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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짱이J Jan 02. 2022

#8 오늘의 우산(2)


“우산 두고 가셨어요-”     


지하철에 타자마자 뒤따라오던 승객이 민에게 우산을 건넸다. 제 꺼 아닌데요, 말하기도 전에 우산을 건넨 사람은 안쪽으로 밀려간 후였다. 열차에 타기 전 앉은 의자 위 우산을 민의 것으로 착각한 모양이었다. 이게 뭐람, 어쩌지 못하고 핸드백 안에 밀어넣자, 안에 있던 발표 자료가 둥글게 휘었다.      


오늘은 사장 보고가 있는 날이다. 갑작스럽게 TF가 만들어진 지 석 달. 마케팅 부서에서 VIP 프로모션을 담당하던 민은 난데없는 발령을 받았다. TF의 목적은 ‘조직 체질 개선’이라고 했다. 디지털 시대에 맞춰 경영 전략과 조직 구조를 전방위적으로 점검하라 했다. 이렇게나 추상적이고 광범위한 업무라니, 킥오프 미팅이 끝나자마자 TF의 실패를 직감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다른 건 차치하더라도, 민이 가장 좋아하는 상사인 박 부장이 팀장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럴듯하게 장표 만들고 발표하면 끝나는 거잖아요. 달라지는 거 없어요. 전 부장님 따라온 것만으로 족해요.”


발령받고 처음 한 식사 자리에서 민은 냉소적으로 말했다. 박 부장은 허허 웃었다.     


“민 대리 욕심 많은 거 뻔히 아는데 왜 이래. 그리고 장난으로라도 나 따라온 거란 소리 하지 마. 일 따라가야지 사람 따라가면 못써.”     


박 부장은 그렇게 말하고선 지난 3개월 내내 도저히 따르지 않을 수 없는 부장의 본을 보였다. 팀원 의견 오래 듣기, 신중히 결정하기, 결정한 바에는 책임지기. 민은 사 년 남짓한 사회생활만으로도 그 원론적인 것들이 얼마나 가지기 힘든 자질인지 잘 알고 있었다. 기본이 어려운 것이다. 원칙이 어려운 것이다. TF에서 일하는 석 달동안 가끔 유니콘을 대하는 기분으로 박 부장을 봤다.     


“피피티 세팅해놨어? 백업 자료는?”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출근하면서도 민은 마음이 급했다. 민과 페어로 일하는 송 주임이 파일 한 무더기를 안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다 됐어요. 파일이랑 다과만 깔면 돼요.”

“부장님은?”

“본부장님 사전보고 들어가셨어요. 오늘 본부장님도 들어오신대요.”      


민은 잠시 얼굴을 찌푸렸다. 왜인지 본부장 보고를 마치고 나올 때마다 박 부장은 지친 기색이었다. 그걸 표현하지 않는다는 점이 박 부장을 더 따르게 만드는 이유이기도 했지만.     


“일단 자료부터 깔자. 사장님 비서실에 연락해서 시간도 한 번 더 체크해줘요.”     


   




민의 걱정과 달리 발표는 물 흐르듯 진행됐다. 발표를 맡은 김 과장은 PT에 있어선 도사였고, 팀원들이 몇 주 동안 야근하며 만든 자료들도 나무랄 데가 없었다. 민은 안도한 얼굴로 박 부장 쪽을 봤다. 아직 긴장을 늦추지 않은 건지, 표정이 굳어 있었다.   

  

“짧은 시간동안 열심히 하셨네요.”     


발표가 끝나자 본부장이 바로 책상 마이크를 켰다. 흔히 할 법한 공치사가 이어졌다. 이 다음이겠지, 마음의 준비를 하면서도 민은 걱정하지 않았다. 이 정도 뽑아낸 것도 기적이었으니까.      


“그런데 말이에요.


순간 본부장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현황 분석은 좋은데, 대안 중에 납득 안 가는 것들이 있네요. 직급제를 정비하자고?”


그게 왜?


“직급 정비한 지 3년밖에 안 됐어요. 이전으로 원복하자는 부분도 있네요?”

“해당 부분은 3년 전 예측한 효과가 나서입니다. 인터뷰 결과 부작용 컸고-”

“그 때 사장님 의지가 강했던 것, 알죠? 지금 사장님이 틀리셨다는 얘긴가?”

“그런 게 아니라-”     


김 과장은 최대한 유도리있게 답변하려 애썼다. 그러나 본부장의 태도가 너무 공격적이었다. 회의실 안이 돌연 긴장감으로 팽팽해졌다. 박 부장이 일어났다.      


“발표 때도 말씀드렸다시피 저희가 도출한 대안들은 어디까지나 제안입니다. 누가 맞고 틀린 것이 아닌, 검토할 만한 안이라고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럼 박 부장은-”


본부장이 볼펜을 딸각였다.      


“당장 조직에 적용할 수도 없는, 아이디어에 불과한 것을 지금 사장님 보고 자리에 가져왔다는 건가? 그럼 이 뒤에 있는 효과 분석 장표들은 뭐지?”     


그렇게까지 말할 것 없잖아, 민은 어이가 없었다. 애초부터 답을 내기 어려운 물음을 가지고 만든 유통기한 반 년짜리 TF인데. 사전보고에 들어갔을 때도 구성원들이 직접 아이데이션을 하고 답을 찾아보는 데 의의가 있다고, 본부장이 제 입으로 말했었는데.      


“박 부장은 책임질 수도 없는 제안들을 덜렁 내놓고 끝내면 다인가? 뒤처리는 누가 하라고?”

“그런 뜻이 아니라-”

“TF는 그냥 해체하면 끝이란 거지?”


이 사람. 민은 렴풋이 깨달았다. 건설적인 피드백을 할 의향이 없어. 머리회전이 빠르기로 유명한 본부장이다. 이런 식의 꼬리물기가 의미없다는 건 누구보다 잘 알 것이다.


그는 상처입히려고 하는 것이다. 누구를? 민은 부장을 돌아봤다. 타겟은 분명했다.    


 




지리한 질의응답은 삼십 분이 넘게 더 이어졌다. 본부장은 직급제 개편을 시작으로 TF의 발표자료를 하나하나 꼬집었고, 그 중엔 실무자조차 곧바로 답할 수 없는, 인신공격에 가까운 질문들이 포함돼있었다. 사장은 시작부터 끝까지 아무 말 없이 듣고는 나가버렸다.      


“너 몰랐어? 본부장이랑 박 부장, 라인이 다르잖아.”     


화장실에서 만난 민의 동기가 속닥거렸다. 아침나절, 임원진만을 상대로 한 발표였는데도 전사에 소문에 돌아 있었다.      


“각자 자기 라인에서 에이스고. 치고 올라올 거 같으니까 뭉개버린 거지. 애초에 박 부장이 난데없이 TF 갈 때부터 다들 얼마나 주의주시하고 있었는데. 본부장, 다 좋은데 하마평이 박 부장보다 한참 밀리잖아.”     


민은 일에 집중하기 어려웠다. 팀원들과 오후 카페에도 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박 부장은 줄곧 조용했다. 왜 그렇게까지 대놓고 질책한 거지? 아무리 그래도 계속 볼 사이이다. 그렇게 상대를 깎아봤자 본인에게 득 될 건 없다.      


민의 궁금증은 여섯 시가 돼서야 풀렸다.      


“대리님, 이것 좀 보세요.”     


퇴근 직전, 옆자리에 있던 송 주임이 거의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인사발령 공문이었다.      


“우리 해체된대요. 팀장님은 광주 지사로 내려가신대요.”     


정신이 멍해졌다. 부서 안에 침묵이 감돌았다. 잠시 넋을 놓고 있던 사이 박 부장이 사무실을 나가는 게 보였다. 민은 황급히 백과 코트를 집어들었다.     


“왜 그래, 민 대리.”      


로비에서 겨우 붙잡은 부장이 민을 알아보고는 허허 웃었다. 얼굴이 검붉어져 있었다. 민은 숨을 몰아쉬며 말을 골랐지만 머릿속이 하다. 그 때 유리문 너머로 소나기가 쏟아지는 게 보였다.      


“부장님... 우산. 우산 가져가세요.”     


민이 황급히 백에서 우산을 꺼냈다. 아침에 얼결에 받은 땡땡이 우산이다. 박 부장이 밖을 내다봤다.     


“아이고, 갑자기 웬 비야. 됐어, 민 대리가 써.”

“아니에요. 쓰세요. 절대 비 맞지 말고 가세요.”     


제가 지금 해드릴 수 있는 게 이것밖에 없어요, 민은 억지로 우산을 부장의 손에 쥐여주며 속으로 생각했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몇 번 더 사양하던 부장은 결국 우산을 받아들고 힘없이 웃었다.      


“민 대리, 조심히 들어가. 나중에 꼭 돌려줄게.”     


민은 로비에 서서 박 부장이 나가는 것을 한참 지켜봤다. 연보라 바탕의 노란 땡땡이 우산이 인파 속으로 갈마들고 있었다. 코끝에 올라오는 열기를 가리려 숨을 참았다. 빗줄기가 거세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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