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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짱이J Jan 13. 2022

#13 가시덤불숲 마녀(3)


여러 해가 흘렀다.      


산골짜기 유채꽃이 일곱 번 피고지고 동리를 감싸나가는 강물도 일곱 번 얼었다 풀어졌다. 산어귀 마을은 해가 갈수록 번성해 이제 토박이들을 찾는 게 도리어 어려워졌다.


시간은 낭아의 몸에도 스몄다. 오라비를 찾겠다며 숲을 딛던 아이는 이제 검은 머리칼과 붉은 뺨을 가진 미인이 됐다. 여인의 태깔이 박히면서부터 보는 눈들도 달라졌다. 이따금 길가에서 남정네들이 저 혼자 시근벌떡거리기도 하고, 넌지시 혼담이 들어오는 일도 생겼다. 그럼에도 아들을 잃고도 건재한 아비의 울타리가 낭아를 아이로 지켰다.     


낭아는 한 번도 덤불숲에서의 일을 발설하지 않았다. 기회가 없었던 건 아니다. 그러나 열 한 살 소녀의 생각에도 제가 겪은 것은 현실보단 환상에 가까웠고, 부모를 포함해 몇이나 믿어줄지 알 수 없었다. 이따금 동네 어른이 으레 마녀 얘기할 때면 낭아의 조용히 고개만 숙였다. 그것은 그녀의 비밀, 말할 수 없는 헛것에 가까웠다.     


오라비는 그때껏 돌아오지 않았다. 언젠가 짐마차를 얻어탄 채 머나먼 해안도시로 떠나는 걸 봤다는 목격담을 끝으로, 행방조차 짐작할 수 없었다. 동리 사람들은 이제 낭아를 외동딸로 여겼다. 깊은 밤 부모의 방에서 흘러나오는 한숨을 들을 때 오라비의 부재를 상기했지만 할 수  없었다. 결국 이뤄지지 않았어. 주변이 고요해지면 생각했다. 세 방울의 피, 세 가지의 소원. 참혹하여 그럴듯까지 했던 노파의 말은 정말 헛것이었었고, 거기엔 더 이상 어떤 희망도 없었다. 꿈인 것이다. 산길을 헤맨 어린애가 저 혼자 지어 믿었을 뿐이다. 그렇게 생각했다.


열여덟, 그를 만나기 전까지는.          


     




아버지의 조수는 낭아보다 여섯 살 위였다. 외지 출신으로, 도시에 나가 포목점을 열 요량에 일을 배우고 있었다. 일처리가 깔끔한 사람이었다. 웃음이 헤프지 않았으나 간혹 고개를 숙이고 웃을 때면 소년처럼 해맑았다. 아비는 그를 신뢰했다. 주로 물건을 떼거나 재고를 관리하는 업무를 주었고, 자신이 없을 땐 손님들도 상대하게 했다. 사업이 커지며 부리는 사람이 늘었으나, 장부를 볼 수 있는 이는 그 뿐이었다. 이름은 정이었다.


처음에 낭아는 정에게 관심이 없었다. 몸이 컸다고 속까지 춘기가 도는 건 아니니까. 어느 날 낭아가 애써 가꿔놓은 텃밭을 비둘기 몇 마리가 망쳐놓는 일이 생겼다. 상심한 낭아는 끼니도 거르고 상한 채소를 건졌다. 다음날 텃밭에 다시 나갔을 때, 두루마기를 입힌 소담한 허수아비가 하늘을 보며 웃고 있었다.     


“비둘기를 잡아먹는 것보단 낫잖아요.”          


낭아가 감사 인사를 하자 정이 수줍어하며 말했다. 마을에서 짐승이 해를 끼쳤을 때 그 짐승을 잡아먹어야 액을 털 수 있다고 믿는 걸 두고 한 말이었다. 기껏 공수를 들여 허수아비를 만들고서도 차선책을 택했을 뿐이라 말하는 그가 어쩐지 낭아는 좋았다. 전보다 더 자주 아비의 가게를 들락거리고, 어미가 만든 새참을 날랐다. 정은 언제나 예의바르며 다정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덜 여문 여자아이는 그의 관심사가 아닌 것 같았다. 정은 모두에게 친절하고 때론 친근했지만 결코 선을 넘지 않았다. 정에게 낭아는 그저 주인집 딸과 어린 막내 여동생, 중간 어디쯤인 것 같았다. 갓 열여덟 먹은 처자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교태를 익히기엔 덜 무르익었고, 상대의 뒷면까지 아우를 경험은 더욱 없었다. 아들 잃은 부모는 물오른 풀잎같은 딸을 아무에게나 주지 않겠다 호언할 지경이었건만, 정작 낭아가 원하는 사람은 그녀를 보지 않았다.           


 드는 밤이 이어졌다. 이제 막 깨어난 꽃봉오리가 그렇듯, 하룻밤 새 만개한 마음이 주인을 쥐고 놓지 않았다. 정의 태도가 절제수록 마음이 까맣게 물들었다. 결코 그를 가질 수 없으리란 생각이 들면 온몸에서 피가 가셨다. 잃어버린 오라비를 제외하곤 무언가를 그렇게 원해본 적이 없었다.      


어느 달밤, 마실을 나가던 낭아는 정이 이웃마을 언니와 산책하는 걸 봤다. 여인은 무에 그리 즐거웠는지 깔깔 웃더니 정의 팔꿈치를 잡았다. 팔뚝을 쓰는 손끝이 자못 간살스러웠다. 낭아의 가슴팍에 화톳불이 얹혀진 것 같았다. 어떤 방법이라도, 설사 미신에 가까운 것이라도 시도해보고 싶었다.           


그 때, 그녀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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