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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두니 Sep 28. 2021

그림 못 그리는 아이

나는 어릴 때 그림을 아주 못 그렸다.

9살 때였다. 두족화(머리에서 팔다리가 뻗어 나오는 그림. 유아기 아이들의 그림 형태)를 겨우 벗어난 수준의 그림을 그렸는데도 내가 그림을 못 그린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던 상태였다.

어느 날, 내가 그린 사람 형태를 보고 엄마가 크레파스를 집어 들었다. 엄마는 그림을 고쳐주며 조곤조곤 설명해 주었다.

"이거 봐라. 사람 팔 하고 다리가 실제로는 이렇게 안 가늘잖아. 팔다리에 요렇게 통통하게 살을 붙여 줘야지. 이렇게 동글~동글."

엄마는 살색 크레파스로 가느다랗게 그려진 팔 위를 동글동글하게 덧칠했다. 해골 뼈다귀 같던 팔다리에 금세 살이 올라 정말 살아있는 사람 같아 보였다.

아, 내가 그동안 이상하게 그렸었구나.


나의 잠재되어 있던 미술 감각은 바로 그 순간에 깨어났다!

유레카!!

엄마의 시범 한 번은 큰 깨달음을 주었다. 그때부터 사람 그림을 그릴 때면 엄마가 살을 붙이던 장면을 연상하며 따라 그렸다. 사물이나 풍경도 실제 모습이 어떤지 자세히 관찰하며 그렸던 것 같다. 어느새 나는 그림 잘 그리는 아이가 되어 있었다.


중고등학교 때는 만화를 많이 그렸다. 주로 잘생긴 남자와 예쁜 여자 얼굴이었다. 그 둘은 늘 키스를 하고 있었다. 다분히 자극적인(?) 그 그림은 쉬는 시간, 반 친구들을 자석처럼 내 자리로 끌어당겼다. 선심 쓰듯 한 장씩 그려서 나눠주면 얼마나 소중하게 받쳐 들고 가던지..    

 

대학을 가고 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주변 사람들은 나를 그림 잘 그리는 사람으로 알고 있었다. 누구 앞에서 그림 그린 적도 없고 말하고 다닌 적도 없으며 그림으로 뭔가를 이룬 것도 하나 없는데 말이다.


그때까지 그림은 나에게 별 의미가 없었다. 깨알 같은 특기 정도로만 생각했다.

직장에 다니며 내게 쓸 여윳돈이 생기자 뭔가 배우고 싶다는 욕구가 일었다. 고민은 없었다. N극에 S극이 붙듯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그림이 배우고 싶었으니까. 작디작은 깨알을 좀 더 큰 알갱이로 키우고 싶었던 모양이다.


집 근처 건물 2층에 '화실'이란 글자가 보였다. 무작정 그곳의 문을 두드렸다. 어두침침한 실내엔 물감 냄새 대신 담배냄새가 났다. 누추한 몰골의 남자가 이젤 앞에 앉아있었다. 미술 수업을 하냐고 묻자 한 달에 얼마라고 답했던 것 같다. 대화 내용이 생각 안 나는 건 내 눈이 한 곳에 꽂혀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그 남자의 손!


손에 담배를 들고 있었는데, 그 모양이 이상했다. 마른 풀색의 잎으로 돌돌 만 형태의 담배였다. 그의 행색과 투미한 눈빛, 의심스러운 담배를 보고서 난 그대로 몸을 돌려 도망치듯 그곳을 빠져나왔다.

대마초다! 등골이 오싹했다. 미술 하는 사람에 대한 선입견이 있던 차에 대마초까지 목격했으니 그림이고 뭐고 정이 뚝 떨어졌다. 지금도 대마초가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지만 낯선 사람이 보는 데서 그렇게 꺼내 들 만큼 대담하긴 어려울 거라 생각한다. 아마도 잎담배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 첫 도전에서 미술에 학을 뗐다.


이후 나는 정식 미술이 아닌 파생/관련 종목을 배우게 되었다. 먼저 당시 유행하던 포크아트였다. 공예에 속하는, 좀 더 접근이 쉬운 종목이었다. 개인 공방에 가서 초급, 중급 언저리까지 배웠다. 붓을 잡고 아크릴 물감으로 칠을 하는 게 재미있었다. 하지만 레퍼토리가 딱 정해져 있고 강사에게서 '장사'의 냄새가 났다. 가장 불만족스러운 점은 스케치 본이 있다는 거였다. 본 대로 먹지에 대고 밑그림을 베껴 채색만 하는 형식이었다. 그 방식이 나한테 맞지 않았다.

포크아트(중급반을 때려치우고 외국 포크아트 책을 사서 본 없이 그려 본 벽 장식)  by duduni


다음은 미술치료였다. 미술 표현을 매개로 심리 치료를 하는 학문으로 기회가 있어 배우게 되었다. 미술치료는 소속이 심리학이다. 미술은 내면을 이끌어내는 수단이었다. 미술 치료에는 다양한 기법들이 사용된다. 그리기, 만들기, 칠하기....  난 도자기 흙으로 내면을 표현하는 스터디와 만다라를 그리는 스터디참여했다. 모인 결과물로 전시회도 하며 그 기법이 주는 마음의 이완 활동에 푹 빠져 지내기도 했다.

하지만 미술 치료를 제대로 써먹으려면 전공을 하고 박사학위까지 야 했다. 스터디 활동은 그저 취미나 마음 수양에 머무는 것이었다. 심리학에도 관심이 있었지만 당시 대학원에 다닐 사정이 되지 않았다.  아이를 가진 상태였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난 심리학보다 미술 활동을 더 좋아했다.


미술의 곁다리를 두루 훑고 다녔지만 마음속 공허가 채워지지 않았다.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게 뭔지 들여다보지 않고 닥치는 족족 훅 빠져서 체험하고 나오는 식이었으니 더 그랬다.


그러다 유화를 배우게 되었다. 우연히 구청 소식지를 보다 수강생 모집 광고를 보고 빈자리가 있어 들어간 것이었다. 아이들이 막 초등,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하던 때라 반나절 정도 시간이 있었다.


수강 첫날, 첫 수업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나와 동갑인 선생님이 설명을 해주시는데, 창으로는 햇살이 들어오고 그 햇살이 수강생들의 캔버스를 비추고 공중에 떠다니는 유화 물감 냄새마저 향기롭게 느껴졌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설레고 눈앞이 환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림 배우러 가면 으레 잡는 4B연필은 필요 없었다. 처음부터 연필 대신 유화 붓으로 시작됐다. 줄 긋기, 구, 기둥, 뿔 등을 몇 주에 걸쳐 그리고 바로 모사에 들어갔다. 그리면서 터득해나가는 방식이었다. 그때부터 그리기 시작한 유화를 지금까지 하고 있다.

(대문 사진 포함) 연습으로 그렸던 모작들 oil on hardboard paper.  by duduni


수업 시간, 눈을 반짝거리며 설명을 들었다. 선생님의 말 한마디, 손길 하나, 붓 자국 하나 놓치지 않으려고 눈을 부릅떴다. 그림 그리는 하루하루가 즐겁고 신났다. 그림 그리기를 평생 할 수 있겠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유화를 그리고 나서는 공허함이 사라졌다. 그러면서 알게 되었다. 내가 정말 하고 싶었던 게 바로 이거였구나!

참, 징하게 둔하다. 그거 깨닫는 데 어지간히 오래도 걸렸네.


그림에 관심이 있었던 게 아니라 했지만, 만화를 그리고, 화실을 찾아가고, 포크 아트와 미술치료를 배우고, 소식지에 있던 유화반 모집 광고가 눈에 들어온 것을 통틀어보면 그 방향이 줄곳 한 곳을 향한다는 걸 알 수 있다.


곁다리를 파고드는 건 효과적이지 못했다. 원하는 게 있으면 정면 돌파하는 것이 옳았다. 그것만이 진정한 만족을 주었다.(물론, 는 '원하는 것' 자체를 미처 알지 못한 경우였지만.)


전공을 하지 않고 문화센터 수강하는 게 정면 돌파냐고 따진다면 할 말은 없다. 그건 당시 나에게 최선의 선택이었기에 아쉬움은 없다. 그런 기회라도 주어진 것에 감사한다. 그 수업을 발판으로 그림을 시작할 수 있었으니까.

 

알고 보니 너무나 오래도록 바라 왔던 그림 그리기.

그토록 즐겁고 열정 넘쳤던 나의 그림 이야기를 브런치 북에 풀어놓고자 한다.       

연습용 모작. oil on canvas.  by duduni



< 그동안 선보였던 '나의 그림 이야기' 매거진을 브런치 북로 발행합니다. 이 글은 곧 발행할 브런치 북의 프롤로그입니다.>


https://youtu.be/qjzh3CwaYKc 

<유자차>

꾸밈없는 목소리가 매력인

'브로콜리 너마저'의 곡이다.


이 차를 다 마시고 봄날으로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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