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처음으로 새벽 길거리를 걸었던 날을 명확하게 기억한다. 엄마와 계속 되던 불화에 결국 집을 나와 친구와 자취하던 여름. 이른 저녁식사 덕에 굶주린 배를 쥐고 배회하다가 새벽 세 시에 슈퍼마켓에 갔다. 평생을 12시 안에 반드시 집에 들어가야하는 신데렐라 인생에게 새벽 세 시의 거리라니. 완전한 자유를 가졌다는 느낌과 함께 이어지는 묘한 설렘과 불안. 계속해서 친구에게 물었다.
이래도 되는거야?
당연하지. 넌 이제 자유야.
아직도 미처 다 식지 못한 후끈한 공기아래 드문드문 켜진 가로등과 조용한 거리. 이 곳에 꼭 우리만 있는듯한 낮과 전혀다른 세상. 이 모두가 다섞인 새벽 세 시의 냄새는 자취방에서의 기억이 아스라하게 지워지는 그 순간에도 곁에 남았다. 아마 모두에게 처음으로 혼자 새벽을 맞이한 그 순간은 미묘한 떨림으로 남지 않을까.
그 뒤로도 새벽은 마음대로 잠들고 깰 수 없는 내게 축구게임의 추가시간이 되었다.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시간.낮의 의무와 책임을 내려놓고. 골치아픈 일들로부터 퇴근하고. 나를 위한 시간을 아주 조금이라도 낸다. 차를 대접하고 따듯한 담요를 덮고, 미뤄두었던 생의 두근거리는 기억들은 꺼내 기록한다. 집 옥상이나 베란다에 나가 다 잠든 도시를 살짝 구경하며 그때의 그 새벽 세시 냄새를 맡아보기도 한다. 물론 모든 새벽이 이렇게 내 시간인건 아니다. 때로는 미뤄둔 일에 낮의 나를 책망하며 애써 키보드를 두드리기도하고, 급한 공부에 꾸역꾸역 머릿속으로 지식을 밀어넣기도 한다. 열두시부터 부지런하면 좀 끝내고 잘 수있겠지만 그럴리가. 한 두시까지는 새벽의 추가시간이 있음에 안도하며 음악을 좀 듣거나 인터넷 서핑을 하고. 그러다가 세시쯤 되면 으악 늦었다 세시라니 깨닫고는 좀 해보려다가 네다섯시가 되면 졸음을 못이기고 끝내 엎어지기. 그러고 정신차리면 아침! 이런 불량한 새벽도 종종 나를 찾아온다.
가끔은 특별한 새벽도 있다. 보낼 수 없는 새벽. 너무 안가는 새벽. 많은 것이 변하는 새벽. 보낼 수 없는 새벽은 사람과 같이 온다. 아끼는 사람들과 모여서 서로의 행복이 되는 새벽.대화가 무르익고 배가 가득 차고. 점점 졸음이 차올라서 같이 히죽 웃으며 노래를 부르고.끝내 꾸벅 고개가 무거워질 때 이 순간이 계속 영원하길 바라는 보낼 수 없는 새벽. 그런 순간들은 대게 아쉬운 아침을 길게 남긴다. 너무 안가는 새벽은 설레는 마음과 같이온다.사랑하는 당신을 보러 달려가야하는데 아침은 한 없이 멀고. 어서 아침해가 떠야 갈텐데. 속절없이 긴 밤, 잠들지도 못하고 애만 태우며 기다리는 그런 새벽. 설렘이 심장에 살아서 어쩔줄 모르는 그런 새벽도 있다. 많은 것이 변하는 새벽은 시작과 같이온다. 오늘과 같이 이 밤이 지나고 나면 새로운 순간들을 맞이해야하는 새벽. 분명 평소와 똑같은 시간인데도 마법같은 변화가 찾아와서 행복하게 만들어줄 것 같은 그런 기분으로 맞이한다. 올해의 무거웠던 일들은 낮에 두고 새벽을 넘어 더 나은 나에게로.
이 새벽의 끝에 당신에게도,
내게도 웃는 아침이 기다리고 있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