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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빌리브 Mar 19. 2024

경제학시험


Based on true story





시작부터 어려운 하루였다. 알 수 없는 불편함에 밤새 뒤척인 데다가 눈이 떠지자마자 몇 년 전 프랑스에서의 기억이 머리를 쥐어뜯게 했다. 한밤중에 담배를 얻으러 왔던 여자 후배 두 명을 문전박대했던 일이다. 조용히 담배나 주면 될 것을 건강이 어쩌고 쓸데없는 소리나 해댄 것이다.



하지만 경제학 전공시험은 굉장히 중요한 일이었 간신히 샤워부스로 기어 들어가서 뜨거운 물을 끼 얻으니 조금 정신을 들었다. 옷을 대충 주워 입고 지하주차장에서 조용히 기다리고 있던 낡은 승용차에 올라타 시동을 걸었다.



아직 이른 새벽이라 도로에는 차가 별로 없었다. 고속도로는 더욱 한산해서 나는 즐겁게 속력을 내고 있었다.


교차로를 몇 개 지난 후 내비게이션의 음성에 따라 도로를 빠져나가기 위해 여유롭게 핸들을 돌리려고 할 때쯤 공사 중이란 푯말들로 길이 막혀있는 것이 보였다.


고속도로에서 차를 세울 수는 없는 일이고 또 세운다고 해서 공사 중인 길을 어찌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일단 계속 달리기로 했다.



내비게이션은 꼼꼼하게 지도를 뒤지더니 결국 유턴할 수 있는 곳을 찾아내서 의기양양하게 액정에 표시했다.


나는 왠지 알 수 없는 긴장감과 함께 유턴을 하였고 곧 다시 빠져나갈 수 있는 곳이 나타났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나는 라디오를 켰다. 생기 넘치는 걸그룹 소녀들이 애교 섞인 목소리로 짧은 치마가 좋다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몇 달 전 헤어진 여자 친구도 짧은 치마가 굉장히 잘 어울렸었다. 조금 과한 면이 있어서 지나가는 사람 대부분이 쳐다보는 것이 신경이 쓰이긴 했지만 그것을 차마 뭐라 할 수 없을 정도로 그녀는 미니 스커트가 아주 잘 어울렸다.


왜 헤어졌는지 기억은 잘 안 나지만 대부분의 연인처럼 우리는 여러 번의 의미 없는 다툼 끝에 헤어졌다. 그 후로 나는 자주 그녀의 생각을 했지만 딱히 연락을 하지는 못했다. 그녀에게서도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한참이 지난 후 다시 찾은 길의 입구에는 나가는 길대신에 또다시 공사물 푯말들로 북적거렸다. 한두 개만 세워놔도 될 텐데 수십 개를 세워놓은 것을 보니 은근히 약이 올랐다.


하지만 당장 도로교통센터에 항의하는 것보다는 경제학 시험이 중요했다. 일단 서둘러서 다른 길을 찾아서 나가야 했다. 그러나 또다시 나타난 길은  엉뚱한 곳이었고 무심코 연료 게이지를 봤더니 눈금의 바늘은 바닥을 가리키고 있었다.



너무 이른 아침이라 주유소도 아직 문을 열지 않았을까 봐 마음이 초조했다. 하지만 힘들게 찾아낸 주유소에는 다행스럽게도 노인 한 분이 주유기 옆에서 뒷짐을 진 채 먼산을 바라보고 계셨다.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가득 채워달라고 말씀드렸다.


하지만 계산을 하려고 보니 주머니 속이 허전했다. 지갑을 집에 두고 온 것이다. 기름을 다시 뺄 수도 없는 노릇이고 굉장히 난감했다.

지금 같으면 폰으로 결제하거나 계좌이체를 하면 되겠지만 이때는 아직 폴더폰을 쓰던 시절이었다.



- 어르신. 다음에 가져다 드리면 안 되나요?

- 안되지. 내가 여기 사장도 아니고 보다시피 난 그냥 알바라네.

- 지갑을 깜박 잊고 와서요.

- 그럼 차를 두고 다녀오시게.

- 지금 어디 좀 급히 가야 할 곳이 있어서요.

- 그럼 뛰어서 가셔야겠군.



험악한 주유소 마크가 그려진 유니폼을 입으신 어르신께서는 나를 차에서 끌어내실 듯한 눈빛으로 다가오셨다.


나는 황급히 두 손을 들어 항복 비슷한 사인을 보낸 후 전화번호 목록을 뒤져서 친구들에게 연락을 해보았다. 하지만 너무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전화를 받는 녀석이 없었다. 나는 노인에게 다시 한번 사정을 해 보았지만 그분은 경찰을 부르신다며 호통을 치셨다.


할 수 없이 전화번호부를 뒤지고 또 뒤진 끝에 결국 한 사람이 나왔다. 헤어진 여자 친구였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전화를 걸었고, 얼음장같이 차가운 목소리의 그녀는 돈을 이체해 줄 테니 다시는 전화하지 말라고 말한 뒤 내 대답을 듣기 전에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리고 잠시 후 다시 전화를 하더니, 혹시 다시 전화할 경우 사람을 사서 내 인생을 끝장내버리겠다고 위협하며 다짐을 받았다.






나는 독이 든 기름을 넣은 차에 다시 시동을 걸어보았다. 역시 시동이 잘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시험 시작 시간은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식은땀을 흘리며 한참을 끙끙거린 후에야 간신히 시동이 걸리고 출발할 수 있었다. 가는 길에 정확히 열다섯 개의 과속 방치턱을 과속으로 넘었다. 차 바닥에 이런저런 문신이 새겨지고 있었다.


나는 차가 멈추지 않길 간절하게 기도하며 떨리는 다리로 엑셀레이터를 밟고 또 밟았다. 라디오에서는 스티비 원더의 레이틀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확실히 간절함이 더 해졌다



마침내 도착한 학교의 주차장은 예상대로 더 이상 찰 수 없을 정도로 꽉 차있었다. 온 세상이 나를 저주하는 기분이었다.

나는 주차장을 세 바퀴 정도 돌다가 이중 주차된 차들 사이에 간신히 차를 구겨 넣고 교실을 향해 달려갔다.



시작시간이 2초 정도 지난 뒤에 도착한 나를 바라보던 시험감독관은 여덟 번 정도 망설인 끝에 나를 교실로 들여보내 주었다.


고장 난 철제 의자가 나를 넘어트리려 했지만 필사적으로 버텨서 겨우 넘어지지 않고 중심을 잡았다.

그리고 우주공간처럼 조용한 교실의 공기 속에서 끼익 거리는 쇳소리를 크게 내며 의자를 바꿔야 했다. 아무도 쳐다보지 않았지만 침묵이란 몽둥이로 온몸을 두들겨 맞는 느낌이었다.



경제학 시험은 하늘이 무너질 만큼 엉망이었다. 나는 진땀을 빼며 한 문제 한 문제를 쥐어짜 낼 수밖에 없었다.

또한 앞자리에는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 여학생이 한 명 우아하게 앉아있었다.


나는 온 세상과 정면으로 대치해서 전면전을 치르는 듯했다. 완전 경쟁 시장에서의 효용 함수를 응용해야만 했고, 어떻게 하면 그녀의 연락처를 알아낼 수 있을지 고민해야 했다.

두 가지 어려운 문제를 풀어야 하는 건 둘째 치고, 어떤 것이 더 중요한 것인지 궁금해지는 머릿속이 너무나 복잡했다.



토끼는 거북이보다 월등하게 달리기 속도가 빠르지만 어찌하다 보면 거북이에게 추월당하기 십상이다. 이는 토끼가 거북이에 비해 게으르다거나 모든 변수의 영향을 합한 총체적인 계산을 못한다거나 또는 불가항력적인 변수를 계산하지 못해서가 아니다. 물론 머리가 멍청해서도 아니다.


토끼가 거북이보다 속도가 빠른 것은 토끼 자신이 노력해서 만든 능력이 아닌 단지 신체적인 우위에 의한 것이다. 무의식 중에 토끼는 불공적인 경쟁에 회의를 느끼고 비관하게 된다. 이것은 토끼에게 정신적인 쇼크로써 신체적인 결함을 극복해서 토끼와 승부하려는 거북이에 비해 토끼를 나약하게 만들게 된다. 문제는 이 사실을 토끼가 정확히 인지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토끼는 혼돈에 빠지게 된다.


바로 이 혼돈의 빠진 토끼와 같은 모습으로 끙끙거리다 보니 어느새 시험이 끝났다.






답안지를 제출하자마자 나는 쓰러질 것만 같은 몸뚱이와 멀어져 가는 정신줄을 간신히 잡고 고 있었다. 그때 뒤에서 누가 어깨를 툭툭 치며 말을 걸었다.


- 오랜만이네 시험은 잘 봤고?

- 지금 말할 힘이 없으니까 말 시키지 말자고

- 그래 그럼 밥이나 먹으러 갈까?

- 그럽시다


오랜만에 시험장에서 만난 친구 녀석이었다. 웬만한 연예인보다 잘생겨서 인기가 하늘을 찌르다 못해 우주에 닿아서 우리는 녀석을 우주인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녀석은 역시 앞자리의 그녀도 알고 있었다.


- 어? 너도 오랜만이네 지금 밥 먹으러 가려는데 같이 갈래?

- 네 좋아요 오빠!


그렇게 셋이 건물을 나서자마자 녀석은 전화를 받더니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 아.. 저기 나 지금 급하게 가봐야 되는데 그냥 둘이 밥 먹으러 갈래? 미안 쏘리 베리 머치

- 그게 난 괜찮긴 한데 이분이 불편하지 않을까

- 전 괜찮아요 밥 먹으러 가요!


나는 행복한 표정을 감추기 위해 휴대폰을 꺼내서 화면을 보았다. 부재중 전화 1통이 있었다. 헤어진 여자 친구의 번호였다. 앞서가던 그녀가 뒤돌아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휴대폰을 가방에 집어넣으며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 시험이 너무 어려웠어요. 맛있는 것을 먹고 신나게 놀면 좋겠어요. 그렇죠?


전신에서 매력을 발산중인 그녀는 뭐라 표현할 수 없는 새로운 차원의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매력적인 그녀와의 식사는 오늘 하루의 불행을 모두 없던 일로 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예전에 봐 두었던 근처의 깔끔한 식당에 들어가서 전골요리를 주문했다. 우리는 즐거운 이야기를 나누며 사이좋게 전골을 나눠먹었다. 의외로 전골요리는 깜짝 놀랄 만큼 맛이 있었고 그제야 가격표를 보니 꽤나 비싼 식당이었다. 그리고 나는 지갑이 없었다.


지갑이 없다?!


지갑이 없다. 순간 나는 다리 힘이 풀려서 주저앉을 뻔했다. 처음 본 여학생을 값비싼 식당으로 데려와 놓고 계산을 하도록 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나는 어지러워서 기절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정신을 좀 차리고 보니 사실 꼭 내가 음식값을 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다음번에 살 수도 있는 것이다. 마음을 가다듬고 그녀에게 사정을 이야기했다.



그녀는 자기가 먼저 돈을 내고 나갈 테니 남아서 나머지 전골을 전부 위장에 처넣고 집에 돌아가서 조용히 TV나 보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쾅하는 소리를 내며 가게문을 닫고 나가버렸다. 그리고 나는 순순히 남은 전골요리를 먹기로 했다. 전골에서 매캐한 맛이 났다.






집으로 돌아가니 집 앞에는 헤어진 여자 친구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당장 빌려준 돈을 내놓으라며 소리를 질렀다. 돈이 없다고 하자 복부에 펀치가 들어왔다. 다이어트한다고 복싱체육관에 등록해 준 기억이 났다. 그동안 꾸준히 다닌 것 같았다.



거짓말하는 게 아니고 지갑을 집에 두고 가서 오늘 하루 종일 길 잃은 강아지처럼 고생이 많았다고 정말 힘든 하루였다고 나는 투덜거리면서 집에 올라가서 돈을 줄 테니까 잠깐만 집으로 들어오라고 자연스럽게 말하고 서둘러서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그리고 창문을 통해 그녀를 바라보았다.



한 겨울이었지만 대낮이라 그런지 따사로운 햇살이 쨍하게 내리쬐었다. 한참을 망설이던 그녀는 대문을 지나 계단을 올라오기 시작했다.



이 날은 내가 기억하는 아주 멋진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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