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두교서를 하는 동안 한 명의 각료는 안전한 장소로 보내진다. 정부에 대한 치명적 공격이 감행될 경우,
이 각료는 우리의 새로운 대통령이 된다. 이는 ‘지정생존자’로 알려져 있다”
#Seane 1
주택도시개발장관 커크맨(키퍼 서덜랜드 분)은 헐렁한 후드티에 팝콘을 안주로 맥주를 마시면서 대통령의 연두교서 실황을 TV로 지켜보고 있다. 그런데 갑자기 TV 화면이 먹통이 돼버린다. 이윽고 검은 정장 차림의 건장한 경호원들이 문을 박차고 들어온다.
"장관님, 지금 당장 휴대폰을 내려놔주십시오."
"마이크, 무슨 일인가?
"당장요."
"알았네."
"의회의사당과 연락이 끊겼습니다. 정보가 확인될 때까지 대피소로 모시겠습니다."
#Seane2 - 대피소로 이동하는 차 안
“확인됐습니다. VIP는 사망했습니다. 상·하원 의장, 각료 모두 생존자는 없습니다.”
“말도 안 돼.”
“장관님, 우리는 정부의 연속성을 유지해야 합니다. 이제부터 당신이 미합중국의 대통령이십니다.”
▲ <지정생존자> 시즌1, 첫 편의 오프닝(유튜브 동영상)
<Netflix>에서 상영 중인 미드 ‘지정생존자’의 내용 일부다. 이 드라마는 ‘지정생존자’로 남겨진 학자 출신의 주택도시개발부장관 톰 커크맨이 엉겁결에 대통령이 된 뒤 진정한 대통령으로 성장해 나가는 내용이다.
선거 없이도 대통령이 될 수 있다.
대통령이 사망하거나, 탄핵되거나, 사퇴하는 경우엔 선거 없이도 대통령이 될 수 있다. 지금까지 8명의 대통령이 그랬다. 대통령에게 유고가 생기면 《대통령직 승계법≫에 따른 승계 순위대로 대통령직을 맡게 된다. 승계 순위가 가장 앞서는 부통령이 대통령직을 승계할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도, 지금까지 대통령이 재직 중 사망한 경우는 모두 8차례(암살 4차례, 자연사 4차례)인데, 모두 부통령이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언제부터 지정생존자 제도가 시작됐는지는 확실치 않다. 상원 기록실(the Senate Historical Office)에 따르면 워싱턴 D.C.를 포함한 미국 전역이 소련의 핵무기 공격을 받을 것을 우려해 "냉전시대인 1960년대 초부터 이 제도를 운영했다"고만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1984년 이전에는 지정생존자가 누구였는지에 대한 기록도 찾을 수 없다. 그리고 2003년부터는 대통령의 의회 연설이 있을 때는 의원 중에서도 한 명은 연설에 참석하지 않고 있다. 의회의 지속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다.
지정생존자는 대통령과 참모가 같이 정한다. 보통은 비서실장이 결정해서 대통령의 재가를 받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통령직 승계법》에 규정된 승계 순위자면 누구라도 지정생존자가 될 수 있다. 다만, 《헌법》제2조에서 정한 대통령의 자격을 충족하고 있어야 한다. 예컨대, 출생을 통해 미국 시민권을 획득했고, 35세 이상이면서 시민권을 14년 이상 보유한 사람이어야 한다.
실제로 국가적 참사가 일어난다면?
지정 생존자는 자동으로 대통령직을 승계할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실제 예를 들어보자. 2010년 오바마 대통령의 연두교서 발표 당시의 지정 생존자는 션 도노반(Shaun Donovan) 주택도시개발장관이었다. 그러나 드라마처럼 의사당에 모인 인사들이 모두 사망했더라도 도노반 장관은 대통령직을 승계할 수 없다. 왜냐하면, 지정생존자인 도노반 장관(13순위)보다 승계 순위가 앞서는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4순위)이 런던에서 열리는 국제회의 참석차 출장 중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통령 경호실은 힐러리 클린턴 장관의 영국 출장 기간 동안 대통령에 준하는 특별 경호를 제공했다.
지정 생존자가 대통령직을 승계하는 경우는 두 가지다. 하나는 행사에 참석한 대통령과 부통령을 포함하여 승계 순위자 모두가 사망할 경우고, 두 번째는 일부가 생존했더라도 지정 생존자보다 승계 순위가 낮은 경우다. 만약 행사에 참석한 생존자가 승계 순위에서 지정 생존자보다 앞서고 대통령직을 수행하는 데 지장이 없다면 지정 생존자는 대통령직을 승계할 수 없다.
지정 생존자는 매번 ≪대통령 승계법≫에 명시된 17명의 대통령직 승계자 중 1명으로 결정한다. 하지만 각료(장관)가 아닌 부통령이나 하원의장, 상원 임시의장은 지정 생존자로 지정하지 않는 것이 관례다. 지금까지 부통령이 지정 생존자로 지정된 적이 딱 한 번 있는데, 바로 2001년 9.11 테러로 인해 부시 대통령이 의회에서 상·하원 합동회의 연설을 했을 때다. 부통령이 상원의장 직을 겸직하고 있으므로 부시 대통령이 상·하원 합동회의 연설을 할 때 하원의장과 함께 의장석에 앉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혹시라도 또 다른 테러가 발생할 것을 우려해 승계 1 순위자인 딕 체니 부통령을 지정 생존자로 지정한 것이다. 게다가 만의 하나 부통령까지도 직무 불능 상태에 빠질 것을 대비해서 토미 톰슨 복지부장관도 지정 생존자로 지정하여 부통령과 다른 장소에 머물도록 조치를 했다.
▲ 2020년 트럼프 대통령의 국정연설(연두교서)에서 손을 내미는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을 외면하는 모습(좌)과 국정연설이 끝난 후 트럼프 대통령의 연설문을 찢는 모습(우)
2차례에 걸쳐 지정 생존자로 지정된 사람도 있다. 가장 최근에 제 존슨 국토안보장관이 2016년 오바마 대통령의 연두교서에 이어서 2017년 트럼프 대통령 취임식 때도 지정 생존자로 지정되었다. 재밌는 것은 1월 19일에 지정 생존자로 지정된 존슨 장관은 바로 다음날인 1월 20일에 트럼프에 의해 바로 해고당했다. 도널드 에반스 상무장관 역시 2005년과 2004년 부시 대통령의 연두교서 때 지정 생존자로 지정된 바 있다. 존슨 장관은 두 대통령 밑에서 지정 생존자를 했지만, 에반스 장관은 같은 대통령 밑에서 지정 생존자를 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한편, 오바마 대통령의 취임식 때도 트럼프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전임 부시 대통령이 임명한 장관을 지정 생존자로 지정했다. 서로 다른 점은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식 바로 다음 날 해고한 반면, 오바마 대통령은 2년 6개월이나 자신의 각료로 함께 일했다는 점이다.
역대로 가장 젊었던 지정 생존자는 1994년 빌 클린턴 대통령의 연두교서 때 지정 생존자였던 마이크 에스피 농업장관이다. 당시 그의 나이는 40세 56일이었다. 그다음이 1999년 연두교서 때 지정 생존자였던 앤드류 쿠오모로 당시 41세 44일이었다.
3일 천하? vs 3시간 천하!
▲ 유사시 핵무기 공격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서류가방 모양의 핵가방 모습(Getty Images)
지정생존자와 관련된 유명한 일화가 있다. 1997년 2월 4일 빌 클린턴 대통령의 연두교서에서 농업부장관인 댄 글릭맨이 지정생존자로 지정되었다. 글릭맨은 'Nuclear football'이라고 부르는 핵 코드가 있는 가방과 함께 앤드류 공군기지에서 대통령 전용기 '에어포스 원'을 타고 뉴욕으로 이동한 후 자신의 딸이 살고 있는 뉴욕의 아파트로 이동해 경호원과 함께 TV로 대통령의 의회 연설을 지켜봤다.
재밌는 것은 대통령의 연설이 끝나고부터다. 대통령이 연설을 마치자마자 경호원들이 순식간에 사라진 것이다. 글릭맨은 할 수 없이 억수로 쏟아지는 비속에서 홀로 택시를 잡아 타고 딸과 약속한 뉴욕의 한 일식당으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지정생존자로서의 임무가 끝났기 때문에 경호도 즉시 사라진 것이다.
“나는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사람이었지만, 3시간 후에 나는 택시조차 잡을 수 없었어요. 이것은 내 인생에서 한 편의 우스운 동화 같은 일이죠.”
언론에 밝힌 글릭맨의 위트 넘치는 소감이다. 워싱턴 D.C.에 돌아와 클린턴 대통령을 만나서는 “D.C로 돌아오는 방법에 대해서는 아무도 브리핑해주지 않았다”라고 푸념을 늘어놓기도 했고, 언론과의 인터뷰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다행이다. 나는 유사시 무엇을 해야 할 지에 대해서 브리핑을 받지 못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글릭맨처럼 지정생존자 임무가 해제된 후 언론 인터뷰를 통해 후일담을 공개하기도 했지만, 2001년 9.11 테러 이후로는 이러한 풍경이 완전히 사라졌다. 설사 언론의 인터뷰 요청이 있더라도 단호하게 ‘노 코멘트’를 반복할 뿐이다. 지정생존자가 머무는 장소도 군사시설과 같은 보안구역으로 제한되고, 관련 정보가 일반에 절대 공개되지 않는다.
<참고>
핵 가방(Nuclear Football)은 3개가 있다. 대통령과 부통령, 그리고 지정생존자용이다. 약 20kg 무게의 핵 가방에는 대통령이 선택할 수 있는 핵 공격 옵션이 적혀있는 문서철인 'Black Book'과 통신장치, 안전벙커 리스트와 행동지침도 담겨있다. 핵무기 공격을 내리기 위해서는 발사명령 인증코드가 담긴 '비스킷(biscuit)'이 필요하다. 비스킷으로 대통령으로서의 자신의 신원을 증명한 뒤 국방부 워룸에 있는 국방부와 전략사령부 관계자들에게 개시 명령을 전달하게 된다. 비스킷의 인증코드가 입력되면 되돌릴 방법이 없으므로 사실상 핵 단추와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