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이호퍼 Mar 31. 2021

돼지를 대통령 후보로 추대하다

1968년 민주당 '피의 전당대회'

'피의 전당대회'. 1968년 시카고에서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를 가리키는 말이다. 미국 역사상 가장 폭력적인 전당대회였기 때문에 붙여진 불명예스러운 이름이다.


게다가, ‘피가수스(Pigasus)'라는 이름의 돼지가 대통령 후보로 나선 것으로도 유명하다. 피가수스는 돼지를 뜻하는 '피그(pig)'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날개 달린 말 '페가수스(pegasus)'의 합성어다. 시위대가 피가수스를 통해 외친 정치적 구호는 "꿀꿀… 더 맨(The Man) 타도하자"였다. '더 맨'은 원래 은행원(The Bank Man)에서 비롯된 말이다.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은행원에 대한 부정적 의미로 쓰였던 것이 차츰 기득권 계층과 집권 보수세력 등을 비난할 때 '더 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영화, <트라이얼 오브 더 시카고 7>

피의 전당대회를 다룬 영화가 있다. 2020년 하반기에 개봉한  넷플릭스의 <트라이얼 오브 더 시카고 7>이다. 1968년 시카고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평화롭게 시작했던 반전 시위가 경찰과 주 방위군의 무력 진압으로 인해 폭력 시위로 변질되면서  시위 주동자 7명에 대한 최악의 재판 과정을 다룬 법정 영화다. '웨스트 윙' '뉴스룸' 등의 시나리오를 쓴 각본가 출신 아론 소킨 감독의 두 번째 연출작으로 골든 글로브 각본상을 수상했다.

▲ <트라이얼 오브 더 시카고 7>의 공식 포스터

영화의 실제 배경이 되었던 1968년 당시는 혼돈과 혁명의 시대로 불린다. 베트남에 파병된 미군이 매달 1천여 명씩 사망하자 반전 운동은 들불처럼 거세졌다. 린든 존슨 대통령은 반전 여론에 밀려 어쩔 수 없이 재선을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를 선출할 전당대회를 앞두고 흑인 민권 운동가인 마틴 루터 킹 목사와 유력한 대통령 후보였던 로버트 케네디 상원의원이 암살당하는 비극적인 사건이 잇달아 발생했다.


당시 민주당에선 베트남에서의 미군 철수를 주장한 유진 매카시 상원의원과 미군 철수에 부정적인 허버트 험프리 부통령이 대통령 후보 자리를 놓고 치열한 경합을 벌이고 있었다. 민주당 당원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았던 매카시 상원의원은 예비선거에 착실히 참여해 압도적인 승리를 승리를 거둔 채 전당대회장에 입성했다. 반면, 험프리 부통령은 예비선거에 단 한 차례도 참가하지 않았다. 하지만, 린든 존슨 대통령과 당의 지도부, 중진 대의원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확보하고 있어 전당대회에서 대통령 후보로 선출될 것이라고 모두가 예상했다.


지금으로선 예비선거에 참여하지 않고 전당대회에서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지만, 당시에는 예비선거에 참여하지 않은 주가 더 많았기 때문에 전당대회에서 얻은 대의원 표만으로도 과반수의 대의원을 확보할 수 있었다. 당원과 시민이 참여하는 예비선거를 통해 후보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소수의 정치 엘리트들이 후보를 결정하는 비민주적인 후보 선출 방식을 채택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허버트 부통령은 예비선거가 열리지 않는 주들의 대의원 표를 독식해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로 선출됐다. 이에 민주당 전당대회의 비민주성을 비판하기 위해 돼지를 대통령 후보로 추대하는 퍼포먼스를 펼치면서 전당대회장 앞에서 수 만 명의 젊은이들이 대규모 반전시위를 벌였고 경찰은 시위대를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언론 인터뷰를 하고 있는 시위대를 경찰이 총으로 쏘는 장면이 생중계되기도 했다. 대규모 유혈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전 세계가 보고 있다.

미국 정부는 불법 공모와 폭동 선동, 음모 혐의로 8명을 기소해서 이중 7명을 재판에 넘겼는데, 이들을 '시카고 7'으로 부르게 되었다. 영화는 실제 사건과 재판 과정을 흥미진진하면서도 긴장감 있게 잘 녹여냈다. 뿌리 깊은 인종차별 문제 등 미국 사회의 고질적 병폐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한편, 배심원 조작과 도청, 피고인에게 재갈을 물리거나 재판장이 증언을 은폐하는 등 블랙 코미디 같은 상황을 속도감 있게 보여주면서 긴장감과 반전을 준다. 영화 말미에 시위대가 한 목소리로 '전 세계가 보고 있다'라고 외치는 장면은 민주주의의 외피를 입었지만 여전히 흑인과 아시아계에 대한 폭력적인 인종차별 행위가 공공연하게 벌어지고 있는 미국 사회의 단면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 <트라이얼 오브 더 시카고 7>의 공식 예고편


예비선거가 제도화되다.

‘피의 전당대회’의 대가는 쓰라렸다. 그해 12월 대선에서 민주당과 로버트 험프리는 리처드 닉슨 공화당 후보에게 참패했다. 정당성을 잃은 전당대회는 당원들의 이탈을 불러일으켰고 대선에서의 패배로 이어진 것이다.  

민주당은 대선이 끝난 뒤 곧바로 당 개혁을 위한 ‘맥거번-프레이저 위원회’를 구성했다. 위기의식을 느낀 것이다. 전당대회에서 폭발한 ‘민심의 괴리’를 막기 위해 위원회는 과감한 개혁 조치를 취했다. 당 지도부가 지명하는 대의원이 전체 대의원 수의 10%를 넘지 못하게 하는 한편, 예비선거에서 일반 시민이 참여하는 프라이머리를 대폭 확대하는 방안을 내놓았다. 그리고 대통령 후보 선출 과정을 모든 당원에게 투명하게 공개하도록 하는 지침도 마련했다. 이 지침 발표 이후부터 예비선거가 일반화, 제도화되기 시작했다.


공화당도 민주당의 개혁 조치에 자극을 받았다. 공화당도 예비선거의 도입을 확대하는 조치를 경쟁적으로 발표한 것이다. 이로써 공화·민주 양당에서 예비선거는 대통령 후보 선출방식으로 확고히 자리 잡게 되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링컨, 마틴 그리고 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