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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짱이J Feb 06. 2022

#20 가시덤불숲 마녀(10)


어쩌면 그녀는 계획대로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부모의 실망과 분노를 감내해서라도 아이를 낳고, 정을 다시 사람으로 바꿀 수 있었을 것이다. 정으로부터 마침내 용서받은 다음, 괜찮은 가정을 꾸렸을지 모른다. 아이는 무럭무럭 자라 재롱도 부리고 몇 달 먼저 태어난 제 사촌과 싸움질도 했을 것이다.

      

낭아는 정과 작은 포목점을 열었으리라. 면과 광목 뿐만 아니라 모보단과 양단, 공단, 호박단, 자미사를 들여 아비보다 더 고운 가게를 운영했을 것이다. 젊은 부부는 개점 때부터 부지런하고 싹싹해 금방 자리 잡았으리라. 부인네들은 철철이 주문을 넣고 조언을 구했을 것이다. 이따금 부부는 오라비가 살았다던 해안 도시에도 함께 가고, 다 자란 아이에게 신기한 구경을 시켜줬을 것이다. 행복했을 것이다. 설사 그 모든 꿈이 낭아만의 망상이었을지라도.     


어디부터, 무엇부터 잘못됐던 걸까.


          




정월 대보름 전날, 낭아는 이웃마을에 다녀왔다. 동무들과 함께였다. 산어귀 동리에서는 정월 대보름이면 전이며 국이며 음식을 했고, 이웃끼리 나눠 먹으며 회포를 푸는 풍습이 있었다. 준비를 위해서는 아침부터 바삐 집을 나서야 했다. 금방 올게요. 새벽녘 정의 집에 들른 낭아는 개의 누런 털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개가 낑낑댔다. 대문을 닫고 나가려던 낭아는 문득 하루종일 묶여있는 그가 가여웠다. 오늘만이에요. 개의 목에서 가죽끈을 끌렀다.

     

그러나 일정은 생각보다 늦어졌다. 가는 곳마다 원하는 물건이 없었고, 올케가 특별히 부탁한 아기 물건도 찾을 수 없었다. 하루종일 동동거리던 낭아는 해가 뉘엿한 저녁이 되어서야 귀가했다.     


“고생했다. 얼마나 돌아다녔누.”     


저녁 밥상 옆에 둘러앉아 있던 가족들이 반겼다. 가족들은 낭아만큼이나 지쳐 보였다. 대보름은 포목점 대목이었고, 어머니와 올케 또한 대보름 준비에 시달렸을 게 뻔했다. 낭아는 기름이 둥둥 뜬 장국을 흘낏 보고 오라비에게 눈을 돌렸다가 그만 깜짝 놀랐다.      


“다리가 왜 그래요?”

“아, 이거.”     


오라비가 멋쩍게 웃었다. 그의 왼다리에 흰 붕대가 칭칭 감겨 있었다. 쭉 편 채 제대로 구부리지도 못하는 걸 보니 부목 비슷한 것도 댄 것 같았다.     


“혹 뼈까지 상했을까 의원 영감이 과하게 조치했다. 난 괜찮아.”

“큰일 날 뻔했어요, 아가씨.”     


손을 내젓는 오라비 대신 올케가 말했다.      


“치료가 빨랐으니 망정이지, 왔을 때만 해도 피칠갑을 해선.”

“네 오라비, 아주 큰일나는 줄 알았어.”     


어머니가 거들었다.     


“웬 떠돌이개가 기어들어선....”     


낭아가 고개를 쳐들었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낭아에게 채근당한 어머니가 말을 이었다.     


“아니, 그 정이 말이다. 오늘 네 오라비가 장부 정리하다 보니 보증서를 정이 빼놓고 안 준 게 있더란 말이야. 연락 없이 떠난 사람이니 어디 찾을 수가 있겠니. 그 보증서가 꼭 필요한데.”     


낭아의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어머니는 눈치채지 못하고 다시금 분이 나는지 씩씩댔다.      


“그래서 네 오라비가  애 살던 집에 집주인이랑 갔어. 혹시나 남기고 간 물건이 있나 하고. 대문 따서 들어가보니 웬 개 한 마리가 떡하니 있지 않니. 그것도 아주 큰 놈이. 주변에서 개짖는 소리가 났다더만 그 놈이었나 보지.”

“난리도 아니었어요, 아가씨. 개도 놀랐는지 그이를 문 거예요. 다른 사람들이 떼내려고 그렇게 때렸는데도 놓질 않아서, 결국엔 집주인이 몽둥이로 치고 나서야 떼어냈어요.”

“살점까지 뜯겼을까봐 어찌나 걱정했던지, 말이 아니었어.”     


어머니와 올케가 차례로 말했다. 낭아의 머릿속이 부얘졌다. 가까스로 물었다.     


“개는요? 개는 어떻게 됐어요?”

“아, 개는...”     


올케가 말끝을 흐렸다. 뭔가 겸연쩍은 눈치였다. 어머니는 별 걸 다 우세스럽게 여긴다는 듯 올케의 어깨를 다독였다.     


“너두 알잖니. 짐승한테 그렇게 크게 화를 당했는데 그냥 넘어갈 수 있어야지. 제대로 액땜해두지 않으면 나중에 더 큰일날 것 같더라.”

“당신은 여즉껏 그런 미신을 믿어가지고.”     


아버지가 말했다. 어머니가 혀를 찼다.     


“미신이래도 내 새끼 일인데 어찌 가만 둬요? 네 오라비는 싫다 했는데 내가 잡아왔다.”

“어디요? 여기요?”     


낭아가 두리번거렸다. 어디에도 개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그 모양을 보고 어머니가 웃었다.      


“아니, 그게 아니지. 잡았다니까, 개를 잡았어.”     


어머니가 손가락을 들었다. 낭아는 그 끝을 따라갔다. 지진이 나는 것 같았다. 세상이 뒤집히고 있었다. 머릿속에서 오래전 정의 목소리가 울렸다.


'비둘기를 잡아먹는 것보단 낫잖아요.'


어머니가 가리킨 곳에는, 김이 무럭무럭 피어오르는 솥이 있었다.     


     




제발요, 낭아가 빌었다. 다 녹지 못한 눈이 무릎 아래서 찰박였다. 한 달 전 그 밤처럼, 치맛자락이 허벅다리 언저리까지 젖었다. 처녀의 간곡한 울음소리에 덤불숲 전체가 고요해졌다.

      

제발.”

“꺼져라.”

“이럴 거라곤 한 적 없잖아요. 이렇게 허망하게 갈 수 있다곤 안 했잖아요. 사람인데, 어떻게 그래요. 이건 무효예요.”

“목숨에도 무효란 게 있나 보구나. 어이가 없어서 원.”     


낭아는 몸을 일으키지 않았다. 귀와 코, 입가에 화기가 뒤덮였다. 퉁퉁 부은 눈 탓에 앞이 보이지 않았다. 말을 잇기 위해 멈추려 한 울음이 온몸으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넌 이미 소원을 다 썼어. 난 빚 하나 없이 다 갚았다.”

“피라면 몇 번이고 낼게요. 내 손에 피가 나서, 그래서 소원을 들어준 거잖아요.”

“네가 단지 피가 나서 소원을 들어준 거라 생각해? 멍청한 년 같으니라고.”     


노파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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