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은 공로연수 중이다. 출근하지 않고 급여는 받는 꿀 빨아먹는 1년 차에 들어갔지만 내 대신 집안 살림을 맡아서 하니 꿀을 빨고 있는지 똥을 싸고 있는지 그것은 당사자만이 알 수 있지만 여쨌거나 출근하지 않을 자유가 있으니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남편이 부럽기도 하다.
남편은 아침마다 나를 데려다주는데 차로 15분 걸리는 짧은 길이지만 우리는 그때 이야기를 많이 한다.
차 안에서 나누는 대화는 집에서 하는 대화보다 특별할 때가 있다. 둘만 있는 좁은 공간에서 바닥까지 드러나는 마음의 소리들을 나눌 때가 있으니 오늘 아침이 그랬다.
나: 내 또래 여자들이 많이 아프더라. 나랑 동갑인 여자들이 특히 아프더라고.
남편: 몸 아픈거야 어떻게 못 해주지만 사는 동안 마음은 안 아프게 해 줄게...
삼십년 참고 산 결과, 대문자 티의 남편은 F로 변했다. 그동안 마늘은 요리에 넣어서 먹었으니 웅녀가 사람이 될 만큼의 양은 나랑 사는 삼십년 동안 먹었겠지만 쑥은 아닐텐데 남편은 공감해주는 남자 사람이 된 것이다.
뭐야 뭐야. 이 놈의 남편이 입에 사탕을 물었나. 금수저가 되라고 했지. 사탕수저가 되라고 한 적은 없는데 이미 될 수 없는 금수저는 패쓰하고 입에 사탕을 물기로 작정을 한 모양이었다.
말을 안 하면 안 했지 거짓말로 상황을 피해갈 줄 모르는 성격이라서, 일본어로 표현하자면 くうきをよむ [空気を読む] 공기를 읽는, 분위기 파악을 할 줄 아는, 눈치 좀 깔 줄 아는 사람이 전혀 아니었기때문에 고구마 백 개 쯤 먹은 것 같은 숨막히는 때도 있었는데 아침 출근 길에 한마디 해 준 걸로 고구마 얹힌 게 쑤욱 내려갔다.
남편이 공기를 읽지 못하고 나에게 고구마 백개의 답답함을 주었던 넘버 원의 사건은 바로 이것이다.
연말정산에서 백만원을 토해내게 생긴 상황에서 설 명절이 돌아왔고 15년 전 쯤 우리에게 백만원은 큰 돈이었다. 물론 지금도 그렇지만 그 때는 한창 세 아이에게 교육비 지출도 큰 때라서 과장된 표현으로 나에게 백만원은 손가락 하나 떨어져나가는 것 같은 아픈 일이었는데 시댁에 가서는 어쩔수없이 웃고 떠들도 마시는 일을 하게 되었는데 문제는 저녁에 일어났다.
직장을 그만두고 새로운 사업을 시작한 둘째 동서네가 일이 자리를 잡아 돈을 많이 벌고 있는 상황이었으니 한참 돈을 버는 사람들이 하고 싶은 말이란, 돈 얘기말고는 없었으니 시댁의 4형제가 모여 술을 마시는 술자리에서 대화의 주제는 1도 돈이었고 2도 돈이었다.
나도 돈이라면 할 말이 많았으나, 둘째네가 하는 돈 얘기와는 결이 달랐다.
연말정산으로 백만원을 토해내게 돼서 백만원이 가시처럼 걸려있었는데 동서는 백만원이 아니라 삼백만원짜리 가방을 산 이야기부터 돈 쓰는 재미들린 이야기를 못 해 안달이었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참고 누르고 들어주면서 있었지만 300만원짜리 가방을 사서 집에 왔는데 잘려고 누웠더니 옆에 있던 몇 백짜리 가방이 눈에 어른거려서 그걸 또 사도 되냐고 자기 남편에게 물었다는 이야기의 언저리쯤에서는 자겠다고 들어와서 자버렸다.
자려고 누웠는데 눈에 뭐가 어른거렸다라는 이야기는 새내기 당구쟁이들에게서나 들어 봤지 명품 가방 썰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내가 경험했던 자려고 누웠는데....의 경험담은 제주도 살 때 고사리 꺾는 재미가 들렸을 무렵, 자려고 누웠는데 고사리가 어른거렸다의 경험담 말고는 없었는데 삼백만원짜리 명품 가방을 이미 사 들고 왔는데 옆에 있던 가방이 어른거렸다라는 이야기는 명품이라도는 짝퉁도 없던 시절의 나로서 상상도 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더 어이없던 것은 남편이었다. 자기 부인이 기분 나빠 들어가는 줄도 모르고 자리지키고 앉아 함께 웃고 떠드는 소리가 그렇게 듣기 싫을 수가 없었다.
자려고 누웠지만 잠이 오지 않았던 밤이었다. 길었던 시댁에서의 명절을 마치고 집으로 올라 오는 길 내 생애 최초로 6시간 반 쯤 묵언수행을 했다. 차는 막혀 6시간이 넘게 걸리지, 부인이라는 사람은 말이 없지, 답답했을 남편이 내가 무슨 일로 침묵 수행을 하는 지 물었으나 눈치를 까지 못 하고 그걸 물어봐야 아나 하는 어이없는 마음에 더욱 말이 하기 싫어서 명절 연휴지만 출근을 해 버렸고, 동생을 만나 밥을 먹으면서 나는 속상함에 울어버렸다.
동서가 삼백짜리 가방을 샀다고 울었던게 아니었다. 그 사람은 그 사람이고 나는 나, 삼천짜리 가방을 샀다고 해도 가치관이 다른 사람들이니 비교할 바가 아니라 울 가치도 없는 일이었지만 다음 달 월급에서 백만원이 공제되고 나온다는 현실적인 이유로 속 상해있는 내 앞에서 동서의 가방 이야기에 함께 웃고 떠들던 모습이 싫었을 뿐이다. 눈치가 없던 남편이 그렇게 미울 수가 없었던 명절 뒤 끝이었다.
15년도 더 전의 일이다.
아직도 백만원은 우리집에서 큰 돈이지만 그동안 동서의 명품사랑은 삼백단위가 아니라 천단위의 가방을 들고 다닐 만큼 그 집의 살림은 폈다.
얼굴도 열심히 피고 있는 중이라 몇 달의 간격을 두고 볼 때마다 빵빵하게 펴져 있는 얼굴에 깜짝 놀랄 때가 있다. 다만 마음도 그만큼 펴져 있는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내 마음은 확실히 펴졌다.
남편: 몸 아픈거야 어떻게 못 해주지만 사는 동안 마음은 안 아프게 해 줄게...
요즘 남편이랑 함께 감사일기를 쓰기 시작했는데 아마 감사일기때문에 마음이 더욱 부드러워졌을것이다.
감정코칭 수업을 다니고 있는 남편이 숙제로 받아 온 감사일기 쓰기에 나까지 함께 하면서 우리의 대화는 주제가 다양해지고 많아졌다.
없던 눈치도 슬슬 생기는지 입에 사탕 문 소리도 잘 하고 그게 나이 탓인지, 감사 일기 탓인지, 생존본능에서 나오는 소리인지는 모르겠으나 새롭게 시작한 일 중에서 잘 했다 싶은 일은 "감사일기 쓰기"
남편: 몸 아픈거야 어떻게 못 해주지만 사는 동안 마음은 안 아프게 해 줄게...
그 말로 그 때 속상했던 마음이 풀렸다. 15년 걸렸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