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트 2. 포기하다
삶을 차곡차곡 살아가다 보면, 때로는 정말 누군가가 ‘운명의 장난’이라도 하는 걸까. 싶을 만큼 야속할 때가 있다. 방송에 등을 돌릴 그때가 딱 그랬다.
동생 꿈의 ‘훼손’에 내 지분이 상당하다는 것을 알게 된 후로는 ‘아나운서’에서 ‘방송기자’로 방향을 틀어서 취업준비를 했었다. 이 분야가 만만해서는 아니고,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필기시험과 면접을 통해서 채용된다는 것에서 ‘열심히 하면’ 합격에 다가설 수 있으리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로 최종 관문까지 가는 일도 생기면서 아나운서를 준비할 때보다는 진전이 있는 듯했다.
하지만 이미 말했듯 만만하지는 않았다. 국내에 언론사의 수 자체가 그리 많지 않고 해마다 기자를 채용하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언제 주어질지 모르는 기회를 잡기 위해서 기약 없이 원고지를 채워갔다.
여지없이 원고지 가득 활자를 써 내려가던 어느 날, 엄마는
“엄마도 이제는 힘에 부친다.”
라는 한 마디를 나지막이 뱉어냈다. 요즘은 채용 시험은 없는지, 치른 시험의 결과는 어찌 되었는지 유난히 질문을 많이 하던 시기였다. 딸과 아들이 행여나 눈치라도 볼까 싶어 한숨조차 숨어서 쉬던 엄마가 한계에 부딪힌 거다. 그럴 만도 한 것이 25살이나 먹은 딸은 제 몫의 경제활동을 하지 않은 채로, 엄마의 도라에몽 주머니를 축내고 있었다.
나는 하고 싶은 것도 많고, 하고자 하는 일에는 거침없이 달려가는 사람이었고 지금도 그렇다. 하지만 이런 나에게 브레이크를 거는 유일한 게 바로 ‘가족’이다. 가족이 걸림돌이라는 말이 아니고 ‘K 장녀’의 고질병이 나에게도 진하게 배어있다는 얘기다. 엄마가 힘들다는 말에 K 장녀는 참지 않지. 곧장 취업 사이트를 뒤적였다.
운명이었을까. 마침 은행 인턴 공고가 눈에 띄었고 마감 당일이었다. 기약 없는 원고지 채우기에 단련이 된 터라 자기소개서를 써 내려가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누가 봐도 평범한 취업 준비생의 증명사진은 아니었지만 무엇이 중요하리. 결과는 합격이었다. ‘운명’이라고 표현한 것이 과장이 아닌 것이 면접 내내 리포터로 활동했던 얘기, 인턴기자로 근무하며 정치인들을 만나서 느꼈던 점 등 은행이랑은 1도 관련이 없는 주제로만 수다를 떨고 왔는데도 결과는 합격이었다.
글을 시작하며 끄집어냈던 ‘운명의 장난’은 지금부터다.
은행 근무는 고객 응대를 능숙하는 나에게는 꽤 잘 맞았다. 리포터, 인턴 기자 생활을 하면서 수많은 인터뷰를 했던 것이 ‘선’을 잘 지키며 대화를 이끌어가는 화법을 체득하게 해 줬고, 언론사 취업을 위해서 수많은 경제 신문을 눈동냥했던 것이 고객 상담에 도움이 됐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언론사 취업 실패하면 은행 취업을 플랜 B로…?”라는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어림도 없지.”
타이밍의 생각은 달랐다. 인턴으로 근무했던 은행의 필기시험과 언론사의 필기시험이 겹쳤다. 둘 다 인턴으로 근무했던 경력으로 가산점을 받을 수 있는 이점이 있었다. 응시만 한다고 해서 무조건 합격을 한다는 보장은 없었지만, 응시조차 못하는 건 계획에 없었다. 계획에 없던 건 이뿐만이 아니었다. 일주일 뒤, 내가 앉아있는 곳은 ‘은행 필기시험장’이었다.
세상은 내게 ‘놓을 거면 제대로 놔’라고 했다. 미련을 두고 자꾸 돌아보지 말고 가라고. 플랜 B 따위의 어물쩍 ‘어쩔 수 없이 선택한다.’ 식의 선택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래서 난 조금이라도 빠르게 취업할 수 있을 것 같은, 조금 자만 섞인 말을 하자면 합격 확률이 더 높은 쪽으로 몸을 돌렸다. 조금 더 솔직해지자면 지쳤던 마음을 끊어내고 싶던 찰나에 환승열차가 눈앞에 선 걸지도 모른다.
누구도 나의 손을 억지로 잡고 포기를 증명하는 지장을 찍으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내가 순순히 찍은 새 빨간 지장이었다. 물론 한동안은 손 끝에 인주가 진득하게 만져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