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6일 토요일. 10.29 이태원 참사 2주기 추모대회가 시청에서 열렸다. 벌써 2년이 되었나? 어떤 일에 대한 시간의 속도는 기억하는 시간과 반비례하나 보다. 잊고 있는 시간이 점점 길어지고 있었다. 시청 광장에 은하수처럼 모인 시민들이 유가족들과 생존피해자들겐 분명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 진상 규명에 힘을 써야 할 기관들은 아무 일도 하지 않았고, 참사 2년이 다 되어 1심 재판에서 용산구청장, 서울경찰청장 등 이태원 참사 주요 책임자들이 모두 무죄를 받았기 때문이다.
지난 달 출범한 ‘이태원 참사 특별조사위원회’를 말하며 여야 모두 “최선을 다해 지원하겠다”고 했는데, 믿지도 않고 안 믿지도 않는다. 지켜볼 것이다. ‘단결과 통합’을 말하는 여당 원내대표는 무대에서 내려올 때까지 시민들의 야유를 받았다. 참사 현장에서 “압사? 뇌진탕 이런 게 있었겠지” 충격적인 망언을 하고 2년 동안 유가족을 단 한 번도 만나주지 않았던 대통령의 충신인 그 사람, 누가 대신 써주었을 글을 글자로 읽으며 영혼은 어디로 가출시켰을까.
앞서 열린 촛불집회 참여로 조금 늦게 도착해, 호주인 희생자 엄마의 딸에게 보내는 눈물어린 영문 편지 낭독과 마지막 순서인 가수 하림의 잔잔하면서도 감동적인 공연까지 본 후 이태원으로 향했다. 대회 중간에 무대에 오른 생존피해자 이주현 씨가 숨겨진 피해자들을 찾아야 한다는 조용하고도 강한 호소와 함께, 참사 현장 골목길에 있겠다, 함께하실 분들은 이태원 녹사평역 광장으로 와 달라고 한 것을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추모대회가 끝났을 당시 나는 이태원에서 작은 행사가 있으니 함께해 달라는 왜곡된 기억을 하고 있었다.
시청에서 녹사평역까지는 먼 거리는 아니지만 지하철로는 두 번을 갈아타야 했다. 추모대회가 8시 45분경에 끝나고 녹사평역에 도착했을 때는 9시가 훨씬 지나 있었다. 2년 전 참사 직후 합동분향소가 마련되었던 녹사평역광장엔 허술한 흰 천막들이 빙 둘러 설치되고, 119 구급대원들 서너 명만 구급약품 하나 없는 빈 테이블에서 한가하게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주변에 119 구급차가 몇 대 있었다. 부상자가 생기면 사고 현장으로 가지 않고 그 광장으로 데려와 치료를 하겠다는 것인가, 구급차에서 치료하겠다는 것인가, 구급차에 태워 병원으로 이송하겠다는 것인가. 즉, 그 천막들은 있을 필요가 없었다. 국가 폭력에 맞장구치고 있는 용산구청, 경찰청의 태도로 보아 나는 ‘여기서 아무 행사도 못 하도록 하겠다’는 의도로 공간을 선점해놓은 것이라고 이해했다.
해밀턴호텔 옆 골목 참사 현장으로 향했다. 온갖 코스튬 의상과 기괴한 분장으로 핼러윈을 즐기러 나온 사람들이 지나쳐 갔다. 오늘이 2년 전 그날, 10월 마지막 토요일이구나. 핼러윈 축제를 실제로 구경조차 해본 적 없는 나는 문화 지체자처럼 이리저리 눈동자만 굴렸다. 내 손에는 시청 광장에서 가져온 피켓이 들려 있었다.
‘10.29 이태원 참사 진상을 규명하라.’
참사 현장 골목은 기대와는 전혀 다른 풍경이었다. 작은 추모 행사는 없었고, 추모객들 대신 핼러윈의 분위기에 들뜬 사람들 수십 명이 무언가를 마시며 유쾌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오른쪽 해밀턴호텔 벽은 파란색 철제 담장이 설치되었고 그 앞에 흰 플라스틱 천으로 덮은 세 개의 평평한 사각 물체가 서 있었다. 별 그림 몇 개와 함께 ‘10.29 기억과 안전의 길’ 작품 설치를 위해 정비 중이라는 간단한 문구가 적힌 게 보였다. 그 왼편으로 유가족이나 친구, 추모의 마음을 가진 이들이 가져다놓았을 작은 꽃다발들과 캔커피, 음료수, 과자, 사진 액자 같은 것들이 바닥에 일렬로 늘어서 있었다.
그 맞은편에 있던 환전소와 가방 가게 등은 모두 사라졌고 편의점이 하나 들어서 손님들이 북적였다. 그 골목이 기억의 공간이어야 한다는 것을 모른다는 듯 그들은 편의점에서 산 맥주, 콜라, 소주를 마시며 떠들었다. 대부분 외국인들이었다. 내가 들고 있던 피켓을 힐끗거리긴 했으나 신경 쓰는 것 같진 않았다. 적어도 참사의 골목만큼은 추모의 분위기이길 바랐는데, 마음이 구겨졌다.
나의 ‘10.29 걷기’는 그다음부터였다. 바닥의 추모품들을 카메라에 담는데 누군가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여기까지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20대로 보이는 여성이었다. 그녀는 몇 차례나 감사하다고 말하며 울음을 터뜨렸다. 희생자와 가까운 사람이라는 직감이 들어 가볍게 등을 감싸고 토닥였다.
“동생이 여기에 있었어요.”
짐작은 했지만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곧 진정한 그녀는 동생이 좋아하는 와인을 가져다 놓았다며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여러 개의 음료수와 캔커피 한가운데 우뚝 솟은 와인 병이 보였다. 동생은 친구 두 명과 함께 핼러윈을 즐기기 위해 이태원에 왔고 이 골목에서 한 친구와 함께 참사를 당했으며 다른 친구 한 명은 생존자로 남았다고 했다. 밝은 성격에 다양한 분야에 관심이 많고 친구들과 노는 것을 좋아했다며 동생을 떠올렸다.
“저랑 같이 다녀줄 수 있나요?”
그녀는 생존희생자 이주현 씨를 찾고 싶다고 했다. 희생자들에게 미안해했던 것에 대해 그럴 필요가 없다고 말하고 싶고, 묻고 싶은 게 있다고 했다. 나는 거절하지 않았다. 사실 이주현 씨를 찾을 수 있다는 기대는 없었다. 많은 인파가 오가는 핼러윈의 북적이는 이태원 골목에서 얼굴을 정확히 구별할 수 없는 사람을 찾기는 불가능할 것 같았고(시청 무대에서 이주현 씨는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참사 현장이 아닌 클럽과 술집의 난장 파티가 벌어지는 곳에 있을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단 1초도 머뭇거리지 않고 좋다고 한 것은 그녀의 깊은 간절함에 나의 합리적 추측 따위 갖다 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니, 어떻게 감히 안 되겠다고 말할 수 있을까. 국가 폭력의 책임은 우리 모두에게 1그램씩이라도 있는데 말이다.
해밀턴호텔 뒷골목은 사람들 물결로 출렁였다. 고깔모자 모양 중앙분리대를 이어놓고 우측통행을 지도하는 경찰들이 어찌나 많던지. 2년 전 그날 이 많은 경찰들은 다 어디에 묶어두었던 걸까. 분노도 함께 출렁거렸다. 참사가 있던 날의 영상에서 보았던 경사진 골목, 줄지어 가는 사람들 사이에 끼어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팔을 잡고서. 한국인들보다 외국인들이 더 많은 넓지 않은 골목. 이동을 못 할 정도의 인파는 아니었지만, 한 치의 틈도 없이 덩어리처럼 붙어 서서 옴짝달싹 못한 채 경찰에 SOS를 치거나 공포의 외마디 소리를 내던 그날의 영상이 떠올라 가슴이 답답했다.
골목 끝까지 갔다가 다시 반대편 끝으로 행렬을 따라 걸었다. 모습도 알지 못하는 이주현 씨를 찾으며. 걷는 도중 추모대회 유튜브 영상으로 이주현 씨가 검은 재킷에 브라운 계열의 긴 스커트를 입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큰 단서라도 찾은 듯 비슷한 스커트를 찾아 부지런히 눈동자를 굴렸다. 서로 괜찮으냐고 물으면서. 그녀는 괜찮다고 했지만 괜찮을 리 없었다.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 앎은 지극히 얕은 짐작이었을 뿐 당사자가 아닌 나로서는 그녀가 느낄 감정의 미세한 결과 무게를 가늠조차 수 없었다.
골목 양쪽으로 클럽과 술집에서 비트가 요란한 음악이 터져 나오고, 입구에서 파격적인 별별 코스튬 의상으로 코스프레를 하며 사진을 찍는 사람들, 활짝 열어놓은 창 안으로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고 소리 지르는 사람들, 입장을 위해 클럽 앞에 길게 줄을 서 있는 사람들을 지나쳐 갔다. 2년 전에 아무 일이 없었다면 그저 신기하고 흥미롭고 나도 한번 놀아보고 싶은 생각까지 들었을지 모르는데, 이 요란한 풍경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서도 공허했고 심정이 복잡하고 착잡했다. 이들은 그날을 기억은 하고 있는 걸까. 내가 들고 있는 피켓을 본 한국인들이 잠깐이나마 웃음기를 거두는 것은 다행이었다. 이주현 씨의 스커트는 보이지 않았다.
이주현 씨가 흥에 취해 파티를 즐기는 이 골목을 다닐 것 같지는 않다, 온다면 참사 현장에 있지 않을까. 행렬을 따라 걷다가 해밀턴호텔 골목 지점에서 한 번씩 추모 공간까지 가보자. 결국 나는 그렇게 제안했고 그녀는 수긍했다. 혹시나 싶어 피켓은 계속 들고 다녔다. 그 골목에서는 공들인 코스튬만큼이나 눈에 띄는 것이었고 이주현 씨가 그곳 어딘가에 있다면 보랏빛 바탕에 흰 글자 ‘진상을 규명하라’를 놓치지 않고 시선으로 가로챌 테니까. 하지만 역시,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생각했고, 그 생각을 입 밖으로 흘리지는 않았다.
가끔 핼러윈 풍경을 취재하러 나온 기자들이 보였는데, 유가족으로서 여러 번 인터뷰를 했었다는 그녀는 반갑게 재회한 jtbc 기자를 붙잡고 애타게 말했다. 생존피해자 이주현 씨를 만나고 싶다, 그분이 미안해하지 않았으면 좋겠고, 참사 현장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듣고 싶다, 누군가 동생이 심폐소생술을 받고 있다고 동생 휴대폰으로 전화를 했었는데 그가 누구였는지, 그때의 상황을 알고 있는지 물어보고 싶다, 참사가 발생한 후부터 가족에게 연락이 올 때까지 동생은 어디에서 어떻게 있었는지 알고 싶다……. 기자는 그녀의 말을 잘 들어주며 공감해주었지만 더 이상 그녀를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은 없었다.
200미터쯤 되는 해밀턴호텔 뒷골목을 반복해 오가기를 몇 번이나 했을까. 우리는 서로 배고프지 않은지 걱정했고, 서로 별 생각은 없으면서 상대를 배려하며 같이 먹을 곳을 찾았다. 대로를 건너 케밥집의 케밥은 맛있었으나 입도 마음도 시큰둥했다. 그녀도 절반만 먹고는 더 이상 먹지 못했다. 다시 참사 현장에 들렀다가 녹사평역 광장에 가보고 이주현 씨가 없으면 집으로 가자는 데 동의, 해밀턴호텔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 골목은 여전히 편의점 맥주와 소주를 마시며 핼러윈의 밤을 즐기는 외국인들만 있었을 뿐 10.29를 추모하는 이는 한 사람도 없었다. 어쩌면 누군가 찾아왔더라도 이런 풍경 속에 오래 있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고, 곧 그 자리를 떠났을 것이다. 어쩌면 이주현 씨도. 다시 큰길로 나와 녹사평역으로 향하다 그녀는 머리가 아파 집으로 가봐야겠다며 택시를 잡았다. 마음이 아팠다.
왠지 안타까워 다시 참사 현장으로 갔다. 그냥 집으로 갈 걸, 나의 실수였을까. 추모물품들 사이에 있던 와인이 사라진 것을 발견했을 때, 나는 어떤 만행의 현장을 보는 것처럼 무참했다. 편의점 주변에 있던 이들을 샅샅이 살폈다. 와인 병을 들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소리치고 싶었다. 너 그 와인이 어떤 와인인지 알고 훔쳤어? 오늘 무슨 날인지 몰라? 너 사람 아니야? 하지만 와인 병은 보이지 않았다. 정말 조롱을 당한 것처럼 무참했다. 그 야만적인 절도범은 적어도 한국인은 아니었겠지. 내가 찾아낸 위로는 고작 그 정도였다. 와인 병이 사라진 자리를 한참 바라보다 발길을 돌렸다. 이태원에서 시간을 처음 확인했다. 밤 11시 45분이었다.
지금까지 걸었던 길들 중 이렇게 힘든 길이 있었을까. 어쩌면 유가족들은 매일 이 길을 걷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분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시청에 은하수처럼 모였던 시민들을 떠올렸다. 159개의 별들을 기억하고 추모하러 나와 5천 개의 휴대폰 불빛을 밝혔던 그들을. 보이지 않는 마음의 연대. 그것이 유가족들을 살아가게 하는 힘이 아닐까. 늦은 밤 기진맥진 돌아가는 나에게도 그것은 위안이 되었다.
무거운 순례의 길 같았던 10.29 이태원 걷기. 아무 도움은 주지 못했어도 발걸음이나마 함께 할 수 있었다면 그것도 의미 있는 일이었다고 여기고 싶다. 이틀이 지나 저녁 산책길에 나는 생각했다.
* 사흘이 지나 뉴스를 보니 그날은 핼러윈 주말이었지만 10월 26일이었기에 사람들이 많이 오지 않았나 보다. 10.29는 오늘. 참사 현장에 적지 않게 놓인 국화꽃과 인터뷰하는 시민들을 보니 딱딱했던 마음이 좀 나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