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국가에서 선거와 관련된 폭력은 상상할 수 없다. 선거 과정이 삶과 죽음의 문제처럼 절박하고 치열했더라도 승자와 패자는 평화롭게 결정되어야 한다. 하지만, 현실에선 평화적 선거와 폭력적 선거의 경계선은 서로 맞닿아있다.
선거 폭력은 민주주의가 미숙한 ‘제3세계’에서만 일어나는 일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프랑스는 2007년 사르코지 대통령 당선 이후 일어난 폭동으로 78명의 경찰관이 부상을 당했고 700건이 넘는 방화 사건이 발생했다. 같은 해, 케냐에서는 선거 이후 폭력사태로 1500명이 사망했다. 이러한 예는 넘쳐난다. 2008년, 인도에서는 선거폭력으로 18명이 사망했고, 몽골에서는 5명이 사망했다. 같은 해 기니 공화국, 벨라루스 공화국, 이란, 코트디부아르에서도 선거 폭력사태가 연이어 발생했다.
미국 역사에도 폭력, 폭동의 흔적이 짙게 배어있다. 심지어 스포츠 경기를 마치고도 심심치 않게 폭력사태가 발생한다. 폭력이 일상적이기까지 하다. 하지만 선거와 관련해선 1860년 링컨의 승리로 62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남북전쟁을 교훈으로 선거와 관련한 심각한 폭력사태는 발생하지 않았다.
1960년 존 F. 케네디에게 12만여 표의 근소한 차로 패배한 닉슨조차도 ‘헌법과 민주주의가 더 우선’이라며 케네디의 당선을 축하했다. 이러한 전통은 2000년 엘 고어 부통령에 이르러 정점을 이뤘다. 537표 차로 낙선한 앨 고어 부통령은 플로리다에서 재검표 소송까지 갔지만, 연방대법원의 석연찮은 재검표 중단 결정을 존중하며 곧바로 승복했다. "외국 스파이가 미국에서 훔쳐 갈 건 인텔 마이크로칩이 아니라 고어 연설문"이라고 할 만큼 감동적인 승복연설로 앨 고어는 둘로 갈라진 미국을 하나로 연결했다.
<워싱턴포스트>는 앨 고어의 연설을 “유머, 축하, 기도와 분열에서의 회복에서 패배의 씁쓸함까지도 담겨있는 승복연설의 가장 훌륭한 예"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트럼프 대통령보다 전국 득표에서 약 280만 표나 더 얻었지만, 선거인단 수에 밀려 패배한 힐러리 클린턴도 “트럼프가 우리의 대통령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에게 마음을 열고 나라를 이끌 기회를 줘야 합니다. 당파적인 원한은 제쳐 두고 그의 국가 운영에 신의 축복이 따르길 바랍니다”라는 감동적인 연설을 남기고 정치무대에서 퇴장했다.
승자가 관대 해지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반면, 패자가 고통을 뒤로하고 깨끗이 승복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대통령 선거에선 더욱 그렇다. 패배는 ‘연장으로 손톱을 빼는 것과 같은 고통’으로 비유되기도 한다. 패배가 지지자들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생각하면 더욱 고통스럽다. 더구나 선거에서의 패배는 공직에서의 영원한 퇴장을 의미하기도 한다.
▲ 2020년 대선에서 패한 트럼프 지지자들이 의회의사당을 점거한 모습
승복연설의 중요성 미국에서 선거는 승자가 승리를 선언했을 때가 아니라, 패자가 패배를 인정했을 때 비로소 종결된다. 물론 법적으로는 패배한 후보자의 승복이 꼭 필요한 절차는 아니다. 그래서 패배의 인정 여부가 사소한 문제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아름다운 승복이야말로 미국식 민주주의의 ‘총아’이자 자부심이라고 할 수 있다. 승복의 짧은 순간만큼은 패자가 승자보다 더 빛날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이기 때문이다.
대통령 선거는 전쟁에 비유되기도 한다. 그래서 패자의 승복연설은 항복문서와도 같다. ‘손에 흰 백합을 쥔 채 관 속에 누워있는 기분’이더라도 패자는 승자에게 축하의 말을 건네야만 한다. 전쟁 직후에 시민들은 평화를 원하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패자에게는 찬사가 주어지고 때론 영예로운 역할이 부여될 수도 있다. 그래서 승복연설은 중요하다.
19세기 중반까지도 승복연설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그저 당의 기관지에 짧은 성명을 발표하는 게 고작이었다. 대중과의 의사소통 수단이 마땅치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1814년에 신문사가 300개 정도였던 것이 1850년엔 약 2500개로 크게 증가하면서 양상은 달라졌다.
1860년 대선에서 에이브러햄 링컨에게 패배한 스티븐 더글러스의 연설을 승복의 기원으로 보는 것이 정설이다. 노예제도를 둘러싸고 남부와 북부가 첨예하게 대결하는 상황에서 더글러스는 이렇게 말했다.
“당파심이 애국심을 앞설 수는 없습니다. 링컨 대통령, 나는 당신과 함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연락을 하는 전통은 1896년 대선에서 패배한 제닝스 브라이언이 윌리엄 매킨리 당선자에게 축하 전보를 보낸 것이 최초다. 그리고 처음으로 라디오 방송에서 공개적으로 패배를 인정한 사람은 1928년 허버트 후버에게 패배한 엘 스미스였고, TV를 통한 승복연설은 1952년 아이젠하워에게 패한 애들레이 스티븐슨이 처음이었다.
‘우아한 승복’으로 갈라진 미국을 다시 하나로 연결하다 2008년 11월 4일 선거 당일 밤, 공화당 후보였던 존 매케인은 패자임에도 그에게 전례 없는 관심이 집중됐다. 오바마 당선인이 시카고의 그랜트Grant 공원에 모인 12만 5천 명의 열성적인 지지자들 앞에서 승리 연설을 시작하기 전에 매케인은 패배를 인정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가 패배를 인정하기 전까지 선거는 끝난 것이 아니다. 당선인의 승리연설보다 패자인 매케인이 먼저 연설을 해야 한다. 이것이 미국의 전통이다. 이때까지 오바마 당선인은 화면에 비추어지면 안 된다.
매케인이 수백 대의 TV 카메라와 7천여 명의 지지자들 앞에 섰을 때 모두가 긴장했다. 오바마 당선인은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 첫 흑인계 미국인이자 케냐 출신의 무슬림 아버지를 두고 있어 공화당 지지자들은 그를 ‘급진파’, ‘테러리스트’로 부를 정도의 극심한 반감을 표출했다. 선거운동 기간에는 오바마의 이름이 불릴 때마다 공화당원들은 ‘죽어라’는 저주를 퍼붓는 것이 보통이었다.
▲ 지지자들 앞에서 승복연설을 하는 존 매케인 공화당 후보
그날도 매케인의 지지자들은 오바마의 이름이 불릴 때마다 야유를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매케인이 지지자들을 향해 오바마를 ‘나의 대통령’이라고 지칭하며 패배를 인정하자, 그의 지지자들은 당선자에 대한 조롱을 멈췄다. 첫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대통령 당선이라는 역사적인 순간을 아낌없이 축하함으로써 선거 시스템을 지키고 미국을 분열이 아닌 화합으로 이끌었다.
“오늘날 미국은 잔인하고 교만한 과거의 미국과는 다른 세계입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미국의 대통령이 된 것만큼 더 좋은 증거는 없을 것입니다.”
매케인은 단순한 승복을 넘어 오바바의 승리에 역사적인 의미까지 보탰다.
만약 매케인이 선거 결과에 대해 불만을 표출하거나, 부정행위가 있었다고 주장했다면 정치적인 대혼란을 넘어 심각한 폭력까지도 야기되었을 수도 있었다. ‘
대통령사’를 연구한 로버트 달렉은 이렇게 지적한다. “평화로운 권력 이양에 힘쓰겠다는 걸 보여주는 승복연설은 단순한 연설이 아니다. 자신을 지지한 유권자에게 패배를 받아들이라고 보내는 신호다.” 트럼프, 민주주의를 산산조각 내다. 미국 정치의 자부심인 승복의 전통도 트럼프에 이르러 산산조각이 났다. 트럼프의 불복 조짐은 오래전부터 감지됐다. 그는 2016년 대선에서 민주당 지지층이 많이 활용하는 우편투표의 신뢰성 문제에 이의를 제기하기도 했지만, 자신의 승리로 끝나면서 불복 문제는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2020년 7월, 트럼프는 <FOX> 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올 대선에서 지면 승복하겠느냐”는 질문을 받고선 이렇게 답했다. “두고 봐야 안다. 난 훌륭한 패자가 아니다.” 2달 후 다시 <FOX> 뉴스와의 인터뷰에선, “우편투표는 민주당이 저지르는 사기”라며 선거 시스템 자체를 부정하기에 이르렀다.
2020년 대선 개표 결과, 트럼프는 패배가 가시화되자 곧바로 1000명에 달하는 변호인단을 꾸리고 36차례에 걸쳐 불복 소송을 연이어 제기했다. 그리고 선거 결과를 부정하거나 지지자들을 선동하는 내용의 트윗을 하루에도 수십 차례씩 올렸다. <CNN>에서 “대선 불복 트윗하느라 나랏일을 소홀히 한다”는 비난을 할 정도였다. 그의 대선 불복은 상·하원 합동회의 선언문 낭독이 있기 하루 전 정점에 다다랐다.
“간밤에 5만 개의 투표용지가 발견되었다. 제3세계 국가만도 못하다.” “펜스 부통령은 (변칙과 사기, 부패한 절차로 빼앗긴 표를) 각 주로 다시 돌려보내야 합니다. 우리는 이길 겁니다. 마이크 하세요! 지금이 최상의 용기를 발휘할 때입니다.”
상하원 합동회의 선언문 낭독 1시간 전 트럼프는 백악관 앞에 운집한 10만 명의 열성 지지자들에게 “절대 승복하지 않을 것", "우리가 이겼다. 압승이었다. 도둑질을 멈추게 할 것"이라고 연설을 했다. 연설 말미엔 해서는 안 될 말도 덧붙였다.
"우리는 의사당에 갈 것이다. 공화당 의원들에게 자부심과 용기를 불러일으켜서 이 나라를 되찾게 할 것이다."
트럼프의 선동은 지지자들을 폭도로 돌변하게 했고, 의사당 점거라는 충격적 결과로 이어졌다. 바이든 당선인에 대한 의회 승인을 중단시키기 위해 의사당에 난입해 회의장을 무력으로 점거하는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1814년 영국군이 의사당을 점령하고 불태운 이후 206년 만에 민주주의의 상징인 의사당이 폭력으로 유린되었다. 의사당은 4시간 만에 정상화됐지만 미국인에겐 상상할 수 없는 충격과 불명예를 안겨주었다.
상하원 합동회의 선언문 낭독은 50개 주와 워싱턴 DC에서 선출한 538명의 선거인단이 2020년 12월 14일 각 주도州都에서 투표한 결과를 개표하고 이를 인증하는 자리다. 취임식 전에 거치는 마지막 ‘통과의례’인 셈이다. 지금까지 상하원 합동회의 선거인단 개표행사는 의회사무처 직원들이 의원들의 출석을 종용할 정도로 요식행위로 여겨져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