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나꽃 Sep 06. 2024

걷기, 이야기

많은 사람이 그렇듯 내 여행도 대부분은 걷기로 이루어진다. 걷기가 주는 맛은 다양하지만, 그중 하나는 뜻하지 않게 생기는 ‘단 한 번의 이야기’가 주는 맛이다. 여행을 한 만큼, 그리고 걸은 만큼 내 기억의 저장소엔 많은 이야기가 들어 있다. 특히 세상 그 어느 곳과도 달랐던 나라 쿠바에서는 좀 더 강렬한 이야기들이 기억에 남았다.      


쿠바의 수도 아바나에서 자동차로 네 시간 거리의 비냘레스는 시외버스 터미널 주변을 빼곤 대체로 한적한 시골이었다. 주민들과 여행자들이 머물고 오가는 마을 주변으로 담배농장이 펼쳐졌고, <어린왕자>에서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 모양의 독특한 언덕 모고테와 야자수가 삐죽삐죽 솟은 계곡이 멀리 보이는 힐링 플레이스. 그곳에서 아무리 보아도 신비하기만 한 모고테를 바라보며 인적 드문 시골길을 걸어다니는 동안, 나는 탐험가라도 된 듯 어떤 조우에 대한 긴장감이 내 주변을 맴도는 것 같았다.      


담배농장 안으로 들어가 신발에 붉은 진흙이 묻는 걸 개의치 않은 채 20분쯤 걸었을까. 드디어 담뱃잎을 건조시키는 창고 앞에서 두 사람을 만났다. 물라토처럼 보이는 나이 든 아버지와 건장한 체격의 레게 머리 젊은 아들은 태양빛에 피부가 검게 그을려 있었다. 영어를 할 줄 아는 아들과 짧은 대화를 주고받다가 그들의 권유로 건조 창고에 들어갔다.      


짙은 갈색의 말린 담뱃잎이 촘촘하게 줄지어 매달린 창고에서 그들은 아시아에서 혼자 온 여성에게 시가 만드는 걸 보여주고 싶어했다. 담뱃잎을 몇 개 겹쳐 능숙한 손길로 돌돌 만 뒤 꿀을 발라 마무리하고 반듯하게 끝을 자르면 끝. 최고의 담뱃잎 생산지 비냘레스에 대한 자부심이 가득한 그들 부자는 나에게 시가를 사라거나 하지는 않았다. 검지와 중지 사이에 시가를 끼우고 불을 붙여 멋들어지게 연기를 피워 올리며 웃는 담배 장인의 모습이 근사해 보였다.      


내가 머문 숙소의 여행자들이 동굴 투어와 승마 투어를 떠날 때, 나는 마을을 돌아다니고 시골길을 걸었다. 마당을 돌아다니는 닭과 병아리, 개, 돼지, 말, 풀을 뜯는 송아지들, 농기구들이 가득한 창고, 어느 집이나 반들반들 닦인 현관 대리석 마루와 목재 흔들의자가 정겨운 시골 풍경을 이루었다. 올라! 마주치는 사람마다 인사를 나누고, 로컬 식당에서 조리법이 단순한 음식에 쿠바 맥주 크리스탈을 마시며 가끔 손님들과 각자의 언어로 눈치껏 소통을 하기도 했다. 음악과 춤에 진심인 쿠바인들은 친화력도 뛰어나 이전에 만난 적이라도 있는 것처럼 붙임성 있게 굴었다.     


2박3일이 휘익 지나가고,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아바나 행 버스를 기다렸다. 쿠바에서 시외버스가 한두 시간 늦는 것은 연착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것. 마음 비우고 가게에서 음료수 하나를 사 문 옆 의자에 앉아 있었다. 대합실도 없는 시골 터미널이라 여행자들은 길가에 주저앉아 마냥 여유를 부리며 떠들었다. 건너편 작은 광장에서는 멈추지 않고 라틴 팝이 터져 나왔다.     


여행자들 사이로 누군가 다가와 나에게 손바닥을 펼쳐 내밀 때, 나는 그가 담배농장 아들이라는 걸 금세 알아보았다. 그의 모션은 누가 봐도 “쉘 위 댄스?”였고, 나는 그의 손바닥에 내 손을 얹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쳤구나. 내가 손사래를 치지 않은 것은 아바나에서 살사 레슨 몇 회를 받아 간이 부은 탓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생각조차 할 겨를 없이 담배농장 아들은(안타깝게도 그의 이름을 잊었다) 현란하게 살사를 추며 내 손을 굉장한 스킬로 돌려댔다. 그의 손끝에 매달려 휙휙 돌고 앞뒤로 스텝을 밟는 게 나인지 누구인지도 모른 채 음악을 따라갔고, 음악이 끝났을 땐 그의 한쪽 팔에 안겨 주위를 둘러싼 여행자들의 요란한 박수에 얼떨떨해하며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이게 꿈이야 현실이야?     


“악. 나 가야 해.”

딱 시간을 맞춰 도착한 아바나 행 버스를 가리키며 그에게 말했다.

“그래. 잘 가.”

그는 자신의 농장에 들렀던 동양 여자의 살사 리더로서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안녕!”

나는 음료수를 그에게 건네고 배낭을 멘 다음 손을 흔들며 버스로 달려갔다. 비냘레스 마지막 날의 환상적인 이야기를 하나 더 등에 얹고. 사실 내 춤은 거의 그의 오른손이 해준 것이었고 나는 기본 스텝만을 반복했을 뿐이다. 할머니, 할아버지들까지 모두가 댄서인 쿠바에서도 그는 압도적으로 뛰어난 댄서였던 것이다. 이 무슨 행운이람.     


신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힘들었던 쿠바 여행이 그 어떤 여행보다도 나에게 특별한 것은 그곳에서의 이야기가 특별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 특별한 이야기들은 나의 걷기에서 생겨난 이야기들이었다. 한 땀 한 땀의 바느질로 단 하나밖에 없는 수제 옷이 만들어지듯, 한 걸음 한 걸음의 걷기로 세상에 단 하나뿐인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미지의 길을 따라가는 동안의 우연한 만남들은 오직 ‘걸음’으로써 맞게 되는 기회이며, 그 걸음은 잊지 못할 이야기의 원천이 되는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내 집 여행하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