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적 희망사항

취임식 장에서 폭탄테러가 일어난다면?

by 아이호퍼

섬뜩한 상상이다.

"대통령 취임식 도중 폭탄테러나 화학무기 공격 같은 참사가 발생한다면?"

"테러로 취임식장에 있던 모든 사람이 사망한다면?"

2017년 1월 트럼프 대통령의 취임식을 앞두고 이 문제가 이슈로 떠오른 적이 있다. 선거 기간 내내 트럼프 대통령과 대립각을 세웠던 <CNN>의 비극적 희망사항이 내포된 기사 때문이다. <CNN>은 트럼프의 취임식 전날 “국가적 참사로 오바마 행정부의 각료인 제 존슨(Jeh Johnson) 국토안보장관이 대통령 자리에 앉을 수 있다”는 내용의 방송을 온종일 헤드라인으로 내보냈다. 그 근거는 ‘지정 생존자(designated survivor)’ 제도에 있다. 대통령과 부통령을 비롯한 정부 각료들이 모두 사망하거나 직무수행이 불가능할 경우 지정 생존자가 대통령직을 승계하도록 ≪대통령직 승계법≫에서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방송 후 “폭력과 테러를 부추기는 부적절한 내용”, “시기가 악의적”, “분노를 불러일으키는 내용”이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정치평론가인 마이크 세노비치는 “CNN이 취임식에서 대통령을 암살하는 팁(Tip)을 주고 있다”, “<CNN>은 테러조직이다”라는 비난하기도 했다.

▲정치평론가 Mike Cernovich의 을 비난하는 내용의 SNS(페이스북 캡처)


팩트 체크를 해보자.

우선, "취임식 행사장에 있는 모든 사람이 사망하면 오바마 대통령이 지정 생존자로 임명한 존슨 국토안보장관이 대통령직을 승계한다"는 전제에 오류가 발견된다. 지정 생존자는 한 명만 지정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대통령 취임식 때는 2명을 지정하기도 한다. 취임식 전후로 민주당에서 공화당으로, 또는 공화당에서 민주당으로 정권이 바뀌는 경우가 그렇다. 실제로 트럼프 대통령 취임식 당시 국토안보장관뿐만 아니라 공화당의 오린 해치 상원 임시의장도 지정 생존자로 함께 지정됐다.


취임식 당일 미 상원은 다음과 같은 보도자료를 배포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요청에 따라 오린 해치 상원의원이 취임식 동안 ‘지정 생존자’의 역할을 하며, 임시의장이지만 정부의 연속성을 위하여 취임식에 참석하지 않고 비공개 장소에 머물 것이다."


따라서 취임식장에 있는 모든 인사가 사망하는 대참사가 발생하더라도 대통령직 승계 순위에서 국토안보장관보다 훨씬 앞선 해치 상원 임시의장이 대통령직을 물려받게 된다. 더구나 해치 상원 임시의장은 공화당 소속이므로 민주당으로 정권이 다시 넘어가는 일 역시 일어나지는 않는다.

▲트럼프 대통령의 요청으로 지정 생존자로 지정되었다는 내용의 오린 해치 상원의원의 SNS(페이스북 캡처)

재난이 일어나는 시기도 중요하다.

왜냐하면, 미국 ≪수정헌법≫ 제19조 제1절은 “대통령과 부통령의 임기는 임기가 만료되었을 해의 1월 20일 정오부터 시작”되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오를 기점으로 대통령 당선자의 임기 개시 여부가 결정된다. 정오가 되기 전에 재난이 발생한다면 새로운 대통령 임기가 시작되지 못한 채 지정 생존자가 대통령직을 승계하게 될 것이다. 반면, 정오가 지나고 나서 재난이 발생한다면, 새로운 대통령의 임기가 시작된 후 지정 생존자가 대통령직을 승계하게 된다.


대통령 취임식 장소에서 국가적 참사가 발생한다는 것은 대통령직 승계 순서뿐만 아니라 행정부의 정체성에도 엄청난 혼선이 초래됨을 의미한다. 불행한 일이지만 상상력을 발휘해보았다.

대통령직의 승계 순위는 여러 차례 변해왔다.

1787년 필라델피아에 모인 헌법 입안자들은 대통령직의 승계 문제에 대해 결정을 하지 않고 의회로 공을 넘겼다. 1792년에 의회를 통과한 첫 번째 ≪대통령직 승계법≫은 지금과는 순위가 약간 다르다. 1순위가 하원의장이었고 다음으로 국무부장관, 재무부장관, 국방부장관 순이었다.

승계 순위는 앤드류 존슨 대통령의 탄핵이 진행된 후 변화가 있었다. 존슨은 부통령을 임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상원 임시의장으로 선출된 벤 웨이드가 대통령 승계 1순위였다. 웨이드는 상원에서 존슨 대통령의 탄핵이 진행되는 동안 자신이 대통령이 되기 위해 목소리를 내면서 캐스팅보트를 행사했다. 심지어 탄핵투표가 이루어지기 전에 내각 인선을 했다는 소문이 돌 지경이었다.


이러한 이익 충돌의 문제를 보면서 『1886년 대통령승계법』은 승계 순위에서 상원 임시의장과 하원의장을 제외했다. 그 결과 오직 대통령이 선택한 내각의 각료만이 대통령직 승계 대상이 될 수 있었다.


『1886년 대통령승계법』은 20세기 중반까지 지속되었고, 선출된 공직자가 대통령직에 오르는 것이 중요하다는 비판론이 제기되었다. 이에 해리 투르먼 대통령에 이르러 부통령 다음으로 하원의장과 상원 임시의장이 대통령직 승계 순위자가 되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대통령직을 승계한 사람은 부통령이 유일하다.


<참고>

넥플릭스의 <지정생존자>를 모티브로 한 <60일, 지정생존자>라는 드라마가 <tvN>에서 방영된 적이 있다. 지정생존자 앞에 '60일'이라는 문구가 붙은 것은 대통령 유고(사망 등)시 60일 이내에 후임자를 선거해야 하기 때문이다(헌법 제68조 제2항). 미드에선 지정생존자였던 주택도시개발부장관(키퍼 서덜랜드 분)이 대통령이 되는 것과 달리, 환경부장관(지진희 분)이 대통령직을 승계하는 점도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