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from island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민원인 Dec 18. 2017

목소리

민.원.상.담.실












야심한 밤, 뒤꿈치를 들고 숨어든 자객의 습격처럼 눈이 내렸습니다. 

30분 전에 노곡리를 지났다는 전화를 주고받았는데 아이들 저녁을 먹이고 설거지를 끝냈을 때까지 소식이 없습니다. 행여 눈길 운전하는 데 방해라도 될까 재차 전화를 걸기도 망설입니다. 한 달 전 아찔했던 기억이 떠올라 더욱 노파심이 났는지 모릅니다.


저녁 무렵, 아이들과 저를 집에 내려주고 마지막 수업을 하러 떠나던 아내의 차를 뒤에서 트럭이 받고선 그대로 달아납니다. 빨리 쫓아가! 아내는 황망한 표정으로 트럭 뒤를 따라 사라졌습니다. 한참이 지나도 아내에게선 소식이 없습니다. 전화가 꺼져 있다는 메시지만 반복해서 흘러나옵니다. 한 손에 둘째 아이를 들쳐 안고, 다른 한 손에 큰 아이 손을 잡고서 무작정 큰길로 달려 나갑니다. 아내의 행방을 알지 못한 채 두려운 시선으로 가로등 너머의 새까만 어둠을 쫓습니다. 아빠 무서워. 천재지변을 본능으로 감지하는 산짐승처럼 큰아이는 부여잡은 제 손을 더 세게 말아 쥐고, 잠시도 가만있지 못하는 둘째 아이도 품 안에서 눈치를 살핍니다. 온갖 끔찍한 상상이 눈앞에 펼쳐집니다. 예전 도로에서 실랑이를 벌이던 여자운전자를 거칠게 몰아세우던 몸집 큰 사내가 떠올랐습니다. 뺑소니차를 왜 아내 혼자 쫓게 했을까... 아내가 악한에게 죽임을 당한 건 아닐까... 그 순간 울린 전화벨 소리. 


여보 나야, 배터리가 떨어졌었어. 


아내의 음성을 듣고 세상을 다 얻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함께 살며 부딪힐 때마다 승리를 위해 아내의 고유한 색깔을 약점처럼 꼬집고, 그 일이 반복될 때마다 아직 아물지 않은 그 상처를 헤집던 반복된 싸움들. 아내가 남편에게 응당 해주길 바랐던 모든 불만과 결핍이 그 목소리 하나로 채워집니다.


예보 없던 큰 눈에 놀란 아빠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이들은 무릎 나온 내복 바람으로 눈 구경에 여념이 없습니다. 길이 미끄러워서 속도를 못 냈어. 가게에서 뭐 좀 사갈까? 아이들 주전부리를 부탁하고 전화를 끊었지만 당신 존재만으로 아무런 부족함이 없다고 말해주고 싶었습니다. 마음이 말랑해지는 걸 보니, 크리스마스가 얼마 안 남았나 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가족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