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대선 때 일이다. 일반 유권자 투표에서 공화당의 조지 W. 부시는 민주당의 앨 고어보다 54만 표를 적게 얻었지만 대통령에 당선됐다. 선거인단 투표에서 전체 538명의 과반인 271명을 확보했기 때문이다.
2016년에도 민주당의 힐러리 클린턴은 공화당의 도널드 트럼프보다 일반 유권자 투표에서 286만 표나 앞섰지만 선거인단 수에서는 80명이나 밀려 고배를 마셨다. 이처럼 미국은 건국 이래로 모두 59차례의 선거로 46명의 대통령이 탄생했는데, 일반 유권자 투표에서는 지고도 대통령에 당선이 된 사람이 5명이나 된다.
▲선거인단 제도의 모순을 풍자한 삽화(The Palm Beach Post)
선거인단은 말 그대로 ‘대통령을 뽑는 사람들’이다. 선거권을 가진 국민이 대통령 후보에게 직접 투표하는 대부분의 나라와는 달리, 미국은 주(state)별로 선거인단을 뽑고, 그 선거인단이 다시 대통령을 선출하는 간접선거 제도를 채택하고 있다. 단순히 유권자로부터 표를 가장 많이 얻었다고 해서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많은 '선거인단'을 확보해야 승리할 수 있는 것이다.
승자독식 방식
각 주의 선거인단 선출은 해당 주에서 한 표라도 더 얻는 후보가 그 주의 표를 모두 가져가는 이른바 '승자독식(Winner-Take-All)'방식이 적용된다. 어떤 주의 선거인단 수가 10명이라면 전체 득표에서 한 표라도 더 얻은 후보가 그 주에 배정된 선거인단 10명의 표를 다 차지하는 식이다.
미국의 50개 주 가운데 48개 주가 승자독식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네브래스카와 메인만 예외다. 2개 주에서 채택하고 있는 선거구제는 직접 투표에서 1등을 한 후보에게 선거인단 2석을 배정하고, 하원 지역구별로 1등에게 선거인을 배정하는 방식이다.
예를 들면, 2020년 대통령 선거에서 2개의 하원 지역구를 가지고 있는 메인은 총 4석의 선거인단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주 전체 선거에서는 조 바이든이 1등을 했기 때문에 바이든에게 먼저 2석이 배정됐고, 하원 지역구는 트럼프와 바이든이 각각 1곳에서 1등을 했기 때문에 각각 1석씩이 배정됐다.
3개의 하원 지역구를 가지고 있는 네브라스카의 직접 투표에서는 트럼프가 1등을 했고, 3곳의 하원 지역구 선거인단 투표에서 트럼프가 2곳에서 1등을 했기 때문에 총 5석의 선거인단 중 4석은 트럼프에게, 1석은 바이든에게 할당됐다.
▲2016년 대선 당시 선거인단 제도에 항의하는 모습(Getty Images)승자독식 방식은 과도한 사표가 발생한다는 문제점이 있다. 극단적으로 보면 49.9%의 유권자 표가 사표가 될 수 있다. 표의 등가성(等價性)에 중대한 문제가 있다. 한마디로 표의 가치가 평등하지 않은 것이다.
예를 들어 2015년 기준 캘리포니아의 유권자 수는 와이오밍의 유권자 수보다 약 66.8배 많다. 하지만 캘리포니아의 선거인단은 55명으로 와이오밍의 3명 대비 18배 많을 뿐이다. 그 결과 와이오밍 유권자들은 캘리포니아 유권자들보다 3.7배 과대 대표된다고 할 수 있다.
선거인단 제도는 어떻게 생겨났나?
1787년 열린 헌법제정회의에서 대통령 선출방법으로 초기에는 의회가 선출하는 방법, 주지사가 선출하는 방법, 주 의회가 선출하는 방법, 직접선거로 선출하는 방법을 놓고 회의기간 내내 논쟁을 벌였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회의에 참석한 대부분의 대표자들은 처음부터 직접투표로 대통령을 선출하는 방안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알렉산더 해밀턴이 쓴 <연방주의자> 논설에 이러한 생각이 잘 나타나 있다.
“대통령 선출은 대통령직에 적합한 자질을 분별할 수 있고, 자신의 선택을 뒷받침하는 동기와 근거를 신중하게 판단할 수 있는 가장 뛰어난 역량을 갖춘 사람들에 의해 이뤄져야 한다.”
그리고 또 다른 헌법입안자인 모리스는 “선거인단이 미국 전역에 걸쳐 동시에, 그리고 서로 멀리 떨어진 거리에서 투표하기 때문에, 음모라는 거대한 해악을 피할 수 있고, 매수가 불가능하다”라고 장점을 설명하였다(Max Farrand ed., The Record of the Federal Convention of 1787, 2 vol. p. 500). 최초의 헌법입안자들은 선거인단 제도를 민주주의에 대한 일종의 안전장치 내지 여과장치로 본 것이다.
원죄의 상징, 선거인단 제도
2016년 대선 후 <뉴욕타임스>는 사설에서 선거인단 제도를 “건국 시대의 흔적, 그 이상으로 살아있는 원죄의 상징”이라고 비판했다. 원죄란 '노예제'를 말한다.
1787년 필라델피아 헌법 제정 회의 당시 선거인단 등을 각 주에 할당할 때, 북부 주들은 백인 남성만을 인구산정 기준으로 삼을 것을 주장했고, 인구의 40%가 노예인 남부 주들은 흑인도 기준에 포함할 것을 주장했다. 결국 북부와 남부는 ‘5분의 3 규칙’에 합의했다. 주의 선거인단 수 등을 결정하는 인구를 산정하면서 흑인 1명을 백인의 5분의 3명으로 인정하면서 남부에 의석수를 3분의 1만큼, 선거인단 수를 3분의 1만큼 더 주기로 합의한 것이다.
당시의 절묘한 합의를 비판할 것까진 없다. 모래알 같은 13개 주를 하나의 국가로 묶어야 하는 시대적, 상황적 한계를 고려한 선택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거인단 제도의 효용성은 사라진 지 이미 오래다. 선거인단 폐지를 내용으로 하는 헌법 수정안이 700여 차례나 의회에 제출된 것만 보아도 미국인들이 선거인단 제도를 얼마나 부정적으로 인식하는지를 알 수 있다.
실제로 “건국의 아버지, 선거인단 제도를 우리에게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제도는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최상의 제도입니다”라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그저 선거인단 제도는 '참으로 우스꽝스러운 것'이라고 자폭하는 미국인을 간혹 만났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