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두두니 Oct 21. 2021

꿀꿀한 내 마음 달래주기

요즘 기분이 꿀꿀하다.

꿀꿀한 이유를 나는 알고 있지만 누구에게 말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니까 말할 거리가 될 만큼 큰 이유는 아니란 말이다. 나에겐 며칠이 지나도록 마음 한편을 가라앉게 하지만 내색하기는 뻘쭘한 그런 거다. 모든 감정의 종착이 그렇듯 결국 내 마음 다스리기에 달렸다.

보통 시간이 지나면 묽어진다. 이 희석의 속도를 좀 더 높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라앉아 있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내가 지친다. 지치면 힘들고 힘들면 만사 귀찮아진다. 이 귀차니즘이 제일 회복이 어렵다. 게으름을 장착하고 세상에 나온 사람이 귀차니즘에 빠지면 어휴~


마음을 달래주기로 했다.

먼저, 뭐니 뭐니 해도 먹는 거다. 그중에서도 달다구리가 직방이다. 평소에 링크를 걸어 내 카톡으로 보내 놓은 맛집 중에서 고르면 된다. 집 근처 스콘 맛집으로 갔다. 코팅 안된 종이 상자에 정성스레 포장해 주니 기분이 좋다. 역시 돈을 쓰니 기분이 좋아지는구나.  

집으로 와 카페라테 한 잔을 만들어 가을 햇살 따스한 베란다에 앉았다. 스콘과 함께 행복한 커피 타임.. 창밖 하늘의 구름을 바라보며 먹고 마셨다. 하늘 멍, 구름 멍을 때리는 그 찰나,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아무리 먹는 걸 좋아한다지만 커피와 스콘 한 조각에 기분이 확 달라지지는 않았다.


스콘 / 라떼  by duduni


그럴 땐 두 번째 방법, 걷기다. 저녁이 되면 겨울로 변해버리니 날 밝을 때 볕과 바람을 좀 쐬야겠다. 운동화를 신고 걸으러 나갔다. 백신 2차를 맞은 지 일주일이 지났지만 왠지 격한 운동은 안될 것 같아 사부작사부작 걸었다. 단풍은 덜 들었는데 시든 풀들이 많았다. 시든 꽃을 보니 나를 보는 기분이 들었다.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카메라에 담았다. 이렇게라도 널 기억해 줄게.

by duduni


발길 닿는 대로 휘적휘적 걸었다. 파크골프장을 지나는데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할아버지들이 싸우고 있었다. 고집 세 보이는 할아버지가 핏대를 올리고 있었다. 입장 인원 제한이 있는데 바로 앞에서 딱 끊긴 모양이다. 내가 들어가겠다는데 어쩌구 하면서 큰 소리를 쳤다. 그 재밌다는 싸움 구경을 좀 더 하려다 말았다. 내 마음 달래러 나왔는데 뭐하러 엄한데 신경을 쓰나. 소란스러움을 뒤로하고 응달진 곳에 핀 하이얀 꽃에게 인사를 건넸다. 구절초야, 귀 막으렴.

by duduni
by duduni


마음 가는 것들을 마음에 담으려고 사진을 찍었다. 작년 이맘때 찍었는데 같은 장소를 또 찍는다. 찍은 걸 따로 잘 보지는 않지만 그 순간의 느낌을 간직하고 싶으니. 촘촘한 은행나무 사이로 비치는 햇살을 찍으며 숲 안으로 들어갔다. 사람들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이다.

나무 사이를 걷다가 하마터면 거미줄을 건드릴 뻔했다. 안보이던 거미줄이 각도를 달리하니 빛에 반짝거렸다. 집을 예쁘게도 지었네. 무당거미가 가운데 자리를 차지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배가 홀쭉한 게 아직 먹이를 못 먹었나 보다. 햇살에 빛나는 거미줄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by duduni


내가 꿀꿀하든 팔팔하든 거미는 자기 집을 짓는다. 꽃은 피고 지고 나뭇잎은 물들고 풀은 마른다. 입구에선 싸움이 벌어지고 안쪽에선 평화롭게 파크골프 경기가 이어진다. 각자 자기의 삶을 산다. 그렇게 세상이 돌아간다. 벌레는 거미줄에 걸려 벌벌 떨며 죽어가고 거미는 벌레를 잡았기에 살 수 있다.

지금 이 순간 세상 곳곳에도 죽고 사는 일이 동시에 일어난다. 죽고 사는 일에 비하면 내 기분 꿀꿀함이야 어디 말 붙일 건덕지라도 있나. 우주의 작은 은하의 행성 지구의 한 나라의 한 도시의 작은 은행나무 숲 안에 있는 나. 티끌만큼도 안 되는 존재다. 그러나 나에게 나는 나뿐이다. 나는 우주에서 유일무이하다(이래서 사이비가 있는 거다). 비약의 극과 극을 오간다.


산책을 마치고 세 번째 코스, 도서관으로 향했다. 캔버스 백이 무겁도록 읽을거리를 가득 빌리면 든든하다. 읽어야 할 책은 누가 빌려가 버렸다. 덜 읽고 반납한 '듄1'과 그림책, 동화책을 빌렸다. 어제 영화 '듄'이 개봉했다. 엄지 손가락 길이만 한 두께의 책이 30페이지 정도 남았다. 남은 페이지를 다 읽었다. 책의 이야기가 어떻게 영상으로 구현될지 너무나 궁금하다. 내일 영화를 보러 갈 참이다. 혼자 조조 영화를 볼 생각을 하니 기분이 점점점 좋아졌다. 꿀꿀함이 조금 희석된 것 같다.


세 가지 마음 달래주기를 마치고 집에 왔다.

옷을 갈아입는데, 아야!!! 팔 밑이 따끔했다. 세상에! 정체모를 가시 열매가 붙어있었다. 검색해 보니 큰 도꼬마리 열매라고 한다. 찍찍이(벨크로)의 아이디어를 얻었다는 바로 그 열매다. 은행나무 숲에서 붙어왔나 보다.

by duduni

큰 도꼬마리 열매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도꼬마리는 가시를 갈고리처럼 걸어서 옮겨 다닌다. 좋은 땅을 만나면 뿌리를 내리려고.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너 진짜 악착같구나!

그렇게 악착같이 살려는데 그냥 쓰레기통에 던져버릴 수 있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다시 밖으로 나갔다. 화단 흙 위에 던져주었다. 게으른 내가 너를 긍휼히 여겨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았으니 부디 무사히 뿌리내려 살기 바란다.  

잘 살아라. 어떻게든.

잘 살자. 너도 나도.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