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의 바람은 사모곡이다.
그 겨울의 그 선창, 어머니를 기다리던 날
1999년 1월 말, 강화군 외포리의 겨울은 유난히 차가웠다. 북서풍은 매섭게 불어왔고, 썰물은 갯벌의 속살을 드러냈다. 짙은 회색 얼음 뻘은 차갑게 빛났다. 멀리 갯바위 뒤로 카페리 한 척이 다가왔다. 그 배 안에 어머니가 타고 계셨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지 14년. 그날 이후 어머니는 혼자 섬에 사셨다. “도시는 공기가 나빠서 못 가겠다.” “교회 식구들이 다 여기 있는데, 내가 어디로 가겠냐. 여기 둘째 누이도 있으니 걱정 말아라." 그 말들은 아들 걱정시키지 않으려는 배려였다. 외로움을 숨긴 사랑의 말이었다.
내 한 몸 움직이면 된다. 자식들이 불편하다고, 추석이나 구정 때마다 자식들을 위하여 배를 타고 인천에 오시던 어머니. 얼굴에 세월주름이 깊었고, 손끝은 마디마다 굳은살이 있었다. 날마다 자식의 이름을 부르며 새벽 기도하시던 분이었다.
그날 선창에서 의사의 말이 떠올랐다. “자궁경부암이 많이 진행되었습니다. 수술은 어렵습니다. 왜 이렇게 되도록 두셨습니까.” 그 말은 내 가슴에 비수로 꽂혔다. 어머니는 아픈 것도 참으셨구나. 자식 걱정할까 봐, 혼자 견디셨구나. 하늘도, 바다도, 내 죄책감도 얼어붙었다.
가난, 신앙의 이름으로
어머니는 1922년 9월, 주문도 봉구지산 아래 초가집에서 태어나셨다. 곱슬머리에 하얀 피부, 마을의 귀염둥이였다. 기독교 감리교 선교사 헷세 부인이 입양을 요청했지만 외조부의 반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어머니는 신앙으로 자라나셨다. 외할머니는 신유의 은사를 가진 여인이었다. 마을의 병든 자를 위해 기도하면 낫고, 자식의 앞날을 위해 밤새 무릎을 꿇으셨다고 했다. 그 믿음이 어머니에게 이어졌다.
어머니는 열여덟 살에 아버지와 혼인했다. 아버지는 일찍 부모를 잃고 동생들을 키웠다. 그러나 막내 동생은 일제 강점기 강제 징병으로 태평양 전투에서 전사했다.
아버지는 동생 유해를 안고 동네를 울며 다녔다고 했다. 똑똑하여 장래가 촉망되던 동생의 전사였다. 아버지는 동생의 죽음으로 하나님을 원망했다.
동생 죽은 충격에 아버지는 술을 마셨다. “어머님의 손을 놓고 돌아설 때에~” 노래를 부르며 눈물 흘리셨다. 이런 아버지의 한과 고난을 어머니는 신앙으로 이기셨다.
“남에게 해 끼치지 말고 착하게 살아라.” 겸손하게 살아라 “ 그 말씀을 자식들에 하셨다. “올려다보고는 못 산다. 주제를 알아야지.” 평범한 말이지만 옳은 말씀이었다.
가난은 늘 따라다녔다. 그러나 어머니는 지혜롭게 7남매를 키웠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 아픈 손가락이 있지만 어쩌겠냐". 그 말씀 뒤에는 언제나 기도가 있었다.
주일학교 성탄절, 나는 초등학생 대표로 인사를 해야 했다. 넥타이가 없자 어머니는 붉은 이불보를 잘라 넥타이를 만들어 주셨다. 그 붉은 넥타이는 나에게 천국 리본 같았다. 그것이 어머니의 지혜이고 사랑이었다.
어머니는 겨울이면 발뒤꿈치가 갈라져 피가 났다. 그래도 웃으며 말씀하셨다. “지(자기) 살 궁리 지(자기)가 다 한다. 걱정 말아라” 그분은 고통을 감추며 믿음으로 견디셨다.
추석, 마지막 당부의 시간
1999년 9월 23일, 추석날. 어머니는 고향 둘째 누님 댁에 누워 계셨다. 자식들을 불러 하나하나 당부하셨다. “나 죽으면 장례는 개신교식으로 해라. 내 찬송가 뒤에 써놨다.”
“믿음으로 살아라. 올바르고 겸손하게 살아라.” “하나님 잘 믿어야 복 받고 산다.” “돈 벌어도 죄짓지 말아라. 내가 죽어서도 기도하마.” 그 말은 축복이자 유언이었다. 입술이 마르기 전까지, 경청은 계속되었다.
14일 뒤, 10월 7일. 찬송 소리 가운데 어머니는 하나님 품에 안기셨다. 그날 나는 싱가포르 출장 중이었다. 전화기 너머로 들려온 둘째 누님의 목소리, “엄마가 찬송 부르는 중에 편히 가셨어.” 그 한마디에 나는 주저앉았다. 나는 임종도 못한 불효자였다. 아버지 임종 때 같이.
세월이 흘러도, 어머니의 기도는 내 곁에 있다
어머니가 하늘나라 가신지 스물여섯 해다. 이제 7남매 모두 머리가 희끗희끗하다. 85세 큰 누님은 통화를 하면 “엄마가 보고 싶어.”라며 우신다. 그 목소리는 여전히 어린아이 같다.
어머니의 열다섯 명의 손주도 각자의 자리에서 살아간다. 대부분 결혼했고, 손주가 손주를 보고, 제 인생의 길을 걷고 있다. 누군가는 병중에 있고, 누군가는 멀리 타국에 살지만 모두 어머니의 기도 안에 있다.
그 기도가 우리 집안을 지탱하고 있다. 나는 가끔 겨울 그 선창을 떠올린다. 그곳엔 여전히 어머니의 그림자가 서 있다. 찬 바람 속에 그분의 음성이 들린다. “얘야, 하나님께 맡겨라. 세상 잠시 사는 거다.” 사랑하다 오너라.” 그 말씀은 내 삶의 북소리다. 내가 넘어질 때마다, 주저앉을 때마다 그 음성이 나를 일으킨다.
붉은 넥타이와 이어지는 기도
붉은 이불보로 만든 넥타이를 매던 아이가 이제 노년의 아버지가 되었다. 손녀가 태어나고 신앙으로 자라나고 있다. 그 모습은, 어머니의 기도가 세대로 이어지고 있다는 증거다.
어머니의 신앙은 말이 아니라 삶이었다. 기도는 언어가 아니라 사랑의 실천이었다. 그 믿음은 오늘도 자식들 안에서 자라나 후손에게 이어진다.
세상은 변하고 사람은 늙어도 어머니의 기도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다. 그 기도가 내 삶의 등불이 되었고, 나는 그 빛으로 오늘도 걸어간다.
찬 겨울의 바다, 갯바위와 카페리, 그곳에 어머니가 서 계신다. "그 눈빛이 내 마음을 녹인다. 나는 오늘도 그 기도 속에서 살아간다. 그리고 사모곡은 끝나지 않는다."
어머니, 사랑합니다.
당신의 기도가 내 생의 숨결이었습니다.
그곳의 바람은 지금도 내 안에서 사모곡이 되어 흐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