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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live in the kitchen Aug 21. 2023

외국 호텔 슈퍼바이저

니가 이상한 님이세요.

호텔리어를 처음부터 꿈꾼 건 아니지만,

얼떨결에 호텔 매니지먼트를 외국에서 공부하고 어느덧 10년 차가 되었다.

듀티매니저도 달아보고, 다시 호텔로 돌아갔을 땐, 듀티매니저에 지위에 속하는 슈퍼바이저가 되었다.

10년이나 일했는데도 내가 슈퍼바이저에 머문 건, 내 영어실력이 좀 한몫하지 않았나 싶다.

살면서 내 발목을 잡는 영어.... (그런데도 공부를 안 함. 먹고 사느라 힘들어서..쉬는 내진짜 삶을 살고싶음)


이전 직장

내가 몸 담은 지도 10년이 넘는 이 시간 동안 나는 지지리도 이 일이 싫었다가도 다시 찾게 되는, 다시 찾을 수밖에 없는 내 직업이 되었다. 사실, 여기선 내 영어적 한계 때문에 다른 일을 다시 시작할 엄두가 잘 나지도 않을뿐더러, 나 정도의 영어 (제한적으로 능숙한 수준) 실력으론 다른 직종으로의 이직이 쉽지 않다. 내가 자꾸 스스로 '쉽지 않다. 어렵다'로 단정 지어서일까, 나만한 영어실력으로 더 나은 일을 잡는 사람들도 보곤 했다.

그들은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진짜 궁금했다. 어디서 그런 자신감이 나오는지) 모든 장애를 무너뜨리고 욕을 엄청 먹어가면서도 원하는 자리에 오르곤 했다. 대단했다. 과정이 아름답진 않았으나, 원하는걸 손에 넣고 사람들의 시선에도 아랑곳없는 강력한 정신력을 갖고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박수받을 만했다. 나한테서 만.


최근 직장

호텔로 옮기고 나서, 나는 더욱 정신을 잃어갔다. 엄청난 일들이 산적하게 있는 데다, 더 많은 일을 하길 바라는 매니저들. 그런데 끊임없는 문화적 충돌과, 언어적 한계와 개인적 감정들을 대면해야 했다. 어떤 대접을 받고 자라왔는지 모르겠지만, 별 쓸데없는 걸로 시비 거는 사람들이 나를 짋밟고 싶어 했다.




손님의 개인적 감정에 대한 예를 들면, 너무 정신없는 호텔의 조식시간, 우리는 조식에 바리스타가 타주는 따끈한 커피를 제공하는데, 레스토랑에 꽉 차는 사람들의 커피 기호를 기억할 길이 없어 인상착의를 적어두곤 했다. 레스토랑에 한 중국인 여성이 커피를 주문해서, '중국여성을 위한 플랫화이트 (Flatwhite for a chinese lady)'라고 적어놓았다. 누가 봐도 찾을 수 있도록. 그곳에 중국인 여성이 혼자였으므로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문제 삼았다. 그 문구는 직원끼리만 볼 수 있도록 적은 것이었는데, 그녀가 테이블에서 기다리지 않고, 그 새를 못 참고 Bar에 가서 기다리느라 그 문구를 보게 되면서 불만이 시작된 것이었다. 처음엔 어이없다는 듯 웃어 제끼더니 매니저를 찾아 정식으로 불만을 제기했다. 불만의 이유는 이것이 인종차별적 문구라는 것이었다.


어이가 없었다. 나는 그녀의 엄청난 피해의식에 정신이 혼미해져 갔다.  그녀의 정식 불만을 듣기 전 그녀가 동료로 보이는 중국인 남성과 중국어와 영어로 하는 대화를 들었다. "중국여자라니!?" 마주 앉은 동료 남성이 그게 뭐가 문제냐는 듯 가볍게 말했다. "중국여성 맞잖아 ㅎㅎ" 그녀는 또 무슨 일인지 궁금해하는 옆에 앉은 인도 남성에게 물었다. "너한테 인도인이라고 말하면 좋겠어?" 그 인도남성도 "상관없는데 ㅎㅎ"라고 응수했다.


 아무튼, 매니저는 내가 만든 문구가 인종차별적인 문구니 문구대신 방번호를 적어 넣으라고 어처구니없는 대답을 하면서 그것이 정답인양 큰 소리로 말했다. 단호하게 큰 소리로 말하면 정답이 되는 건가 또 한 번 정신이 혼미해지면서 내 얼어붙은 입을 탓할 뿐이었다. 손님들은 자기 방 번호도 모르는데, 그 많은 사람들 커피를 기억하는 것도 어려운데, 그들의 얼굴과 방번호와 커피를 일일이 기억하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설루션처럼 말하고 있다. 아 꽉! 진짜.



직원들의 어처구니없는 기대와 문화적 충돌을 예로 들어 보자면,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만 19살짜리 여직원. 16살부터 맥도널드에서 풀타임으로 일한, 흔치 않은 일의 강도를 감당해 내는 팀원이다. 내가 농담으로 넌 19살이지만 29살처럼 일한다고 칭찬 같은 농담을 하곤 했는데, 하루는 아침 일찍 오자마자 기분이 엄청 꽝이다.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었는데, 닭똥 같은 눈물을 떨군다. "남자친구 이모님이 돌아가셨어." "자주 뵙던 분이야?" 하고 안타까워하다가 "아니 어제 처음 봤어."띵...................................................................................................................................


모진 세월을 감내하는 동안, 내 마음이 얼음처럼 차가워 진걸까? 처음 본 사람의 영정 앞에서도 아니고 며칠이 지나서 회사에서 운다는 게 이해하기 어려워 "내가 죽어도 슬퍼해 줄거지?"라는 해선 안 될 말을 하고 말았다. 그것이 화근이 되었다. 백인과 섬나라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그녀는 섬나라 문화를 상당히 따르고 있었다. 그녀의 모습을 제외하면 아마 모든 섬나라 가족이 그녀를 돌보아 왔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뉴질랜드의 주변엔 몇 개의 섬나라가 있는데 정말 작은 국가의 모습을 띠고 있는 나라들이다. 엄청난 주변 섬나라 토속인들이 호주와 뉴질랜드로 이민 와 있다. 섬나라 사람들은 완전한 가족중심 사회이다. 거의 사회주의에 가까웠다. 가족들의 돈을 모아 다 함께 여행을 떠나고 파티를 하고 의식주를 해결했다. 내 주머니란 있을 수 없었다.


그것은 그녀와 나 사이에 엄청난 갈등을 야기했고, 그녀의 언니라는 사람이 와서 매니저에게 강하게 항의함으로써 나는 또 죄인의 모습으로 매니저와 단독해야 했다. 물론 매니저는 모두 내 탓을 했다. 그녀가 3년 전 엄마가 돌아가셔서 힘든 시간을 지니고 있는 데다, 그 이모분이 돌아가신 병원이 엄마가 돌아가신 병원이라 더 힘든 시간들을 보내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그녀의 삶을 어떻게 그렇게 잘 알 수 있단 말인지.. 난 또 한 번 이 일이 진저리 나게 싫어졌다. 일단 사과를 하고, 회사와 개인사를 좀 구분 지어달라고 했다. 그리곤 집에와서 스트레스로 몸살을 앓았다.


나는 사진을 찍었다. 언제가 마지막이 될지 모르겠지만, 마지막일 것 처럼.

그리고 전 직장으로의 이직을 꿈꾸고 있다. 언제든 모든게 갖춰지면 뒤도 안돌아보고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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