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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나연 Sep 16. 2019

노래와 감정, 스티븐 유니버스의 매력

스티븐 유니버스: 더 무비 리뷰

<스티븐 유니버스: 더 무비>가 공개된지 2주가 지났다. 발매 즉시 아이튠즈로 구매해서 지금껏 5번 넘게 시청했다. 재미와 감동 두 마리 토끼를 잡은 그야말로 '스유'다운 신작 명작이었다. 살펴보니 로튼토마토에서는 6개평가로 100퍼센트 신선도를 기록했고 IMDb에서는 1천표로 별점 8.3개를 기록했다. 비단 내 말을 믿지 않더라도 완성도 하나는 보장됐다고 말할 수 있겠다. 헌데 트위터를 살펴보니 나의 감상과 상당히 다른 평이 많더라. 특히 작품 결말부에 대한 여론이 그렇다. 나 같은 감상을 한 사람이 또 있을까 하여 몇 자 남겨본다.


<스티븐 유니버스>의 전개를 생각해보면 시작은 미약하나 끝은 창대하리라 라는 말이 어울린다. 아이스크림을 먹는 게 마냥 신났던 우리 꼬맹이 스티븐은 어느덧 우주 식민주의 제국과 맞서 승리해내고 우주에 평화를 불러온 자유의 용사로 자라났다. 마법의 힘으로 가득한 젬 사회의 비밀을 파헤치는 과정 역시 이 만화의 별미이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스티븐 유니버스를 가장 특별하게 만들어준 요소는 바로 노래와 감정이다.


뮤지컬에서 춤과 노래는 등장인물이 도저히 말로는 못다 표현할 수 없을만큼 압도적인 감정들을 표출하는 고차원의 수단이다. 스티븐이 1화에서 처음 부르는 노래를 생각해보자. (크리스털 젬의 처지를 은유하는 '우주의 난민' 등의 가사도 인상적이지만) 아이스크림이 단종된 것에 앞서 스티븐을 위해 잔뜩 사놓은 친구들의 상냥한 마음에 감화되어, 그리고 아이스크림의 훌륭한 맛에 순수하게 기쁨을 느끼며 부른 그 노래는 처음으로 스티븐의 마법적 젬 파워를 이끌어내는 트리거로 작용했다. 시리즈 첫시작부터 노래와 캐릭터의 감정이 결코 별개가 아니라는 것이 잘 드러난다.


<더 무비> 보컬 수록곡

이번 무비에 삽입된 보컬 노래는 십수곡이 넘는다. 1시간 21분의 러닝타임이 TV에피소드 4화 분량이고, 1화에 대략 1~2곡의 노래가 들어간다는 점을 생각하면 평소의 스타일보다 훨씬 많이 삽입된 편임을 알 수 있다. 서사 자체도 무비의 신캐 '스피넬'과 함께 오리지널 크리스털젬 4인방(A팀)을 중심으로 여러 서브플롯을 풀어내고 있다. 4인의 캐릭터 디벨롭먼트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질 정도이니 말 다했다. 이처럼 러닝타임에 비해 상당히 볼륨있는 서사를 담을 수 있었던 건, 노래가 인물간의 논리적 대화를 압축적으로 전달해주는 경제적인 역할도 겸했던 덕분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혹자는 '전개가 너무 빠르게 휙휙 넘어간다' 라는 인상도 받았던 듯한데, 충분히 그럴수 있다고 본다. 서사 진행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곡들을 우선적으로 선발했을 때 아래 세 가지 톤으로 나눌 수 있다.


1. The Tale of Steven : 다이아 3인방의 디즈니 클래식풍 '이전이야기' 요약

2. Let Us Adore You : 다이아 3인방

3. Happily Ever After : 크리스털 젬 전원 합창곡

4. Other Friends : 스피넬 첫등장

5. system/BOOT. PearlFinal (3) .Info : 디폴트 설정이 된 A팀을 소개하는 펄

6. Who We Are : 크리스털 젬 B팀과 스티븐

7. Isn't It Love? : 가넷의 솔로

8. No Matter What : 스티븐과 애머티스트의 듀엣

9. Disobedient : 새이디 킬러와 용의자들, 피쳐링 애머티스트

10. Independent Together : 스테그(스티븐&그렉 퓨전), 펄, 오팔 합창

11. Drift Away : 스피넬 진상을 밝히다

12. Found : 스티븐과 스피넬의 듀엣

13. True Kinda Love : 가넷, 피쳐링 스티븐

14. Change : 스티븐의 솔로

15. Let Us Adore You (Reprise) : 다이아 3인방과 스피넬의 합창

16. Finale : 크리스털 젬 전원 합창곡


초록색 3번, 16번트랙: 크리스털 젬이 얻어낸 성취를 예찬한다. TV시리즈에서 그렇게 구르고 고생한 끝에 결국에 평화를 이룩해냈으니 스스로가 뿌듯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까지 쌓아온 서사의 깊이만큼, 그들이 성큼 성장한 만큼 자부심 넘치는 출사표다. 영화를 닫는 마지막 노래는 새로운 갈등을 해소하고 사건을 갈무리하는 기쁨을 표출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보라색 7번, 8번, 10번, 13번트랙: 스피넬에게 공격당해 홈월드의 의도대로 갓 만들어진 초기 상태로 돌아간 크리스털 젬들이 본래의 모습을 찾기 위해 애정어린 시선으로 그간의 발자취를 되짚어보는 노래들이다. 이 곡들을 통해 펄, 애머티스트, 가넷의 핵심 정체성을 알 수 있어서 더욱 의미가 깊다. 펄은 맹목과 종속, 자유와 주체성이 핵심인 캐릭터다. 애머티스트는 인격형성과정 그 자체에다가 우정 또한 테마로 볼 수 있다. 가넷은 전혀 다른 두 개체의 사랑의 현신에다가 진실이라는 주제도 최근에 추가되었다.


분홍색 4번, 11번, 12번, 14번, 15번트랙: 스피넬이 화면에 등장할때 나오는 노래는 이번 작품의 기승전결을 나누는 훌륭한 분기점이다. 평화로운 지구에 갑작스럽게 찾아와 문제를 제기하고(4번), 젬들의 본래 모습을 찾는 과정을 거친 끝에 진상을 알리고 서로를 이해하며 한차례 휴전에 응하나(11번, 12번) 결국 오해와 상처를 극복하지 못해 스티븐과 다시 싸우고(14번), 분노를 모두 쏟아낸 뒤에 밀려드는 허탈감과 후회를 안고 새로운 친구와 함께 새출발하는 것으로 희망적인 마무리를 한다(15번).


정리하자면 초록색트랙과 보라색트랙은 2013년부터 우직하게 스티븐 곁을 지켜주었던 친구들, 특히 오리지널 크리스털 젬들의 테마곡으로 함께 묶여서 그간 함께 해준 충성스런 팬들을 향한 러브레터이자 새로운 팬들을 향한 애정어린 입문가이드 기능을 한다.(필름스쿨리젝츠 Carl Broughton) 분홍색트랙에 대한 첨언은 다음 단락에서 자세히 다뤄보겠다.


너의 새 단짝친구, 스피넬이 여기 있잖아!

<더 무비>의 최고 백미는 단연 분홍색트랙, 스피넬이라는 캐릭터다. 스피넬은 홈월드의 의도대로라면 정해진 한 사람, 핑크 다이아몬드(이하 핑크)만을 위한 영원한 친구이자 놀이상대다. 스피넬의 쟁점은 이거다. 핑크는 첫번째 식민지 지구를 얻었을 때 스피넬을 떨어트려놓기 위해 '기다리기'라는 놀이를 제안한다. 결과적으로 핑크는 6천년동안 스피넬을 내버려둔 채로 까맣게 잊어버렸고, 스피넬은 뒤늦게 상황을 파악하고 배신감에 '흑화'한다.

스피넬은 디즈니 클래식 만화영화 캐릭터에 영감 받아 팔다리와 표정을 자유자재로 변화시킨다.

젬이라는 종족이 홈월드 제국의 통치 하에 얼마나 상처받았는지 말하자면 끝도 없다. <스티븐 유니버스>에 등장하는 젬들은 모두 저마다의 고민과 슬픔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스피넬은 그 처사가 별스럽도록 잔인하고 처참하다. 6천년의 한(恨)은 극중에서 다채롭게 표현된다. 광기 어린 증오, 치가 떨리는 분노, 갈 곳 잃은 원망, 공허한 슬픔... 영혼을 울리는 스피넬의 절규에 공명해 몸서리 치노라면, '이...이거 어린이 만화영화 맞냐?' 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 <스티븐 유니버스>는 어린이 만화영화의 포맷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남녀노소 모든 세대가 공감할 수 있는 백천가지 감정들을 다루고 있기에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작품이다.


스피넬의 최초 설정이 한없이 천진하고 장난스러운 유년의 기쁨을 담아내고 있기에 더욱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가 핑크에게 배반당해 상처받은 사건은, 본질만 따져본다면 사실상 누구나 세상에 태어나 타인과 교류하며 마찰하며 겪을 불가피한 시련이다. 이런 시각으로 본다면 스피넬은 유아기와 청소년기 어드메에 위치한 보통의 아이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겠다.


<더 무비>가 스피넬의 분노를 묘사하는 방식은 우리--특히 한국사회의 어른들--가 일상에서 아이들을 대하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는 점에서 의의를 가진다. 돌이켜보라. 우리 어른들이 아이들의 감정을 얼마나 얕잡아 보는지. 아이들이 느끼는 희로애락을 단순히 '철없고' '미숙한' 것으로 하찮게 치부하지 않는가? 아이가 복잡한 심정을 참지 못하고 눈물을 터트리면 아이가 왜 그러는지 이해하기보다 "저러다 말겠지"하고 방치하거나 무작정 "그만두지 못해"라고 종용하기 바쁘다. 특히 아이들의 분노에 관해서는 간과하다마다, 심지어는 "어디 어른 앞에서 화를 내?!"라고 야단내고 멸시하기 일쑤다.


아이의 감정보다 어른의 기분과 체면이 더 중요시여겨지는 우리 사회에, <더 무비>는 당당히 반론한다. 아이들도 분노라는 감정을 느낄 수 있다고. 아이들도 얼마든지 화를 낼 수 있다고. 그건 아주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라고. 많은 시청자들이 스피넬에게 공감하는 것은 극의 시선이 스피넬의 분노에 당위성을 확보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무려 6천년동안 방치당하면 누구라도 정신을 놓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스피넬의 파괴적인 분노는 바깥으로--배반자 핑크가 사랑했던 행성 지구와 배반자 핑크의 아들 스티븐-- 향하다가 결국 내면으로 향한다. 싸움 후반부에 스피넬은 자신의 머리를 주먹으로 때리는 등 자해를 하고 "Now I'm not good at all!"이라 절규하며 자아혐오감, 자기모멸감을 표현해낸다.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십분 이해는 되나 결코 건강하지 못한 대처방법임에 틀림없다. 이에 <더 무비>는 우리들의 영웅 스티븐을 통해 거칠고 격렬한 분노의 감정을 성숙하게 소화할 수 있도록 인도해준다.

나를 죽이려는 사람조차 두 팔 벌려 품에 안아줄 수 있다는 건 그만큼 강인하다는 뜻이다

스티븐은 지금까지 우리가 봐왔던 남성영웅상과 사뭇 다른 캐릭터다. (팝 컬쳐 디텍티브 비디오에세이) 그의 마법 능력은 공격이 아닌 방어에 치중돼있고, 그는 온 우주를 호령하는 압제자 다이아몬드와 결판을 낼 때조차 싸움에 앞서 대화를 통해 갈등을 풀기를 원했던 부드러운 성품의 소유자다. 스티븐을 과거에 죽이려 들었던 B팀(라피스라줄리, 페리도트, 비스무트)을 진실한 친구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은 스티븐의 상냥한 마음씨 덕분이었다. 스티븐은 자신이 사랑하는 모든것을 빼앗으려는 스피넬에게마저 끝까지 대화를 간청하며 스피넬의 심정을 이해해보려고 노력하지 않던가. 영웅으로서 스티븐의 최고 강점은 바로 이와 같은 연민에 있다.

클라이막스에서 싸움 끝에 두 사람이 진정한 이해를 이루었을 때 둘의 얼굴이 거울을 보듯 비슷한 모양새로 그려져있다.
스티븐: 내 말을 들어봐, 스피넬. 나 이해해. 그 모든 일을 겪었다니, 너 정말 무척 괴로웠겠구나.
스피넬: 아니, 아니야. 넌 이해 못해. 내가 이렇게 느끼는 걸 네가 바꿀 수 있을 줄 알고? (You can't change the way I feel!)
스티븐: 그래 맞아! 그건 너만이 가능한 일이야. (That's right! Only you can.)
스티븐: ♪너는 다른 방식을 시도할 수 있어, 네가 올바르게 바꿀 수 있어♪
스티븐: ♪너는 더 나아지게 만들 수 있어, 우리는 싸우지 않아도 돼♪

정리하자면 <더 무비>는 스피넬과 스티븐의 갈등과 화해를 통해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있다. 화낼 일이 있다면 화내는 게 당연하다고. 다만 그 분노를 파괴적인 행위로 풀기보다, 나를 이해해주는 친구와의 소통을 통해 나 스스로의 의지로 극복해나가는 게 마땅하다고. 무엇보다 그 과정에 '나 자신'이 중심에 있어야 한다고.

S04E04 Mindful Education / S04E17 Storm in The Room

같은 맥락에서 내가 역대 <스티븐 유니버스>에서 가장 좋아하는 에피소드를 꼽아보자면 바로 이 두개다. 4시즌 4화에서 스티븐과 코니는 각자가 직면하고 싶지 않아 생각하기를 피하기만 했던 트라우마들을 담담하게 대면하는 법을 배운다. 4시즌 17화는 거대한 모험 직후 어머니의 빈자리를 절감한 스티븐이 형이상학적 마법의 방에 들어가 어머니에 대한 스스로의 복잡한 감정을 마주하고 마음을 가다듬는다. 두 에피소드 모두 아이들이 주체가 되어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올바르게 소화해내는 과정을 조명하고 있다.


아 정말이지... 이 얼마나 소중한 애니메이션인가... 눈물 찔끔.



스티븐과 다이아를 위한 작은 변론

한편 글의 첫머리에서 말했듯이 <더 무비>의 결말부에 대한 여론이 나의 감상과 다르던 점을 짚어보고 싶다. 적어도 나의 타임라인에서 보기에 많은 사람들이 마지막에 영화가 스피넬을 다이아 3인방에게 보내준 선택을 두고 "스티븐이 골칫덩이 스피넬을 남한테 휙 떠넘긴 것이 아니냐?" 혹은 "다이아는 스피넬을 핑크의 대체품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냐?" 라고 해석하는듯 했다. 그런 감상이 틀렸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다. 나는 다르게 생각한다고 살며시 제안해보는 것뿐이다.

어린이의 감정 소화 과정이라는 테마에 주목해본다면 디즈니픽사 영화 <인사이드 아웃>을 함께 떠올려볼 수 있다. 오리지널 스피넬은 영화 속 '기쁨이'와 같다. '라일리'에게 벌어지는 일들을 오로지 기쁜 감정으로만 비춰보려고 하는 '기쁨이'의 모습이, 친구들과 능력을 잃고 좌절한 스티븐에게 본질적인 해결책은 없이 "네 친구 스피넬이 여기있잖아 슬퍼하지마!"라고 활발하게 장난을 거는 스피넬의 모습과 겹쳐보이지 않는가? <인사이드 아웃>의 마지막은 "슬픈 것은 나쁜 것"이라고 치부하기만 했던 통념과 달리, '슬픔이'의 렌즈를 통하면 힘겨운 사건들을 보다 의연하게 대처하고 성숙하게 소화해낼 수 있다고 말한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오리지널 스피넬의 캐릭터성은 '기쁨이'와 같이 한계를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감히 피해자인 스피넬의 잘못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비극의 원흉은 홈월드라는 사회에 있다. 홈월드는 모두가 타고난대로 정해진대로 살아야하는 절대불변의 경직된 사회였다. 이곳에서는 피라미드 가장 꼭대기에 있었던 다이아들마저도 고통받은 피해자였다.


다이아 넷 중 최약체였던 핑크 다이아몬드는 사회의 틀에 어울리지 않고 홀로 튀는 괴짜 이색인(off color)이다. 은유적으로 드러난 것만으로도 감금, 펄 강탈, 인격무시 등의 학대를 받았다. 스피넬 또한 "핑크는 홈월드에서 지내는 게 외롭고 힘들었다"라고 회상한다. 스피넬은 홈월드 사회의 입맛에 맞게 태어나, 유아라는 틀에 정체된 캐릭터였다. 따라서 핑크와 스피넬의 관계는 잠시간의 위로가 됐을 뿐 궁극적인 문제 해결과는 거리가 먼 종류의 것임이 당연하다. 태생적으로 '변화'를 원했던 이색인 핑크에게 식민지 통치라는 탈출구가 주어졌을 때, 그 자체로 홈월드 사회의 불변성을 상징하는 스피넬을 지구에 데려가는 것은 차마 불가능했으리라.


가해자인 핑크가 잘못이 없다고 말하는 것도 결코 아니다. 스피넬이 이해하는 유일한 언어인 '놀이'를 통해 스피넬을 정원에 못 박아놓고 6천년 동안 나몰라라 버려두고 제갈길을 찾아간 것은 스피넬에게 너무나도 잔인한 일이었다. 그러나 핑크 역시 학대의 피해자라는 점, 어떻게 해서든도 홈월드의 학대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필사적인 심정을 고려해줘야 한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평범한 인물들의 성격적 결함이나 사소한 실수들이 쌓이고 쌓여서 돌이킬 수 없는 커다란 재앙을 만들어내는 것이라 설명했다. 스피넬의 비극이 이에 해당한다고 본다.

나 말고도 다른 사람들도 초기화된 스피넬의 첫등장 장면에서 뭐라 형용하기 어려운 어색한 이질감을 느꼈으리라 짐작해본다. 당혹스럽기도 하지. 생판 처음 보는 사람한테 난데 없이 '나는 너의 단짝친구야~' 라고 달려드는 건 무슨 경우람? 친구라는 게 그런식으로 되는 게 아닌데.


국어사전에서 '친구'를 찾아보면 그 뜻으로 "가깝게 오래 사귄 사람"이라 나온다. 그러면 '사귀다'라는 단어의 뜻은 무얼까. "서로 얼굴을 익히고 친하게 지내다." 그렇다. 친구라는 단어는 서로라는 말이 핵심이다.

서로(부사) 1. 관계를 이루는 둘 이상의 대상 사이에서, 각각 그 상대에 대하여. 또는 쌍방이 번갈아서.

결국 스피넬을 통해 알 수 있는 교훈은, 모두가 선의를 갖고 최선을 다해 행동하더라도 상처받는 사람은 생기는 법이며, 인간관계라는 것은 상호 간의 교류와 유대를 통해 형성해야 한다는 것 아닐까? 스피넬 또한 홈월드의 일방적인 방식은 피차 좋은 결과를 만들어내지 못하며, 우정이란 노력을 거쳐 가꾸어 나가야 되는 것임을 마지막에 가서 깨닫는다.


이쯤에서 해석1을 가져와볼까. "스티븐이 골칫덩이 스피넬을 남한테 휙 떠넘긴 것이 아니냐?" 왜 스피넬은 유사한 사례인 B팀처럼 지구에 남아 친구로 지낼 수 없었던 걸까? 작품 외적으로 생각해봤을 때 <더 무비>에 있었던 일들은 <더 무비> 안에서 종결되어야만 한다는건 얼핏 당연한 말이다. 미처 <더 무비>의 존재를 몰랐거나 여건이 안 되어서 보지 못한  팬이 TV시리즈를 정주행할 때 갑작스럽게 이전에는 없었던 캐릭터가 뚱딴지처럼 튀어나와 다뤄지는 건, TV시리즈만 본 시청자 입장에서 다소 당혹스러울 수 있으니까.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제작진의 사정이고. 순수하게 <더 무비> 작내에서 다뤄지는 개연성을 따져보자.

"문제의 원인을 제공한 나를 바로 옆에 두고서, 어떻게 다 잊고 넘어가겠다는 거야?"

스티븐은 스피넬에게 새로운 삶의 터전이자 포용의 장소인 지구에서 새출발을 하자고 제안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실수가 있었다. (스티븐도 결국 성장을 해나가는 과정중에 있는 아이이기 때문에.) 스피넬이 친구들을 죽이고 행성을 파괴하려고 했던 일 따위 없던 일로 잊어버리자고 경솔하게 말한 것이다.


이에 대한 스피넬의 반응은 부정적이다. "내가 너희들을 죽이려고 한 장본인인데, 나를 곁에 두면 나라는 존재 자체가 너희들이 받은 상처를 계속 상기시켜줄 텐데?" 스티븐에게 하는 말이지만, 스피넬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핑크가 사랑한 지구에서, 핑크가 사랑한 친구들(other friends) 곁에 있으면 나는 핑크가 나에게 한 몹쓸짓이 계속 떠오르게 될 텐데?" 라는 식이다. 이런 심리라면 직후 스피넬이 핑크에게 버림받은 상처가 되살아나는 PTSD 반응을 보인 것이 당연하다.


이는 결국 핑크가 스피넬을 두고 떠날 수 밖에 없었던 이유와 연결된다. 위에서 말했듯이, 핑크에게 스피넬은 학대의 주체인 홈월드의 불변성을 상징하는 인물이었다. 스피넬이 "바보 같이 노래 좀 부른다고 모든 게 다 나아지는 줄 알아?!"라고 절규했던 바와 같이, 아무리 우정과 긍정의 힘을 설파한다고 해도 현실적인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스티븐에게 크리스털 젬은 둘도 없이 소중한 친구들이다. 그들을 원래의 상태로 되돌려놓기 위해서는 퍼즐 조각처럼, 그들이 그간 겪었던 중요한 사건들을 다시 겪게 만듦으로써 본래 나 자신이 누구인지 일깨워줘야 했다. 현재의 '나'가 독립적으로 우뚝 서려면 일련의 과거의 '경험'이 필수적으로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스티븐이, 스피넬에게는 '과거에 있었던 일을 없는 셈치자'고 말한다. 조금 부당하지 않은가. 현재 스피넬이 아무리 비틀리고 상처입은 '빌런'이라고 할지라도 그 자아를 구성하는 과거의 경험과 감정은 소중한 법이다. 다시 말하면 현재 '스피넬'이라는 자아를 구성하는 핵심 사건들--핑크에게 버림받고 배신당한 일과, 분풀이로 지구와 스티븐을 공격한 일--은 절대 빼놓을 수 없다는 소리다. 스피넬을 존중하려면 스피넬이 겪은 그 사건들 역시 존중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스티븐의 제안은 통할 수 없었고, 결국 스피넬은 지구를 떠나기로 결심한 것이다.


이상이 내가 이해한 스티븐과 스피넬의 결별 과정이다. 이걸 "스티븐이 스피넬을 남한테 떠넘겼다"라고 볼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다른 시각에선 충분히 가능할 수 있다. 생각하기 나름.)

"다이아는 스피넬을 핑크의 대체품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냐?" 사실 무엇보다 이 해석2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이 기나 긴 글을 쓰고 있었다. 아무래도 <더 무비>의 경우 짧은 러닝타임에 버거운 서사를 꾸역꾸역 넣어서 노래로써 사건을 진행시키다보니, 상대적으로 표현이 덜 되어 오해를 사는 경우도 있는 것 같다. (거듭 강조하지만 나의 시각에서 '오해'라고 보이는 것뿐이지, 다른 사람의 관점에선 아주 타당한 해석일 수 있다.)


<스유> 초반에 스티븐이 14살이고, 또 시즌 여럿을 지나오면서 극중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는 모르겠지만, <더 무비>에서 스티븐은 16살로 나온다. 직전작품 'Change Your Mind' 에피소드에서 시간적 간극이 못해도 몇 개월은 지났으리라고 추측해본다. 영화가 크리스털 젬의 성장과 스피넬과의 갈등을 다루느라 바빠서 그동안 스티븐이 어떻게 제국을 해방시켰는지, 홈월드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변화했는지, 과연 다이아들이 진심전력으로 개과천선했는지 알 수 없다는 게 아쉽다. 하지만 할 수 있는 한 최선의 묘사는 하고 있다. 스티븐이 바라는 대로 우주에 긍정적인 변화가 찾아왔다는 것을 알 수 있는 힌트들이 아주 없지는 않다는 뜻이다.


우선 시종일관 의기소침 우울하게 위축되어서 걸을 때도 얌전히 종종걸음을 걷던 블루의 펄이 이제는 키득키득 웃으며(!) 발랄하게 뛰어간다(!!). 둘째로 핑크에게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으뜸 지도자가 되기를 요구하며 제국 인민 모두의 모범이 되어야 함을 위엄있게 설파하던 다이아들이, 이제는 바닥에 바싹 누워서(!) 스티븐과 눈높이를 맞추고 있다. 셋째로 정복이 아닌 친선 교류의 목적으로 지구를 방문한 다이아들의 곁에 시중을 드는 펄이 온데간데 없다(!). 넷째로 "고작 6천년인데요 뭘, 물구나무 선채로도 한번 더 할 수 있어요"라고 실없는 장난을 치는 스피넬을 보고 옐로우가 배꼽 빠져라 폭소한다(!!!). 어떤가. 이정도면 정말 우주에 평화가 찾아왔다는 게 실감나지 않은가.


마지막 넷째 항목은 특히나 중요하다. 다이아의 등장은 곧 'Let Us Adore You'라는 삽입곡과 직결되는데, 이 노래의 가사가 문제가 되는 듯 싶다. 과연 "다이아는 스피넬을 핑크의 대체품으로 여기"고 있는 걸까?

다이아들: 우리를 따라오렴 궁전으로 가자, 네 방이 준비돼있단다(Come live with us in the palace, there's a room waiting for you)
다이아들: 자 어서, 어서, 어서, 우리가 널 아끼게 해주렴(Come on, come on, come on, just let us adore you)
다이아들: 우리도 알아 너는 그녀가 아니지, 그래도 너는 그녀의 친구였잖니(Yes, we know that you're not her, but you were hers)
다이아들: 너는 그녀를 사랑한단 게 어떤 의민지 알잖니(You know what it meant to love her)
다이아들: 게다가 널 보면 그녀가 떠오른단다 (And you remind us so much of her)

스피넬: 오늘, 바로 여기, 지금 이순간, 난 다시 사랑할 테야(Today, right here, right now, I'll love again)
스피넬: 벌써 그 누군가를 찾았거든(I've already found someone)
스피넬: 나도 알아요 여러분은 그녀가 아니죠, 게다가 저는 그녀의 친구였어요(Yes, I know that you're not her, and I was hers)
스피넬: 그래도 여러분은 그녀를 사랑한단 게 어떤 의민지 알죠(But you know what it meant to love her)
스피넬: 게다가 여러분을 보면 그녀가 떠올라요(And you remind me so much of her)

등장 분량이 워낙에 없다보니 스피넬과 다이아의 교류를 읽어내려면 사실상 학교 국어시간에 관동별곡 해석하듯이 노래 가사를 조목조목 따져볼 수밖에 없는데, 내가 보기엔 이렇다. 다이아들 역시 자각은 못했으나 핑크를 잃기 전에도 홈월드 시스템에 알게모르게 고통 받았던 피해자들이다. (이들의 아픔은 휘하 인민의 고통에 비할바가 못 된다고 생각할 수 있겠으나, 이는 'Change Your Mind' 에피소드에서 잘 다루었다고 생각한다.) 지구 반란 이후 6천년 동안 사랑하는 가족이 죽은줄만 알고 그 슬픔을 각자 다르게 삭여왔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다이아와 스피넬은 그렇게 다르지 않다. 지구 이전의 핑크를 잘 알고 지극하게 사랑했다는 점. 6천년동안 핑크의 부재에 크게 속앓이를 했다는 점. 그리고 현재 핑크의 부재라는 상처를 극복하고 싶은 절실한 마음이 있다는 점이 그렇다.


요는 공감과 연대다. 위에서 언급한 옐로우의 폭소를 생각해보자. 옐로우는 'What's the Use of Feeling (Blue)?'라는 곡에서, 핑크의 부재에 가슴 아파할 바에 차라리 그런 슬픈 감정을 느끼지 않도록, 날카로운 분노를 세워서 우주 정복에 힘을 쏟기를 주장한다. 그랬던 옐로우가 이제는 스피넬의 농담에 깔깔 웃는다니 대단하지 않은가.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6천년 간의 설움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웃을 수 있다. 스피넬의 상처에 진정 공감하고 극복을 위한 연대를 할 수 있는 자가 이 우주에 다이아들 말고 누가 있을까 싶다.


스피넬과 다이아는 핑크를 가장 가까이에서 사랑했던 사람들이고, 그들은 서로를 매개로 하여 배반자 핑크, 거짓말쟁이 핑크, 상처입힌 핑크가 아닌 '내가 사랑했던 핑크'를 떠올릴 수 있다. 나는 이게 서로가 서로를 대체품으로 여기는 양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더 나은 방향이 있을 수야 있겠지만, 이 자체로는 나름대로 희망적이고 긍정적인 해피엔딩이라고 평가해본다.

아무튼. 이렇게 길고 장황하게 떠들 생각은 없었는데 쓰고 쓰다보니 이렇게 뿔어났다. 처음부터 계획을 하고 쓴 글이 아니라서 정신 없는 점 미안하게 생각한다. 결국 하고 싶었던 말은, <스티븐 유니버스: 더 무비> 재밌게 봤다고. 특히 이 작품에서 노래와 감정, 우정과 주체성, 공감과 연대 등의 키워드를 읽어냈다고 이야기하고 싶었다. 여러분은 어떻게 보셨는지? 특히 초록색 해석1,2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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