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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짱이J Jan 24. 2022

#15 가시덤불숲 마녀(5)


덤불숲에서 돌아온 후, 한동안 낭아는 꽁지에 불 붙인 망아지마냥 무게를 잡지 못하고 서성였다. 이제려나, 저제려나, 아무런 표지도 기한도 없이 받아놓은 노파의 주술이 언제 효력을 발휘할지 몰라 속에서 불안이 일었다. 제 오라비 때처럼 한정없이 걸리는 것이라면 의미가 없을진대, 정에게선 기미가 보이지 않았으니 답답할 노릇이었다. 아흐레가 지났을 때, 낭아는 이번에야말로 자신이 덤불숲에 노숙하는 거렁뱅이에게 속은 게 아닌가 의심이 들었다.      


열흘째 되던 날, 어머니가 새참으로 조찰떡을 쪘다. 낭아는 포슬포슬한 떡을 면보째로 이어다 일꾼들에게 건넸다. 순간 손이 모자랐다. 떡을 떨어뜨리던 찰나, 정이 기민하게 그릇을 잡아챘다. 그릇을 건던 손이 낭아의 것과 마주쳤다. 그가 재빨리 눈을 내리깔았다. 낭아는 당황했다.          


좋아했기에 알 수 있었다. 이전까진 느껴지지 않던 시선과 조심스러운 틈들을. 돌아봐주길 바라는 눈빛과 비워둔 곁을. 아무리 순진하기로소니 그런 기류는 놓칠 리 없는 것이다. 정의 기미가 변하고서야 낭아는 실 자신이 소원이 정말 이뤄지리라 믿지 않았었음을 알았다. 하루하루 다가오는 정의 동태에 이따금 숨이 막혔다. 함께 재고를 정리하거나 산책하는 일이 잦아질수록 뒤덜미로 화기가 올랐다. 아주 이따금, 귓전에서 덤불숲 노파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거부할 순 없었다. 거대한 인력이 낭아를 그에게로, 그를 낭아에게로 끌고 있었다. 한 발짝 다가가면 두 발짝 가까워졌다. 머리칼 끝에서 그의 숨결이 느껴졌다. 때로는 어깨에, 허리에 온기가 닿았다. 세상은 부르르 몸을 떨다, 한결 선명한 색으로 변모했다.          


     




“조금만 기다리자. 우리가 준비될 때까진.”          


정이 대답했다. 낭아가 되물었다.     


“왜요?”

“너희 부모님은 안 좋아하실지 몰라.”

“그럴리가요.”

“난 아무것도 없어. 네게 줄 것도, 도움 될 수 있는 것도.”          


정이 낭아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낭아의 목소리에 울음기가 어렸다.     


“아무도 모르잖아요. 우리가 함께라는 걸 몰라요.”

“너를 원해. 다른 사람이 모른다고 해서 그 사실이 변하는 건 아니야.”          


그는 알아갈수록 복잡한 사람이었다. 모든 걸 내주는 듯하면서 마음속 한 켠은 좀체 알 수 없었다. 미처 열지 못한 방들이 많은데 그 열쇠가 낭아에겐 주어지지 않는 것 같았다. 낭아는 이따금 풀이 죽었고, 그 때마다 정은 비맞은 강아지를 보듯 그녀를 내려다봤다.     


그 할머니가 아니었다면 내 힘만으론 얻을 수 없었겠지, 정의 품에 얼굴을 부빌 때마다 낭아는 생각했다. 이토록 복잡한 사람을 혼자힘으로 얻을 수 있었을 것 같지 않았다. 정을 이해하기 어려울수록 그 마음을 알고 싶었다. 자기 사람이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물론 외치지 않는다고 모두가 까맣게 모르는 건 아니었다. 시간이 갈수록 시장 바닥엔 잔가시같은 소문이 덩굴을 쳤다. 포목점집 딸이 그 집 조수와 연분 났다는 소문은 낭아의 부모만 배제한 채 낮고 은밀하게 돌고 있었다. 이따금 동네 처자들이 낭아를 보고 몸을 돌린 채 웃었다. 낭아는 모르는 체했다.     


“너랑 있을 거야.”     


달빛 흐붓한 강가에서, 정 약속했니까.


“네가 원할 때까지, 네 옆에 있을 거야.”     


열기를 머금은 밤바람이 낭아의 이마를 스쳤다. 마주 안은 정의 몸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흙냄새, 이제 막 씨를 뿌린 봄날의 밭냄새가 그에게서 났다. 낭아는 그를 껴안았다. 더 이상 바라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오라비가 돌아온 것은 정과 만난 지 백일째 되던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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