지 한다. 파사국에서도 어머니를 아내로 삼는다. 그리고 토화라국(현 아프카니스탄 발흐/박트리아)을 비롯해 계빈국(현 아프카니스탄 카불)이나 법인국, 사율국 등에서는 형제가 열명이건, 다섯 명이건, 세 명이건 두 명이건 간에 공동으로 한 명의 아내를 취하며, 각자가 부인을 얻는 것은 허용하지 않는다. 그것은 집안 살림이 파탄되는 것을 두려워해서이다. 


                                                                                         -혜초 <왕오천축국전>에 묘사된 사마르칸트 P.373


정수일은 여섯개 호국들이 ‘조로아스터교만 믿고 불교는 알지 못한다’라는 뜻은 대체로 역사적 사실과 부합되기는 하나 더 구체적인 연구가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소그디아나 일원에 불교가 있었던 흔적을 몇 가지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이 그 이유이다. 정수일은 1) 초기의 중국에서 활약한 역경승 가운데 강맹상, 강승개, 강승희 등 강국에서 온 승려들이 있었고 2)투르판이나 돈황에서 소그드어로 된 불전이 발견되었으며, 3)마니교 경전에 일부 인도에서 기원한 불교용어(예컨데 smyr, 산스크리트로 sumera)가 있고 4) 8세기 소그디아나 벽화에도 인도 불교적 요소가 반영되어 있다고 한다. 이러한 이유로 혜초가 여행한 8세기 이 지역이 ‘불교를 알지 못한다’라고 말한 구절은 고증이 좀 더 필요하다는 것이다. 


현장과 혜초 사이에는 시간의 차이가 있지만 사마르칸트가 이들 모두에게 ‘번영’의 상징이자, 문화 교류의 중심지였던 것만은 분명해보인다. 그들에게 사마르칸트는 ‘번영의 현재’ 였을 것이다. 그들이 지금 내가 보고 있는 레지스탄을 봤을 때 이 곳은 거대한 ‘바자르(시장)’이었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거대한 건축물은 없었지만 사람과 사상, 물건이 살아 움직이는 ‘역동의 현재’를 경험하지 않았을까.     


현재의 레기스탄


레기스탄에는 정면으로 3개의 거대한 건물이 있다. 모두 15세기부터 17세기에 지어진 것이다.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근사한 볼거리’라는 설명이 어느 가이드북이나 블로그에 덧붙여 있다. 이 3개의 웅장한 건물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마드라사들인데 더 오래된 것들은 칭기즈칸이 모두 파괴해버렸다고 한다. 잦은 지진과 튼튼하지 않은 모래 지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웅장한 모습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가장 오래된 건물은 정면에서 왼쪽에 보이는 울룩 벡 마드라사(Ulugbek Medressa)이다. 마드라사를 보통 ‘신학교’라고 번역하는데 울룩 벡마르라사는 ‘종합대학’이라 불러야할 것이다. 이 곳에서는 이슬람 신학 뿐 아니라 천문학, 철학, 수학 등의 다양한 학문을 가르쳤기 때문이다. 138권의 책을 외워야할 정도로 공부양이 많았다고 한다. 대부분의 마드라사가 2층구조로 1층은 강의실, 2층은 스상과 학생 2명이 생활하는 기숙사로 되어있다. 이 건물은 1420년 울륵 벡 울륵백이 지은 ‘종합대학’이며, 천문학자인 울룩 벡은 이 곳에서 수학을 직접 가르쳤다고 한다. 울륵 벡은 티무르 제국의 세종으로 불리는 왕이다. 울룩 벡은 사마르칸트를 분봉받아 40년동안 이 곳을 다스렸다. 호학의 군주였던 그는 사마르칸트, 부하라, 기즈다반 세 도시에 고등교육기관인 ‘마드라사’를 건립했는데 특히 1417년에 세워져 지금까지 남아있는 부하라의 마드라사는 중앙아시아 건축물들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 꼽힌다. 또한 직경이 40미터에 이르는 원통형 천문대를 건설했으며, 천문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1437년 천문표를 만들고 이를 계속 수정하여 자신이 살해되던 해인 1449년에 최종 완성했다고 한다. 이 표는 당시 이슬람권은 물론 그 후 오랫동안 유럽도 능가하지 못할 저도로 정확한 관측 결과를 담고 있다. 그는 도서관을 세워 각 분야의 서적 1만 5000권을 수집했으며 자신이 직접 <네 울루스 역사>라는 책을 쓰기도 했다. 사마르칸트에는 울륵 벡의 ‘천문대’가 있는데 그 정교함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울륵 벡의 동상 및 초상화


울륵 벡 마드라사의 맞은편에는 쉐르도르 마드라사(Sher Dor Medressa)가 있다. 1636년에 완공된 것으로 쉐르 도르 마드라사의 특징은 이슬람 건축물에서 볼 수 없는 사람의 얼굴과 동물인 사자와 사슴이 건물 정면에 있다는 것이다. 쉐르도르라는 뜻이 사자라고 하는데 사람의 얼굴은 이 건축물을 지으라고 지시한 17세기 사마르칸트 샤이반 왕조의 에미르 얄랑 투시의 얼굴이며, 사자는 ‘사람’을, 사슴은 ‘학문’을 상징한다고 한다. 그림을 자세히 보면 사자가 사슴을 쫒아가는 그림인데, 사람은 열심히 학문을 따라가야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쉐르도르 마드라사는 이슬람 신학만을 가르쳤다고 한다. 레기스탄 정면에 있는 것은 ‘금요일의 사원’ 또는 ‘틸라카리 황금 마드라사(Tilla-Kari Gold-Coverved Medressa)’라 불린다. 1660년에 완공된 이 건물은 3개 중에 가장 나중에 만들어진 것이다. 여기서는 금요일마다 예배가 이루어져있는데 내부에 있는 화려한 황금 장식에 눈을 떼기 어렵다. 천장 위는 분명 평면인데 눈을 들어 보면 반구형처럼 보인다. 3D를 보는 듯한 착시효과를 이미 1660년에 완성한 것이다. ‘황금빛 레기스탄’이란 표현은 아마도 이 마드라사에서 나온 것이리라. 


그러나 관광객만이 가득한 이 사원에서 나는 살아있는 실크로드를 느낄 수가 없다. 사원을 나와 시압 바자르를 향해 걷는다. 현재를 사는 수많은 사람들이 물건을 사고 팔며 오늘을 산다. 


시압 바자르


대형마트가 익숙한 우리에게 ‘시장’은 이제 신기한 구경거리다. 우즈베키스탄에서도 점차 대형슈퍼마켓이 늘어나는 추세라 한다. 사마르칸트의 시압바자르는 대형마트의 건립을 반대한 시민들로부터 살아남은 시장이다. 관광업이 주업인 이 지역 사람들에게 ‘바자르’는 단순한 먹거리의 매매처만은 아닐 것이다. 시장은 그들의 정체성이자 문화, 역사이다. 사마르칸트의 ‘현재’를 시장 속에서 걸으며 만난다. 우즈베키스탄의 특산물인 말린 과일과 향신료, 실크로 만든 옷과 스카프, 모자 구경은 덤이다. 과거 사마르칸트의 시장 모습을 잘 담은 그림이 있다. 작자 미상이란 이 그림을 울륵벡 박물관에서 보았다. 자세히 보면 갓을 쓴 한국인이 보인다. 당시 사마르칸트로 왔던 수 많은 사람들을 잘 묘사하고 있는 그림이다. 여전히 사마르칸트의 시장엔 수많은 외국인과 현재의 삶이 공존한다. 우즈베키스탄의 명물, 기름밥이란 불리는 ‘푸롬’을 한 그릇 먹고 레기스탄 근처를 걸었다. 우리나라의 볶음밥 같은 밥인데 고소한 맛이 일품이다. 값도 2불정도 밖에 하지 않는다.    


우즈베키스탄 기름밥, Plov
바자르 전경


바자르의 풍경을 보며, 우즈베키스탄의 미래를 생각해 본다. 그들이 가야할 방향은 티무르가 아니라 울륵벡의 나라가 아닐까. 


우즈베키스탄의 미래람지딘(Ramziddin)과 샴시딘(Shamsiddin)


황금 돔을 나와 레기스탄을 지나 걷는다. 레기스탄 뒤쪽에는 우즈베키스탄의 전 대통령 카리모프의 동상이 있다. 가까이 다가가려 하니 고등학생처럼 보이는 두명의 남학생이 말을 걸어온다. 영어를 연습하고 싶어하는 눈치다. 반짝이는 눈망울에서 우즈베키스탄의 미래를 본다. 두 학생 모두 꿈이 있다. 구체적인 꿈이 있고, 꿈꿀 수 있는 변화된 환경이 주어진 현실에 만족하는 듯 했다. 모두 카리모프 이후 신 정부 들어와서의 변화인 것 같았다. 그들은 현 우즈베키스탄의 교육제도가 상당히 낙후되어 있음을 탄식했다. 대학진학하기는 어렵지만 무조건 졸업하는 시스템이라 가서 공부하는 이가 없고, 대학 진학을 위한 시험 공부가 실 생활에 유리되어 있다는 것이다. 언어의 경우 스피킹없이 문법시험만 보고 있는 것에 대해서도 한탄했다. 우리 나라의 과거를 보는 것 같았다. 람지딘이란 학생은 이미 미국의 대학에서 장학금을 받은 상태로, 2순위로 한국에서 대학을 다니고 싶다고 했다. 샴시딘은 타슈켄트에 있는 인하대에서 IT를 전공하고 한국 인하대에서 석사를 하고 싶다고 했다. 두 학생 모두 현재 우즈베키스탄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과학 기술, 그중에서 공학이라고 생각하는 듯 했다. 타슈켄트 코이카에서 진행하는 교육 분야의 직업훈련원과 한국대학의 진출에 대해서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그리고 영어공부를 하는 학생들이 늘어나서 갇혀있는 세상을 벗어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런 학생들이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 공부하고 돌아오는 것, 이것이 우즈베키스탄의 미래이자 희망일 것이다. 다른 점수는 다 높은데 영어 스피킹 점수만 낮다며 수줍어 하는 샴사딘은 고등학교 수학 1등이란다. 가난한 집안 환경에 전액 미국 대학 진학의 어드미션을 받은 람지딘은 마이클 잭슨 춤을 똑같이 출 정도의 실력과 언변을 갖추었다. 티무르 제국의 후예들은 이제 다시 도약할 준비를 하고 있다. 남의 영토를 점령하고자 하는 욕망은 빼앗기는 이들과의 갈등과 분쟁의 씨앗이 된다. 그러나 지적 영토를 넓히려는 욕망은 빼앗음이 없기에 갈등이 없으며, 이해를 통해 오히려 갈등과 분쟁을 사라지게 만든다. 더 넓은 세계를 알고자 하는 람지딘과 샴사딘, 이 두 티무르 제국의 후예들에게서 700년 전 보다 더 위대한 우즈베키스탄의 미래를 본다. 티무르의 제국의 영광은 사마르칸트의 중앙광장에 화석처럼 박제되어 있지만, 티무르제국의 희망은 우즈베키스탄의 청년들에게 눈망울 속에 살아있지 않은가. 그들이 만들어갈 30년 후의 우즈베키스탄을 기대해본다. 

한국을 좋아하고 오고 싶어하는 현재 우즈베키스탄 청년들, 그러나 7세기에는 반대로 우리의 고구려 사신이 왕을 알현하기 위해 온 곳이 바로 이 곳, 사마르칸트이다. 아프롭시아스 궁전의 ‘고구려 사신 벽화’는 한국과 우즈베키스탄의 관계를 언급할 때 반드시 등장하는 사진이다. 1400년 전 이 곳을 들렸던 고구려 사신을 찾아 이제 아프롭시아스 유적지로 떠난다.   


람지딘과 샴샤딘과 함께


아프로프시아스(Afrasiab) 궁전의 벽화고구려 사신


레기스탄 광장 아래에서 택시를 타고 15분쯤 달리니 나즈막한 아프라시압 언덕이 나타난다. 지금의 사마르칸트 시 중심에서 동북방향으로 10킬로미터 떨어진 이 언덕은 기원전 6세기부터 13세기 전반 몽골군이 공략할때까지 사마르칸트의 중심부였다. 1880년대 러시아 고고학자들에 의해 여기에 높은 성벽으로 에워싸인 궁전과 지하수로망을 갖춘 주택들이 있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이 고대 도시 유적에서 발굴된 유물들은 이 언덕 입구에 있는 아프라시압 역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유물 중에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단연 궁전 벽화에 그려진 고구려 사절도다. 


고구려 사신이 그려져 있는 벽화

                   

입구로 들어가니, 이틀 뒤 우즈베키스탄을 방문하는 한국 대통령 맞이에 분주하다. 한-우즈벡 양국 교류의 상징이 되는 이 지역은 방문의 1순위일 것이다. 몇 년전 한국의 동북아재단에서 이 사신도를 복원했음을 물론, 약 9분짜리 다국어로 번역되는 아프롭시아스 벽화 동영상이 박물관에서 상영되고 있었다. 

1965년 아프라시압 도성의 내성 유적 제23호 발굴지점 1호실 서벽에서 7세기 후반 사마르칸트 왕 와르후만(Varxuman)을 진현하는 12명의 외국 사절단 행렬이 그려진 채색 벽화가 발견되었으며, 이듬해에 그것을 공개해 학계의 큰 주목을 끌었다. 벽화는 이 박물관 전지실에 옮겨져 전시되고 있다. 100여평이 되는 전시리에는 높이 2미터가 넘는 벽화가 좌,중,우 3면에 걸려 있다. 40년이라는 세월 속에 벽화는 많이 퇴색되어 어떤 것은 거의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 왼쪽 벽면에는 우즈베키스탄남부에서 시집오는 결혼행렬이 그려져 있는데 신부는 하얀 코끼리 등 위에 올라타고 말을 탄 시녀들이 주위를 에워싸고 있으며, 그 뒤를 낙타와 말을 탄 행렬이 따르고 있다. 


전시길 가운데 벽면에는 바로 그 외국 사절단 행렬도가 있다. 이 행렬의 마지막에 서 있는 두 사람이 외형과 복식, 패용물 등으로 미루어 한국의 사절이며, 이 사절도가 당시 한국과 서역간에 존재한 공식 관계를 시사해준다는데 대해서는 국내외 학계가 견해를 같이하고 있다.


지금은 분간하기 어려우나 발굴당시에는 이들이 인종적으로 검은 머리칼에 밝은 갈색 얼굴을 하고 있던 점으로 보아 몽골인종임에 틀림이 없다고 한다. 복식을 살펴보면 상투머리에 모자를 쓰고 새의 깃을 꽂은 이른바 조우관을 쓰고 있으며, 무릎을 가릴 정도의 긴 황색상의에 허리에는 검은색 띠를 두르고 헐렁한 바지에 끝이 뾰족한 신발을 신고 양손은 팔짱을 끼고 있는데 이런 복식은 당시의 국내외 고분벽화에서 나타나는 한국인의 복식과 일치한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차고있는 큰 검은 당시 한국, 특히 고구려인들이 패용하던 환두대도와 형태가 같다. 그 특징은 머리가 둥그스름하고 칼 콧등이 크며 칼집에 M자형 장식이 있는 것이다.


비록 세월이 흘러 색은 바래가지만, 아프라시압 궁전 벽화 사절도는 1,300여년 전에 첫 한국(고구려) 사절이 중앙 아시아에 갔음을 오롯하게 말해주고 있다. 학자들은 역사에서 벽화가 갖는 의미는 각별하다고 말한다. 기록은 기록자에 의해 실상이 가감될수 있지만, 벽화 만은 그대로의 현실을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고구려 사신 벽화는 시간을 넘어 1300년 전의 우즈베키스탄과 지금을 연결시킨다. 이 땅과 내가 태어난 땅은 이렇게 오랜 전 교류하며 알아왔던 것이다. 떠난 자만이 연결의 역사를 볼 것이며, 그 길 위에 서게 되리라. ‘단절된’ 점이 아닌 ‘연결된’ 선 위에 선 순간, 낯선 땅 우즈베키스탄이 어제보다 가까워져 있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우즈베키스탄 페르가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