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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짱이J Feb 01. 2022

#18 가시덤불숲 마녀(8)


그만 가, 정이 말했다.  

    

밤이었다. 오후내 내린 눈이 길가마다 발목까지 쌓여 있었다. 정의 집 앞엔 길고양이 한 마리만 어슬렁거렸다.


“보는 눈이 있을지 몰라. 소란스럽게 할 필요 없어.”

“왜요?”     


낭아가 물었다.     


“내일 난 떠나.

“그게 무슨 소리예요?”

“네게 줄 게 없다고 생각했었어. 근데.”     


정이 숨을 골랐다.      


“그 반대였던 것 같아.”

“그러지 마요. 정말 그러지 마요.”     


낭아가 정의 팔에 매달렸다. 정이 내려다봤다. 정적에 가까운 얼굴. 낭아를 볼 때마다 부드럽게 일렁이던 눈에 더이상 빛깔이라곤 없었다.     


“잘 가. ”     


눈앞에서 문이 닫혔다. 한 번도 낭아를 밤길에 혼자 보낸 적 없던 사람이 홀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갔다. 바람이 불었다. 엉망이 된 마음 언저리가 나풀거렸다.

    

낭아는 알았다. 사랑하는 연인 손안의 모래알처럼 빠져나가고 있다는 것을. 팔과 다리, 배가 차갑게 식었다. 정이 만졌던 모든 부분이, 심지어 머리털 한 올까지 얼어붙었다. 뱃속의 새 생명에 대해 말해야 했지만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말한 다음에도 마음이 변하지 않는다면. 상상만으로도 몸서리가 쳐다. 기쁨과 환희의 대상이 되어야 할 아이가 갈 곳을 잃은 천덕꾸러기가 다. 기어코 두드리지 못한 정의 집 대문이 눈앞에서 흐려졌다.     


낭아는 결코 눈앞의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안 돼.”     


노파가 부지깽이로 삿대질했다.     


“제발요.”

“한 놈한테 같은 주술을 두 번 걸 순 없어.”

“그래도 뭔가-”

“진작부터 말하지 않았느냐? 그 다음은 네 몫이라고. 빌 거면 딴 걸 빌어. 나도 네 년 다신 안 보고 싶으니.”  

   

아궁이 안에서 나뭇잎이 나풀댔다. 불길이 거세졌다.      


정의 집을 떠난 직후, 낭아는 곧바로 가시덤불숲으로 내달렸다. 어둑신한 밤이었다. 두껍게 쌓인 눈이 달빛에 반사되어 길잡이 노릇을 했다. 차갑다 못해 삐죽한 공기가 폐부를 찌르고, 줄곧 눈 속에서 뜀박질한 발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추위 느낄 수 없었다. 이 방법뿐이야, 낭아는 끊임없이 되뇌었다. 정이 떠나기 전까지, 조금이라도 더.     


내 옆에 남아있게 해줘요. 일 년만, 몇 달만이라도.”    

 

속사포처럼 뱉는 말 굽이굽이 곡진했다. 이제껏 어느 소원이 가벼웠을까만, 이토록 간절한 것 또한 처음이었다.     


“너.”     


노파가 고개를 쳐들었다. 눈이 쪽 찢어지며 한층 귀살스러워졌다.      


“애를 뱄구나. 그렇지?”


낭아는 말문이 막혔다.      


“애가 태어날 때만이라도 붙잡아두고 싶은 게야. 그럼 맘이 바뀔까 싶어서, 네 오라비처럼. 그렇지?”

“그걸 어떻게-”

“생각하는 거 하고는. 될 성싶으냐?”     


노파가 큰 소리로 웃었다. 목구멍에 가래가 끓는 듯했다.      


“부탁이에요.”     


낭아가 무릎을 꿇었다. 쌓인 눈이 깊어 허벅지까지 잠겼다.     


“어떤 방법이든 좋아요. 일 년만, 딱 일 년만 정이 떠나지 않게 해줘요.”

“이게 마지막 소원인 건 기억하고 있는 게냐?”

“알아요. 그러니 제발.”     


낭아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노파가 질색하듯 몸을 떨었다. 이윽고 부지깽이를 내려놓았다.     


“방법이 아주 없는 건 아니야. 다만 멀쩡한 방법이 아닌 건 알겠지. 한 번 주술을 걸었는데도 돌아선 놈이니.”

“다 좋아요. 괜찮아요.”

“놈을 짐승으로 만들면 된다.”     


낭아의 눈이 커졌다.     


“짐승이요?”

“그래. 돼지나 닭, 아무튼 집에서 기르는 가축 말이다. 그 놈을 짐승으로 만들어줄 테니 묶어놔. 네 애가 태어날 때까지만. 그 담에 인간으로 돌아오면 다시 판단하게 두면 되지.”

“그래도 그건-”

“그건 뭐? 과하다고?”     


노파의 희뿌레한 눈 위로 노기가 비쳤다.      


“그럼 좋은 방법이 있을 것 같더냐? 너 싫다고 달아난 놈이 얼씨구나 돌아올 것 같아? 더 이상 기대할 것도 없는 기집년에게?”

“아무리 그래도-”

“싫으면 꺼져. 세 번째 소원은 묵혀뒀다 네 애새끼 장래를 위해서나 빌어주려므나. 그게 가장 현명하겠다.”    


낭아는 땅바닥을 짚었다.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사람이 아닌 정은 상상해본 적 없는데. 낭아는 조금 전 정의 집 앞에서 돌아다니던 길고양이를 떠올렸다. 졸린 눈의 고양이는 눈을 핥고 있었다. 도망칠 수 없을 것이다. 낭아가 놓아주기 전까지, 결코 그녀를 떠나지 못할 것이다.      


잠깐이야. 위를 올려다보며 낭아가 생각했다. 나무들의 완만한 우듬지 사이로 검푸른 하늘이 보였다. 우리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만. 펄펄 내리는 눈틈으로 작은 별 하나가 빛을 발했다. 고개를 내린 낭아의 목소리 더없이 건조했다.

      

“그렇게 해주세요.”     


노파가 웃었다.      


“이걸로 내 소원값은 다 치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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