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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두니 Apr 08. 2021

뜯어버린 그림

한 발 떨어져 전체를 보자.

무슨 일을 하든 자주, 많이 하면 잘하게 된다.

그림도 마찬가지다. 자주, 많이 그리면 잘 그리게 된다.


한창 그림에 빠져있을 때는 물불 안 가리고 열심히 그렸다. 그토록 그리고 싶었던 그림인데 오죽했으랴.

기초 과정을 익히고 재료 탐색을 어느 정도 마치고 난 뒤부터 본격적으로 그리기에 들어갔다.


먼저 그릴 자료를 모았다. 어딜 가든 디카(디지털카메라)를 가지고 다니며 마음에 드는 순간을 담았다. 아름답다고 다 그리기 적합한 자료가 되는 건 아니었다. 구도나 명암 특히 색상이 잘 나와야 그리기가 편했다. 처음에는 사진에 보이는 대로만 그렸기 때문이다.


마음에 드는 장면을 찍었을 땐 날아갈 듯 기뻤다. 어서 빨리 캔버스에 옮기고 싶었다. 되돌아보니 참 열정 넘쳤던 시기였구나 싶다. 아이들을 재우고 난 밤이면 사부작사부작 그림도구를 펼쳤다. 고요한 밤 시간이 집중하기 더 좋았다.


잠이 오면 진한 커피로 각성하고 다크 초콜릿으로 당 충전을 하며 그렸다. 그 진한 드립 커피에 카페인 가득한 초콜릿의 조합은 위궤양이라는 초유의 결과를 불러오긴 했지만.    


그렇게 재미날 수가 없었다. 빨려 들어가듯 심취해서 그려댔다.

무릇 그림에 코를 박고 그리다 보면 놓치기 쉬운 게 있다. 전체를 보는 눈이다. 캔버스에 들러붙어 세세하게 파고 있으면 그 부분만 보인다. 전체적인 그림을 보지 못하는 거다. 그래서 그림 그릴 때는 수시로 의자에서 일어나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전체를 보며 진행해야 한다. 막상 몰입해 있으면 이 사실조차 까먹기 때문에 아예 이젤을 높게 맞추고 선 채로 그리는 게 좋다.

  oil on canvas  by duduni
oil on canvas  by duduni


이 두 그림은 캔버스에 처음으로 그린 그림이다. 짙은 나무줄기 하나하나, 떨어진 나뭇잎 한 잎 한 잎 정성 들여 그렸다. 구름이 CG처럼 얹힌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보이도록 고심했고, 나뭇잎도 한 장 한 장에 집착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도록 애썼다. 다 그리고 나서 결과물이 만족스러웠다. 그때는.


oil on canvas  by duduni


이 그림은 따스한 봄날, 탐스러운 꽃사과 꽃을 그린 것이다. 갓 피어난 꽃사과 꽃이 촤악 내리쬐는 햇살을 받으며 빛나는 장면이다. 처음 이 장면을 사진으로 찍고 나서 얼마나 뿌듯했던지. 화실에 가서 몇 날 며칠 신나게 그림을 그렸다.


그리는 동안 유난히 그림을 칭찬하던 두 회원이 있었다. 거의 완성단계에 들어간 어느 날이었다. 두 분이 슬쩍 다가오더니  본인들도 그리고 싶다며 그림 옆에 붙여둔 사진을 인화해 줄 수 없냐고 물었다. 난 몹시 당황스러웠다.


그림 수업의 자료로 쓸 사진이지만  또한 나의 작품이었기에 이런 부탁은 예의가 아니다. 하지만 그곳은 주민센터의 문화센터였고 대부분 취미로 그리는 분들이었으니 쉽게 생각하신 듯했다.  

나 혼자 진지했고 나 혼자 치열했다. 더군다나 내가 무슨 그림 대가도 아니고  막 시작한 단계인데 매몰차게 거절하는 것도 볼썽사나울 것 같았다. 대놓고 거절하는 건  웃자고 하는 말에 죽자고 달려드는 꼴이었다. 끈질긴 두 사람의 부탁에 결국 인화를 해주었다.


같은 사진으로 그려도 그림의 결과는 저마다  다르게 나온다. 그럼에도 그때부터 이미 이 그림에 정이 떨어졌다. 내 고유의 그림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림에 손을 놓고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쌓아놓은 캔버스가 답답하게 느껴졌다. 마음에 안 드는 그림들은 처분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림들을 꺼내보았다. 어떤 그림은 내가 지금 그려도 저렇게 그릴 수 있을까, 싶은 것도 있었다. 어떤 그림은 보여주기 부끄러운 것도 있었다. 후자에 해당하는 그림 세 점을 나무틀에서 뜯어냈다. 그때 들인 정성과 시간, 두껍게 쌓인 물감이 아까웠지만 뜯었다.


노을 지는 하늘을 그린 그림은 색감이 마음에 안 들었다.

가을의 낙엽 그림은 전반적으로 허술해 보였다.

꽃사과 또한 뒷부분의 줄기까지 뚜렷하게 표현한 것이 성에 차지 않았다. 정이 떨어진 것도 한몫했다.


세 그림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건 이유가 있다.

멀리서 보지 않은 탓이다.

당면한 것에만 몰두하느라 전체적인 아름다움과 균형을 저버린 탓이다.

정작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지향하는 바가 어디인지 잊어버릴 때가 허다하다.


눈앞의 일만 처리하고 넘어가고 또 반복해서 넘어가다 보면 큰 것을 놓칠 수 있다. 결과적으로 순간순간의 성실함이 아무 소용없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얼마나 아까운 일인가.


한 발 떨어져 전체를 보자. 진정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잊어버리지 말자.


뜯어버린 그림을 보며 깨달은 바다.

깨달음을 잊지 않기 위해 이곳에 올린다. 이젠 틀 없이 너덜하게 캔버스 천으로 창고에 개켜져 있는  그림들을.



https://youtu.be/uo-c7knwcBg

<다리미>

커피소년의 곡이다. 가사를 들으면 착찹한 마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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