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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개의 달 Dec 29. 2018

문장 수집1

문장 수집

 가끔 그런 아침이 있다. 평소보다 눈을 일찍 떴는데, 다시 잠들려 해도 이미 정신이 깨버려서 잠들 수 없는 그런 아침. 그런 아침에는 노란 색연필을 들고 <아직 안 읽은 책> 책장에서 가장 얇은 책을 꺼낸다. 아침에 가끔 시를 읽는다고 하면 ‘아, 글 쓰는 분이라 그러시구나.’ ‘문학을 좋아하시나 봐요.’ 라는 대답을 주로 듣는데, 음. 사실 그것보다는 문장을 줍기 위해서라는 말이 더 맞을 것 같다. 시를 읽기 시작한 건 눈이 나빠지고부터였다. 소설책 한 권을 다 보기엔 눈이 아프고 흔들리고. 그래도 활자 중독의 습관은 남아있어서 뭔가 읽고 싶고. 그래서 시를 읽게 되었다. 짧으니까. 내키면 읽고, 이해가 안 되면 넘어가고. 시는 그 짧은 몇 줄 안에 하고 싶은 말을 담으려 하니 자꾸 문장을 고르고 고르게 된다. 그렇게 엄선한 작가의 문장을 읽다가, 이거다! 싶은 문장을 발견하면 노란 색연필로 밑줄을 긋고 귀퉁이를 접어둔다. 시집 한 권을 다 읽고 나면 다시 접힌 것들만 꺼내보면서 그중 최고를 고른다. 빛나는 문장을 수집한 날에는 아끼는 이들에게 찍거나 적어서 보내기도 한다. 읽자마자 누군가가 떠오를 때는 손으로 곱게 써서 선물하기도 한다. 아침을 이렇게 보내면 꼭 문장의 광산에서 보석을 캐는 광부가 된 것만 같아 기분이 좋다. 태초에 사람에게 언어가 생겨난 이후로 지금까지 수도 없이 많은 이들이 문장을 써왔을 텐데 여전히 매일 수도 없이 새로운 빛나는 문장들이 태어난다는 것은 문장 수집가에게 매우 행복한 일이다. 오늘은 잠시 보석함을 열어 그간 열심히 주워온 문장을 딱 다섯 개만 나누고자 한다.


 나는 걸어가기엔 멀고

무얼 타기엔 애매한 길을

누구보다 많이 갖고 있다

- 박준/관음 – 청파동3     


 이 문장은 그냥 좋아하기만 하는 것들을 기록해야겠다고 처음 마음먹었을 때 큰 위로가 되었던 것이다. 잘하기엔 모자라고 좋아하지 않기에는 이미 마음이 가있는 많은 일들을 주워 모으면서 생각했다. 어쩌면 나만 이런 것이 아니라 이 세상 어딘가 또 나와 같은 사람이 그 길 한복판에 서서 고민만 주구장창 하고 있을지도 몰라. 고민 끝에 내가 결정한 것은 그냥 좋아하기만 하는 것. 애매한 채로도 충분히 괜찮을 것이라 믿기로 한 것이었다. 지금도 누군가 그 길 한복판에 서있다면 그냥 많은 길을 가졌다는 것으로, 그걸로 되었다고 안도했으면 좋겠다. 내가 처음 이 문장을 만났을 때처럼.     


가장 광포한 평화이자 가장 차분한 혁명이다

- 첫눈/유용주     


 이 시는 내내 첫눈을 다양한 문장으로 묘사하는데 그중 이것이 제일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그날은 함박눈이 가득 내린 날이었다. 간밤 내내 시끄러웠던 세상이 눈 아래에 완전히 조용해진 것을 보면서, 강제로 선물 받은 평화에 맞장구치며 이 문장에 밑줄을 그었다. 가장 차분한 혁명이라는 말은 눈 왔어! 라고 쏟아지는 메시지와 사진을 보고 깨달았다. 우리 머릿속을 모두 눈! 으로 채워버리는, 누구도 명령하지 않았지만 순식간에 이루어진 가장 차분한 혁명. 상쾌하게 느낌표로 한 대 맞은 느낌과 함께 눈을 쓸러 나가며 주문처럼 되뇌었다.


그 끝 모를 심연을 

키를 잡을 수도 없는 잠 속에

매트리스 – 배에 몸을 맡긴 채

기약 없이 건너 간다

- 정현종/밤바다 항해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밤을 괴로워한다는 사실을 아프고 나서야 알았다. 잠들 수 없는 밤. 잠들어도 아픈 밤. 악몽이 끝내 이어지는 밤. 그런 밤들을 보내는 사람들이 곁에 여럿 있는데, 이 문장을 보고 나서는 우리의 밤이 마냥 달콤하지 않은 이유를 어림할 수 있었다. 어떤 이에게 밤은 울렁거리는 거친 파도로 가득 찬 곳이리라. 매트리스 배에는 키도 없어서 도무지 어떻게 해야 여길 무사히 건너갈 수 있는지 알 수 없는 것이다. 밤바다 한복판에 매트리스 달랑 한 장 위에 앉아서 항해를 하고 있으니 얼마나 어려울까. 나는 이제 끝내 잠들 수 없는 이들에게 자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저 어려운 밤바다 항해가 무사히 아침에 닿길 같이 바랄 뿐이지. 그런 마음이 항해에는 훨씬 나은 전보가 된다는 것을 문장이 가르쳐주었다.     


내 희망을 감시해온 불안의 짐짝들에게 나는 쓴다

이 누추한 육체 속에 얼마든지 머물다 가시라고

-기형도/ 정거장에서의 충고     


 이 문장은 불안에게 오래 감시받은 모든 이들과 나누고 싶다. 희망이 조금만 찾아오려하면 불안이 매섭게 다가와서 안 된다고 저리 가라고 훠이 쫓아내는, 그럼에도 희망을 갈구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을 가진 사람들. 좋은 만남이 찾아오면 이별을 먼저 준비하게 되고, 사람이 너무 좋아서 정을 주는 것이 너무 어려운 이들에게도. 그 불안이라는 녀석이 영영 사라지지는 않을 테니까 그냥 내 안에는 불안이 좀 많이 사는구나. 하고. 이 시의 첫 구절은 ‘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희망을 노래하련다’다. 그래, 네 까짓게 아무리 열심히 감시하면 어쩔 것이냐. 우리는 또 꿈을 꾸고 희망을 노래할 것을.     

 마지막 문장은 내일, 그러니 일요일을 맞이할 당신에게 보내고 싶다. 내가 계속해서 그냥 좋아하기로만 한 것은, 어쩌면 꾸준히 그런 나를 좋아해준 당신들 덕이니 그저 감사하며.     


알아?

네가 있어서

세상에 태어난 게 

덜 외롭다

- 황인숙/ 일요일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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