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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우 Jan 04. 2023

우즈베키스탄 안디잔

기억과 침묵의 사이에서 

여느 도시와 다를 바 없이 평안한 하루의 일상이다. 도로는 언제나 그렇듯 시끄러운 차 소음으로 혼잡하다. 길 옆에 넓게 늘어선 시장에서는 우즈벡의 주식인 빵을 팔러 나온 아주머니가 꾸벅꾸벅 졸고 있다. 수업을 마치고 달려나오는 아이는 엄마를 보자마자 반갑게 안긴다. 아마도 오늘 하루의 일상을 걸어가며 재잘거릴 것이다. 도심은 언제나 그렇듯 평온한 하루를 따분할 만큼 똑같이 반복하고 있다. 아무 일없는 평범한 하루를 어쩐지 외부인 하나가 침범한 느낌이다. 안디잔의 평범한 하루에 이방인인 내가 어색하게 도시 한가운데 서 있다. 이 평범한 일상 속에 고통의 기억을 꺼내려 불쑥 끼어든 내가 불편한 걸까. 길을 걷는 순간마다 경계하는 듯한 낯선 시선이 따라다닌다. 외국인이 많이 찾지 않는 관광지에 ‘동역’ 어디쯤에서 온 듯한 이상한 여자의 ‘침범’이다. 


나는 이 도시에 ‘침범’했다. 평범한 일상의 침묵 속에 고통의 기억이 침범한 것이다. 초대 받지 않은 강제적 개입과 침입은 폭력이다. 그 순간, 지루할 만큼 반복적인 일상의 모든 것이 달라진다. 도로의 차 소음은 공포의 총소리로 변한다. 시장에서 빵을 잔뜩 올려두고 졸고 있는 아낙네의 모습과 방과후 엄마에게 달려가는 아이의 발걸음은 아비규환의 비명소리가 된다. 평화로운 마을이 순식간에 포탄과 비명소리의 핏물이 흐른다. 초대 손님은 반가움을 선물하지만 침입자는 언제나 원치 않는 고통을 동반한다.  


평범한 일상의 침범


2005년 5월13일, 중앙아시아 우즈베키스탄의 동쪽 끝 안디잔. 

 “이슬람 테러용의자로 지목된 사람들은 이 지역 사업가일 뿐이다!” 안디잔 시민들은 정부 전복을 꾀한 명분으로 체포된 23명의 석방을 요구하는 평화 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정부 보안병력은 평화롭게 시위하는 주민들을 향해 총을 발포한다. 무능한 정부에 대한 주민들의 반감이 높아진 사이, 이슬람 조직들은 소액금융과 구호활동 등을 맡아 하며 신망을 얻었다. 그러자 정부는 2004년 6월 ‘히즈밧 타흐리르(해방당)’라는 무슬림 그룹이 정부 전복을 꾀했다며 23명을 구금했다. 정부는 “이슬람 테러용의자 23명을 체포했다”고 밝혔으나 주민들은 “지역 사업가들일 뿐”이라며 맞섰다. 주민들의 반발은 더욱 커졌고, 이듬해 봄까지 시위가 이어졌다. 정부는 결국 학살로 주민들의 입을 막았다. ‘안디잔 학살’로 불리는 이 사건의 희생자는 정부 발표에 따르면 187명, 주민들과 국제 인권단체들에 따르면 2000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자유유럽라디오(RFE) 방송은 우즈벡 정보국 ‘내부고발자’를 인용해 “정보당국이 확인한 것으로도 1500명 이상이 숨졌다”고 보도했다. 안디잔 사건의 실상은 여전히 베일에 가려져 있다. 당시 우즈벡 정부는 외신들의 현장 취재를 철저히 막았을 뿐 아니라, 자국 내에 들어와 있던 외국인들까지 내보냈다. 안디잔 학살이 일어나자 서방은 일제히 카리모프 정부를 비판했다. 카리모프는 이에 맞서 미군에 빌려줬던 기지를 다시 빼앗고, 중국·러시아와 밀착하기 시작했다. 인권탄압을 강력 비난한 유럽과는 완전히 등을 돌렸다. 카리모프 대통령 서거 이후, 현 미르지예요프 대통령은 주변국과의 관계개선 움직임을 보이고 있지만 여전히 이 사건은 우즈베키스탄에서 철저한 비밀로 붙여져 있다. 


불편한 진실과 은폐의 경계에서


사람들이 붐비는 혼잡한 식당에 점심을 먹으러 들어가니 영어가 전혀 통하지 않는다. 러시아어를 할줄 아냐고 게속 묻는데 주문이 불가능하다. 한 젋은이가 다가와 한국말로 “어떤 거 주문하고 싶어요?” 라고 묻는다. 유창한 한국어는 아니지만 의사소통이 된다는 것이 그저 감사하다. 한국 목포의 시멘트 공장에서 5년간 일했었다고 한다. 일하고 고향 안디잔으로 돌아와 결혼하고 한국에서 번 돈으로 여기서 핸드폰 가게까지 차렸단다. 한국에 있을 때 도움받은 분이 많다며, 흥쾌히 점심 식사비를 낸다. 손님을 잘 접대하는 것이 ‘무슬림’의 예의임을 강조한다. 조심스레 ‘안디잔 사건’을 아냐고 물었는데 대화가 잘 통하지 않는다. 다만 알아듣는 한마디가 있었던 모양이다. 어떤 단어 속에 ‘무슬림 테러리스트’ 라는 말이 나왔는데 이 말은 듣자마자 펄쩍 뛰며 반박한다. 


 “사람 죽이는 거 무슬림 아니에요. 테러리스트랑 무슬림 달라요. 무슬림은 사람 죽이지 않아요. 어려운 사람을 도와줘야해요. 손님을 잘 접대해요.” 


그는 안디잔 사건이 무엇인지 모른다. 내가 왜 이 도시를 혼자 돌아다니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알고 있다. 사실이 왜곡되어 전달되었을 때 얼마나 답답한지. 편견을 경험했을 때 얼마나 속상한지. 나는 더 깊게 묻지 않았다, 하지만 알 것 같았다. 왜 그가 그렇게 ‘무슬림’을 강조하고 있는지를. 아마도 그가 한국에서일했던 5년 간 무슬림이라는 본인의 종교를 고백했을 때의 한국 사람들의 반응 때문이 아닐까. 마음 깊은 곳에서 ‘아니다’를 외치는 것은 ‘진실’을 전달하려는 양심의 목소리다. 그것은 누군가 시켜서 하는 일이 아닐 것이다. 2005년 안디잔 사건 후, 14년이 지난 지금의 안디잔은 변함없이 오늘을 지키고 있다. 도시는 분명 그 날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다만 침묵할 뿐. 도시의 침묵을 깨는 것은 불편한 진실을 꺼내려는 누군가의 노력이다. 오늘 나에게 무슬림의 친절함을 말하고 싶어한 샤흘록(30세)의 마음이다. 역사는 기억하려는 사람들의 의지로 만들어진 등대다. 왜곡되고 은폐된 사실에 대해 당당하게 ‘거짓이다’라고 외치는 누군가의 노력이 있을 때, 잘못된 역사, 그 고통의 기억이 더 이상 되풀이되지 않는 것이다. 


기억의 영토화에서 탈영토화로


‘고통의 기억’을 침묵에서 끌어내는 작업은 결코 쉽지 않다. 이 나라의 자국민이 스스로 공포와 거짓에 맞서 싸울 힘이 생길 때까지 아직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기억하려는 의지’를 내지 않으면 공포와 거짓에 결국 굴복하고 만다. 그 결과는 똑 같은 비극의 반복이다. 2015년, 안디잔 학살 10주기에 ‘기억의 의지’를 강조한 것은 외부의 목소리였다. 국제 엠네스티는 안디잔 사건은 반드시 독립적으로 조사되어야 하며, 현재 시위 관련자들에 대해 진행 중인 기소 절차 역시 중단되어야 한다고 밝혔다. 우즈베키스탄의 안디잔에서 여성과 어린이를 포함해 대부분 평화적으로 시위를 벌이던 사람들을 정부군이 무차별적으로 총살한 사건으로부터 14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수백여 명이 불법 구금되거나 기소될 위험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 사건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은 언제 어떤 방식으로 공권력에 의해 또 사라지게 될지 모른다. 정부학살의 책임자는 버젓히 잘 살아가고, 당시 시위에 관련되었다고 의심되는 사람들은 무자비하게 기소당하고, 고문받고, 불법적으로 수감되는 상황은 여전하다. 어쩌면 이 사건의 진실은 영영 밝혀지지 않은채 묻힐지도 모른다. 통치자는 왜곡되고 거짓된 ‘기억’을 자국의 영토 안에서 머물도록 한다. 공권력의 투입은 언제나 ‘자국민을 위한 보호’의 명분 하에 이루어진다. 그런데 자국민 안전보호를 명분으로 또 다른 자국민을 희생하기 위해서는 희생의 대상이 악이 되어야 정당성을 갖는다. 이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틀’ 과 ‘덫’이 바로 통치자를 위한 ‘집단기억’을 만드는 장치이다. 이 집단기억이 자국의 영토 안에 머물게 되면 보편 가치를 질문할 여지가 차단된다. 자국민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같은 자국민을 악으로 규정하고 무차별 살상하는 것은 바람직 한것인가? 그들을 반정부 테러리스트, 폭도, 날강도 등의 악으로 규정화 시킨 것은 어디에 근거한 것이며, 누구를 위한 것인가? 국가가 공권력이란 이름을 생명의 존엄이라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보다 상위에 두고 남용하는 것은 용인할 수 있는 것인가? 


우리는 한 국가 안에서 이렇게 자국민을 또 다른 악으로 규정하기 위해 만드는 수 많은 프레임을 본다. 타 민족간의 갈등과는 그 상황이 다르다. 타 민족은 민족적 다름이 이미 주어진 갈등의 명분이지만, 자국민을 국가의 공권력이 살상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악의 틀로 규정한 명분이 필요하다. 우즈베키스탄에서 일어난 2005년의 안디잔 사건은 1947년 한국에서 일어난 ‘제주 4.3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제주 4.3사건’도 일제 패망 이후 남북한 이념 갈등을 발단으로 봉기한 남로당 무장대와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의 묵인하에 벌어진 대학살극이다. 물론 4·3이라는 명칭은 1948년 4월 3일에 발생했던 대규모 소요사태에서 유래하였다. 하지만 이 사건을 ‘48년 3월’이라는 단절된 시간으로 보면 제주 4.3에서부터 여순반란사건 등 해방전후부터 한국전쟁 이후까지 한국 현대사의 총체적 흐름 속에서 만들어진 ‘빨갱이’라는 ‘악의 프레임’을 놓치게 된다. 정부는 제주도민을 학살하는 과정에서 제주도를 인구의 70%가 좌익단체에 동조한, 좌익분자의 거점으로 규정했다. 이렇게 씌여진 좌익프레임 속에서 제주도는 여순반란 사건을 거치며, 지역전체가 빨갱이의 거점으로 낙인찍혔다. 한번 규정된 빨갱이라는 악의 프레임은 그후 박정희, 전두환 시대를 거치는 반공정권에서도 자국민 살상을 정당화하는 구실로 지속적으로 활용되었다. 얼마나 무고한 사람들이 ‘빨갱이’라는 프레임 속에서 소리도 없이 죽어갔을 것인가. 4.3 당시 군사재판을 받은 수형인은 2530명, 일반 재판 수형인은 1306명이다. ‘빨갱이’ 프레임으로 무고하게 죽어간 목숨은 다시 살릴 방법이 없다. 아직까지 살아있는 생존 수형인에게 무죄를 판결한 것이 불과 3개월 전이다(2019년 1월 17일), 대한민국 법원은 70년 만에 처음으로 국가 공권력의 남용을 인정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2005년의 안디잔 사건도 2005년의 5월의 단절된 시간만으로 놓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정부는 ‘근본 이슬람 무장단체’라는 틀에서 수 많은 민간인을 대량 살상했고 그 과정을 인멸하고자 공개하기를 꺼리고 있다. 이 사건의 진실을 위해 얼마나 긴 시간을 더 싸워야 할 것인가. 진실은 ‘기억’하려는 ‘의지’와 ‘기록’하려는 ‘의지’의 합이 만든다. 어떤 국가의 집단기억이 아니라 전세계의 보편가치라는 눈으로 그 기억을 ‘탈영토화’할 때 진실에 더 가까워지는 것이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은 1980년 광주를 취재하러 온 독일인 기자 ‘힌츠페터’에 의해 그 진상이 많이 알려지게 되었다. 2005년 안디잔사건의 끔직한 참상은 ‘데니스 시냐코프’라는 사진자가의 목숨 건 취재가 있어서 가능했다. 만약 이들이 이 사건을 나와 상관없는 ‘저기 어디 먼 땅’의 이야기로 치부하고 그냥 떠나버렸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진실’을 밝히려는 그들의 의지, 이들의 목숨건 취재가 있었기에 국가권력의 폭력성과 잔인함이 세상에 드러나게 된 것이다. 진실을 찾아가려는 의지가 곧 올바른 역사의 등대가 된다는 사실을 몸소 보여준 두 기자가 존경스럽다. 기록되는 역사 만이 기억되고, 기억하지 않는 한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국가 공권력의 폭력성 안에서 무고하게 희생당한 ‘사람’을 기억하려 애쓴 그 기록으로, 우리는 국가의 폭력성의 및낱을 발견한다. 세상 그 어떤 폭력으로부터 무차별하게 희생되는 생명이 없는 진정한 평화의 시대는 언제쯤 가능할까? 


바부르의 동상:  다양한 계절이 있는 것처럼


바부르의 동상


 내리누르는 불편한 마음만큼이나 흐린 하늘이다. 안디잔의 중심도로를 따라 걷는데 빗방울이 떨어진다. 침묵하지만 기억하려는 누군가와, 혹은 기억조차 못하는 어떤 이에게 2005년 안디잔의 고통이 불러온 눈물이 아닐까. 원인도 모른 채 희생된 영혼의 눈물이 거리에 살포시 내려앉는다. 도로를 따라 걷다보니 ‘거대한 동상’ 하나가 보인다. 설마 여기도 티무르일까라는 마음에 가까이 다가가보니 반은 맞았다. 티무르의 후예를 자처한 ‘바부르’의 동상이다. 바부르는 티무르제국의 분열기에 파란만장한 삶은 살았다. 그는 인도 무굴제국을 세운 왕으로 이 곳 안디잔 출신이다. 무굴제국은 인도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했다. 경제적으로는 세계 최고 수준의 부를 누렸으며, 문화적으로는 화려한 궁정 문화를 활짝 꽃피웠다. 그래서 안디잔에서 티무르의 후예이자, 무굴제국의 창시자로 그를 기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도시가 제국의 창시자나 제국의 후예로서의 ‘바부르’가 아니라, 종교적 관용을 강조한 그를 기억해주었으면 싶다. 그는 그의 아들 후마윤에게 다음과 같은 유서를 남겼다. 


 “종교적 선입관을 품지 마라. 모든 백성의 종교적 감성과 의례를 주의깊게 살펴 공정하게 대하라. 이슬람은폭정과 박해라는 칼보다 사랑가 애정으로 훨씬 더 잘 전파될 것이다. 이슬람교도 내부의 대립을 피하라. 다양한 계절이 있는 것처럼 백성들도 다양한 성향이 있는 것을 명심하라.” 


 ‘안디잔’의 바부르가 전하는 이 메시지가 이 도시를 넘어 인접한 모든 국가의 분쟁과 갈등 지역에 빗방울이 되어 전해지길 간절히 바래본다. 다양한 계절 같은 종교적 관용이, 폭정과 박해보다 사랑과 애정으로. 


안디잔에서의 마지막 밤 : 아들을 기다리는 어머니


     비가 세차게 내려 근처 까페에 들어가 비가 잦아들길 기다린다. 노트북을 펴고 글을 정리하고 있다보니 벌써 어둑어둑 해 질 녘이다. 로컬 전화가 걸려와 받으니 아까 점심에 만난 샤흘록 그 친구다. 이제 퇴근하니 저녁을 같이 먹자고 부른다. 친구 두명과 함께 차를 가지고 왔다. 안디잔에서 가장 ‘핫’한 플레이스로 나를 데려간다. 화려한 음악분수와 고층 쇼핑센터가 있는 곳이다. 도시 최고의 모습을 구경시켜주고 싶은 마음인 걸 안다. 아이들은 어딜가나 해맑게 뛰어논다. 분수대 앞에서 까르르 웃으며 물놀이를 하는 아이들을 보고 있으니 이 도시가 기억하는 고통의 역사기억에서 빠져나와 잠시나마 ‘쉼’을 얻는 느낌이다. 그렇게 또 산 사람들은 오늘을 살아가야하지 않겠는가. 언제 또 만날지도 모를 낯선 이방인을 환대하는 ‘무슬림’의 친절이 지금 이 ‘순간’이다. 우즈베키스탄에서의 마지막 저녁은 성대히 먹어야한다며 푸짐한 한 테이블로 주문을 시킨다. 이 나라를 떠나는 나를 위한 ‘페어웰 파티’이다. 낯선 도시에 ‘침범’한 이방인이라 생각했는데 우즈베키스탄에서의 마지막 밤은 나에게 선물처럼 ‘초대장’ 전한다.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지만 침묵하고 있는 도시는 먼 나라에서 그 이야기를 공감해준 이방인이 고마웠던 걸까. 비내린 흐린 밤, 하늘에서 볼 수 없는 수 많은 별을 거리에 내려주었다. 


우즈베키스탄 안디잔: 빛의 거리


안디잔의 밤은 아름답다. 14년 전의 끔직한 참상이 전혀 상상도 되지 않을 만큼 찬란한 불빛이다. 그 불빛을 따라 발견한 것이 바로 2차대전 전몰전사를 추모하는 광장이다. 이 광장에는 전쟁에 나가 돌아오지 못한 아들을 기다리는 어머니 상이 있다. 나는 이 어머니의 눈물과 기다림이 우즈베스탄이 나에게 전한 마지막 선물이라 생각한다. 평화는 영광의 역사를 재현하는 ‘티무르’에 있지 않았다. 정복의 역사가 만든 영광은 파괴와 절망의 양면이기 때문이다. 티무르 제국의 후예 ‘바부르’에게 있지도 않았다. 번영은 누군가의 희생의 그림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추모광장의 어머니는 말한다. 


우즈베키스탄 안디잔: 2차세계 대전 전사자를 위한 추모공원


“평화는 전쟁의 승리를 기억하는 것에 있지 않다. 평화는 세상 그 어떤 폭력에도 단호하게 ‘노’를 외치려는 의지에 있다. 잔인한 폭력에 무모하게 희생된 이들을 기억하려는 마음에 있다. 전쟁의 고통 없는 세상을 기다리는 어머니의 희망 속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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