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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원인 May 21. 2017

육두문자 프러포즈

민.원.상.담.실









머리를 대충 말리고 나왔어야 했다. 아님 운동화를 신고 나오든지. 빠른 걸음은 이내 반쯤 달리기로 바뀌고 보도 블록에 맞닿는, 아직 길들지 않은 구두 뒤꿈치가 말발굽처럼 경쾌한 소리를 낸다. 스쳐 지나가는 젊은 엄마들의 시선이 어디서 아이를 잃고 저리 뛰어다니나 하는 눈치다. 숨은 턱까지 차 오는데 그런 생각에 순간 마음까지 복잡해진다. 


한 달 전 직장을 그만두고 나서 그런 시선들을 자주 느끼기 시작했다. 예전 일하던 출판사에서는 작년 환갑잔치를 치렀던 사장님과 가끔 토요일에 아이들을 데리고 출근하는 경리 과장을 제외하곤 모두 미스였다. 그중 디자인실의 황은 이제 갓 대학을 졸업한 친구라 륙색에 인라인스케이트와 포카리스웨트 물병을 꽂고 출근하는 젊은 치였지만, 나머지는 티백을 낚싯줄처럼 위아래로 흔들며 지난밤 본 드라마 이야기로 녹차 물을 우려내는 서른 줄 넘은 동년배들이었다. 그네들과 더불어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책에 파묻혀 지내다 보니 올해로 서른세 해를 넘기고 말았다. 게다가 장에 탈이 난 것조차도 모르고 있었다. 

퇴직 후 처음으로 마주 대한 보통의 삶은 왜 이리 어색한지, 절대로 워커홀릭은 아니었지만 낮 두 시에 전화 외판원과 실랑이를 벌이고, 해질 무렵 김칫국물이 뚝뚝 떨어지는 음식물쓰레기 봉지를 들고 공동소각장으로 걸어가는 자신의 모습에 분명 이질감을 느끼고 있었다.

 “혜미 씨! 여기야, 여기.” 

맨 처음 들어갔던 출판사의 동기 최가 날 향해 오른손을 번쩍 치켜든다. 아이를 낳아서인지 8년 전의 가냘프던 그녀의 모습 위에 또 다른 한 겹을 덧입고 있는 느낌이었지만 하얗고 오밀조밀한 얼굴 생김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어머, 영화 씬 더 예뻐진 것 같아.” 

사실 그녀는 눈썹 정도만 그리고 나온 수수한 얼굴이었다. 그런데도 귀한 집 딸내미 같은 부티가 얼굴 전체에 흐르고 있었다. 

같은 출판사에 근무하던 영업부 대리와 3년 비밀 연애 끝에 결혼한 그녀의 빈자리를 보며 난 그녀를 거짓말쟁이라고 수없이 힐책했었다. 함께 책에 대한 열정을 얘기하고, 활자를 담을 느낌 좋은 종이를 찾아 여기저기 기웃거리고, 돈 모아 예쁜 그림책이 많이 나오는 체코에 가보자고 굳게 약속했던 그녀가 훌쩍 결혼해 떠나버린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뭐 당시엔 죽자 살자 찍은 사진들임에도 장롱 깊숙이 틀어박혀 켜켜이 먼지를 덥고 있는 사진첩처럼, 최에게 연락이 왔을 때 그녀의 이름을 기억 속에서 뒤적거렸을 정도로 당시의 날 선 미움은 이제 무른 과일조차 깎지 못할 만큼 무뎌진 지 오래였다. 


영화 <러브레터> 중에서


아이 때문에 오래 있진 못한다는 그녀의 말을 듣고서야 난 발뒤꿈치의 통증을 느낄 수 있었다. 8년 만에 만난다는 설렘에 약속시간을 기어이 지키려 했던 자신의 노력이 왠지 허망해졌다. 아니, 난 조금 다른 것을 기대했는지도 모르겠다. 아이가 말썽을 부려 힘들다거나, 신랑의 주사가 심해 너무 속상하다는, 배신자의 그리 행복하지 못한 결혼 후일담을 듣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기억은 무뎌졌지만 까칠한 내 성격은 그대로였다. 

얼마 남지 않은 아이스커피를 밑바닥까지 비워 넘기는 최의 목 언저리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우리의 지난 얘기는 한 시간 정도로 대충 마무리 지어질 만큼 생각보다 그 깊이가 너무 얕았다. 군대 얘기로 평생을 우려먹는 남자들의 이 년 남짓한 군대생활이 몹시 궁금해졌다. 


최는 가방에서 지갑을 꺼내며 그제야 생각이 났다는 듯 작은 책 한 권을 꺼낸다. 체코의 유명 삽화가 피터 시즈의 화집이었다.

“얼마 전 이사했거든. 그때 이걸 찾았지 뭐야. 우리 신랑하고 이것 때문에 말다툼까지 했어. 혹시 박민수 씨 기억나? 추리소설팀에 있었던.”

그리 큰 차이는 아니지만 최보다 박민수라는 사람의 기억을 더듬어 찾는 데 좀 더 시간이 걸리긴 했다. 가끔 복도에서 마주치고 회식 때 옆자리에 앉은 기억이 있는, 어차피 아동팀에 있던 내가 그와 많은 시간 부딪치지 않은 건 당연한 일이었다. 

“우리 신랑이 박민수 씨랑 좀 친했나 봐. 민수 씨가 회사 그만두고 나가면서 이 책을 혜미 씨한테 전해달라고 부탁했다지 뭐야. 그런데 그걸 이제야 전해주니……. 그이가 깜박했데. 미안하다, 혜미 씨.” 

그가 내 앞으로 체코 삽화가의 화집을 전했다는 것이 몇 해 만에 연락이 닿은 최만큼이나 생경했다. 최가 버스에 오르는 것을 보고 돌아서는데 발뒤꿈치가 베인 듯 쓰라렸다. 

급한 마음에 버스정류장 앞에 있는 편의점 계단에 피터 시즈의 화집을 깔고 앉아 상태를 살폈다. 스타킹이 터진 자리로 살이 빨갛게 부어있었다. 

8년 전 어느 날 종이에 베인 적이 있었다. 새로 들여온 복사용지를 옮길 때 생긴 상처였다. 화장실에서 돌아와 보니 미키 마우스가 그려진 반창고가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혜미 씨 손가락 다치셨어요? 예, 그냥 살짝요. 

기억 한 구석에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박의 음성이다. 그래, 그때 복도에서 내가 손가락을 부여잡고 걷는 모습을 그가 걱정스럽게 보며 물었던 적이 있었다. 

최의 말로는 박이 두고 간 반창고라고 했다. 그날 마침 마감이 있어 고맙다는 인사도 못하고 그렇게 어영부영 시간이 흘렀던 것 같은데……. 박, 그래 고깃집에서 회식을 했을 때 그가 내 앞으로 상추와 깻잎을 자주 챙겨주었던 것 같다. 자기 쪽에서 초벌구이 한 삼겹살을 나와 최가 앉아 있는 불판으로 옮기다 자신의 바지에 사이다를 엎질렀던 그의 모습이 생각났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그날 갔었던 고깃집 주인아주머니의 얼굴만큼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 그가 왜 나에게 피터 시즈의 화집을 주었을까? 

그나마 희미하게 남아 있던 박의 기억은 매큼한 버스 연기가 콧속으로 스며들자 설 곳을 잃고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 중학생 시절, 계절이 바뀔 무렵의 들꽃이나 이파리들을 따다가 두툼한 책갈피에 보관하는 여자애들이 있었다. 박에 대한 기억들도 그렇게 내 머리 속 어딘가에 차곡하게 쌓여 있었음에 분명하다. 하지만 오랜 시간 잊고 지내다 우연히 발견한 그 기억들은 내 건조한 삶의 한 구석에서 바싹 말라붙어 자칫 잘못 건드렸다간 미세한 분말을 날리며 날아가 버릴 것 같은, 그리 견고하지 못한 기억들이 대부분이었다. 나는 다리를 약간 저는 듯 걸으며 피터 시즈의 화집을 펼쳤다. 

최와 함께 가고 싶었던 프라하의 전경이 첫 장에 펼쳐졌다. 

아직도 기사와 공주와 용이 나올 것 같은 고딕건물들의 아름다움에서 겨우 시선을 떼어 다음 장을 펼쳤을 때 이런 글이 적혀 있었다. 


당산역 근처 중고 책방에서 우연히 발견했어요. 

신선한 느낌에 몇 장 들춰봤는데 그림이 너무 예쁘더라고요. 

이 그림을 그린 작가가 그렇게 유명하다고 하네요. 

좋아하실지 어떨지 잘 모르겠지만, 

아동서적을 작업하시니 도움이 될까 싶어서요. 

요즘 아이들에게 조금 어려울 듯 보이지만, 전 이 작가의 그림 맘에 듭니다. 


영화 <러브레터> 중에서


풋, 싱겁다. 사랑고백 정도 적혀 있을까 했는데. 하긴 남자에게 고백을 받아본 지가 너무 오래돼서 그런 고백을 들으면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나 역시 궁금하다. 

경비실에 택배를 맡겨 두었다고 연락이 왔다. 떡볶이 가게에 들러 순대 이 천 원, 떡볶이에 튀김 천 원어치를 묻혀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p.s 유치하지만 약간의 추리가 있습니다. 제목을 잘 보시면.... 지금 보니 컴퓨터로 봐야 알기 쉽겠네요.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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