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모임 2 번째 만남
평소 이어령 교수님의 여러 매체나 인터뷰 글을 읽고 참 존경스러운 지성인이자 학자라고 생각했다. 암으로 투병 중이라는 소식에 앞으로 들려주실 이야기들이 많을 텐데.. 하며 참 안타까운 마음이 있었다. 독서 모임 회원 한 분이 추천해 주셔서 10월 독서 모임 선정 도서로 정하였고 이어령 교수님의 책이어서 반가운 마음에 책을 읽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큰 기대 없이 읽기 시작해서 마지막 책을 덮을 때는 "와"하는 감탄으로 끝났다. 이어령 님의 저서가 꽤 많은 걸로 알고 있는데 쓰신 책을 이번에 처음으로 읽게 되어 뜻깊은 시간이었다.
한국인은 초음파 과학 기술이 나오기 수백 년 전부터 배내 아이를 환히 들여다본 것 같다. 판소리 <심청가> 이야기다. 열 달 동안 어떻게 어머니 배 속에서 자랐는지는 비디오를 찍듯 훤히 노래한다. 사십 후에 낳은 자식, 한 달 두 달 이슬 맺어, 석 달에 피어리고, 넉 달에 인형 삼겨..
작은 차이가 아니다 0살 때 태어나는 서양인의 이야기와 장용학 작가처럼 한 살 때 태어났다는 '한국인 이야기'를 가르는 중대한 분기점이다. 인간과 생명과 자연을 보는 차이가 바로 이 한 살 나이 차이에서 비롯된다. 최첨단 초음파 기술이라 할지라도 앞 못 보는 심봉사를 따르지 못하는 이유는 예나 지금이나 모태의 생명 공간을 들여다보는 것은 사람 눈의 수정체도, 카메라의 렌즈도 아니라는 것, 그것은 오직 생명의 예지를 지닌 ‘마음의 눈' '영혼의 눈'이라는 점이다.
한국인들의 '태명 짓기'가 우리나라만의 풍습이라는 것을 이 책을 읽고 알게 되었다. 우리는 배내 아이부터 생명으로 여기고 이름을 지어주며 태교를 시작하는 것이 너무도 당연하지만, 서양의 다른 문화권에서는 생소하고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태어난 아이의 0살과 1살이 단순한 차이가 아니다. 출생 전 심리학을 개척한 T. 버니 박사의 연구대로 태아는 듣고, 보고, 느끼고 무엇보다 엄마의 생각이 나 감정을 읽을 줄 안다는 것이 밝혀졌듯이 한국의 태교 문화는 단순한 전통을 넘어선 과학인 것이다.
옹알이 말, 유아어란 의미의 이전에 소리만으로 어느 대상이나 느낌을 전달하는 일종의 태생적 '배꼽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언어학자들은 이 의성어가 가장 발달한 말로 한국어를 꼽는다. 우리가 전 세계에서 가장 의성어를 많이 쓴다는 것. 정식으로 사전에 나와 있는 것만 8,000개이다. 일본은 2,200개, 독일은 우리의 7% 수준인 541개이니 말할 것도 없다."자장가의 뜻이 뭔지 아나?" 여자 대학에서 국문학 교수를 하다 보니 애 어머니가 된 제자들이 찾아오면 자연 그런 농담 같은 질문을 한다."잠투정하는 아기에게 '자자' '자자'라고 달래겠지. 그런데 애가 '자자'라는 말 알아듣겠어? 카톡 같은 게 없었던 시절인데도 우리 슬기로운 어머니, 할머니들은'나동’ '감사합니당’이라고 하듯 끝말에 '이응'을 붙였던 거지. 그 순간 짜잔! '자자'가 '자장'으로 변해 자장자장 자장가가 생겨나고 아이들은 그 옹알이 배냇 말에 안심하고 잠이 드는 거다.
우리가 좋아하는 '이응' 붙은 단어가 또 있다. 바로 한국인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아리랑'이다.‘아리다, 쓰리다'라는 단어는 아픈 감정을 소리로 드러내는 말 중 하나다.'아리다'라는 말과 '쓰리다'라는 말을 이어주는 접속 조사에 이응(ㅇ)을 첨가한 '랑'이 들어있다.'너랑 나랑' , '머루랑 다래랑'처럼 서로를 응집시켜고, 서로를 가깝게 하고 태내의 그 정서로 돌아가게 만드는 것, 천년을 가는 문화적 밈, 바로 꼬부랑 할머니의, 꼬부랑 고개의 그 '랑' 효과다.
이어령은 밤이면 밤마다 이어지는 꼬부랑 할머니 이야기처럼 끊임없이 이어지는 이야기의 향연을 보여준다. 독서 모임에서 한 분도 이렇게 느끼셨다고 하였다. 이 책은 문학책이자 역사책이고 언어학 책, 육아 책, 문화 책, 인류학 책, 과학책 등등으로 표현해도 모자랄 정도로 다양한 분야의 방대한 이야기들이 유기적으로 서로를 설명해 주며 녹아있다. 한국인의 의성어, 배냇 말, 옹알이 말에 대한 이야기가 '상어 가족'이라는 신한류를 일으킨 노랫말까지 이어지면서 다시 한번 우리 한국인의 언어의 힘을 알 수 있다. 한국인들만이 배내 아이를 생명의 존재로 여겨 이름을 부여했듯이 배냇 말의 생명력을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우리가 모두가 여자이고 아이를 낳은 엄마이다 보니 출산과 모성애와 육아에 대해 강조를 하는 것이 '시어머니 잔소리' 같은 갑갑함을 느꼈다는 분도 있었다. 그러면서 이어진 서양의 스와들과 우리의 기저귀 문화와 포대기 문화.. 이 책에는 서양의 스와들 이야기 속에 그리스까지 거슬러 올라간 영아 살해나 유기 같은 역사의 이야기도 나온다.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 인물 50인 중에서 2인씩 매 독서모임마다 인물 탐구 형식으로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데 책을 읽다 보면 이렇게 책과 책 사이의 연결이 꽤나 재미있다. 스파르타 로마 시대의 고대 영웅들의 이야기 속에는 갖가지 인간 만상이 들어있고 정치와 문화, 여성, 아이들의 존재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어서 영웅전 이야기로 옮겨가기도 했다.
또한 한국인의 97%가 있는 몽고반점에 대해 우리는 수치를 느끼지 않고 단일 민족의 휘장이나 정체성쯤으로 여긴다는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한강의 소설 '몽고반점'. 1회 독서 모임에서 생명과 살아있음 또는 소멸에 대해 열띤 이야기를 나눈 한강의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두었다'를 공연히 생각하면서 흐뭇했다.
엎어 재운 서양 아이들과는 다르다. 한국 애들은 누워 지내던 태에서 엎어지는 운동을 하고 다음에는 고개를 들고 누에 벌레처럼 배로 기어가는 단계에 이른다. 1년 가까이 그런 과정을 제힘과 의지로 자연스럽게 통과해야만 두 발로 일어서는 마지막 봉우리에 오르게 된다. 중력의 법칙에 따르면 엎드려 기어 다니는 이상으로 편한 자세는 없다. 이 세상 어떤 의자나 책상도 두 다리로 서 있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왜 아이들은 누가 시키지도 않는데 모험을 자청하는가? 한국의 장판은 양탄자가 깔린 서양이나 일본의 다다미방과는 다르다. 한번 넘어지는 콘크리트 바닥이나 다름없다.
아이들은 무릎을 찧고 머리를 부딪혀 울면서도 다시 일어선다. 유난히 정이 많은 한국의 어머니, 아버지들인데도 애가 일어나 걸음마를 배우는 순간만은 옆에 떨어져서 추임새만 한다. ‘따로~따로~따로~'라고 외치면서 손뼉을 친다. 아이는 다시 일어섰다가는 쓰러지고 쓰러졌다가는 또 일어선다. 등뼈를 꼿꼿이 세우고 이 땅의 지평 위에 우뚝 선다.'한 일 一'자의 땅바닥 위에 사람 형상을 딴 '큰 대大'자를 세워놓은 한자의 그 '설 입立'자처럼. 한 폭의 깃발처럼. 그런데 서양 아이들은 거의 대부분이 최초로 일어선 순간의 감동을 잘 모른다.
큰 교통사고를 당해 전신마비 정도의 위기를 극복하고 필라테스 강사 된 강미영 원장은 나에겐 특별한 운동 선생님이다. 사람의 몸에 대하여 움직임에 대하여 정말 많이 공부하고 알고 있다. 몸의 움직임의 흐름을 일깨우고 근육을 단련하기 위해 자주 언급하는 말이 바로 “아기의 움직임을 보면 답이 있다"이다. 그만큼 아이가 성장하면서 수많은 시도 끝에 성공하는 각 움직임은 자연스럽고 중력의 힘에 맞서서 인간의 몸의 기관 모두를 이용해 엄청난 에너지가 드는 과학적인 움직임의 힘이다. 아이가 뒤집기를 하고 고개를 들고 배밀이를 하고 엎드리고 앉고 딛고 일어서는 그 모든 과정은 어른들이 효과적으로 온몸의 관절과 근육을 효과적으로 단련시키는 운동법도 되는 것이다.
좌식 문화인 한국의 아이들은 서양의 아이들처럼 보행기나 스와들에 묶여있지 않고 자유롭게 발과 손을 썼다.
문화적 배경 속에 자유롭게 뒤집고 배밀이를 하고 앉고 기고 일어서서 걸어가는 그 일련의 움직임들이 아마도 크게는 한국인들의 두뇌발달과 각종 발달에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도 해본다.
이야기의 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미국 '픽사'의 수많은 구성원 중에 가장 높은 연봉을 가진 두 명이 있는데 바로 ‘스토리 메이커'이다. 이야기꾼들을 구하는 일이 가장 힘든 일이고 주목받는 일이 될 것이고 앞으로 AI 시대를 맞서는 이야기꾼들의 활약에 관한 이야기도 나누었다.
이 책에는 더 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이쯤에서 마칠까 한다. 칼럼의 연재로 시작한 한국인 이야기 12 시리즈 중에 첫 시리즈인 '한국인 이야기, 탄생 너 어디에서 왔니'는 한국에서 태어난 한국인이라면 꼭 한번 읽어볼 만한 추천 책이다. 이어령 님을 두고 '천재'라는 수식어가 아깝지 않은 분이라더니 정말 책을 읽는 내내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암 투병 중에 힘겹게 집필하셨다는 이 책을 술술 쉽게 읽어 버리는 게 죄송스러운 마음이 들 정도다. 부디 건강 회복하여서 한국의 대표 지성으로 한국인이 모르는 한국인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