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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기 난동 인질 사건

전쟁의 그림자, 강제적 공간의 우정

by 더웨이

인질을 위로한 동기

빵, 빵, 빵 M16 총소리가 났다. 총구가 우리를 향했다. 1976년, 20대 초반 나는 그렇게 죽음과 마주했다. 술에 취한 하사가 실탄을 장전한 총을 들고 내무반에 난입했다. 십여 명의 전우들이 순식간에 인질이 되었다.


"다 죽여버리겠다. 0 대위 불러와, 0 대위 오라고 해!" 하사가 실탄을 발사하며 고함쳤다. 내무반 바닥에 총을 쐈다. 콘크리트 파편이 내 얼굴에 튀었고, 총알 맞은 줄 알았다. 모두 벌벌 떨며 새하얗게 질렸다. 그는 창문 쪽으로도 총을 쏘며 외부 접근을 차단했다. 이대로 죽는 것 같았다.


우리는 꼼짝할 수 없이 인질로 잡힌 채 내무반에 갇혔다. 밖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랐다. 1시간 대치하던 중 잠시 그 하사가 방심했다. 그때 한 중사가 뒤에서 문을 밀치고 들어왔다. 하사를 뒤에서 덮쳤다. 총이 바닥에 떨어졌다. 둘이 몸싸움이 벌어지는 사이 인질 몇 명은 빠져나왔다.


나도 그때 탈출했다. 나는 영내 장교숙소로 안내되었고 장교들이 내무반 상황을 물었다. 잡혀있는 인질들과 내부 상황을 알려 줬다. 동기들이 어깨에 담요를 덮어주고 내 등을 두드렸다. "이제 괜찮아, 자 물 마셔." 극한 상황에서 누가 친구인지 알 수 있었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 전우애와 우정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탈출 못한 인질들이 잡혀 있었고 사단 사령부에서 저격병이 동원됐다. 부대장 소령은 핸드 마이크로 계속 설득했다. "0 하사, 0 대위와 만나게 해 주겠다. 억울한 일 없도록 하겠다." 3시간 대치하던 중 하사는 자수했다. 나중에 그는 군 수사와 군사재판을 받았다. 징역형이 선고되어 국군교도소에 수감되었다.


전쟁 전야

1976년 8월 18일 오전,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서 도끼 만행 사건이 발생했다. 경비구역 내 미루나무 가지치기 작업을 하던 미군과 한국군을 북한군 삼십여 명이 도끼와 몽둥이로 기습 공격했다. 미군 장교 두 명이 도끼로 살해되었다. 한국군과 유엔군 병력 아홉 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미국은 데프콘-3 전시준비태세로 돌입했고, 해군 7함대 주력 항공모함 미드웨이와 해병대를 한반도에 파견했다. 한국 전군에 비상이 걸렸고 순식간에 전쟁 전야가 되었다. 실탄이 지급되고 군화를 신고 옷을 입은 상태로 잤다. 언제든지 전쟁에 투입될 준비가 되었다. 전쟁이라는 단어를 실감했다.


달빛 아래 어른이 되다

전쟁 전야 기관총(50 구경) 초소 보초를 서던 날 밤, 달빛 아래에서 죽음을 생각했다. '내일 전쟁이 나면 정말 죽을 수도 있겠구나.' 공포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당시에 군대는 "그냥 버티면 제대하는 곳"이었다. 갑자기 목숨을 걸어야 하는 현실이 되었다. 부모님과 형제자매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친구들 생각도 났다. '


‘이제 다시는 그들을 볼 수 없겠구나.' 그 순간 삶에서 소중한 것은 가족과 친구라는 것을 깨 달았다.

전쟁의 공포 속에서 동기들과 더 가까워졌다. 그리고 어린 청년을 단숨에 어른으로 만들어버렸다.


이 사건은 한반도 최대 위기로 실제 전쟁 발발 직전의 수준까지 긴장도를 끌어올렸다. 긴장 기간은 닷새간 계속되었다. 결국 북한의 김일성이 유엔군 사령관에게 공식 사과문을 전달하여 한반도의 위기가 일단락되었다.


일탈과 특별한 우정

병기 부대 내 삼십 명의 동기들 중에서 특히 네 명은 각별하게 친했다. 차량 창고장 S병장, 총포 창고장 U병장, 위병조장 K병장, 그리고 관리부 서무계 나. 우리는 고참이 되어 때로는 군대 규율의 경계를 넘나들었다. 근처 마을 추석날 노래자랑에 참가했다. S병장은 '천리 먼 길'을 불러 3등을 했다. 우리는 저녁에 창고나 관리부 사무실에서 자주 몰래 만났다.


외부에서 구해온 음식과 술을 먹고 마셨다. 걸리면 영창 가는 일이었다. 이런 일탈들이 우리를 더 가깝게 만들었다. 비밀을 공유한다는 것은 신뢰였다. '잘못되면 모두 처벌받는다. 그래도 함께하며' 위험을 나눠 갖는 것이 우정의 출발점이었다. 젊은 날의 무모함 속에서도 우리는 서로를 지켜주려 했다.


그 보호가 진정한 우정이었고, 의리였으며 지켜야 할 약속이었다. 제대할 때 우리는 전역을 기념하여 기념패를 만들어 서로에게 주었다. 그 기념패에는 '사랑을 원리로, 진리를 목표로, 질서를 생활로'라는 내용이 새겨져 있었다. 이것은 폐쇄된 공간과 시간 속에서 깨달은 삶의 원칙이었다. 일탈을 했지만 지금 생각해도 특별한 전역 기념패였다.


산천은 변했어도

제대 후에도 네 친구는 계속 만났다. 각자 사업가, 직장인으로 다른 길을 걸었지만 우정은 이어졌다.

결혼식에서 서로를 축하해 주었다. 네 가족이 해외여행도 함께했다. 자녀들 결혼식, 부모님 장례식까지 기쁨과 슬픔을 모두 나눴다. 일반적으로 ‘군대 가서 고생만 하고 와서 군대 쪽으로는 오줌도 안 눈다'고들 한다. 우리는 달랐다. 군대에서 인생 최고의 친구들을 만났다.


우리 중에 모든 친구들이 좋아하며 리더십이 특별한 친구가 있다. 긍정적이고 진취적이며 어려운 친구들을 돌보고 배려한다. 바쁜 중에도 먼저 연락하고 친구들을 챙긴다. 솔선수범하는 친구다. 그 친구 때문에 우정이 지속될 수 있었다. 리더 한 사람이 관계를 이끌며 우정을 이끌어온 것이다.


3년 전, 친구들과 옛 부대를 찾아갔다. 부대는 이전해서 없었다. 유격훈련받던 지역은 유원지가 되었고, 휴식하던 계곡에 카페와 음식점이 들어서 있었다. 변한 것은 주위 환경뿐이었다. 세월이 모든 것을 바꾼다. 부대도 사라지고 산천도 변했다. 그곳에서 우정은 세월을 거슬러 오래된 과거에 도착했다.


강제적 공간의 우정

요즘 세대는 SNS에서 수천, 수만 명의 '친구'와 손쉽게 연결된다. 그러나 우리의 친구들은 총구 앞의 공포와 전쟁의 위기, 금지된 일탈을 함께 겪으며 군대라는 척박한 환경 속에서 만났다. 억압과 두려움 속에서 싹튼 신뢰는 깊게 뿌리를 내렸고, 강제적 공간도, 전쟁의 그림자도, 인질 사건의 극한 상황조차도 우정을 키우는 터전이 되었다.


백발의 마지막 장

반세기가 지난 지금, 그 우정은 돈으로 살 수 없는 인생 최고의 자산이 되었다. 오랜 동행은 단순히 시간을 함께 보낸 것이 아니다. 서로의 성장과 발전을 도와주며 살아왔다. 각기 다른 분야에서 일했지만 인생에 좋은 영향을 주고받았다. 반세기 전 군복을 입었던 청년들은 이제 백발이 되어 인생의 마지막 장을 써 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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