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터슨 시에 사는 패터슨 씨보다 더 뻔할 수가 있는인물이 있을까. 이 영화는 그가 뱉어 쓴 시에 대한 이야기다.
버스기사인 그가 모는 시내버스는 매일 같은 거리를 지나고 아침마다 안부를 묻는 동료 도니는 매일 비슷한 불만을 투덜거린다. 숨어 쓰는 시는 그가 반복되는 일상 속 뚫어둔 숨구멍.그 시를 쓰는 시간마저도 꽤 일정하다. 매일 아침 동료가 찾아오기 전까지 같은 운전석에 앉아 시구를 끄적인다. 일주일 간 그야말로 반복되는 일상을 사는 것이다.
라고 쉽게 말할 수 없다고 이 영화는 말하고 있다.
전개가 목요일쯤 이르렀을 때 깨달았다. 조금만 더자세히 살펴보면 그의 하루하루의 시작과 중간, 끝은 온전히 같은 적이 없었다는 것을. 이 영화를 보기 전이었더라면 윗 문단에서도 '비슷한', '꽤'의 표현 대신 '똑같은'이라고 쉽게 형용했을지도 모른다.
아침마다 아내가 종알종알 전해주는 꿈의 내용이 다르고, 이를 통해 형성된 그의 달라지는 시선이 바라보는 거리의 풍경도 같지 않았다. 같은 노선을 운행하는 버스에 태우는 사람들 하나하나가 담고 있는 이야기 역시 그러했다.
과연 하필 아내가 쌍둥이 꿈을 꾸었다고 전해준 날 이후부터, 이 도시의 모든 쌍둥이들이 그의 앞에 총출동했던 걸까? 아닐 것이다. 아내의 꿈 이야기로 한 뼘 정도 넓어진 그의 시선은 주변 세계를 확장하고 어제와 다른 오늘의 풍경을 깨닫는다. 그대로인 풍경을 오래 바라볼 수 있는 건 귀여운 디테일을 볼 수 있는 마음의 여유와 궁금증에 있을 것이다.
자신의 집 성냥에서도 영감을 얻는 눈과, 엄마와 동생을 기다리는 길 위의 10살 소녀가 지은 시에 대해 묻고 들을 수 있는 귀. 검은색과 흰색의 조합만으로도 매일매일 새로운 걸 시도하는 사랑스럽고 생기 있는 아내. 그리고 오래간 써내려 온 시집을 물어뜯어버리는 강아지.
비슷하지만 꼭 같진 않은 '쌍둥이'같은 일상 속.. 이동진이 말하는 '일상을 유영하게 하는 시적인 리듬'을 구성하는 경쾌한 음표들을 외면하지 않고 오래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고 싶다.
아직 복사를 해두지 않아 찢긴 시 노트 앞에 선 패터슨. 앞으로도 그의 삶에같지만 다른 순간들이 반복되겠지. 한 번씩 키우던 강아지에게 몇 페이지를 뜯어 먹히기도 하면서.
벤치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사라진 일본의 노신사의 '번역된 시를 읽는 건 "비옷을 입은 채 샤워하는 것과 같다"는 말이 맴돌았다. 물기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는 의미겠지.꼭 같다고 정확히 대응시킬 수 없는 언어별 결의 차이, 때문이겠지.
마지막 장면으로 미루어보아 그는 빈 페이지를 들고 "아하"하며 패터슨의 시를 쓰는 버스기사, 혹은 버스를 모는 시인으로 살아갈 것 같다.
텅 빈 페이지는 더 많은 가능성을 시사한다는 것, 거기서 거리낌 없이 '아하'하고 시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 을 잊지 않고 살아야지
"에밀리 디킨슨을 좋아하는 버스기사라니 정말 멋져요."
"버스기사라니 시적인데요." "왜죠"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의 시가 될 수도 있었잖아요"
내가 들었더라면 하루를 꼬박 곱씹었을 따뜻한 말들.
우리 모두 유명 작가의 시가 될 수 있는 오늘을 살고 있다. 그걸 알고 사는 자과 아닌 자의 삶은 이란성 쌍둥이만큼 꽤 다를 것 같다.
패터슨을 보고 부터는 마을버스의 기사분들이 다루게 보인다. 표정없는 도시의 npc들 같았던 이들이 일과를 마치고 돌아갔을 집에 있을 귀여운 아내와 끄적일 일기들을 상상하노라면 내 일상도 조금 더 수채화 빛이 된다
"시인 패터슨이 2016년쯤 패터슨의 버스 드라이버였던 것 알아요?"라는 대화가 어디선가 들려오길 바란다는 왓차평이 마음에 오래 남았다. 그리고 나는 백업을 잘해두고 살아야지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