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잠'을 보고
**이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하신 뒤에 보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큰 스크린을 통해 보는 배우의 연기 중 돋보이는 것은 배우의 눈빛이다. 배우의 연기가 중심이 된 영화에서 배우의 눈은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영화 '잠'의 하이라이트이자 백미는 정유미의 맑고 깨끗하고 강렬한 눈이다. 배우 정유미를 사랑하는 팬이라면 이 영화는 좋은 선택이다.
영화 '잠'은 잠들면 다른 사람처럼 변하는 남편 현수(이선균 분)를 고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아내 수진(정유미 분)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칸 국제 영화제 비평가 주간에 초대된 작품이다. 연출을 맡은 유재선 감독은 봉준호 감독의 연출부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잠'은 배우의 매력으로 이끌어가는 영화다. 영화의 배경은 대부분 집 안이며, 러닝타임 내내 이선균과 정유미가 등장해서 영화를 가득 채운다. 영화의 완성도를 올리는 것은 이선균과 정유미의 연기다. 이선균은 늘 그렇듯이 상대 배우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연기를 펼친다. 이선균 역시 야망 없어보는 눈빛과 빙의돼서 텅 비어있는 양극단을 아주 자연스럽게 오고 간다. 오직 이선균만 할 수 있는 연기는 아니지만 이선균이 아닌 다른 사람이 떠오르지 않는 연기다.
이 영화의 백미는 정유미의 눈이다. 공포에 떨기도 하고 충혈되기도 하고 작심을 하기도 하는 정유미의 눈은 중요한 순간마다 클로즈업된다. 공포에 떨고 있던 정유미가 공포의 대상이 되는 과정 역시 고스란히 그의 눈빛에 담겨 있다. 그동안 다른 연기에서 보지 못했던 깊이까지 느껴진다. 똑 부러지고 사랑스러운 모습부터 조금씩 미쳐가는 모습까지 스펙트럼 넓은 모습을 보여준다.
영화 속에서 수진은 대부분 장면에서 눈을 뜨고 있다. 수진은 그 눈으로 사랑하고 의심하고 증오하고 겁에 질리고 광기를 보여준다. 인간의 다채로운 감정을 담아내는 정유미의 눈은 극장을 나와서도 오래오래 여운으로 남는다.
이 영화에서 연출이 아닌 배우의 연기를 칭찬할 수밖에 없는 것은 설득력이 부족해 자꾸만 다른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함께 살면 무시무시한 위협이 되는 현수와 수진이 서로 떨어지지 않는 것은 둘이 함께라면 극복 못할 문제는 없다는 좌우명 때문이다. 그런 단순한 좌우명으로 묶이기에 현수가 잠이 든 이후 행하는 행동은 너무나도 위협적이다. 갓 태어난 딸이 남편과의 사랑 보다 더 소중해 보이는 상황에서 수진은 딸에게 위협이 되는 남편을 끌어안고 있는 것이 납득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수진이 자신의 강아지와 꼭 닮은 강아지를 죽이고 아랫집 아주머니를 납치해서 살해 협박할 정도로 현수를 지켜야 하는 감정이 뜬금없이 느껴진다. 수진이 지키고 싶었던 남편과 자신의 딸은 강아지를 죽이고 이웃을 납치 살해 협박 하는 것으로 지켜지지 않는다. 수진은 남편에게 빙의된 귀신을 쫓아내기 위해 극단적인 수단을 사용함으로써 또다시 남편과 딸과 떨어져 감옥에 가야 한다. 수진이 한 선택이 너무나도 한심하기 때문에 이 영화는 후반부에 모든 힘을 잃어버린다.
유재선 감독은 공간 활용이나 인간의 양면적인 면을 표현하는 방법 등에서 봉준호 감독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야기를 끌고 가는 힘과 그 힘을 만들어내는 디테일에 대해서는 아쉬운 면이 있다. 배우의 좋은 면을 이끌어내는 능력은 '잠'을 통해서 충분히 보여줬다. 누군가의 포스트가 아닌 유재선으로서 강렬한 작품을 남길 것으로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