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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특이점 Aug 16. 2024

엘리시움(Elysium)

2011년, 20살에 처음 쓴 소설 습작 1부.

 “나는 죽어가고 있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나의 생명이 꺼져가고 있다. 아니, 소멸해가고 있다. 그러기에 나는 내가 존재했다는 흔적을 남기고자 이렇게 기록을 남긴다.”



  나에게도 분명히 이름이란 것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잊어버린 지는 오래다. 나에게 이름은 무의미한 것이다. 불러줄 사람도 기억해 줄 사람도 없기 때문이다. 나는 평생을 이곳에 갇혀 살았다. 결코 나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누구도 들어오는 것도 불가능했다.

 ‘이곳은 외부의 어떠한 충격이나 재난에도 완벽하게 보호된다. 이곳에서는 움직일 필요가 없이 뇌에 직접 연결된 컴퓨터로 모든 생활이 가능하다. 이곳은 이렇게 안락한 생활만을 누리면서 영원히 살아갈 수 있는 낙원이다.’

  우리가 이곳을 설계하고 지원자를 받을 때 광고 문구에는 대충 이런 내용이었던 것 같다.

사실 이 프로젝트는 정부에서 비밀리에 행한 실험이다. 나는 이 프로젝트의 총책임자였으므로 당연히 이곳의 구조와 피실험자들이 어떻게 되는지도 알고 있었다.



<기록 1-A.D. 2,150년>

  이곳은 거대한 구 형태로 되어있고 지하에 위치하고 있다. 수용인원은 대략 10000명 정도 된다. 반경 1km의 구형인 시설에 그 바깥에는 빈 공간이 자리하고 있고 그 밖에는 안이 텅 빈 구 형태의 외곽이 둘러싸고 있다. 이 외곽과 내부 시설은 자기력을 띠고 있어서 사실상 이곳은 지하에 텅 빈 공간에 떠있는 형태이다. 이러한 구조는 충격흡수에 아주 뛰어나다. 강력한 지각변동에도 내부까지 충격이 전해지지 않는다. 결코 부식하지 않으며, 마그마에 잠기더라도 완벽히 보호된다. 이 말은 지구가 멸망하지 않는 이상 이곳이 파괴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더군다나 이런 철통 같은 요새에서 영원히 살아갈 수 있다면 인간이라면 당연히 여기에 살고 싶어 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피실험자들이 어떤 식으로 실험되는지를…….

  백만분의 일의 확률로 이곳에서의 거주권을 획득한 행운의 피실험자들은 정신적인 테스트를 받게 된다. 정신만 멀쩡하다면 아주 적합한 모르모트였으리라.

  신체검사는 뇌 부분만 하게 된다. 뇌에 종양이나 암이 없으면 통과이다. 나머지 육체는 아무래도 상관없다. 다리가 하나 없거나, 심각한 화상이 있거나, 암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상관없다. 왜냐하면 어차피 실험에서는 필요 없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테스트를 마친 피실험자들은 시설내부로 들어가기 전에 1차적으로 육체가 제거된다. 육체가 제거되는 과정은 우선 피실험자를 마취시킨 후 흉골을 절개한다. 그러고 나서 폐와 심장을 최우선적으로 제거한 후 1분 내에 영양분과 산소를 공급해 주는 튜브를 연결시킨다. 그다음 목뒤를 절개하여 척수를 뇌와 분리시키고 하악골부터 그 아래 모든 부분은 그대로 절단한다. (절단된 부분들은 대개 폐기시키거나 가축용 사료로 가공된다.) 그리고 안면의 모든 피부 및 근육을 차례로 제거하고 톱으로 두개골을 절개한 후 조심스럽게 떼어낸다. 이제 시신경, 후신경, 청신경을 하나씩 제거하고 증류수로 씻어낸다. 마지막으로 배양액에 담그고 척수가 있던 자리에 각 개인마다 지급되는 단말기와 연결되는 선을 연결한다. 각각의 단말기는 중앙처리컴퓨터인 스카이넷의 통제 하에 연결되어 있다. 잠시 후 뇌가 마취에서 깨어나면서 실험이 시작된다.

  그들은 이곳에서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가능했다. 무한한 크기의 가상공간에서 자신들이 관심을 가지는 분야가 같은 사람끼리 모이는 단체를 만들 수도 있었고 프로그램을 마치 건물의 형태로 만들어 낼 수도 있다. 여기의 거주민들은 모두 서로의 생각을 공유할 수 있었다.



<기록 2-A.D. 2,160년>

  우리는 피실험자들은 관찰하기 시작했다. 처음 10년은 혼란 그 자체였다. 자신들의 육체는 하나도 남아있지 않고 오로지 생각만 할 수 있는 상태라는 것을 깨닫게 되자 그들은 폭주하기 시작했다. 다시는 원래세계로 나갈 수 없다는 공포감과 영원히 이런 공허한 데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은 정신착란 증세를 유발하였다. 그들보고 살아라고 준 가상세계는 아무것도 없었다. 포맷된 하드디스크나 다름없었다. 마치 아무도 살지 않는 사막 한가운데에 떨어진 느낌이었으리라. 패닉상태에서 뇌에 공급되는 산소 부족으로 인해 수많은 실험체들이 파괴되었다. 이 혼란에서 160개의 뇌가 소멸되었다. 그리고 어떤 실험체는 자폭하는 심정으로 직접 스카이넷을 해킹하는 바람에 500개의 생명유지장치가 꺼져서 순식간에 500개의 실험체를 잃는 참사가 발생하기도 했다. 스카이넷은 당시 기술로 만들 수 있는 최고성능의 컴퓨터로써 하나의 두뇌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의 뛰어난 상황판단력, 인공지능, 감정을 두루 겸비한 과학기술의 집합체였다. 그러한 스카이넷이라 할지라도 완벽한 것은 없다. 스카이넷은 일부 약한 정신력을 가진 뇌를 자신에 대해 위협적인 존재라고 오판하여 고의로 산소공급 및 영양공급을 차단하였다. 이 과정에서 340개의 실험체가 희생되었다.

  - 우리는 이곳을 ‘엘리시움’이라고 불렀다.



  “두뇌라는 것은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수명이 연장된다고 한다. 반대로 사용하지 않을수록 수명은 줄어들게 된다.”



  당시 지상에서는 노화를 억제하는 기술이 개발되어 전 세계적으로 큰 센세이션이 일어났다. 텔로머라아제라는 효소를 세포에 주입하여 텔로미어가 짧아지는 것을 방지하여 불로불사의 몸을 얻게 되는 원리이다. 이들 또한 기술이 개발단계라서 임상실험이 필요했다. 동물실험으로 이미 효과는 검증되었으므로 최종적으로 인간에게 적용되면 되는 것이었다. 그런 식으로 전 세계적으로 지원자를 받아서 임상실험을 했다. 실험은 성공적이었다. 70대 노인이 점차적으로 젊어지면서 20대의 몸을 갖게 된 것이다. 그렇게 이 약품은 ‘텔로미온’이라는 이름으로 시판되기 시작했다. 늙지 않고 영원히 산다는 것은 신의 영역에 도전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종교단체와의 끝없는 갈등이 있었고 급기야 제조공장에 자살폭탄테러가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언제나 다수가 소수를 지배하는 법, 텔로미온을 반대하는 단체들은 정부의 사주에 의해 하나둘씩 소리 없이 사라져 갔다.

  텔로미온이 상용화되고 약 10년 정도 흘렀을 무렵, 세계 각지에서 단체자살이 끊이지 않는다는 보고가 들려왔다. 정작 불로불사의 몸을 얻었으나 삶의 낙이 사라지고 우울증에 시달리는 정신적 공황에 빠지는 부작용이 있었던 것이다. 자살하지 않은 사람들은 반대로 삶에 대해 극단적인 집착으로 인해 남을 죽여서 그 생명을 얻어야만 영생할 수 있다는 망상에 빠져서 서로 죽이는 사태가 벌어졌다. 우리는 이 현상을 ‘디멘시아’라고 불렀다. 그렇게 인류는 디멘시안(dementian), 세인(sane), 모탈(mortal) 세 집단으로 나뉘었다. 흥미로운 점은, 가장 먼저 소멸될 것이라고 예상했던 디멘시안들은 자기들끼리 죽여봤자 이득 될 것이 없다고 판단하여 조직을 만들어 나머지 집단을 사냥하기 시작했다. 세인(텔로미온을 투약했지만 부작용 없이 정신적으로 온전한 사람들)들은 스스로 방어하기 위해 레지스탕스를 조직하여 이에 맞섰다. 유일하게 텔로미온 투약을 거부한 집단인 모탈은 중립적으로 보였으나 사실상 세인의 편이었다. 우리는 도와도 이득 될 것 없이 오히려 디멘시안의 표적이 되기 때문에 도울 필요가 없지 않은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모탈은 종교인이었다. 그들은 남을 도와서 선을 행하면 자신이 죽을 때 하느님의 곁으로 갈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에 기꺼이 세인의 편에 섰다.



  엘리시움에서 스카이넷의 오작동으로 인해 많은 실험체가 손실되었다. 이렇게 가다가는 내 젊음을 바친 프로젝트가 무산될 것이라고 느꼈다. 그래서 그때 나는 평생 후회할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아무리 뛰어난 컴퓨터라 할지라도 인간의 이성적 판단에 따라올 수 없다고 판단하여 나 스스로가 스카이넷이 되기로 결심했다.

  내 뇌가 스카이넷으로 전환되는 과정은 다른 피실험자들과 다를 바 없었다. 한 가지 다른 점이라면 피실험자들은 각각의 단말기에 연결되지만 나는 엘리시움 전체의 통제권을 가지게 된다. 내가 최초로 한 일은 우선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좌절에 빠진 정신체들에게 정신적 안정화를 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나를 제외한 모든 실험체에 모르핀 5mg을 투여했다. 그들은 점차 안정되어 갔고 나는 모두에게 사회의 건설에 대해 브레인스토밍을 시켰다. 그들은 놀랍도록 빠르게 적응했다. 생각만으로 모든 정신체와 의사소통이 가능하고 모든 생각이 공유되기 때문에 이내 하나의 가상도시가 건설되었다. 그들은 온갖 유희시설을 프로그래밍하고 친목도모를 위한 카페도 만들었다. 술을 마시는 주점도 만들어졌다. 술집 같은 경우는 적정의 대가를 지불하면 에탄올을 뇌에 직접 주입하는 형태였다. 이런 경우는 뇌에 연결된 튜브를 통해 알코올이 해독되므로 간의 작용과 같다.

  이곳, 꿈의 도시는 현실세계와 전혀 다름이 없었다. 인류의 뇌과학 수준은 이미 뇌의 구조와 작용원리를 완벽히 밝혀 냈으므로 현실과 구분이 불가능한, 하지만 원하는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는 가상 사회를 구축할 수 있었다. 쾌락을 위한 마약 따위는 필요하지 않았다. 뇌에 마약이 주는 환각과 쾌감을 전기신호로써 자극하여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다. 현실에서는 불법이지만 나는 엘리시움의 관리자로서 즐거움을 가질 수 있다면 기꺼이 모든 것을 허용했다.

  모든 건물과 시설은 소프트웨어의 형태로 지어졌고 자연스럽게 화폐의 개념이 도입되었다. 화폐는 사회발전에 얼마나 기여를 했는가에 따라서 지급된다. 예를 들어 어떤 정신체가 놀이기구를 만들었다면 그게 어느 만큼 다른 개체에게 영향을 주고 즐거움을 줬는가에 따라서 내가 직접 돈을 지급했다. 여기에서도 놀이기구는 현실에서의 그것과 다를 바 없다. 물리엔진을 이용해서 현실과 똑같은 물리법칙이 적용되므로 스릴을 즐기는데 아무 지장이 없다. (물리엔진을 개발한 정신체에게는 상당한 보상금을 지급했다.) 그렇게 우리들의 진정한 낙원은 점차 규모를 확장해 나가고 번성하였다.

  -그렇게 약 500년이 흐른 것 같다.



  지상에서는 여전히 전쟁이 지속되고 있었다. 어린 아이나 여자들 할 것 없이 누구나 총을 지니고 다니는 것은 일상생활이 되었다. 그들은 그들만의 일상이 있었고 전 세계 인구는 180억이 되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어린이들은 반드시 어른과 동행하고 모든 사람들은 항상 무리 지어 다니면서 주변을 경계하고 은신처에는 항상 보초가 서있었다. 적이 접근하는지 레이더로 실시간 감시하고 반경 5km 내에는 무장한 로봇이 항시 경비를 서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여느 때와는 전혀 다른 게 없는, 지극히 일상적인 날이었고 또 그렇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렇게 그 누구도 예상하지도, 의심의 여지조차 없었던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다. 누가 어디서 발사했는지 모를 핵미사일이 지상을 타격한 것이다. 대부분의 인간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생각할 찰나의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은 채 그 자리에서 소멸되고 말았다. 이 제노사이드는 특히나 삶에 집착이 강했던 디멘시안에게 엄청난 공포감을 불러일으켰고 그에 반해 종교인이 대부분인 모탈은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종교에 따라 둠스데이, 아포칼립스, 아마겟돈 등으로 불리는 이 심판의 날에, 모든 종교인들은 신에게 도전하여 자연의 순리를 거부하고 영생을 얻으려 한 어리석은 인간들은 지옥에 떨어질 것이고 자신들은 하느님 곁으로 불려 갈 것이라 믿었다. 그러니 그들에게는 죽음에 대해 일말의 두려움이 없었다. 그들은 번쩍하는 섬광을 보는 순간 하느님의 손길을 보았으리라.

  그렇게 정체 모를 핵미사일 무리는 지구상의 70% 이상을 파괴하였다. 극소수의 살아남은 인간은 대개 지하에서 생활하거나 바다, 해저에 있을 때 우연히 심판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핵미사일이 남긴 것은 폐허뿐만이 아니었다. 바로 지독한 방사능이다. 당연히 수많은 변종과 돌연변이들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들이 공상소설에나 나오는 덩치가 크고 사나운 괴물은 아니다. 이 뮤턴트들은 방사능으로 인한 불쌍한 피해자일 뿐이다. 방사능피폭에 의한 유전자 변이로 인해서 생명체가 진화한다는 것은 정말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그들은 정상적인 개체에 비해 매우 열등해질 뿐이다. 이들은 수백 년 안에 모두 멸종할 것이다.

  쥐보다 적응력이 좋은 동물은 인간이라고도 한다. 인류가 지구상에서 거의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사라졌으나 수만 년 동안 적응하고 번식하여 지구를 지배하였던 인간이라는 종족은 오랜 시간에 걸쳐서 또다시 번성할 것이다. 이것 또한 내가 관찰하고 연구할 대상이다.



<기록 3-A.D. 2,667년>

  엘리시움은 지구상에서 핵폭탄이 터지는 것에는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다. 여기는 우리들만의 독립된 세계나 다름없다. 애초에 그럴 목적으로 지어졌고, 앞으로도 그래야 했다.

  나는 이 수많은 실험체들과 500년을 지내오면서 흥미로운 점을 발견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인간은 놀랍도록 적응이 빠른 것이다. 우리가 만든 이 가상세계에서도 의견 차이에 의해 여러 집단으로 나뉘기도 하고 마음이 맞는 사람끼리 무리를 지어 살기도 했다. 방화벽을 지어 자신만의 ‘홈(home)’을 만들고 가정을 꾸리기도 했다. 정신체끼리 화폐와 노력을 대가로 가상의 자식들을 아바타로 만들어내는 프로그램도 개발되었다. 그들은 정말로 친자식처럼 아끼고 키웠다. 간혹 자신을 키운 정신체를 흡수하여 보다 강해지는 아바타가 있었다. 나는 즉시 이런 아바타들을 삭제해 버리고 그 프로그램의 버그를 패치하였다. 아마 이것 때문에 희생된 실험체는 3개 정도이었던 것 같다.

 이런 사회에서는 필연적으로 갈등이 빚어지기 마련이다. 큰 두 집단이 서로 전쟁을 시작한 것이다. 물론 나는 이 세계에서는 신이 나 다름없었으므로 그들의 생각을 읽고 있었기 때문에 언제 시작될지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사회의 흐름에 하나이므로 어느 정도 지켜보기로 결정했다. 전쟁의 과정은 이러했다. 적진에 바이러스를 침투시켜 방화벽을 약화시키고 방화벽이 재구성되기 전에 해킹프로그램을 전송시킨다. 그렇게 적들의 뇌가 연결된 단말기를 포맷시켜서 생명유지장치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뇌에 산소공급이 차단되면 5분 내에 대부분의 중요 뇌세포가 파괴되어 그대로 생명을 잃게 된다. 이런 방식의 밀고 당김이 반복되면서 결국 우세한 쪽이 승리하게 되고 진 집단은 이 세계를 로그아웃하게 되고 현실에서는 사망하는 것이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참으로 어리석다. 역사를 통틀어 봐도 항상 전쟁은 끊이지 않았다. 여기라고 다를 건 없었다. 전쟁은 어떤 것도 해결하지 못한다. 자신과 다른 생각을 한다는 이유로 상대방을 그저 내버려 두질 못하는 것인가. 그렇게 남을 제거하면 자신만이 남아서 자신의 것이 옳은 것이라고 생각할 텐데 그것은 그냥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거나 다름없다. 생각이라는 것은 한개 두 개만이 있는 게 아니라 무궁무진하게 많을 수 있다. 자신이 표적이 되어 남을 제거하였듯이 제거당할 수도 있고 다른 생각은 수없이 많기 때문에 전쟁은 끊이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도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은 정말로 어리석게도 이 행동을 영원히 반복하고 있다.

  참으로 씁쓸한 연구결과였다. 아무튼 나는 그 수천이나 되는 실험체를 죽게 내버려 둘 순 없었다. 포맷된 단말기 대신 보조 생명유지장치를 작동시켰고 그동안 나는 그 단말기들을 재프로그래밍하였다. 이러한 갈등을 최소화시키기 위해 나는 그 가장 강력한 집단에 벌을 주기로 했다. 발전시켜야 할 우리 사회에 분란을 조장하였고 소중한 실험체들을 대량으로 잃을 뻔하게 한 죄로 무기한 동면시켰다. 이 과정에서 약 2500개의 뇌가 극저온 냉동되었다. 사회가 안정을 되찾고 번성하게 될 때쯤 다시 풀어줄 예정이다.



<기록 4-A.D. 3,654년>

  애초에 이 실험의 목적은 뇌는 늙지 않는가에 대해 알아보는 것이었다. 실험을 시작한 지 1000년이 지난 지금에도 노환으로 사망한 뇌는 단 하나도 없었다. 그렇다고 이 실험이 성공했다고 단정 지을 수도 없다. 인간의 정상적인 수명에 비하면 분명히 오래 살았다. 하지만 늙지 않는다는 말은 1000년이 아니라 영원히 불멸이다는 말과 같다. 그러므로 나는 노환으로 죽는 실험체가 나올 때까지 실험을 그만둘 수는 없다. 얼마 후에 실험이 끝날지, 지구의 수명이 다할 때까지 이어질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나는 동면에 들어간 2500개의 뇌를 해동시켰다. 머지않아 그들은 깨어났고, 그동안 바뀐 환경에 적응하며 새 삶을 살 준비를 시작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깨어나지 않는 뇌가 있는 것이었다. 나는 즉시 그 실험체들을 검사했고 그 결과 동면에서 깨어나지 못한 뇌들은 냉동과정에서 세포가 파괴되었던 것을 알아내었다. 이렇게 500개의 뇌가 또다시 고깃덩이가 되고 말았다. 아직은 괜찮았다. 남아있는 실험체는 아직 매우 많았으니까.

  이곳에서의 삶은 너무나도 지루했다. 그냥 지상세계를 그대로 복사해서 붙여놓은 것 같았다. 술집문화가 번성하고 마약 밀거래가 늘어나면서 자신의 뇌를 스스로 망치는 실험체가 상당해졌다. 어떤 실험체는 과도한 알코올섭취로 인해 뇌세포의 절반이 파괴되어서 죽지는 않았지만 살아있다고도 볼 수 없을 정도로 망가졌다. 나는 이들이 자멸하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알코올중독자와 마약중독자를 사회에서 격리시켜 교육시켰다. 철저히 교육시켜서 사회에 보내었으나 그들은 이내 다시 중독물을 찾았다. 나는 좀 더 왜 현실에서 중독물을 금지시키고 불법으로 규정한 데에 대해 깊이 생각했어야 했다. 여기서 내가 깨달은 것은 이들에게는 기회를 주어질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아깝지만 나는 이 ‘불량품’들을 폐기하기로 했다. 나는 마지막 선물로 그들이 그토록 원했던 약물을, 전기신호가 아닌 실제 약물을 직접적으로 그들의 뇌에 치사량의 10배씩 투여했다. 그들은 아마도 영문을 모를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다. 여기서 폐기된 실험체는 1340개였다. 처음 시작에 비해 실험치수가 확연히 줄어들었다.



<기록 5-A.D. 8,772년>

- 그리고 5000년이 지났다.

 참으로 오랜 시간을 살아온 것 같다. 동양의 어떤 나라의 역사와도 맞먹는 시간이다. 아니 내가 그 나라에서 태어났던가? 이제 그런 기억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별로 중요하지 않은 기억은 서서히 잊히기 마련이다. 이 무렵, 지상에서는 모든 방사능이 걷히고 또다시 기계문명이 번영하였다. 나는 이것을 제2의 철기문명이라고 명명했다. 핵전쟁 이전부터 아직까지 살아온 지상의 인간이 있을 확률은 거의 0%에 가깝다. 노화가 오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렇게 긴 시간을 살다 보면 어떠한 사고나 재난에 휘말릴지 모르는 것이다. 게다가 텔로미온이라는 약물이 영구적으로 노화를 억제한다는 보장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것은 더 이상 의미 없는 것이었다. 과거 3집단으로 나뉘었을 때 가장 위협적이던 디멘시안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자연은 오랜 기간 동안 인간이 남긴 흔적들을 지우고 인간들은 다시 문명을 발달시켜 나갔다. 이것은 마치 컴퓨터가 오류가 났을 때 리셋한 것과 같이 깔끔히 정리되어 정상적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이 새 문명은 5만 년을 지구상에서 존속했다.)



 <기록 6-A.D. 9,662년>

  내가 엘리시움에서 산지 7500년이 되었을 때다. 이곳은 외부와 근절되어 있으므로 위치를 알아내기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비밀코드를 정확히 입력하지 않으면 입구는 결코 열리지 않는다. 외곽과 내부시설 사이는 진공으로 되어있어서 접근하기 위해서는 특수한 보호복을 입어야 한다. 핵폭탄에 직격으로 맞아도 끄떡없을 정도의 내구력을 지닌 이곳을 힘으로 뚫고 들어온다는 것은 이미 불가능한 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7500년 만에 엘리시움의 입구가 열렸다. 나는 이 누군지 모를 불청객을 쫓아내기 위해 경비로봇을 보내 상황을 보고시켰다. 그러나 잠시 후 그들과 연락이 끊겼다. 나는 비상셔터를 내리고 보안등급을 1로 높였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이 불청객은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고 유유히 접근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가 가진 마스터키는 어디서든 접근이 허용되는 것이었다. 그는 대부분의 방어용 로봇을 파괴하고 곧 엘리시움의 내부까지 접근하였다. 나는 무엇 때문에 이렇게 필사적으로 이곳에 들어오려 하는지 궁금해서 그의 행동을 주시하기로 했다. 그는 수많은 실험체들을 지나 나에게 왔다. 그러고는 간단한 인사말을 했다.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7500년 만에 만난 외부인이 처음으로 꺼낸 말이 ‘안녕하세요’라니! 일단은 그에 응해주기로 했다.

 그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아버지라니. 자신의 아버지를 찾아왔다고 했다. 이곳에 있는 실험체들은 모두 7500년 전부터 존재해 왔으며 그들의 자식이 살아있을 리 만무했던 것이다. 어찌 됐던 흥미로운 일이므로 그의 이야기를 듣기로 했다.

  그의 이야기에 따르면 놀랍게도 그는 원생인류였다. 그는 세인의 후예로서 평생을 엘리시움을 찾는데에 보냈다고 한다. 그의 인생은 참으로 파란만장했다. 태어나자마자 버려진 채 고아원에서 자랐고 10대에 고아원을 탈출하여 정처 없이 방황하던 중 자신의 양아버지를 만나게 되었다. 양아버지도 가족이 없이 홀로 지내는 신세여서 가난해도 서로 의지하며 행복히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작스럽게 양아버지의 사망을 통지받았다. 가족도 없고 밑천도 없는 그에게는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이유조차 알 수 없었다고 한다.

  그는 선한 영혼들은 죽어서 ‘엘리시움’이라는 낙원에서 살게 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래서 엘리시움이라는 곳을 찾으면 아버지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 믿은 것이다. 그는 돈을 벌기 위해 군에 입대하여 오랜 시간을 보냈다. 군인에게는 텔로미온이 자동적으로 지급되었으며 그도 대세에 따라 텔로미온을 투약했던 것이다. 군을 전역하고 얼마 안 가서 지상에서는 전쟁이 일어났다. 국가 간의 전쟁이 아닌 인종 간의 전쟁이었다. 그는 세인의 편에 서서 군대에서의 경험을 살려 그들을 지켜내는데 큰 활약을 하여 영웅이 되었다. 그들 무리에서는 가장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 되었고 자신의 꿈을 이루는 데에도 큰 도움을 받았다. 그는 부하들에게 엘리시움이라는 곳에 대해 조사시켰고 알아낸 것은 지구상의 어딘가 지하에 있다는 점과 들어가기 위해서는 각 나라의 정부건물의 비밀금고에서 접근키를 구해와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그는 세계 각지를 돌며 디멘시안들이 점령한 건물에 침입하고 세계 곳곳에 엘리시움을 뒤졌다고 한다. 그의 모험담은 정말로 방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생각한 엘리시움은 여기와는 사뭇 다른 풍경이었을 것이다. 노래하는 천사들 대신 수많은 뇌가 표본병에 담겨서 침묵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이중에 아버지가 있다 하더라도 무슨 수로 찾아내겠는가? 나는 상황을 설명하고 그에게 현실을 인지시킨 후 돌려보내려고 설득하였다. 그는 바깥에서 찾을 수 없다면 직접 가상세계에 접속해서 찾아내고 말겠다고 자신도 안으로 들여보내 달라고 요구했다. 비록 뇌만 남은 것은 아니지만 어차피 불사의 몸이므로 실험체가 하나 더 늘어나는데 굳이 막을 이유가 없었다. 나는 흔쾌히 승낙하고 그를 실험대에 눕힌 후 뇌신호를 컴퓨터신호로 전환해 주는 약물을 척수에 투약했다. 그리고 그의 정신을 우리들의 세계에 접속시켰다. 그 불청객은 모든 가상거주민들에게 통신을 했고 뜻밖에 거기에 응답한 신호가 감지되었다. 둘은 서로를 분명히 알아보았고 아버지는 분명 엘리시움에 간 것이었다. 나는 그 아버지에게 어떻게 된 건지 물어보았다.

  실상은 이러했다. 생활고에 시달리던 아버지는 어떤 임상실험에 지원하면 막대한 보상금을 준다는 것을 듣고 거기에 지원하고 보상금으로 빈곤에서 벗어나려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실험은 위장된 것이었고 7500년을 나가지도 못하고 살아온 것이다.

  이 이후로 그 둘은 가장 삶에 대해 적극적인 의지를 지닌 개체가 되었다.



<기록 7-A.D. 27,192년>

실험 D+2만 5천 년이 지났다. 이때 결코 잊을 수 없는 역사적인 성과를 거두었다. 다른 건 몰라도 나는 이날의 날짜만은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A.D. 27,192년 11월 30일 , 가장 중요한 성과를 얻었다. 바로 노화에 의한 자연사한 실험체가 생긴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누군가의 죽음에 이렇게 기뻐한 적은 처음이다. 비록 4743개의 실험체가 소실되었지만 그들은 때가 되어 떠난 것이고 연구성과에 큰 기여를 했으므로 전혀 아깝지 않았다. 흥분을 가라앉히고 사망한 실험체들의 뇌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것들은 하나의 공통점이 있었다. 한눈에 확연히 들어올 정도로 깨끗한 상태였다. 이 말은 이상할 정도로 뇌가 매끈한 상태였다. 주름이 거의 없다는 말은 생각을 안 하고 살았다는 말이고 그만큼 뇌활동이 적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 결론으로 아직 살아있는 실험체들을 조사해 보았다. 젊은 뇌들은 늙은 뇌들에 비해 비교적 주름이 많았으며 평소에도 적극적으로 살아가고 끊임없는 사고작용을 한 사실이 드러났다. 그에 반해 늙은 뇌들은 무기력하고 소극적이며 생각하는 것을 귀찮아했다. 지겹도록 장수한 이들에게 치매는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이치였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나는 ‘뇌는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노화가 오지 않는다’라는 최종결론을 도출해 내었다. 뇌는 반드시 영생하는 것은 아니지만 자기가 하기에 따라서 늙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정말 오래 살고 볼일이었다.



<기록 8-(추정) A.D. 40,000년 경>

  서기 4만 년 정도가 되었을 때였다. 우려했던 사태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자살자가 여기저기서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자살하는 방법은 아주 간단했다. 가상세계를 로그아웃해 버리면 그만이다. 로그아웃하면 자신은 현실세계로 빠져나가 혼자만의 단절된 상상의 세계에 갇히게 된다. 그렇게 되면 자신의 뇌에 연결된 단말기는 재부팅하게 되고 재부팅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10분 정도 소요되며 그동안은 바깥에서 현실의 연구원이 인공적으로 산소를 공급해야 한다. 불행히도 4만 년이 지난 그때는 옛날의 연구원이 살아있을 리가 없었다. 그들은 산소공급이 차단되고 서서히 의식을 잃어가면서 편안한 죽음을 맞이하였을 것이다. 몇 명이 자살했지만 그것은 하나의 해프닝으로 끝나는가 싶었다. 하지만 그것은 베르테르 효과를 불러일으켰고 평소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던 정신체들의 잇따른 모방자살로 인해 563개의 실험체가 손실되었다.

  끈질긴 삶이 너무 지겨운 나머지 스스로 동면에 들어가는 실험체도 상당했다. 자칫하면 깨어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면서도 3000개의 뇌는 자청하여 냉동되었다.



  내가 여기서 살면서 하는 것은 실험뿐만이 아니었다. 지구상에서의 일들을 모두 관찰하고 우주 멀리의 새로운 천체를 발견해내기도 했다. 지상의에서의 새문명 구성원들은 4만 년을 지나도록 제자리걸음뿐이었다. 생활에 편리한 기계들을 만들어 낼 줄은 알면서 건물을 짓거나 사회를 구성할 줄을 모르는 듯하였다. 과거에는 국가를 중심으로 지역사회 가족 등을 꾸리고 살았으나 이들은 마치 원시부족처럼 수십 명이서 무리 지어 생활할 뿐이었다. 건물을 지을 줄도 몰랐고 옷을 만들어 입을 줄도 몰랐다. 그저 지하에서 발굴해 내서 더러운 옷들을 입고 동굴이나 지하철에서 살았다. 이 현생인류들은 창의성이 부족하고 사회적이지 못하였다. 이들은 세계 각지에서 번성하겠지만 결코 발전하지 못하고 지구를 지배하지는 못할 것이다. 내가 알던 인류는 사실상 이때 멸종한 것 같다.



<기록 8-(추정) A.D. 108,000년 경>

- 그렇게 6만 8천 년이 지났다.

  내 천문관측대에 비상이 내려졌다. 직경 60km 규모의 소행성이 지구로 돌진하고 있었다. 이 정도의 소행성이 직격으로 충돌하면 지상의 모든 생명체가 전멸하는 것은 당연하고 이 엘리시움조차도 안전하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 6개월 후면 충돌할 것이고 지구는 불바다가 될 것이다. 그전에 나는 대책을 세워야 했다. 미사일을 날려봤자 겉에 흠집 내는 정도밖에 되지 않을 것이므로 효과적으로 파괴하기 위해서는 내부에서 폭파시켜야 한다. 나는 즉시 가동되는 모든 로봇들을 초음속 수송기에 태워서 세계 주요 대륙으로 급파했다. 그들의 주요 임무는 부품수립이었다. 지름 2m에 길이 100m인 텅스텐막대에 내부에는 플루토늄으로 가득 채우고 앞에는 성형작약탄두를 달아서 보다 깊이 파고들 수 있도록 만들었다. 이런 수제폭탄은 대륙마다 각각 하나씩 총 5개가 동시에 발사되며 소행성의 곳곳에 깊이 파고들어 내부에서 폭발하여 소행성을 산산조각 내 버릴 것이다. 이러한 부품들은 대부분 핵미사일기지나 원자력발전소의 잔해에서 구할 수 있었다. 제작기간은 3개월,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그 미사일은 당연히 성공적으로 소행성을 파괴시켰다. 거의 10만 년을 살아오면서 이미 모든 물리법칙은 통달한 상태고 이론상이지만 어떤 물질이 가장 적합한지도 쉽게 알 수 있었다.

게다가 그렇지 않았으면 지금 이렇게 기록을 남기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았겠는가.

  분명히 소행성을 파괴시키는 데에는 성공했다. 그러나 생각보다 위력이 약했던 모양이다. 미사일을 더 길고 크게 만들었어야 했다. 아니 차라리 충격을 가해 궤도를 변경시켜 태양으로 돌진하도록 만들었어야 했다. 이건 순전히 내 계산 착오였다. 파괴된 소행성은 지름이 6km로 줄어들고 나머지 잔해는 비처럼 뿌려졌다.

  그 정도 크기의 파편이라도 충분이 엘리시움에 위협적일 수 있다. 나는 나를 제외한 모든 실험체를 동면시키고 각각 보호셔터를 내려서 보호했다. 그렇게 잔해들의 소나기를 지켜보면서 우리 쪽으로 떨어지는 게 없는지 주시하다가 파편하나가 이쪽을 향해 돌진하는 것을 발견했다. 이제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엘리시움이 버텨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곧, 그 소행성파편은 지상을 타격했고 지하 15km까지 파고들었다. 엘리시움 외곽을 정확히 타격하였고 그 결과 완전한 구형이었던 외형이 약간 찌그러진 모습이 되었다. 다행히 내부에는 충격이 전해지지 않았다. 하지만 지상 육상생물의 90%가 멸종했을 것이다. 비유하자면, 과거의 핵전쟁 이후는 리셋이었다면 이번 소행성 충돌은 ‘포맷’이었다. 그 충격으로 인해 지구의 공전궤도가 아주 미세하게나마 변경되었다. 그것으로 인해 여름은 시원해지고 겨울은 따뜻해지는 기상이변이 찾아올 것이다. 그 이후에는 빙하기가 도래하게 될 것이다.



<기록 9-(추정) A.D. 508,100년 경>

  D+50만 년, 장기간의 동면으로 인해 동면되었던 3000개의 실험체중 1200개가 깨어나지 못했다. 이제 실험체는 1717개밖에 남지 않았다. 소수의 생존자 중에는 마크원과 마크투가 있었다.(과거 불청객과 아버지, 편의상 마크원 마크투라고 부른다. 여기서는 부자(父子)의 개념이 없다.) 그 둘은 나에게 있어서 특별했다. 다른 실험체들에 비해 생각의 능력이 뛰어났다. 혼자서는 매우 평범했으나 둘이서 같이 작업할 경우 엄청난 작업의 효율을 가져왔다. 지금껏 살아남은 실험체의 뇌는 그만큼 우수하기 때문에 살아남은 것인데 그런 실험체 20개가 하는 작업량을 그 둘이서 순식간에 해낸다. 그리고 따로 교육을 시키지 않았지만 둘의 뇌가 서로 상호작용을 통해 여러 분야의 학문을 모두 꿰뚫었다. 특히 기존의 전 우주에 적용되는 물리법칙을 넘어 초공간의 개념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3차원 공간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의 상식으로썬 4차원이상의 공간은 이해하기 매우 어렵다. 이들은 학습 및 새로운 이론을 만들어내는 등의 놀라운 효율을 보여주었다. 이들에 의해 곧 우리 은하의 좌표가 완성될 것이고 지구를 기준으로 반경 30만 광년 내의 지도좌표를 만들어낼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초공간이론이 완성될 즈음엔 우주는 더 이상 광활한 공간이 아니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 특별한 두 실험체는 실험체번호 OOOO으로 표기하지 않고 MK.1, MK2라는 특별한 호칭을 붙여 주었다. 마크원과 마크투를 선두로 하여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우수한 뇌들은 가상세계를 더욱더 발전시키고 더 넓은 세계를 개척해 나갈 것이다.

 이 무렵, 지상은 얼음으로 뒤덮여 있었다. 소행성 충돌에서 살아남은 종이라 할지라도 극심한 추위에서는 살아남지 못하였을 것이다. 몇몇 해저생물을 제외한 나머지 지상생물들은 사실상 모두 멸종했을 것이다. 비록 내가 우주로 나가서 볼 수는 없었지만 백색의 지구는 아름답기 그지없지 않을까 싶었다.

  우리의 뇌에도 휴식이 필요했다. 10만 년 동안 쉬지 않고 사고를 해온 모든 실험체들에게 휴식을 제공하기로 했다. 나와 마크원, 마크투를 제외한 모든 실험체를 장기간 동면시키기로 했다. 일종의 휴가인 셈이다. 이들이 깊은 잠에 빠져든 동안 우리는 거대한 공간을 위해 도약할 준비를 해 나갈 것이다.



<기록 10-(추정) A.D. 1,002,100년 경>

  D+100만 년, 여전히 지구는 얼어붙어있다. 그동안 우리는 상상도 못 할 만큼 발전해 왔다. 지구관찰용 위성이 수백 개가 발사되어 지구를 공전하고 있고 우리만의 통신탑도 설치했다. 위성사진을 통해 직접 본 백색의 차가운 지구는 내가 상상한 것만큼 아름다웠다. 달은 언제나 그랬듯이 지구주위를 공전하고 있고 고요의 바다에는 여전히 성조기가 꽂혀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우리는 지구표면을 ‘직접’ 탐사했다. 우리의 뇌를 탐사로봇에 동기화시켜 마치 자신의 몸처럼 움직일 수 있었다. 당시 지구의 표면은 -150℃였다. 이 환경에서 살아남은 생물이 있을 리가 없었다. 생명력이 질긴 미생물은 종종 발견되었으나 그런 것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우리들의 기준에서는 미생물은 더 이상 생물로 취급할 수가 없을 정도로 미물일 뿐이었다. 우리는 지구표면에 우리의 수족이 되어줄 로봇을 생산할 공장을 세웠다. 처음엔 아주 간단한 로봇으로 지구 전체에 파견하여 온갖 재료를 닥치는 대로 구해오도록 명령했고 그 물질들을 이용해 보다 더 정교한 기계를 만들어 내었고 마침내 인간형 슈트를 개발했다. 그리고 우리만의 힘으로 탐사선과 발사대를 세웠다. 그렇게 태양계 전체를 끊임없이 연구했고 적어도 태양계 내에서는 어떠한 생명체도 발견되지 않았다. 하지만 우물 안 개구리처럼 언제까지 우리 은하 안에서만 머무를 수는 없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독자적으로 개발한 탐사선을 대마젤란은하, 안드로메다 은하에 보내기로 했다. 각각 15만 7천 광년, 225만 광년 정도 떨어져 있다. 다르게 말해, 빛의 속도로 갔을 때 걸리는 시간이 각각 15만 7천 년, 225만 년 걸리는 거리라는 말이다. 아인슈타인은 옳았다. 우리 탐사선이 질량을 갖고 있는 한 결코 광속을 낼 수는 없다.

 하지만 초공간이론에 따르면, 3차원 공간상에서의 거리를 4차원공간을 통해서 가면 훨씬 짧은 거리로 이동할 수 있다. 마치 직육면체에서 2차원 면을 따라 이동하면 더 오래 걸리지만 3차원공간을 통해 가로질러 가면 이동거리를 비약적으로 줄일 수 있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 이 논리를 3차원공간과 4차원공간의 관계에 적용시켜 같은 속도로 단시간 내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은 불완전한 이론이므로 탐사선이 언제 귀환할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었다. 빛이 다녀오는 시간보다 더 일찍 도착할지, 아니면 훨씬 일찍 다녀올지 말이다.

  한편 우리는 새로운 동면법을 개발해 내었다. 과거 냉동건조식 동면법은 많은 문제가 있었다. 급속냉동으로 인해 세포가 파괴되는 일이 빈번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분의 팽창에 의한 세포파괴를 막기 위해 혈관에 다량의 당분을 주입하여 저온을 유지하되, 액체상태를 유지하게 만들었다. 우린 이 방법을 ‘냉혈동면법’이라 불렀다.

  나와 마크원, 마크투는 백만 년 동안 너무나도 많은 업적을 세웠다. 이제 우리들에게도 휴식이 필요했다. 우린 스스로 개발한 냉혈동면법으로 동면할 계획이었다. 그전에 냉동동면중인 1717개의 실험체들을 깨워야 했다. 우려했던바와 같이 이들 중 대다수는 깨어나지 못하였다. 우리 셋을 제외한 실험체중 의식을 되찾은 실험체는 정확히 1000개였다. 우리는 이 운 좋은 전(前) 인류들을 ‘임모탈(immortal)’이라 불렀다. 그들은 의식을 되찾는 대로 각각의 단말기에 미리 프로그래밍해 둔 대로 새로운 지식과 기계들을 다루는 방법을 배울 것이고 스스로를 인간형 슈트에 담아 인간이었을 때와 같이 움직이게 될 것이다. 그들의 활동은 더욱 자유로워지고 우리의 뒤를 이어 눈부신 업적을 쌓을 것이다.


  ‘나는 연구결과 따위는 잊어버린 지 오래다. 난 현재 살아있다는 자체가 흥미로울 따름이었다.’


-한참을 잤을까, 2억 년은 족히 흐른 것 같다.


-1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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