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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의 시집 읽기

<내가 살아갈 사람>  김중일, 창비, 2015

아저씨의 시집 읽기 1        

아저씨가 스스로를 아저씨라 부르는 것은 어딘지 낯간지러운 일이다. 마치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말하는 어린아이의 화법을 따라 하는 것 같다.    

 

아저씨 오늘 술 마셨어염...     


그런데 아저씨만큼 아저씨를 부르기 적당한 이름도 없다. 이름 뒤에 숨는 많은 사람들처럼, 아저씨들은 아저씨라는 이름 뒤에 숨는다. 할 말은 많지만 하지 않는 것처럼 아저씨는 그 이름이면 적당히 만족한다. 그리고 많은 것들을 버린다. 이사를 할 때마다 줄어드는 짐과 늘어 드는 짐이 있다. 아저씨는 소년, 오빠와 같은 몇 개의 단어와 세상 사이를 몇 차례 이사하는 동안 필요한 것들 몇 개만 남기고 대개 자신의 짐들을 버린다.     

시집은, 아저씨가 버리지 않은 짐들 중 하나이다. 아마 새롭게 늘어난 짐이 몇 개 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시집마저 버려 버린다면 아저씨는 정말로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게 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시집이 소중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시집으로 속이고 가려보려 한 것이다. 아저씨는 그 점을 반성한다. 아저씨는 정말로 소중한 것들만 지니고 있어야 한다. 정말로 소중하지 않은 것들을 가지고 있는 것만큼 아름답지 않은 것도 없다. 뱃살, 턱살 등등.     


그런데 내 머리카락은 정말 소중한데...    


<내가 살아갈 사람>    김중일, 창작과 비평, 2015    


아저씨의 시집 읽기 첫 번째 시집은 김중일 시인의 <내가 살아갈 사람>이다. 우리나라에는 시인이 많다고 한다. 그래서 좋은 시도 많고 좋은 시집도 많다. 좋은 시인들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저마다 개성이 있고 의미가 깊은 시들을 써낸다. 좋은 시란 무엇일까. 좋은 시가 있다면 나쁜 시도 있을까.     


시인의 시어를 무속의 언어에 비유한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이를테면 샤먼의 언어라는 것이다. 샤먼의 언어란 어떤 언어인가. 샤먼은 일상 속에서 무엇인가 해결해야 할 일이 생기거나, 반성해야 할 일이 생기거나 혹은 미래를 봐야 할 일이 생길 때 말하는 사람이다. 그의 언어는 언제나 일상의 한가운데에서 비롯되지만 일상의 언어를 통해서 말하지는 않는다. 그의 언어는 생경하고 꼭 저 멀리 우주에서 내려온 것 같으면서 노래인 것 같기도 하고, 읊조리는 것 같기도 하다. 시인의 언어는 그 샤먼의 언어를 닮았다는 것이다.      


시간이 흐르는 동안, 말하자면 세상이 복잡해지는 동안 샤먼은 예전에 비해 사람들에게 권위를 잃었고 합리적인 언어가 아니면 인정받지 못하게 되었다. 일상적이고 합리적인 언어들 사이에서 의미를 가지지 못하는 언어는 퇴출되는 세상이 온 것이다. 그 언어와 언어들 사이의 퇴출되지 않으려는 힘을 ‘중력’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언어는 언어 사이에 존재하는 중력들에 의해서 사람들 사이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중력이라는 아주 작은 공    



우리가 함께 던졌던 작은 마음의 공

우리가 던진 작은 공은 점점 더 아주 작아졌다 

지금 어디쯤 치솟고 있을까

대기권 밖으로 너무 높이 날아간

새들의 주검과 달빛의 부스러기와 함께

지구를 공전하고 있을까 그러다가

어느날 살짝 핏물이 밴 베고니아 꽃잎이

소리없이 등 뒤로 떨어지듯 발밑에 

떨어질 것이다    


전 세계의 사람들이 

동시에 물구나무서서 땅을 움켜쥔다면

지구를 한 주먹의 작은 공처럼 뭉칠 수 있을까 

은빛 레일이 있는 승강장 한쪽에 무심히 놓인

환한 달의 휴지통 속으로 던져넣을 수 있을까

환한 달의 휴지통을 뒤집자 쏟아지는

흰 파지처럼 구겨진 눈 덮인 산맥과 구름

지난 계절 우리가 던진 공은 어느날 돌연 

빗방울이라는 아주 작은 공이 되어 

떨어질 것이다    


온통 철탑으로 둘러싸인 강가에서 

검은 라이방을 쓴 칠면조와 나는 고개를 외로 꺾고 

등 뒤로 떨어지는 철새떼를 좇았다

칠면조는 일생 중력의 조롱 속에 갇혀 

얼굴색을 바꾸는 수련을 해 왔다

딸꾹질의 텐션으로 간신히 하늘에 떠 있는 

얄팍한 새들을 멀리하며 

충분히 튼튼한 날개를 가졌으나 

이제 그것은 세세연년 벼린 칼처럼

너무 작아졌다    

(중략)    


시인은 언어 사이에 내재된 중력을 거스르는 언어를 말하는 사람이다. 시인은 그래서 힘이 없고 가난하기 마련이다. 아저씨 역시 시를 좋아하지만, 일상의 세계에서는 일상 언어의 중력을 벗어나지 않기 위해 애쓴다. 물론 그 중력이라는 것이 지키기 위해서 노력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내재되어 공기처럼 존재하는 것이긴 하다. 그래서 중력을 벗어나지 않기 위해 애쓰지만, 그것을 벗어나기도 힘든 어떤 상태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중력을 벗어나지 않기 위해 애쓰는 그 중력을 벗어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술을 마시면 가끔 그 중력을 벗어나는 기분을 느끼기는 하지만 엄밀히 말해 그것은 중력을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중력을 속이는 것뿐이다. 술이 깨고 나면 중력은 다시 찾아와 몇 배의 채무를 이행할 것을 요구한다.)    


자 이제 언어를 삶이라고 바꿔 읽으면 문제는 훨씬 더 심각해지고, 언어를 사랑이라고 바꿔 읽으면 문제는 묘해진다. 언어를 사회라 읽으면 문제는 당황스러운 것이 된다. 그래서 시인은 칠면조의 날개가 너무 작아졌다고 말한다. 중력을 벗어나고 싶었지만 날 수조차 없는 모습이 되어 버린 것이다.     


나는 지구를 던져 쓰레기통에 집어넣는 시인의 호기로움이 너무나 멋지면서도 그것이 중력을 벗어 날 수 없다는 것 또한 알기에 서글퍼진다. 아저씨는 전철 안에서 이 시를 읽다가 울컥 뜨거워졌다. 약속 장소에 가려면 분명히 이 역에 내려야 하지만, 그깟 내려야 할 역 따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한갓 ‘딸꾹질의 텐션’으로 떠 있는 삶 따위 내팽개쳐 버리고 싶어 질 정도였다.      


그러나 어디 그럴 수 있겠는가. 나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어 시집을 덮어 버리고 말았다. 책을 덮으면 꿈꾸는 소년이 아저씨가 된다. 안내방송. 내릴 때 발밑을 조심하라는 안내 방송 따위! 아저씨는 그러나 내리기 직전에 언뜻 내비친 ‘세세연년 벼린 칼’에 마음이 떨어진다.     


날 수 없는 그 날개는 사실, 세세연년 벼리느라 작아져 버린 칼인 것이다. 


시인의 이러한 자존심이 없었던 들, 

나는 이 중력의 세계를 어떻게 견딜 수 있었겠는가. 

아저씨는 시인들의 세계에서 세상을 견디고 있는

나는 이를테면

시인들의 채무자이다.




아저씨의 시집 읽기 첫 번째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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