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우산은 접이식이었다. 연보라색 배경에 노란 땡땡이가 그려져 있었다. 남자의 우산을 보고 희는 깜짝 놀라 물었다.
“오늘 비 오나요?”
남자가 답했다. “저녁 때 온다던데요? 우산 안 챙겼어요?”
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귀갓길이 걱정됐지만 여차하면 편의점 우산을 사면 그만이었다. 지금은 다른 게 더 중요했다. 희는 소개팅 중이었다.
파스타집에서 만난 남자는 하얀 얼굴에 곱상한 이목구비를 한 동갑내기였다. 키는 크되 체격은 중간이었다. 주선해준 친구는 보자마자 감 왔어! 이건 희 꺼다! 네 확신의 이상형상이야! 라고 말했다. 오산이었다. 희는 자기보다 고운 남자에겐 관심 없었다. 이왕이면 ‘나는 수컷’이라고 온몸으로 내지르는 남자가 좋았다. 예쁜 남자 아이돌을 좋아하는 탓에 종종 받는 오해였지만, 그래도 토요일 저녁을 넷플릭스나 보며 뒹구는 것보단 소개팅이 나을 것 같았다.
“소개팅 많이 해보셨어요?”
남자가 물었다. 희는 쉽게 수긍했다.
“네. 근데 쉽지 않네요.”
“만날 때마다 어색하죠. 이렇게 사람 만나는 게 맞나 싶고.”
“맞아요. 뜬금포 같달까. 마치...”
희가 적당한 단어를 찾느라 말끝을 흐렸다. 남자가 씩 웃었다.
“금도끼 은도끼 같지 않아요? 산신령이 아무 도끼나 주워다 이것이 네 도끼냐- 묻는 느낌.”
“정확해요.”
희는 저도 모르게 웃었다. 너도 짝 찾느라 고생 좀 했구나, 별 대화가 아니었는데도 안도감이 들었다.
까르보나라를 먹으며 희는 남자가 삼남매의 둘째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누나랑 여동생이 있어요, 포크로 파스타면을 둘둘 말며 남자가 말했다. 덕분에 위아래로 치여서 고생 좀 했어요. 다들 자기 식대로 한가닥 하거든요. 희는 남자에게 여자 형제가 있다는 점이 퍽 괜찮았다. 29년 간의 데이터로 종합해봤을 때 여자 형제가 있는 남자애들은 매너가 좋았다. 희는 자기에겐 남동생 하나 뿐이라고 말했고, 지난번 동생이 짐을 들어주러 아파트 1층에 왔을 때 15층까지 엘리베이터를 타고 가는 동안 일년치 대화를 끝내두었다고 설명했다. 남자가 푸흐흐 하고 웃었다.
“비 오네요.”
커피까지 마시고 나왔을 때 머리 위로 빗방울이 떨어졌다. 빗발은 약했지만 심상찮았다.
“괜찮겠어요?”
역까지 걸어가는 동안 남자가 물었다. 희는 씩씩하게 대답했다.
“괜찮아요. 이 정도쯤”
“흠.”
남자의 얼굴에 장난기가 어렸다.
“보통의 남자라면 이럴 때 우산을 주겠지만-”
“네?”
“보통의 남자라면 여자한테 짜잔, 하고 우산을 주겠죠. 근데 난 보통의 남자가 아닌데.”
이게 뭔 말이야 방구야, 희는 당황하면서도 어린애처럼 상대 반응을 기다리는 남자의 익살기에 안 웃을 수 없었다. 남자는 헤헤거리더니 역 앞에서 우산을 건넸다. 비 맞지 말고 가요. 감기 걸리면 안 되니까. 희는 두어 번 거절하다 미안해하며 우산을 받았다. 우산이 큐트하네요? 남자가 뻔뻔하게 대답했다. 주인 닮아서죠. 우산에서 온기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애프터는 없었다. 남자는 메신저로 잘 들어갔냐고 묻더니 좋은 사람 만나길 바란다고 맺었다. 우산은 희더러 가지라 했다. 아아, 여자 형제 있는 애들은 매너가 좋지. 희는 이불 속에서 멍하니 휴대폰 액정을 보며 생각했다. 나쁜 새끼, 매너만 좋았구나. 아무래도 희 또한 남자에게 확신의 이상형상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희는 유튜브로 아이돌 영상을 찾아보다 얼마 안 돼 껐다. 그렇게 좋아하던 아이돌인데도 어쩐지 하얀 얼굴이 미웠다.
며칠 되지 않아 또다시 비가 내렸다. 엄마가 물었다.
“너 저 친구가 빌려줬다던 우산, 안 갖다주니?”
희는 그제야 엄마에게 우산을 기억해냈다. 응, 갖다 줘야지, 건성으로 대답하며 내다 버릴 생각을 했다. 그런데 어쩐지 내키지 않았다. 희는 그 날 아침 연보라 우산을 몰래 가방에 넣고 다른 장우산도 챙겼다. 퇴근하면서 회사 앞 지하철역 의자 위에다 우산을 올려놓고 튀었다. 우산은 원래 돌고 도는 거니까. 전철에서 혼자 심호흡을 하다 키득댔다. 차창 밖으로 한강이 비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