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는 포장지 없는 선물이다. 높은 건물과 공장지대, 화려한 네온사인은 근대 도시 발전의 척도였다. 근대는 ‘발전’이라는 포장지를 더욱 거대하게 부풀려 씌웠다. 그렇게 포장지가 거대하게 부풀려지는 동안 정작 우리 삶의 진짜 선물인 자연은 초라해져갔다. 타슈켄트의 공항에서 가장 먼저 나에게 인사한 것은 선명한 파란 하늘이다. ‘미세먼지 알람국’에서 온 나에게만 유독 ‘유난한’ 하늘일까. 타슈켄트의 청정한 공기와 내리쬐는 봄 햇살은 포장지 없는 선물로 이방인을 맞이하고 있다. 타국 땅을 실감하는 순간이다. 1200년 전, 이 땅을 처음 밟았던 한국 최초의 세계인, 혜초 스님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석국, 타슈켄트의 첫 소감이리라.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는 포장지 없는 선물이다. 높은 건물과 공장지대, 화려한 네온사인은 근대 도시 발전의 척도였다. 근대는 ‘발전’이라는 포장지를 더욱 거대하게 부풀려 씌웠다. 그렇게 포장지가 거대하게 부풀려지는 동안 정작 우리 삶의 진짜 선물인 자연은 초라해져갔다. 타슈켄트의 공항에서 가장 먼저 나에게 인사한 것은 선명한 파란 하늘이다. ‘미세먼지 알람국’에서 온 나에게만 유독 ‘유난한’ 하늘일까. 타슈켄트의 청정한 공기와 내리쬐는 봄 햇살은 포장지 없는 선물로 이방인을 맞이하고 있다. 타국 땅을 실감하는 순간이다. 1200년 전, 이 땅을 처음 밟았던 한국 최초의 세계인, 혜초 스님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석국, 타슈켄트의 첫 소감이리라.
타슈켄트 도심의 녹지
청정 자연을 만끽하며 공항에서 도심으로 나오니 또 다른 타슈켄트가 나를 맞이한다. 곳곳이 건설현장이다. 고층 건물이 많이 보인다. 잘 정돈된 도로를 보니 도시가 잘 계획되어 있는 느낌이다. 잘 정돈된 도로와 인도만 있다면 황량하다는 느낌도 있을 법한데 생각보다 많은 녹지가 있어 눈이 싱그럽다. 햇살이 얼마나 쨍한 지 푸르른 녹음이 마치 영상을 보는 듯 시야를 밝힌다. 넓은 6차선 도로를 달리는 대부분의 승용차는 한국차다. 우즈베키스탄 거리 어디서든 대우차가 많이 보인다. 1990년대 후반기에 우즈베키스탄에서 돌아다니는 자동차의 대부분은 구소련 시절에 만든 승용차 라다였는데 그후에 대우가 들어오면서 대우의 넥시아와 라세티가 거리를 메웠다고 한다. 구소련 해체 후 대우는 우즈베키스탄 경제 부흥의 상징적 존재였다. 대우는 우즈베키스탄의 한 지방 전체 주민들에게 대우 텔레비전을 무료로 기증하기도 했고, 우즈베키스탄과 합작으로 안디잔에 자동차공장을 세웠다. 그런 공로로 대우그룹 회장은 국빈대접을 받아 우즈베키스탄 국립박물관에 사진이 걸리기도 했다. 아무도 관심 같지 않았던 불모지 같던 땅을 알아봐준 대우의 노력 때문일까. 탸슈켄트의 대통령 거리에 있는 두개의 유일한 대사관은 한국 대사관과 투르크메니스탄 대사관이다. 대통령 거리에 다른 공관 건물의 건축이 제한되는 상황에서 특별 대우를 받은 것이나 다름없다. 러시아, 중국, 미국, 일본 등 한국보다 더 뛰어난 경제력으로 우즈베키스탄인들에게 손을 내밀고 있는 강대국들이 있지만 우즈베키스탄인들이 한국을 더 친근하게 느끼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그 이유를 ‘제국적 야망 없는’ 매력국가에서 찾는다. 우즈베키스탄은 한국과 마찬가지로 주변 강국의 위협과 침략 속에 고난을 겪을 나라다. 19세기 후반 이후에는 러시아의 치하에 들어갔으며, 이후 구소련의 치하에서 국가 발전에 많은 제한을 받으면서 성장하였다. 냉전이 종식된 이후에도 중앙아시아를 둘러싼 미국, 러시아, 중국, 이란 등의 각축은 계속되고 있다. 지리적 차원에서 전략적 중요성이 높기 때문이다. 9.11 테러 이후에는 미국에게 매우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카스피해 유전에 가까이 위치하고 있어 지경학적으로도 강대국의 각축장이 될 여지가 있다. 이렇게 강대국은 이 지역에 대한 전략적 이해 관계를 가진다. 그렇데 이러한 이해관계는 자국민들에게 ‘제국적 야망’ 또는 ‘패권 점유’의 목적으로 비추어 진다. 강대국은 ‘선의의 도움’이라고 말하지만 실제 주민들은 ‘선의’를 내세운 ‘침범’이라 느끼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은 제국이 아니면서 현재까지 발전상 그 자체로 귀감이 될 수 있는 국가이다. 대우의 진출은 우즈베키스탄인들에게 경제부흥의 상징으로 보였다. 한국의 드라마는 우즈베키스탄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한국은 앞서가는 중진국으로 중저소득국 국가에게 매력적으로 다가갈 역량이 충분한 것이다. 이제, 거리 곳곳을 메우는 대우차와 삼성과 LG간판이 즐비한 잘 뚫려진 길을 따라 우즈베키스탄의 수도, 타슈켄트의 중심 독립광장으로 향한다.
타슈켄트 독립광장
독립광장 앞에서 본 우즈베키스탄의 오늘
우즈베키스탄의 정치적 상징은 독립광장이다. 타쉬켄트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독립광장은 과거에 레닌광장이었다. 모든 중요한 정치집회와 혁명기념일, 당 창건기념일 등의 행사가 이곳에서 열렸다. 1991년 우즈베키스탄 독립이후 이곳은 독립광장이 되었고 레닌동상은 독립기념탑이 되었다. 이제 레닌동상은 사라졌고 그 대신에 지구의를 본 뜬 독립기념탑이 섰지만 기단부는 그대로 남아있다. 러시아라는 그림자에서 벗어나 도약할 준비를 마친 우즈베키스탄을 상징하는 것만 같다.
1991년 독립 이래 우즈베키스탄은 강력한 대통령 중심제를 유지했다. 대통령은 국가 원수인 동시에 행정부 수반이다. 카리모프 초대 대통령은 1991년 소련으로부터의 독립과 함께 임기를 시작하여 2016년 9월 서거할 때까지 25년 간 국정 전반에 걸쳐 절대적인 영향력을 유지했다. 우즈베키스탄은 카리모프 정권 하에서 매년 평균 8%의 경제성장을 유지했다. 카리모프 대통령은 사마르칸트 출신으로서 권력기관 내에 타슈켄트와 사마르탄트 출신 양대 세력을 균형있게 등용하고 정치적 안정을 유지하면서 세게적인 불황 속에서 경제성장을 지속하여 정권의 안정을 유지했다. 카리모프 대통령 서거 후 2016년 취임한 미르지요예프 대통령은 현재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서 광범위한 개혁을 추진하고 있다. 미르지요예프 대통령은 2003년 이래 카리모프 대통령 하의 총리로 재직하였다. 그는 카리모프 대통령 서거 후 상하원 결의를 통해 대통령 권한 대행으로 지명되었다가 2016년 12월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88.61%라는 압도적인 지지로 당선되었다고 한다. 미르지요예프 대통령 당선 이후 우즈베키스탄의 변화는 더욱 크게 감지되고 있다. 사실 카리모프 대통령 때까지만 해도 우즈베키스탄은 무비자 국가가 아니었다. 한국인에게 무비자를 허용한 것은 미르지요예프 대통령 이후의 일이다. 외국인에게 무비자를 확대하여 관광수익을 창출하려는 시도는 경제개발을 위한 개혁개방정책의 일환이다. 우즈베키스탄의 현재는 분명 무비자 이전 시대와는 또 다른 활기가 가득한 것이다.
사실 중앙아시아 국가들은 과거 구소련에 의존적인 경제구조로 인해 독립 후 경제 재건을 위한 돌파구를 찾아야했다. 구소련으로부터 독립한 후 급진적인 사유화를 추진했던 러시아나 카자흐스탄 등의 국가와는 달리 우즈베키스탄은 점진적인 개혁전략을 실시했다. 이러한 개혁전략은 독립에 따른 초기 충격을 회피하고 단기적인 경제성장의 효과를 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수입대체 산업화로 대변되는 폐쇄된 경제구조와 비효율적인 국가통제는 지속 가능한 경제성장에 한계를 보일 수 밖게 없다. 장기적으로 대외지향적이고 민간중심의 경제구조를 확립하기 위해서는 정부 통제를 완화하여 시장질서를 확립해야하는 것이다. 경제성장을 위한 구조적 개혁은 현 대통령과 집권정당의 우선 과제일 것이다. 이런 와중에 우즈베키스탄은 미국, 러시아, 중국 등 강대국들의 자국 자원 안보룰 위한 에너지 경쟁의 각축장이다. 또한 과거 구소련을 위한 면화 생산과 농산물 공급기지의 역할을 하는 과정에서 아랄해의 고갈로 인한 여러가지 환경문제를 경험하고 있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어려움 속에서 현재의 우즈베키스탄은 어떤 국가 전략과 방향을 가지고 있는가? 그들이 그리는 미래는 어떤 모습인가? 한국은 우즈베키스탄의 국가 전략 안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나는 경희대학교 평화복지대학원 시절 함께 공부했던 현 코이카 우즈베키스탄 사무소의 박미 부소장을 찾아가기로 했다. 현지에서 3년 간의 경험을 가진 박미 부소장이말로 이 도시의 변화와 우즈베키스탄의 국가전략, 한국과의 협력관계를 가장 포괄적으로 이해하는 사람 중의 한명이기 때문이다. 그녀와의 대화를 통해 현지 우즈베키스탄의 상황과 변화를 이해할 수 있었다.
타슈켄트에서 만난 한국인: 코이카 우즈베키스탄 사무소 박미 부소장
한국 코이카 사무소는 타슈켄트의 중심지에 위치한다. 작은 사무실에서 한국인 11명과 현지인 10명이 함께 일하고 있다. 평일 오후에 사무실로 방문한 나를 언니는 너무도 반갑게 맞아주었다. 나는 코이카 회의실에서 부소장님으로부터 코이카의 현지 활동과 우즈베키스탄의 개황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우즈베키스탄 코이카 박미 부소장과의 인터뷰]
우즈베키스탄의 국가전략
나: 타슈켄트의 청정한 공기에 감탄하며 시내로 들어오니 곳곳에 건설현장이 많이 보이네요. 우리나라가 막 경제개발 5개년 계획하에 도로와 건물들이 들어서는 느낌이랄까? 뭔가 역동적인 경제발전이 이루어지는 것 같은데 맞나요?
부소장: 응 맞아, 카리모프 초대 대통령 서거후, 현 정권 와서 물가상승률도 가파르지만 눈으로 보이는 변화도 엄청난 것 같아. 자고나면 건물 하나가 올라가는 느낌이랄까? 오면서 모든 관공기관, 학교, 병원, 거리 벽이나 포스터, 간판에 붙어있는 다섯개의 천으로 만든 천막 그림 봤니? 우리나라 박정희 시대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처럼, 신정부 들어와서 우즈베키스탄에도 국가발전 행동전략 5대과제를 채택했어. 그 그림은 국가계획을 홍보하고 알리는 그림이야. 정치, 사회, 법, 모든 내용을 포함해서 5개 과제인데 외부 도움없이 자체적으로 만든거야. 실질적으로 국가 발전 계획을 만들 역량 있다는 거지. 우즈베키스탄 어느 곳에서든 저 문양을 볼 수있어. 정부가 발전 계획에 대해 국민들에게 홍보하는 거야. 다섯개의 띠는 각각 행동전략인 1)국가, 사회건설 완성, 2)법치주의 확립 및 사법제도 개편, 3)경제자유화, 4)사회부분 발전, 5)안보강화 이 다섯가지를 나타내고 있어.
나: 카리모프 정권 때는 주변국과의 영토분쟁도 많고 러시아와도 거리를 두기 위해 유라시아 경제연합에도 가입하지 않았다고 들었는데 변화가 있나요?
부소장: 응. 확실히 현정부는 주변국과의 관계개선을 위해 노력하고 있어. 우즈베키스탄을 중앙아시아의 허브국가로 만들겠다는 의지, 그리고 예전의 소련시대의 이 나라의 입지 회복의지가 강해. 이 지역은 실크로드 중심지로 아시아 유럽을 잇는 전략적 요충지로 판단하고 있어. 우즈베키스탄은 성장 잠재력이 매우 높아. 특히 젊은 인구가 많거든. 그래서 앞으로 신흥 시장으로의 발전 가능성이 굉장히 높다고 판단하고 있어. 평균연령이 26세고 현재 아이 출산율이 2-3명으로 다른 국가에 비해 출산율이 높아. 전형적인 피라미드형 인구구조로 노동력이 많은 구조이지. 노동인구가 풍부하기 떄문에 발전 가능성도 그만큼 높거든. 2018년에 맥킨지 글로벌 연구소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빠른 경제성장을 보이는 11개의 국가에 우즈베키스탄을 선정했어. 또 우즈베키스탄에는 아직 개발되지 않은 자원이 매우 많다고 해. 원소주기율표에 있는 에너지 자원이 다 있다는 말도 있어.
나: 그 정도의 성장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면 다른 나라에서도 협력을 위해 공을 많이 들이겠는데요?
부소장: 우즈베키스탄은 에너지 개발을 위해 다른 국가와 적극적으로 공동작업을 하고 있어. 한국과의 관계는 1992년 수교이래 지속적으로 교류하고 있고. 고려인 동포가 우즈베키스탄 전체에 18만명 있어. 한국교민은 2500명, 타슈켄트에만 600명 정도 있지. 한국과 우즈베키스탄의 교역량은 약12억불인데 한국은 우즈벡의 5위 교역국가야. 1위 중국, 2위는 러시아, 3위는 카자흐스탄이야. 우즈베키스탄의 한국기업은 약 500개인데 규제도 많고, 투자환경이 좋지 않아서 큰 기업은 많이 들어와있지 않은데 천연자원 개발 이후에 롯데캐미칼, 현대중공업이 들어와 있어. 앞으로는 규제가 더 완화되어 더 들어올 가능성이 많다고 보여져. 한국어 교육 수강생은 2만명이고, 한국내 우즈베키스탄 유학생은 7천명이 있어. 한국 내에 있는 유학생중에서는 4,5위 정도라고 하더라고. 현재 연간 3천명 정도의 우즈베키스탄 사람들이 산업인력공단의 합법적인 노동자로 한국에 가고 있어. 한국대한 관심이 매우 높은 편이야. 택시기사 등 한국어를 할 수 있는 우즈베키스탄인은 정말 많고, 대학에도 정규, 비정규 과정으로 한국어 강좌가 많아. 물론 중국어 강좌도 많고 대학에 공자학원이 모두 있지만 우즈베키스탄 내에서 가장 인기있는 언어는 한국어라고 해.
우즈베키스탄과 한국의 협력
나: 그렇다면 한국과 우즈베키스탄의 협력은 매우 활발하겠네요. 진행하는 프로젝트가 있나요?
부소장: 한국와 우즈베키스탄은 1992년 외교관계를 수립한 이래, 1995년 코이카 우즈베키스탄 사무소가 건립되었고, 2015년 한국-우즈벡 무상원조 기본 협정이 체결되어 이를 기반으로 지속적인 협력을 하고 있어. 우리 나라 정부에서 ODA관련 중점 협력국을 선정을 했는데 그중의 하나가 우즈베키스탄이야. 중앙아시아에는 두개 국가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우즈베키스탄이고 또 하나가 아제르바이잔이야. 이렇게 가장 큰 국가로 선정되어있고, 우즈베키스탄에는 투자위원회가 원조총괄기관으로 되어있는데 몇 주 전에 이 이름이 ‘투자대외무역부’로 바뀌었어. 처음에 대외경제무역부였어. 그러다가 신정부 들어서서 투자위원회로 바뀌었고 지금은 투자대외무역부로 이전 부처와 현 부처가 결합한거지. 이름을 보면 알겠지만, 우즈베키스탄은 원조를 개발협력의 재원확보로 보이는게 아니고 다른 나라가 우즈베키스탄에 투자하는 것이라고 이해하는 듯해. 그래서 매우 적극적으로 유치하려고 하고 매년 원조에 대한 금액도 늘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 한국의 개발원조는 국제사회와 함께 가고 있어. 2015년 세계 발전 패러다임에 거대한 변화가 있던 이래로 세계은행과 UNDP는 개발도상국에게도 ‘지속가능한 개발’ 패러다임을 강조하고 있어. 그런데 세계은행과 UNDP가 지원을 하는 ‘지속가능한 개발(SDGs:Sustainable Development Growths)을 개발도상국은 잘 이해를 못해. 그래서 세계은행이 주도가 되어서 필요로 하는 국가에 National SDG를 만들어주는 작업을 했었어. 이 나라에서 가장 필요한 것, 이 나라에서 할 수 있는 것, 어떻게 해야하는 가를 정리해서 만든거지. 이 것이 2018년 10월에 우즈베키스탄 내각력으로 채택이 되어서 범국가적으로 취해야하는 전략으로 수렴이 된거지. National SDG는 우즈벡에서 총 16개 목표로 구성되어 사업 실행, 모니터링, 관리체계를 갖추고 있는데 강조하는 것중에 하나는 투명한 통계 데이터야. 정확한 통계, 수치화, DB화가 기반되어야 진단이 가능하고 예측을 하겠지. 그런데 아직까지 우즈베키스탄은 데이터도 불명확하고 외부에 공개할 수 있는 긍정적 수치만 강조하는 편이야. 우리나라 지원전략을 보면, 우리나라에서 중점지원국으로 선정한 국가가 우즈베키스탄이다라고 나와있지? 이걸 CPS라고 하는데 Country Partnership Strategy 야. 우리나라 총리실 아래 국가개발협력위원회에서 유상원조는 기재부와 수출입은행에서, 무상원조는 외교부와 코이카가 주축이 되서 지원전략을 만들었어. 우즈베키스탄의 중점분야는 3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교육, 하나는 보건, 물 위생, 세번쨰가 공공행정이야. 우리나라의 대외개발 원조에서 가장 많은 범위는 국가별 소득수준 기준으로 최빈국, 하위, 중위, 중상, 상 등으로 나눠지는데 그중에서도 중저소득국(UMIC)에 집중되어있어. 최빈국이나 하위국은 우리 기업이 와서 어떤 사업을 진행하기 위한 기본 인프라가 너무 없거든. 근데 중저소득국은 어느정도 인프라도 되어있고 자본력도 있고, 외부투자환경도 갖추고 있어서 예산을 많이 집행하는거야. 중앙아시아에서 한국 중점 협력국은 우즈베키스탄과 아제르바이잔 두 국가가 전부야. 그중에서 투자환경이 좋고, ODA지원시 가장 많은 성과가 나는 국가를 보통 ‘중저소득국’이라하는데 중저 소득국으로 분류되는 국가는 우즈베키스탄, 키르키스스탄, 타지크메니스탄, 투르크메니스이야. 카자흐스탄은 소득수준이 이미 넘어서 한국 지원국대상이 아니고. 아제르바이잔은 지원대상국이지만 중고소득국으로 분류되고, 중동을 기준으로 한국 중점지원대상국으로 분류되는 국가는 모로코, 요르단, 팔레스타인인데 모두 저소득국으로 분류되기 때문에 한국 중점 지원대상국이면서 중저소득국으로 지정된 국가는 ‘우즈베키스탄’ 하나인거지. 그런 면에서 우즈베키스탄과 한국에게도 매우 중요한 협력대상이라고 볼 수 있어. 엄밀하게 말하면, 아제르바이잔은 이미 소득수준이 만불이 넘었기 때문에 우리가 지원할 대상은 아니지만 카스피해 유전문제로 인해서 과거에 관여한 바가 있어 중점 협력국에서 제외되지 않고있는거라고 보면 돼. 카자흐스탄은 대외원조는 2011년 2월에 빠져나왔어. 한국은 OECD 소득기준으로 일정수준을 넘으면 더 이상 지원하지 않거든. 우즈베키스탄은 중국에선 연간 1억불정도 지원하고 있다고 하고, 일본은 무상원조는 점점 줄여가고 있는 실정이야.
우즈베키스탄 무상원조 추진 방향과 전략
나: 한국에서 우즈베키스탄에 지원하는 구체적인 사업은 어떤 건가요?
부소장: 한국 중점현력전략은 교육, 보건 및 물보건, 공공행정으로 나누어져. 이번 정부령으로 비영리단체에 대한 강화와 지원이 발표된것도 사실 놀라운거거든. 앞으로 우즈베키스탄은 사회 변화가 많아질거야. 현재 코이카 진행하는 프로젝트는 교육분야에서 직업교육훈련과 교육정보화 지원을 하고 있어. 사흐리사브즈의 직업훈련원에 연간 850만불, 페르가나 직업훈력원에 연간 890만원을 지원하고 있지. 타슈켄트, 사마르칸트, 사흐리사브즈 직업훈련원까지 우즈베키스탄에는 총 3개의 직업훈련원을 운영하는데 한국 대학과 연계하거나 현대 엔지니어링 지술 자문등과 연계해서 계속해서 확대할 계획이야. 앞으로는 2020년부터 2024년까지 우르겐치 지역에 또 하나의 직업 훈련원을 설립할 예정이고, 타슈켄트 시에는 비즈니스 인큐베이팅 센터를 구축해서 스타트업 역량강화와 성과확산 프로그램을 실행할 예정이야. 그 외에도 수자원 관리 역량강화, 영유아에 대한 보건지원 확대, 전염병 진단 및 치료시스템 구축, 전자정부구축과, 공공부분 역량 강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어.
한국과 이렇게 활발한 협력과 가까운 관계를 가지고 있는 우즈베키스탄이지만 정작 국내에서 우즈베키스탄에 대한 이해는 매우 협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지에서 3년간 일하고 있는 코이카 박미 부소장 역시, 한국인의 우즈베키스탄 이해는 매우 피상적이며 편견이 많다고 했다. 우리의 머리 속에 ‘-스탄’이 붙은 국가들은 모두 낙후된 이미지로 존재한다. 이 지역에 대한 서적을 찾기도 어려울 뿐 아니라, 찾아 여행가려는 사람도 없다. 코이카 사무실을 나와 또 다시 길을 걷는다. 한참을 걸으니 타슈켄트의 도심 거리에서 미국 팝이 들린다. 문을 열고 들어가보았다.
우즈베키스탄의 청담동, social coffee에서
마치 한국의 청담동 어느 까페에 온 것 같다. 세련된 원목 탁자에 푸른 나무가 적절하게 데코된 까페에서 흐르는 미국 가수의 팝이라니! 이곳이 우즈베키스탄, 과거 구 소련의 영토였던 곳이 맞는걸까. 아이스 커피가 있는 것도 신기한데 아이스 아메리카를 시키니 종이 빨대가 나온다. 한국은 아직 빨대 사용이 금지되지도 않았으며, 일회용 컵 사용도 비일비재한데 우즈베키스탄에서 만난 예상치 못한 진보의 환경정책이 아닐 수 없다.
타슈켄트의 Social Cofee 까페 정경, 종이빨대를 사용하는 까페매장
한참을 앉아있으니 이 곳이 정녕 무슬림 80%의 국가가 맞는지 의심스럽다. 한 떄 이슬람 제국 을 이룬 티무르의 후손이 맞는걸까. 아무리 구소련시대 종교가 없어졌다고 해도 여전히 우즈베키스탄에는 많은 이슬람사원이 있다. 또한 국민의 80%는 스스로를 무슬림이라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타슈켄트 거리에서는 무슬림이란 ‘단일한’ 공통성보다 수많은 인종의 ‘다양성’이 먼저 다가온다.
다양한 문화 전시장, 우즈베키스탄
다민족 국가, 우즈베키스탄! 이 나라는 카자흐스탄, 키르지스스탄, 우즈베키스탄 등 중앙아시아 3국 중 가장 많은 인구를 보유하고 있다. 3천 250만명 정도의 인구에 우즈베키스탄인, 81%, 러시아인 5.4%, 타지크족 4%, 카자흐인 3% 등을 차지한다. 거주하는 모든 인종들을 다합치면 약 140여여 개 민족이 있다고 한다. 그야말로 ‘다양성’이 일상인 다민족 국가이다. ‘다양성’을 우즈베키스탄처럼 잘 보여주는 나라가 있을까? 우즈베키스탄은 민족적 다양성 외에도 문화적 다양성의 전시장이다. 우즈베키스탄에는 유목문화, 이슬람, 사회주의라는 다양한 문화가 혼재한다. 이는 우즈베키스탄의 역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중앙아시아의 역사는 크게 이슬람 이전 즉, 유목민과 정주민의 시대, 이슬람 세력의 진출 후인 투르크-이슬람 시대, 그리고 러시아 제국의 중앙아시아 진출과 독립이후의 근현대로 구별할 수 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혜초가 이 지역을 여행했던 시기는 8세기이다. 기원후 2세기에서 8세기까지 중국에서 이 지역은 ‘서역’으로 불렸다. 이 당시, 중앙아시아 북부에는 유목민인 흉노족(BC 3-AD2), 유연(400-500), 돌궐(545-745)가 있었으며, 중앙아시아 남부에는 오아시스 정주민인 페르시아계 소그드족이 있었다. 이렇게 유목민과 정주민이 있던 이 시기를 ‘유목민과 정주민의 시대’ 또는 ‘아리아인의 시대’라고도 부른다.
기원후 9세기부터 12세기까지는 ‘이슬람 세력의 진출 시기’다. 아리아 민족의 중앙 오아시스 지대에 북방 초원지대로부터 위구르 등 투르크계 유목민이 진출하면서 정착민이었던 아리아계 사람들을 투르크 언어 사용자로 만들고 ‘투르크 민족의 땅’으로 변모시킨 시대이다. 학자들은 이 시기를 9세기 이전의 ‘아리아 시대, 또는 유목민과 정주민의 시기’와 구별하여 투르크-이슬람 시대라고 한다. 이 시대는 아리아인이 투르크화되고, 아리아 시대의 조로아스터교에서 이슬람으로 지배종교가 변동하면서 탄생했다. 그후, 13세기부터 15세기는 몽골제국과 티무르 제국 시기로 계속해서 이슬람 문화가 융성한 꽃을 피우게 된다. 실크로드의 교역의 중심이자 동서양의 문물교류의 중심축이었언 이 지역의 정체는 항해술의 발달과 해상무역의 번성과 함께 침체된다. 몽골 제국이 와해되면서 실크로드 무역도 동반 침체되었고 새로운 항로의 발견은 스페인과 포르투갈과 같은 국가의 번영을 가져왔다. 18,19세기 러시아와 청에 의해 정복당한 후에는 사회주의라는 이데올로기가 우즈베키스탄에 침투한다. 소비에트 체제 하에 존속하게 되는 것이다. 1937년 스탈린의 강제이주로 추방된 수많은 한인은 이때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대거 이주하게 된다. 그후, 1991년 러시아로부터 독립한 우즈베키스탄은 현재에 이르고 있다. 따라서, 우즈베키스탄은 유목문화, 이슬람, 사회주의라는 다양한 문화가 혼재된 문화의 종합 전시장이 된 것이다. 게다가 이 지역내에만 140여개의 민족이 있으니 이 나라는 진정한 ‘다민족 국가’의 표본이 아닌가. 다문화국가로 변모하고 있는 대한민국에 우즈베키스탄은 좋은 사례연구가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다민족 국가의 국가적 정체성은 무엇으로 규정해야 할까?
중앙아시아 5개국은 1990년대 초 구소련에서 독립해 저마다 이슬람의 정체성을 되찾겠다고 목소리를 높였지만 국기에 이슬람의 상징인 초승달을 그려넣은 나라는 우즈베키스탄 뿐이다. 그만큼 우즈베키스탄은 이슬람이 깊이 자리잡고 있다. 물론 그 중심에는 타슈켄트가 있다. 정수일 교수에 따르면, 타슈켄트는 기원 전후부터 오아시스 도시로 자연환경이 유리한데다 교통의 요지에 자리잡고 있어 농경과 교역이 다 같이 발달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 곳에는 일찍부터 여러 종교가 들어와 공존했으며, 도시가 발달했다. 그러다 7세기 초부터 이슬람의 영향권 안에 들어가게 된다 11세기 타슈켄트는 이슬람 문화의 꽃을 피웠으나 13세기 몽골군의 침입으로 도시가 모두 파괴된다. 다행이 15세기에 티무르제국의 출현을 계기로 이슬람이 다시 ‘르네상스’를 맞으면서 타슈켄트는 중앙아시아에서 이슬람의 심장부로 부상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의 단일성으로 묶을 수 없다고 해도 우즈베키스탄은 공식적으로 국기에 이슬람 문양인 초승달을 가지며, 인구의 80%가 무슬림을 자부하는 국가임에 분명하다. 또 이들이 가장 위대한 제국으로 자부하는 ‘티무르 제국’은 이슬람을 계승한 국가였다. 그렇다면 다양한 민족과 문화라는 이 같은 정체성의 혼재 속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이슬람’은 이들에게 어떤 의미일까? 타슈켄트 어디에서 ‘이슬람’의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이제 나는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의 ‘이슬람’을 찾아 무이 무보락 마드라사로 떠난다.
무이 무보락 마드라사: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最古) 코란을 찾아
오전부터 비가 내린다. 사막에서 자주 볼 수 없는 비 내리는 오전, 아침 일찍 타슈켄트의 ‘무이 무보락 마드라사(Muyi Muborak madrasah)’를 찾았다. 이 곳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코란이 보관된 이슬람의 신학교이다. 7세기의 코란이 전시되어 있다. 강성한 티무르제국(1370-1405) 시대에 가져온 것이다. 이른 아침에도 이 곳은 세계 최고의 코란을 보고자 하는 많은 관광객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타슈켄트 무이 무보락 마드라사(Muyi Muborak madrasah)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이슬람 경전 『꾸란』 사본은 어떤 경로를 통해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일까. 정수일 교수에 따르면, 이슬람 기록문화유산에서 최고의 보물로 꼽히는 이 경전 사본은 1400여 년동안 사용되어 온 이슬람교 경전의 유일한 정본이라 한다. 일명 오스만 본(이맘 본)이라 불린다. 원래 『꾸란』 은 교조 무함마드에게 내린 토막 계시의 모음책이다. 그의 사후 1대 칼리프인 아부 바르크 시대에 처음으로 그 계시들을 한데 묶었다. 그리고 그것을 2대 칼리파인 오마르가 보관하고 있다가 3대인 오스만 시대(644-656)에 이르러 보관한 판본에 기준하여 경전의 결정판을 완성했다. 그것이 바로 지금 타슈켄트에 있는 오스만 정본이다. 오스만은 이 정본을 4부 필사해 터키의 이스탄불과 이집트의 카이로,사우디아라비아의 메디나,이라크의 바스라에 각각 보내 보관토록했다. 그후 이 보물은 권력자들의 기호나 정략적 수요에 따라 이리저리 떠돌아다니게 된다. 그러다 14세기 후반 중앙아시아의 패자, 티무르가 이라크를 정복하면서 이라크 바스라에서 이 정본을 전리품으로 가져다가 애첩을 위해 세운 사마르칸트의 비비하눔 사원에 보관했다. 오스만 본이 전시된 사원안으로 들어가니 사진 찍기를 불허한다. 내부에는 각 국에서 번역된 『꾸란』 이 모두 전시되어 있었다. 한국어로 번역된 『꾸란』 이 보인다. 인류의 소중한 지혜는 이렇게 세월이 지나도, 국가와 언어를 넘어 전세계에 전해지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책을 『경전』이라 부른다.
다국적 언어로 번역된 『꾸란』
이슬람 기록문화 유산 중 최고로 꼽히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꾸란>사본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정수일교수 책에서 발췌]
인류 지혜의 보고, 그 불변의 기록들
인류 지혜의 보고인 『경전』을 보존해야겠다는 생각은 어느 나라나 다르지 않은 듯하다. 중국 북경의 국자감과 서안의 비림에는 유교의 경전 『13경』을 돌에 새긴 거대한‘비석책의 숲’이 있다. 미얀마 만델레이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책, 흰 대리석 석판에 불경을 새긴 <산다무니 파고다>와 <꾸도더 파고다>가 있다. 아르메니아의 수도, 예레반에는 고문서관 <마테나다란>곳에는 12세기 인쇄기술의 발명 전 제작된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책이 있다.
먼저 중국을 보자. 중국은 13경으로 내려오는 유교사상과25사로 정리되는 역사서 그리고 당송시대의 한시에서부터 명청시대로 이어지는 삼국지, 수호전, 서유기, 홍루몽 등의 세계적인 문학작품을 남긴 민족이다. 중국문명은 인도문명과 달리 ‘기록’ 문화를 중시했다. 암송중심의 인도문명에서 그들의 역사를 살펴보기 위해 역으로 중국의 역사서를 참고할 상황이니 기록을 중시하는 중국인의 면면을 가히 생각해 볼 만하다. 중국은 역사기록 뿐 아니라 중국 고유의 철학사상으로서 유교경전도 13경이라하여 학문의 근본으로 삼았다. 조선시대 주희의 영향을 깊게 받은 우리는 유교경전이라 하면, <사서삼경>을 떠올린다. 사서오경(四書五經) 또는 사서삼경(四書三經)은 유교의 교육 및 교양 서적으로, 유교 교육의 가장 핵심적인 책이다. 송나라에 이르러 성리학 체계가 성립하면서 주희가 《예기》에서 일부를 〈대학〉과 〈중용〉의 두 편으로 발췌하면서, 논어·맹자와 함께 사서 체계를 확립했다. 사서는 "논어", "맹자", "대학", "중용"을 말하고, 삼경은 "시경", "서경", "역경"을 말한다. 삼경에 "춘추"와 "예기"를 합해 오경이라 부르고, 합해서 사서오경이라 부른다. 그런데 중국은 사서오경의 7권의 책 이외에 유가에서 중시하는 6권의 책을 더 추가하여 송대에 유교 철학의 핵심 경전으로 13경(十三經)을 확정했다. 13경은 유가(儒家)에서 중시하는 13종의 경서(經書)를 총칭하는 말이다. 이 13권 안에는 《논어》(論語),《맹자》(孟子), 《시경》(詩經), 《서경》(書經), 《역경》(易經), 《예기》(禮記)(《중용》(中庸), 《대학》(大學) 포함)외에도 《주례》(周禮), 《의례》(儀禮),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춘추곡량전》(春秋穀梁傳),《이아》(爾雅),《효경》(孝經)이 포함된다.
북경에 있는 국자감(國子監)은 중국 수(隋)대 이후의 중앙관학으로서 중국의 고대 교육 체계 최고 학부였다. 이 곳에서 공부한 인재들이 나라의 관료가 되어 중국의 역사를 만들어왔다. 그리고 13경은 중국을 이끌어나가는 인재들의 사상적 기반이 된 유가의 기본서였던 것이다. 지금의 중국을 이끌어 온 수많은 인재들은 바로 이 13경이라는 학문의 바탕위에서 정책을 결정하고 집행하며 역사를 이어왔다. 그러니까 『13경』은 중국에서 가장 중요한 ‘경전’인 것이다. 북경의 국자감에는 원래 13경을 조각한 돌 189개에 임금이 친히 만든 비석 1개까지 합쳐 총 190개의 비석이 있었다고 한다. 이를 중국에서는 ‘건륭석경’이라 부른다. 현재 중국 서안 비림에 보관된 석경은 ‘개성석경’이다. 청대의 장헝이란 사람이 장안(현 서안)을 여행하던 도중 ‘카이청스징(開成石經, 개성석경)’ 을 보고, 오탈자가 많고 석경의 내용이 문란한 것을 발견에 그 현실이 너무 안타까워 스스로 13경을 쓰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개성석경은 당나라 문종의 명으로 당현탁 등에게 경서를 베껴쓰게 하여 837년에 완성된 석각이다. 여기에는 역경, 서경, 시경, 주례, 예기, 좌전, 춘추, 논어, 이아, 효경 등 12편의 경서를 양면의 돌 114개, 각각 앞면과 뒷면의 총 228개의 면에 65만자 이상 새겨놓았다. 이후 여러곳으로 흩어진 것을 북송 때 다시 수집하여 국자감 태학에 보관하고 있었고 청대에 들어와 맹자를 새겨 모두 13경이 된 것이다. 종이가 보편화되지 않았던 시기, 중국인들은 중국 지혜의 보고를 영원히 보관하고자 아예 돌에다 글을 새긴 것이다. 과거에 응시하기 위해 경전을 필사하여 공부하던 유학생들은 이 석판을 견본삼아 자신의 실사본이 틀린 곳이 없는지 비교했다고 한다. 경서를 옮긴 이는 필사 과정에서 생길 수 있는 오탈자를 방지하기 위해 극도의 주의를 기울였다고 한다. 당시 각 글자를 어떻게 쓰고 어떤 글자를 선택할 것인가를 엄격하게 규정, 그 규칙을 기록한 비석도 따로 존재한다고 하니 중국인의 <경전>에 대한 경외심에 놀랄 뿐이다.
미얀마에도 불경을 대리석판에 기록한 파고다가 있다. 미얀마 전역의 2500명의 승려들이 6개월 동안 729개의 대리석판에 불교경전을 비문으로 새긴 것이다. 중국의 석경과 마찬가지도 인류 지혜의 보고를 영원히 담아두고 싶어한 인간 욕망이 만들어 낸 위대한 인류의 문화유산인 셈이다. 이 같은 욕망은 이미 인쇄술이 발달하기 전부터 존재했던 듯 하다. 마테나다란(아르메니아어: Մատենադարան)은 아르메니아 예레반에 있는 고문서관이다. 정식 명칭은 아르메니아 문자 설립자 메스로프 마슈토츠의 이름을 딴 메스로프 마슈토츠 고문서 협회(아랍어: Մեսրոպ Մաշտոցի անվան հին ձեռագրերի ինստիտուտ)이다. 이 곳에 가면 인류 기록문화 유산을 남긴 사람과 그가 제작한 책을 볼 수 있다.유네스코가 2012년 예레반을 ‘세계 책의 수도’로 선정한 이유를 보여주는 곳이 바로 이 고문서관이기도 하다.여기에는 아르메니아의 무슈 시민들들이 긴 역사 속에서 끝까지 지켜난 책, 바로‘무슈의 코나칸’이 있다.
12세기는 아직 인쇄기술이 발명되지 않아서 책이 지금보다도 귀중하고 특별한 존재였다. 그러한 시대에 아르메니아에서 세계 제일의 거대한 책을 제작하려고 생각한 사람이 있었다. 무슈라는 마을의 귀족 아스트와챠툴이다. 그는 수많은 집필자에게 의뢰해 세계 제일의 거대한 책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제작 기간은 1200년부터 1202년, 약 2년에 걸쳐 완성된 책은 성경의 단어, 사상가들의 이념, 아르메니아의 역사 등 폭넓은 내용을 담고 있었다. 책에는 세밀하고 아름다운 그림이 그려져 있었고 페이지는 660페이지에 달했다. 외형과 내용 모두 말 그대로 ‘거대한 책’이 완성된 것이다. 무슈의 토나칸’이라고 이름 붙여진 이 책은 일반 시민도 읽을 수 있도록 도시의 교회에 비치되었다. 무슈의 토나칸이 일반에 공개되고 약 1년후 무슈의 도시에 투르크군이 침략했고 이들에 의해 아스트와챠툴은 살해된다. 값나가는 물건은 송두리째 빼앗았던 투르크군에게 무슈의 토나칸도 물론 약탈당했다. 투르크군의 지도자는 훗날 이 책을 은 4000냥에 팔겠다고 내놨다. 당시 일반 시민들에게는 결코 손에 만질 수 없는 거액이었다. 그런데 이 얘기를 들은 시민들은 집회를 열어 “한사람으로는 지불하지 못하지만 전체가 힘을 모으면 되사올수 있다”며 돈을 모금하였다. 생각한 대로 돈은 모였고, 도시의 보물이었던 책을 무사히 되살 수 있었다. 시민의 손으로 돌아온 책은 이후 800년 이상 교회에 보관돼 중요한 보물로 지켜졌다.
사마르칸트의 비비하눔 사원에 있는 코란 받침대
인류의 지혜가 가지는 문명의 힘
중요한 것은 ‘어느 나라’가 가장 큰 책, 또는 가장 오래된 책을 보유하고 있는가가 아니라, ‘어떤 책’을 영원히 보관하려고 했는가에 있다. 그렇다면 영원히 보관되는 책이 갖는 의미는 무엇이며, 인간은 왜 그 내용을 기록하고 남기려고 했을까?
나는 그 이유를 인류의 지혜, 정신문명의 보고인 <경전>이 가지는 ‘문명의 힘’에서 찾는다. 아놀드 토인비(Arnold Toynbee)는 인류가 창조한 문명(문명권)은 모두 27개로 헤아렸다. 그중 성장 도중 정체된 정체문명 5개와 태어나기 전 죽어버린 유산문명 4개를 제외하면 제대로 성장한 성장문명은 모두 21개라고 한다. 이 성장 문명 중에서도 14개는 이미 사명을 다한 사문명이고, 지금까지 살아 숨 쉬는 생존문명은 고작 7개(인도, 이슬람, 극동, 비잔틴, 남동유럽, 그리스 정교, 서구문명)뿐이다. 지금까지 살아 있는 생존 문명은 모두 불교, 이슬람, 기독교, 유교라는 정신문화에 뿌리하고 있다. 인도의 불교문명, 극동 중국의 유교문명, 중동과 서남아시아의 이슬람문명, 그리고 유럽의 기독교 문명은 모두 ‘기록’하고 ‘보존’하려고 부단히도 애쓴 경전을 가진 문명이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꾸란>을 가진 무이 무보락 마드라사(Muyi Muborak madrasah)의 의미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슬람 문화의 뿌리를 보유한 문화국의 자부심이 우즈베키스탄에 있는 이유이다. 그렇다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꾸란>을 가져온 우즈베키스탄이 가장 자랑스러워 하는 인물, ‘티무르’는 누구인가? 이제 그를 찾아 티무르 동상이 있는 중앙광장으로 향한다.
티무르 동상 앞에서
타슈켄트의 티무르 동상
구소련으로부터의 독립 이후, 1990년까지도 건재하였던 칼 마르크스 동상은 아미르 티무르 동상으로 교체되었다. 레닌 거리도 우즈베키스탄 출신 작가인 샤타 루스타벨리 이름의 길로 바뀌었다. 과거 레닌광장은 독립광장으로 개명되었고 광장의 상징은 우즈베키스탄의 불사조 <아무르 티무르>가 점령했다. 우즈베키스탄은 티무르 제국의 중심지이다. 이 제국의 왕, 티무르는 우즈베키스탄의 자부심요, 자랑이다. 우즈베키스탄에는 총 3개의 티무르 동상이 세워져있다. 수도인 타슈켄트에, 사마르칸트에 그리고 티무르의 고향 사흐리사브즈 이렇게 3개인데 모두 그 형태가 다르다고 한다. 타슈켄트에 있는 티무르는 가장 역동적으로 보인다. 말을 타고 달리는 모습이기 떄문이다. 반면, 사마르칸트나 사흐리사브즈에 있는 티무르의 동상은 앉아있는 모습과 전쟁 후 절름발이의 모습이다.
몽골 제국의 후계자, 티무르 제국
우즈베키스탄의 자랑, 티무르 제국은 몽골제국의 후계자이다. 따라서 몽골제국이 세계사에서 가지는 의미를 이해해야 티무르 제국이 가지는 의미를 보다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몽골은 변방에서 일어나 주변의 문명세계를 유린하고 동서를 하나로 통합하여 세계사의 물줄기를 바꾸어놓은 제국이다. 몽골의 역사는 대체로 13세기에서 16세기이 이르는 역사이다. 이 시기는 중앙유라시아사를 움직이는 두가지 요소, 즉 유목민의 군사, 정치력과 오아시스 정주민의 경제력이 가장 효과적으로 결합되어 중앙 유라시아 세계의 에너지가 최대로 발휘된 시대이다. 특히 그 전반지는 중앙 유라시아 세계가 몽골 제국이라는 하나의 정권 아래서 통합되고 그 힘이 다시 주변으로 확대되어 인류 역사상 최대의 제국이 건설된 시기이기도 하다. 유라시아 대륙은 그 때까지 서로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사실상 각 지역의 역사가 개별적으로 전개되었다. 그러나 이들이 몽골에 의해 통합되면서 북아프리카를 포함한 유라시아 전역의 역사가 한 방향으로 움직이게 된 것이다. 중앙유라시아는 예로부터 동서를 잇는 교역로로 끊임없는 물자의 이동이 있던 지역이었다. 물자의 이동은 필연적으로 문화와 사람의 이동을 수반하며, 이 과정에서 물자 중개를 담당한 이 지역 오아시스 정주민은 동과 서의 신문화를 가장 빠르게 접할 기회를 얻었다. 이들은 중국인에 앞서 서방에서 발생한 종교를 받아들이고 서아시아와 유럽인에 앞서 중국의 제지 기술을 체득한다. 선진 문화의 수용은 자연스럽게 새로운 문화창조로 이어졌으며 특히 중개무역을 통해 모은 경제력은 오아시스민들이 동서양의 외래 문화를 통합하여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는 밑거름이 된다. 간다라미술과 이슬람문명은 모두 새로운 문화를 창조한 밑거름이 되었고 이들은 이렇게 동서 두 세계에서 흡수한 이질문화와 스스로 창초한 혼합문화를 세계로 전파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몽골제국은 정주문명의 혁신세력으로 기동력과 군사력을 가진 유목민과 동서 문화교류의 전파자 또는 혼합된 신문화의 창조자로서의 오아시스 정주민이 가진 경제력과 문화력이 동서문명의 접합지점에서 가장 성대하게 통합되어 꽃피운 제국이었다. 몽골제국은 동서문명을 하나로 통합하고 정주민과 유목민을 연결시키면서 이 거대한 제국을 연결하는 실크로드에 ‘이동의 안전성’을 가져온다. 이 과정에서 중국의 인쇄술, 화약, 나침반등이 서양으로 전해지면서 중세를 떠받치던 봉건제도와 기독교문명에 새로운 균열을 만들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천년의 중세를 무너뜨린 그 혁신성과 창조성은 원천은 바로 중앙유라시아의 몽골제국이었던 것이다.
티무르는 몽골제국을 이은 후계자였다. ‘티무르’는 몽골어 ‘테무르Temür(현대 우즈베크어로는 ‘Temur’)’의 이란어형이다. 티무르의 시대의 투르크-몽골의 전통은 칭기즈 칸의 후예가 아닌 사람이 칸이 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칸을 자칭할 수 없었다. 그는 대신 ‘아미르’(지휘관)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14세기 후반이 되면 각지의 몽골 정권은 쇠퇴의 길로 들어서고 통합력도 점점 허물어져 간다. 바로 그 시대에 티무르라는 걸출한 인물이 등장하여 봉괴한 몽골제국을 재건하려고 했다. 그는 과거 몽골제국 영토의 서부 영역을 자신의 지배 아래 넣었다. 또 티무르와 그 후계자들의 시대에 그들의 지배 아래 있었던 오아시스 도시에서는 화려한 도시 문화와 궁정문화가 꽃피고 이른바 투르크-이슬람 문화가 결실을 맺었다. 그는 칭기스 칸의 후손들을 허수아비 칸으로 세우고 그의 이름으로 통치한 뒤에는 ‘부마‘(몽골어: хүргэн /kürügän/)이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이는 ‘사위’라는 의미인데, 그가 칭기스 가문의 공주와 결혼했기 때문에 이런 호칭을 사용할 수 있었다. 티무르의 후손들은 이후 인도의 무굴 제국의 군주가 된다.
칭기스칸의 직계 자손이 아닌 티무르와 그의 후계자들은 스스로 칸에 즉위하지 않고, 다른 유목부족의 장군들과 같이 아미르의 칭호를 사용하였다. 명목상은 칸이었던 칭기스칸 가문의 사위로써 칸의 곁에 있는 아미르의 최고 유력자로써 권력을 휘둘렀던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1370년 중앙 아시아에서 티무르 가문의 권력이 확립되고, 티무르 가문에 의한 지배가 진행되면서 이를 티무르 왕조(티무르 제국)이라고 불렀다.
티무르는 칭기스칸이 쌓아 올렸던 세계제국의 꿈을 이상으로 삼았고, 또한 자신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서는 전투에서 승리를 계속해, 전리품을 휘하의 여러 부족에게 분배해 주어야 할 필요도 있었기 때문에 대외 원정을 계속 되풀이하였다. 1380년 시작된 티무르의 원정은, 이란, 아프카니스탄, 아르메니아, 그루지아까지 이어지며 1398년에는 인도 원정까지 단행하여 델리 술탄 왕조를 격파한다. 1399년 시작된 7년 전쟁에서는 아제르바이잔, 시리아을, 1402년에는 오스만군까지 격파한다. 여기까지 단행한 원정에서 티무르는 몽골 제국의 서쪽 절반에 해당하는 곳을 차지하게 된다. 그의 마지막원정은 1404년이다. 1404년 말, 티무르는 20만 대군을 이끌고, 명나라를 격파하여 원나라의 옛 영지를 탈환하려 했따. 그러나 티무르는 원정 도중에 갑자기 병이 나서 1405년 2월 오트라르에서 병사했다. 그가 병사하지 않고 명과 싸웠다면 동북아시아의 역사는 또 한번 변했을 것이다. 티무르는 군사에 있어서는 천재적인 인물로, 생애에 걸쳐 벌인 전투에서는 한번도 패배하지 않았다. 그러나 원정을 할 경우 특별한 이슬람교적인 문화로서의 도시건설을 할 경우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원정은 그곳을 다스리기 위함이라기보다 약탈하고 파괴하는 것에 더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또한 칭기즈칸은 항복하거나 투항하는 적을 살려주었던 반면에 티무르는 투항하는 적도 여지없이 살육하는 잔인함을 보였다고 한다. 1대의 티무르 왕조는 티무르 생전에 확고한 지배체제가 준비되지 못했기 때문에 그의 사후 제국은 급속도로 동요하고 분열되어 갔다. 이것이 우즈베키스탄이 가장 영광으로 생각하는 제국의 역사, 티무르의 이야기다.
우즈베키스탄의 현재와 미래
유목민과 정주민의 시대, 투르크 이슬람시대, 러시아의 지배를 거친 독립된 우즈베키스탄이 선택한 과거는 ‘티무르의 제국’인 듯 보인다. 광활한 영토를 호령했던 제국의 역사는 늘 영광의 기억일까. 영토 확장의 이면에는 수 많은 학살과 민중의 고통이 있다. 어느 국가나 영광스런 과거의 재현을 늘 기원하지만 정작 민중의 척박한 삶과 현실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우즈베키스탄의 그림자를 잘 보여주는 사건이 바로 2005년의 안디잔 사태이다. 아직도 이 사건에 대해서는 정확한 원인규명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카리모프의 25년 장기집권에 대한 평가는 두 가지로 나뉜다. 현지인들은 과격한 근본 무슬림 세력으로부터 안전하게 국가를 보호하며 연간 8%의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달성한 위대한 지도자라는 인식이 하나다. 그러나 그의 장기집권의 이면에는 경찰과 정보기구를 통한 전면적인 통제와 감시체계의 구축, 야당탄압과 국민기본권의 무시가 존재했다. 실제로 지금까지 모든 선거에서 투표 집계 조작, 야당 탄압등의 부정행위가 광범위하게 자행되고 국민선택이 크게 제한된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카리모프는 시민적 자유를 억압하고 반대세력을 철저하게 탄압하는 정책을 시행했으며 신 정권도 ‘집회’는 그것이 하물며 동호회나 동창의 모임이라도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정부에 대한 가장 중요한 반대세력은 세속국가의 전복과 이란과 유사한 이슬람국가 건설을 내세우고 있는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이다. 때문에 이들의 활동은 전면 불법화되고 있고, 가장 혹독한 탄압정책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와 관련, 카리모프는 독재의 명분으로 ‘이슬람 테러리스트들러부터의 국가안보’를 가장 크게 내세운다. 현재 우즈베키스탄에는 5300명에서 5800명으로 추산되는 ‘극단주의자’들이 여전히 투옥되어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감옥상태는 매우 열악하며 특히 극단주의 활동에 참여한 이들의 수감생활은 처참한 것으로 알려져 있고, 상당수의 수감자들이 질병과 학대등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고문은 경찰과 정보부에서 일상적으로 행해지고 있다한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이슬람 단체 소속 멤버로 추정되는 이들에 의한 폭탄테러가 종종 발생하기도 한다. 최근 것으로는 2004년 3월 28일에서 4월 1일 테러리스트에 의한 타슈켄트 및 부하라에서의 폭탄 투하가 있었다. 누가 저질렀는지 아직 정확하게 밝혀지고 있진 않지만 카리모프는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소행으로 이들에 대한 대대적인 소탕작업을 벌였다. 안디잔 사태는 다음 해 2005년 일어나게 된다. 국가에서 이슬람 극단주의자의 토벌 명목으로 다수의 국민을 무차별 진압한 사건이다. 이 나라에서는 ‘안디잔 폭동’ 서방에서는 ‘안디잔 대학살’ 또는 ‘안디잔 민주화 시위’라 명명한다. 안디잔 사건은 2005년 5월 13일, 시민들은 안디잔 시의 형무소를 습격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들은 독재에 반대하는 반정부 인사들을 석방시키고 민주화를 요구하며 시위를 일으켰다. 동시에 전 우즈베키스탄 대통령 카리모프의 퇴진을 요구하는 민주화 시위도 일어났다. 그러자 정부는 시위대에게 총을 쐈고 이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사망했다. 하지만 우즈베키스탄 당국에서 자세한 경위를 공포하지 않았고, 세계 각지에서는 인권 문제와 관련하여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 사건 이후, 미국등 서구 세계에서는 안디잔의 시위의 진압에 대해 항의를 했고 같은 해 11월 우즈베키스탄 내의 미군들은 철수한다.
독립 후 우즈베키스탄은 친서방정책을 채택하고 국내적으로도 ‘탈러시아’정책을 시행했다. 사회전역에서 러시아 지배의 잔재를 청산하는 작업을 적극 추진하며 러시아 주도의 유라시아 경제연합에 가입하지 않았다. 우즈베키스탄은 두 개의 대륙을 통해야만 해양으로 향할 수 있는 세계 유일의 ‘이중 내륙국가’이면서 국경 어디에도 강대국을 접하고 있지 않은 장점으로 비교적 독립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탈러시아 정책의 연장선상에서,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의 영향력 증대를 차단할 목적으로 2001년 미국의 대아프카니스탄 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에게 군사기지를 제공하기도 한다. 그러나 2005년 안디잔(Andijan)사태 이후에는 서방의 부당한 내정간섭 등을 들어 미군을 철군시키고 러시아와 새로운 군사동맹관계를 맺었다. 이로인해 우즈베키스탄은 최근에는 뚜렷하게 친러시아로 기울고 있는 듯 보인다. 그러나 동시에 경제성장 등을 위해 서방, 특히 미국과의 관계를 악화시키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2001년 6월 우즈베키스탄은 국경문제해결과 군사적 신뢰구축 문제를 우선과제로 설정한 가운데 중-러 양국과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 타지키스탄, 키르기스탄 등 5개국으로 출범한 ‘상하이 협력기구(SCO)에 가입했다. 상하이 협력기구는 현재 정치적인 지역적 다자 안보기구 역할을 수행하는데에서 더 나아가 역내 투자와 무역의 점진적인 자유화를 추구하는 지역경제협력기구로서의 발전을 모색하고 있다. 이 때문에 SCO의 역할 확대가 분명히 이 지역에서 미국 주도에 대한 견제가 될 수 있을 거란 예측이 있다. 우즈베키스탄이 그리는 미래가 어떤 방향을 향해 가는지는 좀 더 지켜봐야할 것 같다. 어떤 미래가 펼쳐질지는 더 두고봐야겠지만 적어도 지금 우즈베키스탄이 가장 기억하고 되돌리고 싶은 영광의 역사가 그들의 희망인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이제, 나는 우즈베키스탄이 기억하고 되돌리고 싶은 영광의 역사, 그 역사의 중심지 사마르칸트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