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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짱이J Mar 08. 2022

#22 난만 닦을 수 있다면


“상무님.”     


이 부장이다. 현은 서류를 내려놨다.      


“오후 4시쯤일 것 같답니다. 지금 회장님 결재 기다리는 중이랍니다.”     


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이 부장.”

“벌써 짐정리를 하셨습니까?”

“어찌될지 모르니 해둬야지. 이참에 버릴 거 다 버렸어.”     


현은 빙긋 웃었다. 그의 사무실 책장 절반이 비어 있다.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책장을 꽉 채우고 있던 물건들은 지금쯤 다 소각됐거나 박스에 싸인 채 비서 자리에 놓여 있을 것이다. 이 부장이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입을 열었다.      


“회장님께선 아무 말씀 없으셨습니까?”

“글쎄.”     


현은 부장이 묻는 게 무엇인지 알면서도 대답을 꺼렸다. 이제는 정말, 말을 아끼는 편이 나을 것이다. 이 부장 목례를 하고 나가자 현은 다시 서류를 들었다. 글자가 들어오지 않았다. 면보를 들고 창가에 하나 남은 난 쪽으로 갔다.

      

오늘은 임원 인사가 있는 날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임원 인사가 있는 '날일 것이다'. 회장의 결재는 며칠째 미뤄지고 있었고, 이번주 내내 현은 속이 타들어갔다. 이번에 승진한다면 부사장이다. 못한다면 퇴직이다. 결혼이 늦었던 현은 아직껏 두 아들을 장가보내지 못했다. 막내는 대학생이었다. 이만하면 할 만큼 했다 싶으면서도 취직하지 못한 둘째를 생각하면 마음이 조였다.   

   

난잎이 길쭉길쭉했다. 이건 언제 받은 거더라, 잎끝을 매만지며 골똘히 기억에 빠졌다. 아마 처음 임원 승진을 했을 때일 거다. 그 때 현은 사무실이 무슨 온실이라도 된 줄 알았다. 회사와 집으로 배달된 화분들의 개수만 백 여개에 이르렀다. 어디선가는 거의 나무에 가까운 것을 보내 용달차가 집까지 와 내려주고 갔다.

     

그러나 우습게도 난잎을 닦을 때면 현은 신입사원 시절만 생각났다. 부서 막내인 현에게 부장은 난 돌보는 일을 시켰다. 그 잡일이 뭐라고 잘하고 싶어 물도 주고 잎도 닦고 바지런을 떨었다. 헌데 공을 너무 많이 들인 게 문제였는지, 두 달이 못 되어 부장 자리에 있던 난들이 차례로 죽었다. 몇 차례 잡혀가 한소리 듣고 나자 난만 보면 신물이 났다. 이십 년 동안 쳐다도 안 봤다. 그런데도 나이 먹고는 삼십 년 전 그 부장처럼 난 보는 걸 낙으로 삼고 있으니,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삼십 년. 벌써 그렇게 지났나. 현은 면보를 내려놓고 창밖을 봤다. 삼십 년이라니, 정말이지 엊그제같은데.

     

내달린 세월이다. 지금 이렇게 속이 마른다지만, 사실 어느 단계에서고 치열하지 않은 적 없었다. 언제나 승진하지 못하면 뒤처지는 게 아니라 아웃이었고, 회사를 나갈 수 없다면 나가느니만 못한 취급을 받았다. 젊은 시절의 현은 한때 점장이던 이들이 주차관리 요원 조끼를 입고 야광봉을 휘두르는 걸 봤다. 승진이 조금 늦어졌을 뿐인데 자신을 벌써 뒷방 늙은이 취급하는 후배를 마주한 적 있었다. 그런 취급을 받긴 죽기보다 싫었다.   

  

현은 정치질에 능한 타입은 아니었다. 라이벌을 제끼겠다고 드라마에 나오는 권모술수 비슷한 것도 부려본 적 없었다. 다만 운이 좋았을 뿐이다. 자신을 못마땅해하던 인사권자가 스캔들에 날아가고, 유력한 경쟁자가 하급자의 실수에 휘말려 좌천됐다. 유능한 건 기본 소양이지만 임원까지 달려면 천운이 따라야 하는 것이다. 다행히 현도 일생일대의 동아줄도 붙잡지 못할 만큼 멍청하진 않았다.      


그러나 꼭대기에 도달했을 때, 깨달았다. 고원의 위 아무도 없다. 사람들은 잘 몰랐다. 임원이라 하면 돈은 억대로 받아가며 시키는 것만 잘하는 인간으로 생각하기 십상이었지만 실제는 달랐다. 외로울 때가 많았다. 업무에서의 고민도, 매일밤 잠을 설치게 할 만큼 막중하게 짓누르는 책임감도, 마땅히 나눌 사람이 없었다. 산전수전 다 겪으며 어지간한 사람보다 멘탈이 세다고 여겼는데, 가끔은 그조차 추스르기 어려울 만큼 마음이 힘든 날이 있었다.

      

현은 이따금 저들끼리 몰려다니며 소주를 마시러 가는 대리급들이 한없이 부러웠다. 상사 욕도 하고 개인사 걱정도 나누고 괜찮다 서로 위로할 수 있는 그 아이들이 부러웠다. 이제 현에겐 아무도 없다. 선배도, 동기도, 후배도. 한때 마음을 졸리게 했던 경쟁자조차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사라졌다. 시간이 가장 무서운 것이다. 무수한 시간이 지나 혼자 남는 것이 두려운 것이다. 그럼에도 이 자리를 내놓겠느냐 묻는다면, 그 또한 쉽지 않은 것이다.

     

현은 다시 면보를 들었다. 면보가 스칠 때마다 잎 위에 미세하게 얹혀 있던 잔먼지가 털려 나갔다. 회사에서 나간 후에도 최소한 난잎은 닦을 수 있겠지. 물건을 못 버리는 와이프는 선물로 들어온 난을 한참 남들에게 나눠주고도 남은 게 너무 많다며 불평했다. 최소한 그 난들은 닦을 수 있다.     


그럼 괜찮을 것이다. 조금은.     


핸드폰이 울렸다. 직감과도 같은 깨달음이 왔다. 아주 잠깐 심장이 내려앉았지만 이내 평온해졌다. 괜찮다. 어떤 식으로라도 괜찮아. 현은 천천히 면보를 내려놓고, 책상으로 다가간다. 핸드폰이 그 대신 방긋 웃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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