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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개의 달 Jan 12. 2019

냄새의 기억

냄새

 지난 크리스마스에 갔던 파티에서 마니또에게 한라봉 향초를 선물 받았다. 불을 무서워해서, 그리고 작고 귀한 모양이 무너지는 것이 마냥 아까워서 피워보지 못하고 대신 고이 싸서 서랍 속에 넣어두었다. 그 뒤로 그 가끔 메모지를 꺼내거나 볼펜이 필요해 서랍을 열 때마다 한라봉 향과 함께 그날의 웃음과 유쾌했던 사람들이 쓱 피어올라 가끔은 열고 킁킁 냄새를 맡아보는 사람이 되었다. 

  어떤 이는 내게 좋은 것은 냄새 말고 향기라고 불러야한다 했지만, 그렇다고 갓 구운 빵 냄새를 향기라고 부를 수는 없으니 역시 냄새가 좋겠다. 냄새는 기억을 갖는다. 그리고 그 기억은 곧 이름이 된다. ‘나무 냄새’처럼 똑 떨어지는 이름도 있고, ‘H네 집 냄새’처럼 맡아보기 전까지는 뭔지 영 알 수 없는 이름도 있다. 한참 뒤에서야 이름을 알거나, 도중에 이름이 바뀌는 것도 있다. 오랜 시간 ‘첫사랑의 냄새’라고 기억했던 것이 실은 E사의 유명한 향수였던 것이나, 가장 싫어했던 섬유유연제 냄새가 얼마 전 친해진 친구의 코트 냄새가 된 것처럼. 

 좋아하는 냄새를 고르라면 간식을 빼놓을 수 없다. 겨울은 간식 냄새의 제철이다. 붕어빵, 호떡, 오뎅, 찐빵. 고소하게 굽고, 지지고 끓이는 냄새들. 맡기만 해도 금방 지갑을 불러내는 귀신같은 친구들. 이중 요즘 내게 가장 강렬한 녀석은 찐빵이다. 지하철을 타고 나가 사람을 만나거나 일을 하고 다 지쳐 돌아오는 저녁. 출구 앞으로 나가면 쉬익—하는 증기가 가득 올라오며 찐빵냄새가 가득 퍼진다. 푸욱 쪄서 한없이 보들보들한 찐빵. 사서 반 갈라보면 달큰한 팥 냄새가 올라오며 기분까지 푸근하게 만들어준다. 한입씩 베어 물며 집으로 들어가는 버스를 기다리는 길. 냄새는 끝내 기다리는 사람들 손에 찐빵을 하나씩 들게 만든다. 다른 그 어떤 마케팅보다 강렬한 냄새의 유혹. 나는 늘 기분 좋게 져준다. 주머니가 넉넉한 날은 식구들 것까지 포장도 하고.

 표현하기 어렵지만 햇빛냄새도 있다. 멀리서부터 오는 손님이 자고 간다고 연락이 오면 집의 이불을 깨끗이 빨아 옥상에 널어둔다. 해가 질 때쯤 이불을 걷으러 가면 바삭거리는 촉감과 함께 햇빛냄새를 맡을 수 있는데 그 냄새가 마냥 행복해서 품에 가득 안고 실컷 들이마시곤 한다. 이사온 집에는 건조기를 두어 더 이상 빨래를 밖에서 말리지 않는데 편리하긴 하지만 햇빛냄새가 사라져서 괜히 아쉽다. 그 뽀송거리고 설레는 냄새가 마냥 좋은데. 바삭거리는 느낌도. 미세먼지가 가득 뒤덮은 하늘 아래서는 엄두도 못 내지만, 곧 볕이 세지고 해가 길어지면 하루 날 잡고 가득 이불빨래를 해서 햇빛냄새를 이불에 붙잡아 둘 것이다. 괜찮다면 해 뜨기 전 집을 나서 해 진 뒤 돌아오시는 당신께도 좀 내어드리고. 

 기다려야지만 맡을 수 있는 냄새 중엔 후리지아 냄새도 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꽃. 겨울얼음을 깨고 봄을 알리는 전령 후리지아. 두 팔 가득 차는 후리지아 꽃다발에 얼굴을 푹 파뭍고 겨울과 봄 사이의 아스라한 냄새를 가득 폐부에 채우면 몸 아주 깊은 곳부터 꽃이 가득 피어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입학식과 졸업식 시즌이 후루룩 지나가고 조금 가격이 싸지면 후리지아를 가득 사서 거실 식탁 한가운데에 놓아둔다. 그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면 졸음에 꾸벅 취한 상태로도 무사히 거실까지 나갈 수 있다. 후리지아 냄새가 사람을 이리 오라고 부르니까.

  겨울 동안 한없이 후리지아를 기다렸다가 아주 짧게 잠깐 만나보고 사라지는 게 내심 아쉬워 후리지아 향수를 사려고 시도도 했는데, 무엇도 후리지아와 같지 않아 시무룩했던 날도 있었다. 후리지아는 향수를 만들 수 없는 꽃이라 모든 후리지아 향수는 조향사의 상상으로만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안 것은 그보다 한참 뒤의 일이었다. 화사한 색과 강렬한 냄새로 나를 가득 채워줄 후리지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한 해를 기다릴 수 있는 냄새가 있다는 것은 생에 제법 위로가 되는 일이다. 

 좋아하는 냄새에는 모두와 나눌 수 없는, 아무리 설명을 써도 나만 알 것 같은 냄새도 있다. 익숙함과 그리움의 상징인 사람 냄새가 꼭 그렇다. K는 나와 옷 사이즈가 비슷해 우리집에 오면 종종 내 옷을 입는다. 멀리서부터 온 K를 배웅하고 돌아와 방의 꺼진 불을 켜면, 보낼 준비를 하느라 미처 보지 못했던 아주 곱게 개어 올려둔 옷을 발견하곤 한다. 결국 빨 것인데 뭐 이리 곱게 개었나 싶어 피식하며 들어 올리면 스치듯 K냄새가 난다. 따듯한 가을 저녁의 서재같은 냄새. K의 생을 가득 담아둔 것 같은 냄새. 괜히 같이 보냈던 시간이 그리워 한 가득 숨을 들이마실 수 있을 때까지 담아보았다가 내쉬며 놓아준다. 또 만날 테니까. 생애 만났던 수많은 냄새의 기억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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