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여신님이 보고계셔> 후기
죽지 못해 산다는 말은 누가 만든 말인지 모르겠다. 처음에 말을 뱉은 사람은 어떤 상황에 처해 있었는지 모르겠으나, 놀랍게도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씁쓸한 미소를 짓는다. 농담처럼 돈 많은 백수가 꿈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설사 돈 많은 백수로 살 수 있게 된다고 해도 삶이 마냥 행복할 수만은 없다. 삶은 필시 고통을 수반하기 마련이다.
뮤지컬 <여신님이 보고계셔> 속 여섯 명의 인물들은 우리들과는 조금 다른 상황에 처해 있다. 그들은 죽임을 당하지 않기 위해 상대편을 죽이고 산다. 한국 전쟁으로 인해 매일같이 생사의 기로에 놓여 있던 그들은 무인도에 고립되면서 또 다른 생사의 기로를 마주하게 된다. 그 섬에서 생존하고 탈출하기 위해 그들은 서로를 가로막던 이념의 장벽마저 무너뜨리고 동지가 된다.
남한 병사 두 명과 북한 병사 네 명이 한 편이 되는 데에 가장 큰 역할을 하는 것은 ‘여신님’이다. 아프로디테와 같은 그리스 신화 속 여신을 떠올리거나 흔히 외양이 아름다운 사람을 빗대어 표현하는 여신을 떠올렸다면, 이 뮤지컬 속 ‘여신님’과는 많이 동떨어진 해석임을 미리 지적하고 싶다. 필자 또한 제목만을 보고 내용과 작품성에 대해 큰 오해를 했었다. 역시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지 말라는 옛 선현들의 말씀은 하나도 틀린 것이 없다.
뮤지컬 <여신님이 보고계셔> 속 ‘여신님’은 명확하게 정의 내리기 어렵다. 영범, 석구, 창섭, 동현, 주화, 그리고 순호에게 ‘여신님’은 각기 다른 의미를 지닌다. 딱 한 가지 공통점을 꼽아 보자면, 그들에게 ‘여신님’은 삶의 이유이고, 생존에 대한 희망을 찾아볼 수조차 없는 무인도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이유이다. 유일하게 선박 수리를 할 수 있는 순호가 정신을 다잡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믿는 척했던 ‘여신님’은, 어느새 그들에게 절박한 상황 속에서 참고 버틸 힘을 주는 여신이 되어 있었다.
영범에게는 자신의 아이가, 석구에게는 끝내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지 못한 누나가, 주화에게는 파트너가 되어 함께 춤을 추기로 약속한 동생이, 창섭에게는 자신을 독하게 키웠던 홀어머니가, 동현에게는 자신을 두고 남으로 전향한 가족이 ‘여신님’이다. 그들은 총성과 비명이 난무하는 전쟁 속에서 잊고 살 수밖에 없었던 가장 소중한 존재를 무인도에서 되찾게 된다. 여신님이 보고 계신 무인도에서 만큼은, 그들도 더 이상 이념 싸움 하에서의 총알받이가 아니라 자신에게 소중한 것을 지키며 살아가는 평범한 인간일 수 있다.
순호는 전쟁통에 형을 잃은 후 전쟁에 대한 공포를 남들보다 심하게 느끼게 되었다. 순호에게 있어 ‘여신님’은 전쟁은 물론 사소한 싸움도 없는 진정한 평화이다. 뮤지컬 <여신님이 보고계셔> 속 큰 반전은, 순호마저도 ‘여신님’을 믿는 척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2막 후반부의 ‘보여주세요’라는 넘버에서 무인도에 표류된 지 백일 째 되던 날, 배의 항로를 정하는 과정에서 다시금 불거진 다툼에 다시 삶의 의욕을 잃은 순호가 여신님에게 하는 말에서 드러난다. “당신을 믿는 척하면 다 될 줄 알았어. 더 이상 안 싸우고 다 괜찮아질 줄 알았어.”
재미있는 점은 “누구를 위해 우리는 지금, 무엇을 위해 서로 또다시” 싸우는지 알 수 없게 만들었던 이념과 “미움도 분노도 괴로움도” 모두 숨결 만으로 녹여 사라져 버리게 할 수 있는 ‘여신님’ 모두 형체 없는 추상적 개념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적어도 여섯 명에게 있어 ‘여신님’은 이념을 뛰어넘었다. 그들에게 당장 살아남을 방도를 마련해 주어서가 아니라, 삶의 이유를 찾게 만들어 주었고 그 삶의 이유는 이제 전쟁보다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무인도 탈출을 앞두고 다시 맞닥뜨릴 전쟁을 알지만, 그들은 더 이상 “주어진 길만을 따라서 달려온 그 끝에서”, “길을 잃은 줄도 모르고 달려온 그 끝에서” 낯선 나를 마주하지 않는다. “깨어있을 때도 잠든 후에도 언제나 부르고 바라고 기다리는 곳, 지키지 못한 약속 함께 이룰 수 있는 곳, 못다 한 많은 말들 맘껏 말할 수 있는 곳.” 이제는 길을 잃었던 그들에게도 “돌아갈 곳이” 있다.
한국 전쟁을 배경으로 하지만, 뮤지컬 <여신님이 보고계셔>는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는 여타 다른 작품들이 지니는 클리셰를 따르지 않는다. ‘여신님’이 보고 계신 무인도에서 무기 상자는 ‘여신님’ 자리에 숨겨져 있었고, 그 어떤 관객도 극 중 인물이 목숨을 잃거나 다치는 모습에 눈물 흘릴 일이 없었다. 관객들은 오히려 여섯 명이 ‘여신님’을 잊게 만든 이념을 원망했으며, ‘여신님’을 되찾는 여섯 명의 모습에 눈물 흘렸다. 전쟁이 여섯 명을 비극적 운명으로 이끌었으나, 뮤지컬 <여신님이 보고계셔>가 마냥 진부한 전쟁 이야기라고 느껴지지 않는 이유이다.
각자 다른 매력을 가진 여섯 남자들의 생존기에 웃음을 참지 못하던 관객들은 결국 눈물을 감추지 못한 채로 극장을 빠져나온다. 여신님이 보고 계신 무인도는 무대 위에만 존재하지만, 뮤지컬 <여신님이 보고계셔>를 관람한 관객들은 마음속에 ‘여신님’을 하나씩 품고 나온다. 감정의 승화로서의 카타르시스를 경험한 관객들은 죽지 못해 살고 있던 삶 속에서 ‘여신님’을 떠올리며 살아갈 이유를 되새긴다. 무인도가 아니더라도 ‘여신님’은 늘 우리를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