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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두니 Dec 11. 2020

소녀가 다시 아름답게 보일 때


by duduni


그림 습작하던 시절, 판넬에 오일로 그린 그림이다. 어느 화가의 작품을 모작한 것으로 당시 함께 그림을 배우던 수강생들 사이에서 최고 난이도로 통하던 그림이었다.

같은 그림을 보고 그리는데도 각자의 완성작을 보면 다 다른 얼굴이었다. 어딘지 모르게 그리는 사람을 닮은 구석이 있었다. 수강생들끼리 서로의 그림과 얼굴을 번갈아보며 닮은 점을 찾곤 했다.


이 그림을 그릴 때 얼마나 재미있었는지 모른다. 구성이 정말 화려하지 않은가. 소녀의 오목조목한 이목구비에 털 달린 가죽 옷, 화려한 장신구에 거친 돌담까지. 그릴 거리가 다양해 그리는 재미가 쏠쏠했다. 그림을 막 시작했으니 닥치는 대로 다양하게 마구마구 그려내고 싶었다.


가죽 옷을 입고 무표정하게 있는 티벳 소녀는 업무차 몽골에 갔을 때 벌판에서 보았던 아이들을 떠올리게 했다.

나무 하나 없는 드넓은 벌판에 게르를 짓고 목축을 하며 사는 가족. 탐방 코스로 들른 집인 만큼 여행사 측과 연계가 됐을 터다. 그럼에도 보여주기 식이 아닌, 사는 그대로의 모습인 듯 보였다. 그들은 이방인들에게 자신의 집을 거리낌 없이 내보이면서 순박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 집의 안주인이 사발에 마유를 내 왔다. 아이들은 흥미로운 눈으로 이방인을 쳐다보았다. 난 멀겋고 뽀얀 마유를 살짝 입에 대 보았다. 시큼한 맛에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지만 아이들이 보고 있어 애써 참았다. 하지만 미묘한 표정 변화를 감지한 아이들이 소리 내어 웃었다. 나도 같이 웃었다.

그때 그 웃음.

아이들의 웃음과 나의 웃음에는 어떤 근심도 불안도 막막함도 없었다. 그냥 마음 가는 대로 웃었다.


이 그림을 그릴 당시에는 이 티벳 소녀도 나도 마음껏 웃고 있었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내 기억 속의 몽골의 아이들은 여전히 웃고 있는데, 지금 이 티벳의 소녀는 슬퍼 보이고 뚱해 보인다. 어떤 즐거움도 기대도 없어 보인다.

처음 그릴 때는 분명 이렇게 보이지 않았는데.

맑고 순수하고 때 묻지 않은 느낌이었는데.  

지금 꺼내 본 그림은 전혀 다른 느낌이다.


앞다투어 이 그림을 그릴 당시 수강생들이 했던 말이 생각난다.

"이 그림 거실에 뒀는데 밤에 지나가다 보면 깜짝깜짝 놀란다니까요."

컴컴한 거실에서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소녀를 보고 두려움을 느꼈다고 했다. 그때는 그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이렇게 순수한 아이 얼굴이 뭐가 무섭단 말이야? 예쁘기만 하구만...싶었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은 소녀의 얼굴이 좋았었다. 최고 난이도의 그림을 끝까지 그려낸 내게 주어진 합격증 같기도 했다. 그림은 문화센터의 복도를 몇 년 동안 장식하다가 우리 집 베란다 한편에서 당당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 그림이 지금 완전히 다르게 보인다는 거다.

내 속을 너무 빤히 들여다보는 기분이 들었다. 너무 오랫동안 나와 함께한 것 같아 부담스럽고 나를 꿰뚫어 보는 것 같아 버겁게 느껴졌다.

그래서 그림을 뒤집어 놓았다. 지금은 완전히 치워져 있다. 다른 그림들 틈바구니에 끼워 넣어 날 쳐다볼 수 없도록 막아두었다.


누군가에게 들키기 싫은 속마음이 있는 걸까?

내 마음이 나도 마음에 안 드는 걸까?

무엇이 내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걸까?

불안하고 불만족스럽고 갑갑한 속을 솔직하게 꺼내 볼 자신이 없는 걸까?


한 그림을 두고 때에 따라 다르게 느낄 수는 있다. 여기에 더해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됐다.  예민하지 못한 탓에 나 스스로 인지하지 못했던 내 마음이 그림 감상으로 표출되기도 한다것이다. 미술 작업을 하는 것만이 미술 치료가 아니라, 감상하는 것도 치료의 시작점이 될 수 있겠구나, 라는 걸 깨달았다. 아직 표면에 드러나지 않았지만 내 마음 어딘가를 눈여겨보라는 경고 알람 같다. 더 곪기 전에 살펴보고 적절한 조치를 해 주라는 처방 같다. 그림의 또 다른 순기능이다.  


때론 내버려 두는 것도 필요하다. 너무 애쓰지 말아야겠다. 아직 어찌해 볼 방법을 알지 못하니 어쩔 수 없다. 내킬 때까지 그냥 두는 것도 필요하다.

소녀가 다시 아름답게 보일 때, 그때 그림을 꺼내놓아야겠다.

 


https://youtu.be/rVN1B-tUpgs

<On the nature of daylight>

Max richter가 작곡한 곡.

1분 만에 울고 싶다면 이 곡을 들으라.. 는 평을 봤다.

1분은 아니지만 듣는 내내 먹먹해지는 곡



https://youtu.be/fCVBjFIZFuQ

<그 또한 내 삶인데>

조용필

이 또한 무슨 설명이 필요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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